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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의 역사 문화에세이
그리고 나를 키워준 그리운 고향
목차
책머리에/ 1. 추억 어린 안양을 찾아서/ 2. 안양사에 대하여/ 3. 왕건의 안양사/ 4. 안양은 아미타불로서/ 5. 중초사의 당간지주/ 6. 안양사와 현화사의 귀부/ 7. 안양사의 부도에 대하여/ 8. 안양유원지/ 9. 옛 동네 이름이 갖는 문화의 향기/ 10. 인덕원이란 곳/ 11. 신작로 1/ 12. 신작로 2/ 13. 비산동 수푸루지 다리/ 14. 구시장과 수푸루지 동네/ 15. 성남시 단대동과 안양시 신흥동/ 16. 조선 시대 보훈처가 어찌 이곳에/ 17. 충훈부가 안양의 명소가 되었다/ 18. 인덕원에서 안양으로 가는 길/ 19. 시간 멈춰 선 영상 둘/ 20. 광문당과 대동서점/ 21. 안양역과 원태우 지사/ 22. 안양역이 갖는 의미/ 23. 이웃집 누나와 안양역/ 24. 영등포의 밤/ 25. 양짓말의 채만식/ 26. 채만식의 안양복거기/ 27. 안양천을 안양 8경에 넣자/ 28. 양지마을의 벽화처럼/ 29. 밤나무의 추억/ 30. 그 시절의 극장/ 31. 박달동의 군용지/ 32. 박달동과 석수동의 현주소/ 33. 금성방직을 알면 그는 안양 토박이다/ 34. 금성방직에 다닌 누나/ 35. 하얀 눈길을 걸으며/ 36. 안양 하면 축구가 아닌가/ 37. 내가 만난 축구 하는 아이들/ 38. 늘 푸른 운동장/ 39. 나는 36회 졸업생 / 40. 안양 읍내/ 41. 안양 읍내로 향하던 시절/ 42. 안양 시내/ 43. 내 살던 곳, 주접동 547번지/ 44. 가축위생연구소(수의과학연구원)/ 45. 사도세자와 정조/ 46. 주접동에서 쉬었다가 지지대고개를 넘었다는 정조/ 47. 명학 바위를 관광명소로 만들면 어떨까/ 48. 짜장면집 한일관/ 49. 현충탑에 새겨져야 할 터키 영웅들/ 50. 어릴 적 내 가오리연이 날아간 벌터/ 51. 잊히지 않는 안양의 대재난/ 52. 내가 즐겨 찾던 그 카페, 길모퉁이/ 53. 강냉이 빵/ 54. 오라이 버스/ 55. 호계동은 뼈대 튼튼한 동네/ 56. 수리산을 아시는가/ 57. 골목길/ 58. 삼성산에 올라/ 59. 배움의 길목, 그 아스라한 추억들/ 60. 내 친구 이종걸 이야기/ 에필로그
작가 소개
2005년 《한국수필》수필가로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회원이며, 격월간 문예지《그린에세이》편집위원
또한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35년간 재직했으며 올해 정년퇴임.
작품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005)《작게 사는 희망이지만》(2006) 《2천년 로마 이야기》(2006) 《2천년 스페인이야기》(2007)《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2008)《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2》(2009)《오후 다섯 시 반》(2009) 《나 어릴 적》(2010) 《아내는 밥이다》(2013)《신라 천년의 자취소리》(2014)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2015)
《조선의 꽃 열하일기》(2016)《조선 선비 최부의 표해록》(2017)《베트남 2천년 시간여행》(2018) 《동그맣던 시절의 유정》(2018)《나는 오늘을 사랑한다》(2020)《추억어린 안양을 찾아서》(2020)
수상
2006년 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 수상
2008년 1회 소운문학상 수상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
2014년《신라 천년의 자취소리》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회 세종도서 선정
2014년 한국수필가 협회 인산기행수필문학상
2018년 대전문화재단 공모사업 지원
2020년 안양문화예술활동 지원사업 선정
본문 속으로
그곳엔 ‘안양’이란 오래전 절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그 절이 그렇게 고맙고 대견할 수 없다. 천년 너머를 그대로 고이 간직한다는 게 어디 쉬운가. 내가 버젓이 안양 사람이라고 말하는 나란 존재의 일부를 차지하는 영유로서도 그렇지만 남다른 의미의 고상함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나의 안양 첫 기행은 바로 그 절부터 시작함이 의당 맞다.
그러기에 가을도 다 지는 때 나는 엄마를 보러 안양 가는 길에 그곳에 들렀다. 그대들은 ‘안양사’가 품고 있는 고아한 정취를 제대로 아는가.
―<추억어린 안양을 찾으며> 중에서
서울의 위성도시로 발전한 안양시는 위락시설로서도 서울시의 부담을 떠안았는데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서울시에서 넘쳐나는 수많은 행락인파로 당시 안양유원지는 꽤 유명한 명소로 자리매김 하였다. 백만 평 정도의 안양유원지에는 수영장과 보트 등 각종 놀이시설과 위락시설이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관광호텔시설까지 있어서 주위에 산재한 포도밭과 함께 잘 어우러져 당시 서울 시민이라면 한 번쯤은 이곳에 들를 정도로 쉼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 바람에 심심하다 싶으면 우리는 한 여름철 서울 멋쟁이들을 보러 그곳에 가곤 했다. 안양유원지엔 관악산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계곡을 차곡차곡 막아서 만년풀이니 대형풀이니 풀을 만들어 서울 손님을 맞이했다. 제일 비싼 곳은 당연히 호텔에 있는 풀장이고 물줄기를 맞는 순서대로 입장료도 달랐다.
―<안양유원지> 중에서
지금 그 신작로는 1번 국도를 제치고 안양이라는 거대도시의 중심을 관통하는 안양대로가 되었다. 분명히 신작로는 문명의 첨병이다. 문명 세계에서 필요는 빠른 시간을 전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기에 그 길은 미루나무처럼 쭉 뻗어 있으며 문명에 편리하도록 반듯하다. 문명 길에서는 길이 끊기면 황량함이 되고 말 것이다. 이후로 나는 신작로를 만드는 무수한 광경들을 우리나라 곳곳에서 보았다. 촌로들은 바깥세상을 기웃이라도 할 양으로 으레 신작로 길 초입의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문명 길에 펼쳐진 광경들을 쳐다보곤 한다.
―<신작로2> 중에서
안양이 자연적으로 갖는 자산이 무얼까. 안양 시내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향하는 안양천은 뱀이 기어가는 모양으로 굴곡이 심한 사행천이었다. 이런 모습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어 안양이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로 변모하면서 예전의 모습에서 멀어졌다. 1930년도 조선직물이 들어선 이후 조선견직, 제일방직, 금성방직 등 근대적 산업시설을 갖춘 공장이 설립되면서 안양은 섬유와 제지산업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업 도시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후 수많은 공장은 안양천의 풍부하고 깨끗한 물을 공업용수로 사용했고 공장은 용수를 공급한 발원지로 다시금 공장폐수를 흘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안양천은 사람들의 일상과 멀어지며 물과 강이 지닌 상징과 이야기 신성함으로서의 가치와 지위를 잃고 단지 삶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칙칙한 도심에 밝고 환한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벚꽃이 충훈부 안양천에서 화사하게 빛을 발할 줄은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안양 충훈 벚꽃축제가 이제 제법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생태하천 안양천에 노란 개나리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안양 충훈부 벚꽃 길에 축제를 즐기려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뉴스를 접한 나로서는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뭔가 하고 반문할 수밖에. 그간 울산 태화강을 그렇게 부러워했는데 이제 안양은 더 바랄 것 없는 도심과 산 그리고 강이 한데 어우러진 품격의 도시가 된 것이다. 과연 충훈부는 안양의 보훈처답게 안양인에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충훈부가 안양의 명소가 되었다> 중에서
우리는 학교를 파하고 신작로로 올 때 은근히 마부를 기다렸다. 동네 마부를 만나는 재수 좋은 날에 말발굽 소리가 가볍다 싶으면 영락없이 돈벌이를 한 날이었고 우리는 그 덕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하동 밑에 마부들이 모이던 곳에 생김새부터가 넘어질 듯 힘이 센 이상한 삼륜차가 들어왔다. 그렇게 기아 혼다 마스타 2톤 삼륜차가 하나둘 늘더니 어느새 마차는 뒤꽁무니 줄에 따로 몰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신속하고 친절한 에프터서비스, 운송세계의 인기 독점이란 말 그대로 상대가 되지를 않았다. 그 시대 삼륜차의 등장은 비교도 안 되는 신기술이고 도약이었다. 신작로에 찬바람이 일고 삼륜차가 어느새 앞서 달려나갔다.
―<시간이 멈춰 선 영상 둘> 중에서
나는 책을 살펴볼 뿐 거의 책은 사지 않았는데도 그는 싫은 기색은커녕 동그란 모양의 앉은뱅이 의자까지 내게 내준 적이 있다. 그는 책을 보는 사람 자체를 좋아했었다. 어쩌면 그는 나의 두꺼운 안경테를 보고 분명히 판사나 글쟁이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책을 안 사는 게 미안해 허겁지겁 그곳을 빠져나왔었는데 다음에 찾을 때는 그는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씽긋 웃었다. 이미 그는 내가 무슨 성향의 책을 선호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러기에 선뜻 그 자리로 나를 안내하지 않았는가. 참으로 책에 대해서는 도가 튼 분이었다. 그런 그의 서점이 부도가 났다는 소리를 언젠가 들었던 것도 같다. 내가 아끼던 광문당이 그렇듯이 또 그렇게만 생각해 둔 대동서점인데 다시 보니 그저 감개무량하고 눈물이 날 지경이다. 글에 회의감이 들던 어느 때 누군가 한 사람의 독자만 있어도 글을 써야 한다고 나를 위로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 권의 책을 원한다 하면 밤새도록 기다릴 사람이다.
―<안양의 광문당과 대동서점> 중에서
사람들은 저 사진을 보고 나 같은 나이층은 아! 그때 그랬지 할 것이고 젊은 층은 이런 데서 어찌 살았을까 할 것이다. 그런데 저 기찻길은 또 뭐람 할 테고 그러면 또 누군가가 채석장 이야기를 들려 줄 테다. 사진은 과거의 기록을 연이어 말한다. 피난민촌에서 환경친화마을로 바뀌었다는 것하며 그 시절 오염된 수암천에 삼덕제지를 비롯한 공장들. 그리고 심호흡 한 번 하시고 병목안 시민공원을 한 번 둘러보라 하는 것도 같다. ‘이렇게 달라지고 이렇게 지켜냈습니다. 물 좋다는 수리산입니다. 폭포는 또 어떤데요.’ 흡사 자연 심폐소생술을 그림으로 느끼도록 보여 주는 것 같다. 이미 산을 오르기 전 의미는 다 챙겼다. 거기에 동심으로 돌아가자는 뜻인지 아이들 그림이 정겹다. ‘우리 가족의 소원은 행복입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도 따라 답했다. 그림 그린 당신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양지마을의 벽화처럼>
우리 집에 큰 고목으로 우뚝 선 밤나무, 수령이 모르긴 몰라도 당시로도 30년은 넘었다 했는데 이번 안양의 추억을 더듬으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부터 밤이 많이나 ‘밤 栗’자를 딴 동네 이름을 간직한 곳인데 오죽하겠는가. 율전동이라는 동네가 아예 안양에는 따로 있지 않은가. 안양의 한복판인 장내동에 위치한 성당 근처까지 과거에 밤나무 천지였다니 임업시험장에서 멀지 않은 우리 동네도 당연히 밤나무가 많았을 것이다. 예전에 밤나무가 그 고목 말고도 많았는데 집을 짓는다고 쳐냈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밤이 나고 자란 자리에 집을 지은 것이다.
―<밤나무의 추억> 중에서
<빨간 마후라>, <성춘향> 등 신 감독의 대표작이 모두 여기서 나왔다. 이후 안양은 명실상부한 영화의 도시로 떠올랐다. 안양시는 영화촬영소가 있었던 이 아파트 입구에 ‘안양영화촬영소터’라고 적힌 안내문을 붙여 기리고 있다. 영화촬영소 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영화 인력 양성을 위한 학교까지 세웠다. ‘안양예술학교’가 그것이다. 서울 용산에서 사무실을 운영할 당시 신인 배우를 양성하기 위해 설치했던 연기실을 전문적인 교육기관으로 만든 것이다. 1966년 고교과정으로 정식인가를 받아 1967년 3월 개교한 안양영화예술학교는 1982년 안양예술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박달동과 석수동의 현주소> 중에서
그러니까 현재 안양 호계2동의 효성 안양공장이 위치한 곳이 그 시절 삼성과 합작을 할 때는 한일나일론이었으며 이후 동양나일론으로 바뀌다가 현 효성공장이 된 것이다. 지금은 그 오랜시간 그곳에서는 해마다 때가 되면 진달래 축제가 벌어진다. 효성 진달래 축제는 진달래 만개할 즈음부터 매년 봄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다녀가는 안양의 소문난 명소로도 유명한 곳이 되었다. 내 친구 아버지는 한일나일론을 일군 최초의 공장장(윤영종)이다.
―<금성방직을 알면 그는 안양 토박이다> 중에서
내 어릴 적 안양 하면 누구든 포도를 말했고 좀 지나서는 안양축구란 말을 많이들 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느참 안양은 축구로 유명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국내에서 내노라하는 선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안양공고 출신이거나 안양중학교 출신이 많다. 초롱이 이영표를 비롯해 정해원, 조윤환 등이 대표적인 안양공고 출신이며 안양공고를 축구 명문으로 끌어올린 일등 공신들이다. 물론 이렇게 안양 하면 축구를 떠올리게 될 때까지는 뛰어난 기량의 이들 선수 이외에도 안양을 사랑하는 지역 유지들의 축구에 대한 후원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축구라는 구기 종목이 그렇지만 손발이 맞는 게 선수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안양하면 축구가 아닌가> 중에서
안양 복판에 중앙시장이 차지하고 예전에 마부들이 일터였으며 삼영운수 종점이기도 했던 곳에 청과물을 취급하는 시장이 생겨난 것이다. 바로 남부시장인데 우리 집에서는 한국전력 지소하고 등기소 그리고 안양전화국 언덕을 내려와야 그곳에 닿는다. 가격이 형편없다고 인상을 찌푸린 엄마의 모습이 흐릿하지만 여태 기억으로 남아있다. 청춘 시절 강원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친구가 여름방학 때 시골집에서 아버지를 따라 2시간 걸려 감자를 싣고 장터로 나가 팔았다는데 판 감자값이 고작 커피 열 잔 값이었다는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친구는 절대로 다방 출입은 하지를 않았었다. 부모님 생각이 나서 도저히 못 들어가겠다고 했다.
―<안양 읍내를 향하던 시절> 중에서
그런 동네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너무도 아름답고 조용한 동네였다. 당신 때문에 운명적으로 만난 안양, 이 또한 나는 너무도 고맙다. 글 한 자락이라도 이렇게 쓰는 것은 바로 그런 영화로움이 내게 준 선물이 아니겠는가 싶은 것이다. 당신은 조실부모하여 갖은 고생을 하셨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어릴 적이나 다 커서 분가하여 살면서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땅 한 마지기 없이 나와 단신으로 객지에서 공부하고 자립을 하였으니 당신 의지만큼 설움 또한 컸을 것인데 하필 당신 떠나고 부질없는 지금에서야 당신의 그 눈물 많았을 유년의 삶이 자꾸 상상이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살던 곳, 주접동 547번지> 중에서
그런 걸레 더미는 다음 날 아침 뻣뻣한 동태걸레가 되어 번번이 나동그라졌다. 한 학년이 오르면 가정방문을 하던 시절 오늘은 이 동네 내일은 저 동네 선생님들은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옮겨 다녔다. 소골안 아이들은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핑계를 대곤 하였다. 냉천동 부자 동네를 가본 후로는 나 역시도 왠지 집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 도망을 쳤는데 집에 가보니 선생님은 이미 마루에 걸터앉아 계셨다. 피하는 부끄러움은 못산다는 사실을 스스로 안다는 말도 될 것인데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그 어린 나이에 못산다는 것이 부끄러움이 되고 창피하다 여기는 마음이 어디서 생겨났던 것인지.
―<가축위생연구소(수의과학연구원)> 중에서
즉 행렬이 배다리(舟橋)로 한강을 건넌 후 시흥을 지나 석수역 앞(大博山 前坪), 안양예술공원 앞(念佛橋), 만안교(萬安橋)를 지나고 지금의 안양역 근처인 미륵당참을 거쳐 명학역(鳴鶴驛) 앞으로 지나간 것이 분명하고 그때는 안양역 주변의 미륵당참에 보초까지 섰었다. 그러니까 1927년도까지도 안양역 앞 용화사에 있었는데 이후 자취를 감춘 것이다. 어디에 있었으며 그 미륵불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 현재의 만안교는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다. 원래는 안양천 위에 놓인 안양교(구도로)를 지나 안양예술공원 지하차도 앞 교차로에서 서울방향으로 약 20미터 지점(현 영화아파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번 국도확장사업으로 1980년 8월 약 200미터 북쪽의 안양시 석수동 260번지 석수교회 앞 삼막천 위로 옮겨 다시 축조했다는 것이다.
―<주접동에서 쉬었다가 지지대 고개를 넘었다는 정조> 중에서
이후 터키여단은 우리 안양의 수리산 일대에서 이 금양장리 전투로 와해되어 버린 중공군 제50군의 잔존 2개 연대와 6일에 걸친 치열한 격전을 치렀는데, 이 두 차례의 전투를 통해 터키여단은 군우리에서 잃은 명예를 완전히 회복했다. 은혜를 모른다는 것은 배은망덕과 같은 말이다. 나는 안양시가 엉뚱하게도 한자 자체도 틀린 중국의 안양(安陽)과 친교를 맺을 것이 아니라 수만 리 타국까지 와서 수리산을 굳건히 지켜준 터키와 친형제 같은 교우의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슬기봉이 그렇게 격전지였다는 게 새삼스럽고 지금도 군부대가 철통방위로서 상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더불어 하게도 된다.
―<안양 현충탑에 새겨져야 할 터키 영웅들> 중에서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게 세상살이다. 안양이 급속도로 달라지고 내 살던 주접동이 부자 동네가 된 것은 1977년을 경계해서부터다. 안양 시내 냉천동 부자 동네 아이들하고 티격태격한 게 엊그제인데 양상이 확 바뀌고 만 것이다. 1977년 안양에 큰 물난리가 나 안양 시내가 거의 침수되고 서울 가는 안양대교가 절단 나는 큰 사건이 발생되고 언덕에 올라선 우리 동네가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안양초등학교를 가로질러 지금의 평촌신도시와 인덕원을 향한 비산동을 연결한 고가도로가 생기고 안양에 전체적인 도시 정비가 이루어졌다.
―<잊혀지지 않는 안양의 대재난> 중에서
나도 동네 누이를 만나면 공짜로 얻어 타기도 했다. 그 버스 차장이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것은 1989년이다. 시민자율버스라고 해서 승객이 토큰을 직접 넣는 것으로 바뀌고 나서다. 그녀들은 60년대의 마부처럼 대한민국에서 극적으로 실종된 직업군이다. 나는 대학 시절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4명 중 2명의 아버지가 버스 기사였다. 그중 한 애 엄마는 내가 잘 아는 경력 출중한 버스 차장 출신이었는데 벌써 그 아이들이 커서 나에게 공부를 하러 온 것이다. 버스 종점에서 그 아이 동생을 업고 서울 간 남편 오기를 기다리던 그 애 엄마 모습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오라이 버스> 중에서
예전 그 근방은 공장이 자리했었다. 큰 굴뚝, 내가 먹는 원기소가 그곳 영양제였다. 비나폴로도 그렇다. 안양시는 2006년 유유산업공장이 이전하자 2007년 김중업 건축가가 설계한 유유산업 안양공장의 부지를 매입해 유유산업 공장건물을 ‘김중업 박물관’으로 리모델링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절묘한 스위칭에 도킹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안양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된 고려 시대 사찰 안양사(安養寺) 터가 발견돼 발굴작업 등 오랜 산고 끝에 2014년 3월 거장 건축가의 작품 속에 그의 이름을 딴 김중업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삼성산에 올라> 중에서
인권변호사 출신에 비주류로 담금질이 오래 걸렸고 정이 많아 일정이 늦어져 시간도 못 지킨다는 소리도 들은 친구지만 친구는 말보다는 행동을 그때그때의 임기응변이 아니라 뿌리 깊은 나무같이 생각이 깊고 누구보다 진실한 친구다. 솔직히 그 집안 내력이 어디 가겠는가. 올바르고 곧은 선조의 뿌리 깊은 의식처럼 나라와 약한 자와 가난을 먼저 생각하는 가슴 따뜻한 친구다. 늦은 귀가에도 꼭 시장통 야방을 돌아 집으로 향하는 투철한 의지를 갖은 친구, 대기만성형으로 언젠가는 큰 빛을 보리라 늘 생각하였고 지금도 나는 그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 친구 이종걸 이야기> 중에서
이는 안양의 물이 만들어낸 안양의 자산이다. 다채롭고 다양한 안양으로서 번영을 말한다. 우리가 명실공히 안양으로서 자리매김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안양인이라는 긍지가 있었기 때문이고 안양을 위해 알게 모르게 헌신한 사람들의 공덕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공덕자들 중에 꼽으라면 수리산을 수호해준 터키의 무명용사를 제일 먼저 말하고 그 자리에 현충탑을 지으라고 터를 내준 사람을 말하고 공장이 떠날 때 그 터를 공원으로 쓰라고 아낌없이 순순히 내준 사장을 말하고 안양에게 마음의 양식을 내준 대동서점 주인을 말하고 수십 년 넘게 보육원을 지탱해준 사람들을 말하고 공원들에게 따뜻한 국밥을 돈 가리지 않고 말아준 순대집 할머니를 말하고 꼭두새벽부터 서울을 오가며 안양의 일꾼들을 키운 버스 차장을 말하고 물난리를 겪으면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이재민을 말하고 채석장 기차에 치이는 아이를 구하고 대신 팔다리를 잃은 친구를 다시 그 친구가 50년 넘게 업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 아무렇지 않은 듯 어울려 사는 그렇게 이 안양 땅에서 안양 물 마시며 순순히 살아준 소시민들이 다 공적 대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 천 년 안양의 이름을 지켜온 백성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산다면 그래서 안양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안양천이 안양 시내를 굽이굽이 돌며 안양을 지켜주는 한.
―<에필로그> 중에서
출판사 서평
안양은 작가가 나고 자란 곳으로 현재도 그곳에 부모님이 계신다. 이 작품은 안양이란 지역의 기원과 역사적인 배경, 또 근대화 과정과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역사 ․ 문화 ․ 예술 ․ 문학 산업발전 등이 총 망라되어 있다.
안양은 작가의 경험이 축적된 유년시절의 추억과 중고등학교를 보낸 곳이다. 61개의 주제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안양이란 작가가 태어난 고장의 과거 모습을 담았다. 안양을 주제로 한 테마형 수필인 만큼 다분히 안양이란 속에 오롯이 담긴 지역적 의미와 땀 냄새 풀풀 나는 서민적 정서가 깔린 수필 형식의 글 엮음이다. ‘안양’이라는 이름이 고려 태조왕건이 창건한 안양사라는 이름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안양이란 이름의 태생, 안양사가 창건된 계기와 중초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당간지주와의 관계 등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과거 보러 가는 삼남의 길로써 번영의 길로 나선 과천 인덕원을 제치고 안양이 두각을 나타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서술하였다. 이후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안양이 특히 섬유직물이나 제지산업으로 두각을 나타나게 된 연유라 할지 6∙25전쟁 때의 안양, 물난리로 큰 변고를 당한 과거의 안양에 대해서 가감없이 수필기행 형식을 빌어 서술하였다. 이렇듯 이 글은 전체 안양의 역사가 담긴 서사적인 글이지만 작가의 고향으로서 어린 시절의 그리운 추억을 수필로 적어 서정적 필치에 소홀함이 없다.
이 글은 작가가 얼마나 고향에 대한 서정을 갖고 사는지 그래서 그 누구든 존재하는 고향에 대한 정서를 같이 공유하고 함유하리라 생각한다.
첫댓글 (추억어린 안양을 찾아서)~~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안양인들을 위해 우리 맘 속
깊은 곳에 채워 두었던 추억들을 이야기하며 웃고 슬픈 기억들을 나눌 수 있겠답니다. 또한 오래된 사진들을 보며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친구들, 선후배와 없어져버린 건물들을 아쉬워하겠지요. 목차를 보니 한마디로 그리움이란 단어로 소감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어서 빨리 책을 만나고 싶군요. 안양 오실 기회가 되면 꼭, 꼭 연락주세요~~식사 한번 하자구요...
이 글 소개 글을 어느 카톡에 올렸더니 구시장 기찻길 옆에 살았던 친구가 그리움도 크지만 아픔이 많아 나는 이 책을 다 못읽을 것 같다고 주석을 달아 놓았네요... 그친구는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고 맙니다. 그 시절에 친구 여동생은 친구를 부를때 혀 짧은 소리로 부르곤 했죠...분더바.......독일말로는 원더풀이라는 의미라는데 ....친구는 원거플한 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 친구가 무척 보고싶어집니다. 퀭한 내 마음만큼이나 하늘이 움푹 패여 오늘따라 무척 시리군요....다시글을 쓸까 합니다. 한동안 쉬었었죠. 슬픔을 담고 그리움을 담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멀써 그런 나이가 됐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