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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 자산어보- 흑산도에서 귀향살이를 하면서
물고기들의 도감을 썼는데 조선 최고의 해양도감이었다고 합니다.
1. 이수광
조선 중기의 문신, 실학의 선구자.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가 1614년에 완성한 '지봉유설'은 전 20권의 백과 사전이다.
이 책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비교하면서
우리 나라가 중국과 동등한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자세히 밝혔다.
그리고 다른 문화권을 소개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2. 유형원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치, 경제,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국가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고 사실을 중시하는
학문 태도를 주장하여 조선 후기 실학 발전의 토대를 쌓은 인물이다.
그가 지은 '반계수록'에는 토지 제도, 조세 제도, 교육 제도,
과거 제도, 관리 임용 제도, 군사 제도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안이 담겨 있었다.
특히 농민들에게 땅을 고루 나누어 주자는 균전제는 이후 실학자들의
토지 제도 개혁안의 출발점이 되었다.
3. 이익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 실학의 대가가 되었으며,
정약용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익은 경제, 제도, 군사, 천문, 지리, 역사, 풍속 등
광범한 분야에서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 제도, 미신, 승려, 게으름을 국가 발전을
해치는 6가지 원인이라고 말했으며, 농업을 향상시키고
농민을 보호하자고 주장하였다.
4. 박제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를 방문하여
그 곳 학자들과 학문을 교류하면서 청나라의 문물을 수입하는 데 앞장을 섰으며,
북학파(청나라에서 발달한 실용적인 학문을 북학이라 불렀는데
이를 따르자고 주장한 실학자들)의 사상을 집대성했다.
1778년에 청나라에 다녀온 후,
청나라에서 경험한 것을 '북학의'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정치, 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 방안뿐만 아니라
생활 도구의 개선 등을 다루었다.
1786년에는 당시 임금인 정조에게 신분 차별을 없애고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상공업을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5. 정약용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정약용은 학문을 하는 데 이론과 실천을 함께 갖출 것을 항상 강조하였다.
그래서 우주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와
구체적인 사회 개혁의 추구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경세유표'를 통해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위한 원칙을 내놓았고,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통해서는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지방 수령이나
향리들의 부정 부패를 비판하고 올바른 지방 관리의 행동 지침을 제시하였다.
1792년에는 수원 화성을 쌓는데 수레와 거중기를 직접 제작하여
성을 쌓는 비용을 크게 줄이기도 하였다.
이수광
지평·예조참판 등을 지내고 주청사로 연경에 내왕하였는데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리치의
저서 《천주실의(天主實義)》 2권과 《교우론(敎友論)》 1권 및
중국인 유변(劉汴) 등이 지은 《속이담(續耳譚》 6권을가지고 돌아와
한국에 최초로 서학(西學)을 도입하였고,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지어 서양의 사정과 천주교 지식을 소개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이 대옥을 일으켜
인목대비를 폐모하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이 되었고,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를 공주로 모셨고
1627년 정묘호란에는 왕을 호송하여 강화로 갔다.
이조판서를 지내고 사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저서에 《지봉집》 《채신잡록(採薪雜錄)》 등이 있다.
<중농학파>
유형원
1653년(효종 4) 부안현 우반동에 정착하였다.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수차 전국을 유람하였다.
1665년, 16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구휼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큰 배 4,5척과 마필 등을 비치하여 구급에 대비하게 하였다.
학문은 성리학·역사·지리·병법·음운·선술·문학 등에 두루 관심을 가졌다.
당시 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피폐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처방이 필요하였다.
이에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통하여 전반적인 제도개편을 구상하였다.
중농사상에 입각하여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를 개편,
세제·녹봉제의 확립, 과거제의 폐지와 천거제의 실시,
신분·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균등의 구현, 관제·학제의 전면 개편 등을 주장하였다.
뒷날 이익·홍대용·정약용 등에게 이어져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으나,
정책으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다만 학문적 가치가 인정되어,
1770년(영조 46) 영조의 명으로 《반계수록》 26권이 간행되었다.
실학을 최초로 체계화하였으며, 이 밖에 20여 종의 저서와
문집을 남겼으나 남아 있지 않고,
위의 《반계수록》과 《군현제(郡縣制)》 1권이 전할 뿐이다.
호조참의·찬선에 추증되었고, 부안 동림서원에 제향되었다.
이익
형 잠이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쟁의 제물로 장살(杖殺)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첨성리로 낙향하여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727년 그의 학문이 높다는 명성을 듣고
조정에서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763년(영조 39) 83세 때 조정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예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의 자급을 내렸으나 그해 세상을 떠났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학문은 아버지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수많은 서적들이 밑바탕이 되었으며,
처음 성리학에서 출발하였으나 차차 경직화된 학풍에서
벗어나 사회실정에 맞는 실용적인 학문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의 학문에 심취하였고,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 · 지리 · 율산 · 의학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다.
이러한 관심분야는 한문으로 번역된 서학서들을 접하면서
더욱 영역이 확대되고 깊이가 심화되었다.
그는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그의 주요 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을 통해
당시의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 · 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중농사상에 입각하여 전제개혁의 방향을 개인의 토지점유를 제한하여
전주의 몰락을 방지하려는 한전론에서 찾았으며,
사회신분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노비를 점차적으로 해방시켜 양천합일을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 당쟁이 발생하는 것은 이해가 서로 상반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하여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 이론을 주장하였다.
인재등용에 대해서는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서 채용하는
공거제를 함께 실시할 것과 병역문제는 향병제를 두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무기의 개발과 군마 양성, 성지수축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등
여려 방면에 걸친 일대 혁신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은 후손으로 종자인 이병휴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 이가환 등으로 이어졌고,
문인으로는 안정복 · 윤동규 · 신후담 · 권철신 · 정약용 등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성호사설》과 《곽우록》 이외에
《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사서삼경》
《근사록(近史錄)》 등이 있고, 편저에 《사칠신편(四七新編)》
《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자복편(自卜編)》
《관물편(觀物編)》 《백언해(百諺解)》 등이 있다.
정약용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암행어사·참의·좌우부승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왜냐하면,
신유교옥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은 없으나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가환·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에 접하였고,
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 뱃길에서
이벽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유학경전에 관한 연구로는 《내강중용강의 內降中庸講義》·
《내강모시강의 內降毛詩講義》·《희정당대학강의(熙政堂大學講義)》 등이 있으며,
기술적 업적으로는 1789년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1년 진산의 윤지충·권상연의 옥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795년 주문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도 채 못 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을 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앉지 않고 더욱 거세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이 시절에 《마과회통 麻科會通》·《사기찬주(史記纂註)》와 같은 잡저를 남겼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 지 채 1년도 못 되어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그를 둘러싼 화기가 무르익어 1801년 2월 책롱사건으로 체포, 투옥되니,
이로써 그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따.
그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으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면서
《고삼창고훈 考三倉詁訓》·《이아술 爾雅述》·《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 등의
잡저를 저술하였으나 서울로 옮기던 중 일실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강진에 도착하자 첫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가이다.
이곳에서는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거처하였고,
자기가 묵던 협실을 사의재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은 유배 초기가 되어서 파문괴장 불허안접(破門壞墻 不許安接)할 정도로
고적하던 시절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주가의 한 늙은 주모의 도움이 있었고,
1803년 봄에 때마침 만덕사 소풍길에
혜장선사를 만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기도 하였다.
1805년 겨울에는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갔다.
한편, 9개월 만에 다시금 목리 이학래 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으니,
이때에 이학래로 하여금 다산역의 준공을 맞게 한 것을 보면
경함을 다시금 목리로 옮긴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08년에 탈고하였고 《상례사전(喪禮四箋)》은 읍거시절에 기고하였으나
초당으로 옮긴 직후 1811년에 완성하였다.《시경》(1810)·《춘추》(1812)·
《논어》(1813)·《맹자》(1814)·《대학》(1814)·《중용》(1814)·
《악경》(1816)·《경세유표》(1817)·《목민심서》(1818) 등을 차례로 저술하였고,
1818년 귀양이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흠흠신서》와 《상서고훈》 등을 저술하여
그의 6경4서와 1표2서를 완결지었다.
<중상학파>
유수원
1714년(숙종 40) 진사가 되고,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22년(경종 2) 정언이 되었다.
당시는 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이 즉위한 후
경종의 왕위계승이 합당하며 연잉군(후에 영조)의 세제책봉은 잘못되었다는
소론과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고 나아가
대리청정을 요구하는 노론 사이에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기이다.
소론이었던 유수원은 1723년 소론의 영의정 조태구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소론계가 원로를 함부로 비난했다고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복직되어 외직인 낭천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경종이 일찍 죽고
노론계의 지지를 받은 영조가 왕위에 오름에 따라 주목받지 못하다가
1728년(영조 4) 지평을 거쳐 단양군수를 지냈다.
지방 수령으로 있으면서 책을 저술하여
1737년 《우서(迂書)》를 발간하였다.
영조가 그의 책을 보고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여 정언·장령·사복시정 등을 지냈다.
1741년(영조 17)에는 우의정 조현명의 추천으로 경연에 들어
관제서승도설을 바치면서 영조와 토론하는 경연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뒤 영조의 특병으로 《속오례의(續五禮儀)》 편찬에 참여하다가
1744년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서 생활하였다.
이어 1755년 나주에서 발생한 괘서사건 연이어
심정연 시권사건이 발생하여 소론들이 대거 숙청당할 때 함께 화를 입었다.
그의 일생은 당쟁의 여파로 불우하게 살았지만 학문과 경륜이 뛰어났고,
이용후생을 주장한 실학자의 선구적인 인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홍대용
어려서 학문은 석실서원의 유학자 김원행에게서 배웠으며
수학, 천문학 등 과학분야에 상당한 학식을 쌓았고 노장사상, 불교, 양명학 등에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유연한 사상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성장하면서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등과
깊은 친교를 맺으면서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65년(영조 41)에는 숙부인 억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으로 수행하여,
베이징에서 청나라의 학자인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사귀면서 경의 ·성리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이들과는 귀국 후에도 서신 교환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유하면서 청나라 학문을 받아들였다.
당시까지도 청나라를 오랑캐로 인식하면서
청의 문물을 배격하는 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청을 비롯한 서양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천주당에 가서 서양 문물을 견학하고
선교사로 머물고 있던 독일 사람인 흠천감정 할레르슈타인,
부감 고가이슬과 필담으로 면담했으며, 관상대를 견학하여 천문 지식을 넓혔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하였는데 《담헌서(湛軒書)》가 대표적이고,
독일인과의 필담 내용은 《유포문답(劉鮑問答)》으로 정리하여 기록을 남겼다.
특히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근대 서양 과학사상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북경 방문은 그에게 학문세계를 열어주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북경에서 보고 들은 것이 모태가 되어 북학사상의 근원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의 자전설을 설파하였고,
균전제 ·부병제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에 의한 인재 등용,
신분의 차별의 철폐와 모든 아동에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교육기회의 균등부여 등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제창하였다.
나아가 동양의 화이론을 부정하면서
모든 나라들이 중심임을 강조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과 자연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수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주해수용(籌解需用)》이라는 수학서를 저술하는 등
사회사상가이자 과학사상가로서 당대의 뛰어난 학자였다.
그의 저서로는 《담헌서(湛軒書)》를 비롯하여 편서(編書)에
《건정필담(乾淨筆談)》, 《담헌연기(湛軒燕記)》, 《임하경륜(林下經綸)》,
《사서문의(四書問疑)》, 《항전척독(抗傳尺牘)》, 《삼경문변(三經問辨)》 등이 있다.
박지원
돈령부지사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 이군문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이 진하사 겸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랴오둥·러허·베이징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
이듬해 의금부도사·제릉령,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 2권을 찬진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박제가
18세기 후반기의 대표적인 조선 실학자.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전통적인 양반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신분적인 제약으로 사회적인 차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대하는 선진적인 실학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연암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으므로
누구보다도 국내 상업과 외국 무역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따라서 그의 사상도 당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도시 상공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기 실학,
이용후생학파와 시기를 같이한다.
그리하여 그는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등의 토지경제사상을 지양하고
선진적인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상공업의 발전을 위하여 국가는 수레를 쓸 수 있도록 길을 내어야 하고
화폐 사용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중상주의적 국가관을 내세우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북학의』(北學議)가 있다.
다산 정약용
정약용은 정조때의 실학자로..
정조의 신임을 받아 화성건설에 도움도 주었으며,
다른 신하들의 모함 속에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되어
실학에 도움을 되는 책을 많이 편찬 하여 대표적인것으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 적혀 있는 경세유표,
지방의 수령이나 관리들이 해야할 것(?)이 적혀있는
목민심서등이 있습니다..정약용은 농업을 중요시한 실학자입니다.
정약용의 형, 실학자 정약전
정약전은 정약용의 형으로,정약용과 마찬가지로 정조 때의 실학자 입니다.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함께 천주교에 인한 것에 신하들의 모함때문에
정약전은 흑산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가서, 흑산도의 물고기,
생물들을 조사하여 '자산어보'라는 책을 편찬 하였습니다.
정약전은 우리것을 중요시한 실학자이며,
오늘날 자산어보는 우리들이 조선시대의
생물들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책이 되었습니다.
유형원
유형원은 확실히는 모르지만, 토지제도의 개혁을 중요시 한,
농업을 중요시한 실학자입니다.
유형원은 3년을 공들어 반계수록을 지었으며,반계수록을 지은후,
그는 안타깝게도 얼마 안되서 죽었습니다.
박지원
박지원은 당쟁에서 이긴 노론 집안의 실학자 입니다.
박지원은 사촌형을 따라 청나라에 가면서,
상공업을 중요시하는 그의 삶은 시작 되었습니다.
사촌형을 따라간 청나라에는 외국과
무역을 하여 눈부시게 발전한 청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청나라를 여행하고나서 적은 일지인 '열하일기'를 편찬하였으며,
또 다른 대표적인 것은 양반도 상업에 종사할수 있다는걸 보여준 '허생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