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으로 이송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에 대한 첫 임상 검사에서 '콜린에스트라아제 억제제' 중독 현상이 나타난 뒤, 병원 의료진은 그의 중독 물질 찾기에 분주하다. 독일 언론은 의료진이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나발니를 '콜린에스트라아제 억제제' 중독 상태에 빠뜨린 독성 물질(?)의 가설을 제시하는 등 추적 보도에 나섰다.
샤리테 병원 취재가 여의치 않는 러시아 언론으로서는 독일 언론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상태.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언론은 독일의 유력 주간지 슈피겔이다. 영국의 온라인 탐사 매체로 유명한 '벨링캣' Bellingcat 과 공동으로 나발니 혼수 사건을 추적하고 있다고 한다.
슈피겔은 샤리테 병원이 '분데스베르 연구소'의 독극물 및 화학전 물질 전문가와, 러시아 이중간첩 출신 세르게이 스크리팔 군정찰국(GRU) 대령 부녀의 '노비촉' 중독 사건(2018년 3월 영국)을 맡았던 영국 '포턴 다운 연구소'에 관련 자료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독일 뮌헨에 있는 '분데르베르 연구소'는 이미 폐쇄된 군관련 실험실이지만, 독극물 및 화학전 최고 전문가들이 모여 있다고 한다.
이 주간지는 또 독일 의료진이 지난 2015년 불가리아에서 중독 증세로 쓰러진 현지 방산사업자 예멜리안 게브레브의 치료 병원에도 자료를 요청했다고 전했다. 러시아-그루지야(조지야) 전쟁(2008년) 당시, 그루지야 측에 무기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게브레브는 2015년 4월 28일 수도 소피아에서 한 비즈니스 리셉션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그는 병원으로 급히 후송됐다.
거의 동시에, 소피아 시내 다른 곳에 있던 게브레브의 아들과 이사급 인사 한명도 비슷한 중독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나중에 알려진 것은 세 사람이 리셉션 날 아침에 사무실에서 함께 회의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함께 모여 있었던 게브레브 사무실에서 '뭔가' 사달이 난 것으로 언론은 추정했다.
그리고 벨링캣과 슈피겔, 더 인사이더 등 언론매체는 2019년 11월 헬싱키 대학 산하 화학무기 전문 실험실의 분석 결과, 게브레브의 몸에서 '유기인산염'의 흔적을 발견됐으며, 러시아 GRU 요원 8명이 게브레브의 암살 시도에 연루되었다고 보도했다. 유기인산염은 살충제는 물론, 사린과 VX, 노비촉과 같이 강력한 독성을 지닌 신경작용제를 만드는데 쓰이는 물질이다.
샤리테 병원 측이 영국과 불가리아 측에 관련 자료를 요청한 것은, 나발니 역시 게브레브와 동일한 유기인산염 계열의 물질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라고 언론은 전했다.나발니가 중독 증세를 보인 '콜린에스테라아제 억제제'에는 '유기인 화합물'이 포함되니 상식적으로 가능한 추정이다. 유기인산염과 유기인 화합물은 혼합물질이 조금 다르긴 하나, 사린과 VX, 노비촉과 같은 독성 물질 제조에 사용된다.
그러나 샤리테 병원 측은 러시아 리아노보스티 통신의 확인 요청에 "새로운 임상 정보가 있으며 발표할 것이며, 가정과 추측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고 언론의 추측 보도에 선을 그었다.
서방 언론의 추측 보도는 한마디로 2015년 불가리아 게브레브 중독 사건과 2018년 스크리팔 부녀 암살 시도 사건, 2020년 나발니 사건이 모두 동일한 '유기인산염' 특수 물질, 즉 '노비촉'에 노출된 것이며, 러시아 GRU 조직이 저질렀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제각기 (전쟁 중) 무기 수출과 조국 배신, 반체제 인사 등으로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사건들을 하나로 뭉뚱그린 것이다.
샤리테 병원은 나발니가 여전히 혼수상태이지만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고 28일 밝혔다. 콜린에스테라아제 억제제로 인한 증상을 해소하기 이해 '아트로핀 약제'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측은 그러나 나발니의 중독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대변인은 "우리는 독일측이 무엇 때문에 '중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그렇게 서두르는지 모르겠다"며 "이 가설(중독설)은 우리 의료진도 검토한 첫 번째 가설 중 하나였지만 (독성) 물질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콜린에스트라아제 억제제가 아닌 다른 약물 때문에 체내의 콜린에스트라아제 수치가 낮아질 수 있다(억제제 중독 증상)"며 "독일 의료진이 택한 '아트로핀 약제'도 나발니가 (러시아 옴스크 병원) 중환자실에 처음 실려 왔을 때부터 사용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앞서 러시아 내무부의 시베리아 지부는 "나발니 사건에 대한 내사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경찰은 나발니가 묵었던 호텔 객실과 다녔던 장소 등을 검증하고, 100점 이상의 물건을 압수했으며, CCTV 자료를 분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법의학적, 생물학적, 물리-화학적 분석도 20여차례 실시했으나, 향정신성 고위험 물질이나 마약성 물질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경찰은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