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치료과정을 거치다 보니 바깥 나들이도 줄어 들었다.
특별히 염려와 기도로 응원해 주신
고향의 어머님을 비롯하여 친척,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큰 마음을 먹고 차를 몰았다.
4 시간에 걸쳐서 장거리 운전을 했는데 그리 피곤치 않다. 고향이 품는 넉넉함을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날씨가 추워졌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추위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시골집이 보일러를 돌려서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내가 잘려고 했던 건넌방은 옛날 할머니가 주무셨었는데 아직도 장작을 떼야하는 온돌방이다.
저녁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불을 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보일러가 잘 통하는 부엌에서 이부자리를 깔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는 동네 산책을 나섰다.
야트막한 산을 건설 자재용 흙으로 다 파내서 민둥산으로 변했다.
인근에는 KTX 김천구미역이 지척인 김천 신도시가 보인다. 서울까지 1시간 20분이면 갈 수 있다.
내가 어릴적 살 때에는 완전 깡촌이었는데 혁신도시가 되고 부터 천지개벽으로 변했다.
지방의 중소도시가 점점 인구가 줄어들어 소멸되어 가고 있다고 해서 걱정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척에 있는 상주나 문경이 좋은 사례이다. 곶감으로 유명했던 상주나 시멘트와 탄광으로 이름났던 문경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천을 고향으로 둔 나는 그나마 위안이 된다.
오늘은 첫 번째로 가까이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찾았다. 종손으로 태어나 많은 귀여움을 받고 자랐기에 더 보고 싶다.
술 대신 요구르트, 귤, 건빵을 준비하여
정성스레 올려 놓고 절을 올렸다.
여러가지 사연으로 끝까지 가족들과 같이 하지 못했던 어머님을 모신 곳도 찾아 뵈었다.
살아계셨을 때,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같아 사죄의 눈물을 흘렸다.
나도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님 어머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야한다.
지극히 당연한 생로병사의 흐름이다.
이번에 아파보니 죽음이 한발짝 다가온 것으로 느낀다.
잠깐 언급했듯이 요즘 지방은 말그대로 소멸되어 가고 있다. 빈집이 늘어나고 아기 울음소리가 끊긴지가 오래이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가 한 학년에 3반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폐교되고 말았다.
이곳 용암리 고향마을도 대부분 팔십이 넘은 노인들이 살고 있다.
정부에서 여러가지 대책을 내놓았지만 백약이 무효이다.
가장 큰 문제는 젊은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의료, 교육, 문화시설 등이 수도권에 비해 너무 열악하기 때문이다.
또한 요즘 젊은이들의 결혼기피, 자녀출산 기피 등의 풍조도 한몫을 하고 있다.
대안으로 그 옛날 도시로 나갔던 지금의 베이비부머 (약 700만명)가 다시 자기 고향으로 가야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학자도 있다.
일견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베이비부머가 대부분 은퇴했다.
나같이 55년생 베이비부머는 도시에 나가 나름대로 할 일을 하고 명예롭게 은퇴하여 도시에서 대부분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칠십이다.
이런 친구들이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도 짓고(물론 전문적인 농사는 안된다) 농촌에 거주하면 인구도 늘어나고 노후를 자연과 더불어 더 멋있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귀촌이 쉽지 않다.
도시에서 한 평생을 살았는데 농촌으로 돌아가기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고향 친구를 만나니 하루빨리 내려오라고 성화가 대단하다. 골프, 테니스, 낚시, 등산 등 취미생활을 할 수 있고 간단한 농사나 부업도 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얘기도 곁들인다.
나도 여느 때와 좀 다르게 귀촌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즉 "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곳으로 향한다"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난다.
인간도 자기가 태어난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하는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물론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 내년 봄에 닥칠 농사 준비를 걱정하고 있다.
모처럼 고향에 오니 어린 아이처럼 좋은가 보다.
산소 정면으로 백마산의 모습이 보인다. 가장 좋은 곳에 모셨다고 다들 명당자리라고 한다.
백일홍과 할머니 묘 옆에 안장한 낳아주신 어머님을 모신 곳
산소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