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기택 총재와 전두환, YS, DJ, 이회창, 노무현, 이명박
전두환, 전경환 보내 "당(黨) 만들어 달라"
" 적어도 나는 YS처럼 3당 야합을 하거나, DJ처럼 거짓말을 하고 배신을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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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hoto by 사진=서경리 |
이기택(李基澤) 전 민주당 총재가 지난 2월20일 타계했다. 향년 79세. 연세가 있긴 하지만, 평소 그 분의 건강과 요즘 평균연령을
생각하면 일찍 돌아가셨다는 느낌이 든다. 기자는 지난 2013년 <월간조선> 6~8월호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에서 이기택 총재의
정치역정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기자가 만난 이기택 전 총재는 한 마디로 ‘영원한 4.19세대’였다. 그는 1960년 고려대 상과대 학생위원장(상대
학생회장)으로 4·18 고대생 시위를 이끌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시간 단위, 분 단위로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이후 한 동안 도피할
때의 이야기도 자세히 했다. 4.18때의 이야기를 할 때, 그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이기택 전 총재, 김상현 전 민추협 의장대행, 정대철 전 의원 같은 이들을 만날 때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나름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YS나 DJ의 시대가 5년 정도 일찍 끝나고, 한국 정치판에서 30~40년을 정치하면서
의회민주주의를 경험하고 대화와 타협의 묘미를 아는 이들이 5~10년 정도 우리 정치의 주역으로 활동한 뒤 노무현 세대로 넘어갔다면 우리 정치는
조금 덜 팍팍하지 않았을까?
이기택 전 총재는 자신이 YS와 DJ를 넘어서지 못한 데 대해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는 나이. YS보다는 열 살,
DJ보다는 열한 살 아래다 보니, 두 사람과 같은 반열에 설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한참 아래로서 명확히 차별되는 나이도 아니라는
애매함이 운신의 폭을 많이 제한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너무 이른 나이에 정치에 뛰어들다 보니, 제대로 공부하고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성숙해질 기회를 놓쳤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혹자는 이를 두고 ‘권력의지가 부족하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나는 YS처럼 3당 야합을 하거나, DJ처럼 거짓말을 하고 배신을 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했다.
기자가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를 쓸 무렵, 이기택 전 총재는 서울 아현동 범시민사회단체연합(범사련)에 있는 사무실에서 소일하고
있었다. 연재를 마친 후 종종 그의 사무실을 찾으면 붓글씨를 쓰거나, 4.19유관단체의 일을 보고 있었다. 기자가 방문을 열고 인사를 하면 무척
반가워했다. 때때로 이 전 총재는 “배 기자가 내 회고록을 써 주면 좋겠다”는 뜻을 비치기도 했다. 회사에 매어 있는 몸이라 그 부탁에 응하지
못했다. 작년 가을 찾아뵈었을 때에는 “그냥 전에 쓴 것들 바탕으로 해서 회고록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회고록 탈고를 마친 후 돌아가셨다는
부음 기사를 보니, 가슴이 찡하다. '영원한 4.19세대'답게 그는 국립 4.19묘지에 묻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인과 역대 대통령에
얽힌 일화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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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1일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마련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의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이 고인을
애도하고 있다. |
1. 전두환, 전경환 보내 “당 만들어 달라”
1980년 6월 초였다. 그해 5월 30일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때 나는 부산에 내려가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미국 LA에서 안경사업을 하는 친구 신모였다. 그는 “중요한 일이 있다. 빨리 올라오라”고 했다.
약속장소인 청와대 인근 한정식집으로 가서 방문을 열었더니, 누가 보료에 비스듬히 앉아 있다가 얼른 일어났다.
전경환(全敬煥)이었다. 그와는 안면이 있었다.
전경환은 1970년대 후반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회장 경호비서를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낭인(浪人)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LA에서
불우하게 지냈는데, 이때 현지의 교포 사업가들과 자주 어울렸다. 전경환은 그들에게 “형이 육군소장(少將)으로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라고
자랑했다. 그들은 ‘그런 형을 둔 사람이 저렇게 사나’ 하면서도 전경환에게 몇 번 밥도 사고 술도 샀다. 내게 전화를 건 신모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12·12사태 이후 세상이 바뀌었다. 전두환(全斗煥) 장군이 실력자로 부상(浮上)하면서 전경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LA에서
전경환에게 잘해 주었던 교포 사업가들은 서울로 달려왔다. 신모 덕에 나도 그들이 어울리는 자리에 낀 적이 있었고, 그래서 전경환과 안면을 트게
됐다.
보료에서 일어난 전경환은 내게 보료에 앉으라고 권하고, 자기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제 얘기가 아니고, 제 형님(전두환)이 하는 얘기입니다. 제 얘기는 한마디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민정(民政)으로 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정당이 필요하다”면서 “이 의원님께서 정당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했다.
나에게 전두환을 위한 정당을 만들어달라니….
생각지도 않았던 얘기였다. 전경환에게 “3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청년시절부터 동지이자 내 보좌관을 했던 박관용 국회전문위원(전
국회의장)과 의논했다. 쿠데타 한 사람들하고 정당을 같이 할 수는 없었다. ‘당신들 얘기를 신중히 검토했지만, 여러 가지 상황상 응할 수
없다’고 작은 예의라도 차려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거절의 편지를 보냈다. 결국 나도 정치규제에 묶였다.
그때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나는 그때 전경환의 제안을 전두환 정권의 여당(與黨)을 만들어달라는 얘기였던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지인(知人)들과 골프를 치면서 이야기를 했더니, 같이 있던 한 언론인이 이렇게 말했다.
“총재님, 그건 여당, 즉 민정당(民正黨)을 만들어달라는 얘기가 아니고, 민한당(民韓黨) 같은 관제(官製)야당을 만들어달라는 얘기였을
겁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2. YS와 3당 합당
1990년 3당 합당(合黨) 이틀 전이었다. 정동성(鄭東成) 민정당 원내총무가 내게 편지를 건네며 말했다.
“이걸 김영삼 총재께
전해주십시오.”
“이게 뭐요?”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親書)입니다. 3당 합당과 관련, 청와대 회동에 관한 것입니다.”
머리가
띵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3당 합당이라니, YS가 군사정권의 노태우, JP와 손을 잡다니….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상도동에 있는 YS의 집으로 달려갔다. 아침부터 들이닥친 나를 본 YS는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3당 합당을 한다는데, 사실입니까?”
한순간 YS가 흠칫했다.
“이 부총재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게 그만한 정보망은 있습니다.”
YS는 “그거 이상한데…”라고 혼잣말을 하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안
그래도 이 부총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나 했는데, 잘됐소. 내 얘길 들어보시오. 4당 체제 아래서 국정(國政)이 목표도 없이 이리저리 흘러가고
있어요. 3당 합당은 우리가 사는 길이고, 나라가 사는 길이오. 우리 같이 갑시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군사독재정권과 손을 잡는단 말입니까? 우리가 평생 군사정권과 싸워왔는데, 국민이 그걸 용납하겠습니까? 총재님, 생각을
돌려주십시오.”
“이미 다 결정된 일이에요. 우리 다 함께 갑시다.”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우리는 40~50분 정도 옥신각신했다. 나는 그날 오후 부산에서 재혼(再婚)을 하는 친구의 결혼식 주례를 서기로 되어 있었다. 부산행
비행기표도 끊어놓은 상태였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일어나야 했다.
“실은 제가 오늘 부산에서 주례를 서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만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천하대세가 결정되는 판인데 주례는 무슨…. 결론을 내지 않고는 절대로 못 나갑니다!”
“이제 가봐야
합니다. 그럼 주례를 마치고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약속 지킬 거죠?”
“제가 왜 총재님과의 약속을
어기겠습니까?”
부산에서 주례를 마치고 오후 4시 서울로 돌아왔다. 상도동으로 갔다가는 YS에게 붙잡힐 것 같았다. 수행비서에게 “YS
수행비서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가 비행기를 놓쳐서 못 올라간다고 전하라”고 했다.
1990년 1월 20일, 노태우 대통령과 YS, JP는 청와대에서 3당 합당을 선언했다. 며칠 후 3당 통합준비위원회 모임이 열렸다.
YS는 준비위원에 내 이름을 집어넣었다. 모임 장소는 국회에 있는 통일민주당 원내총무실 바로 윗방이었다. 모른 척할 수도 없어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가 바로 원내총무실로 내려왔다. 그런 나를 보면서 기자들은 “이 총무, 왜 나왔어요?”라면서 의아해했다.
1월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3당 통합추진 15인 위원의 오찬에 참석한 것은 YS와의 인간적 의리 때문이었다. YS는 그의 계보도
아니었던 나를 부총재, 원내총무, 5공특위 위원장으로 중용해주었다. 인간적으로 고마웠다. 헤어지더라도 그 정도까지는 해주고 싶었다. 통합준비위
2차 모임부터는 아예 나가지 않았다. YS가 나를 찾았다. 나는 잠적해버렸다.
3. DJ,“대선에 다시 출마하라고 권하는 사람은 동지로 생각하지 않을 것"
1992년 대선 다음 날인 12월 19일 아침, DJ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 대표, 나는 정계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어떻게 더 정치를 할 수 있겠소?”
그 순간 ‘DJ가 정말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이구나. YS의 정치보복을 피하려고 정계은퇴를 선언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정계은퇴 선언을 정말로 믿었다. 후일 “DJ의 정계은퇴 선언 당시, 그가 정말로 은퇴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는 사람들을 보았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게 안 보였다.
DJ는 영국으로 출국하기 전, 수천 명의 환송객 앞에서도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내게 정치를 하라, 대통령에 다시 출마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동지로, 아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1993년 3월 나는 DJ가 떠난 민주당의 대표가 됐다. 전당대회에서는 나와 김상현(金相賢) 의원, 정대철(鄭大哲) 의원이 당
대표직에 도전했다. 동교동계에서는 적극적으로 나를 지원해주었다. 권노갑(權魯甲), 박지원(朴智元), 한광옥(韓光玉) 의원 등이 애를 많이
써주었다. 나도 최고위원에 도전한 권노갑, 한광옥 의원의 표가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고 지원해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DJ의 정계복귀설이 솔솔 나오기 시작했다. 한번은 호남 출신 모(某)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말했다.
“DJ의 롤백 설이 있는데 사실일까?”
“소문일 뿐이지, 절대 안 나올 거요. 국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은퇴선언을
했는데, 어떻게 또 나오겠소?”
“그래도 여러 가지 돌아가는 정황을 종합해보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에이, 그러면
×××지. 절대로 안 나올 거요.”
그랬던 그가 나중에 DJ정권 아래서 장관을 했다. 세상사는 참 모를 일이다.
1993년 6월 나는 유럽 순방길에 나섰다. 6월 20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DJ를 만났다. “국내 정국이 돌아가는 것이나 저희가 야당
하는 것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많으시죠?”라고 물었다. 정계 복귀 의사가 있는지 우회적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그는 딱 잡아뗐다.
“나는 전혀 몰라요. 누가 얘기를 꺼내면 말도 못 하게 하고 있어요. 이 대표, 나는 정계에서 은퇴한 사람이에요.”
1993년 7월 4일, DJ가 6개월여 만에 영국에서 돌아왔다. DJ는 아태평화재단을 만들어 남북관계 개선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정계복귀설에 대해서는 늘 단호하게 부인했다.
1994년 말부터 이듬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 체제 개편론이 나왔다. DJ의 입김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런데도 DJ는 여전히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정계복귀 가능성을 부인했다.
1995년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DJ는 경기지사 후보로 이종찬(李鍾贊) 의원을 밀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종찬 카드를 고집하는
DJ를 보면서 비로소 ‘아, DJ가 정계에 복귀해 대선 4수에 도전하려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경기도 지사 경선에서는 장경우(張慶宇)
의원과 이종찬 의원의 대타(代打)로 나온 안동선(安東善) 의원이 맞붙었다. 개표에서 안동선 후보의 패색(敗色)이 짙어지자 안 후보 측 당원들이
마지막 남은 투표함 3~4개를 개표하지 못하도록 난동을 부렸다.
나는 문제의 투표함들을 중앙당으로 가져오게 한 후 창고에 보관했다. 그리고 호남 출신의 존경받는 변호사 출신인 홍영기(洪英基)
국회부의장을 개표위원장으로 임명해 투표함을 열도록 했다. 결과는 장경우 후보의 승리였다.
DJ가 보자고 했다. DJ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이번 경선은 없었던 걸로 하고 후보를 다시 세우자”고 했다. 장경우・안동선
후보가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의 합의로 이종찬 의원을 후보로 세우자는 얘기였다. 나는 DJ에게 말했다.
“당 대표는 저입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응접실에는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대표 권한으로, 경기지사 후보는 장경우 의원으로 확정됐음을 알린다”고 했다.이로써
DJ와 나는 결별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민주당의 공식적인 후보는 장경우였음에도, 동교동계에서는 호남향우회를 통해 장 후보를 찍지 말라고
선동했다. DJ에게는 경우도, 민주주의도 없었다. 남들보고는 민주주의를 하라고 그렇게 외쳤던 사람이 말이다. 그래야 대통령이 되는
것인지….
4. 이회창과 노무현
2000년 총선이 다가왔다. 합당 시 공천지분은 민주당 4, 신한국당 6으로 하기로 했지만, 그걸 따지기는 적절치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이회창 총재에게 “합당 시 약속에는 구애받지 말고, 대신 자기 쪽에서 꼭 공천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우리 둘이 의논해서 공천심사위에
얘기하자”고 했다.
공천을 앞두고 내가 공천에서 탈락할 거라는 얘기가 돌았다. 설마 했다. 2월 18일 공천결과가 나왔다. 공천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나뿐이 아니었다. 신상우・오세응(吳世應) 등 당 중진과 원로들이 대거 탈락했다. 명분은 “당을 젊게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신한국당과 통합할 때 딸려온 민주당 당사를 팔아 자기 선거빚을 갚았다던 사람이….
생각해보니 총재권한 대행 시절에, 국회정상화와 국회부의장 지명 등을 놓고 내 주장을 관철했던 것이 원인(遠因)이었던 것 같았다. 이회창 총재나
측근들은 내가 녹록지 않은 사람이며, 나를 그대로 놔두면 이회창 총재의 정치가도(街道)에 장애가 될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이회창 총재와 만났다. 그를 거칠게 비판했다. 그가 말했다.
“비례대표를 하시지요.”
“멀쩡한 내가 왜 지역구 공천을 못
받고, 당신이 던져주는 비례대표나 받아야 하오? 더러워서 안 하겠소!”
나는 김윤환 의원을 찾아갔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잠옷 바람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는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다”고 호소했다. 우리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민주국민당을 만들었다.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조순 전 서울시장, 신상우 의원, 재야운동가 장기표(張琪杓)씨, 김용환(金龍煥) 전 자민련
부총재, 김상현 의원, 박찬종 의원, 김광일 전 대통령비서실장, 5공 실세였던 허화평(許和平)씨 등이 합류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당선자는 지역구에서 한승수(韓昇洙) 의원, 전국구에서 강숙자 의원, 단 두 사람이었다. 2000년 총선 이후 운동권 출신 젊은 정치인들이 많이
진출한 정치판의 모습은 우리 때와는 많이 달랐다. 그때 나는 사실상 정치를 접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으로부터의 러브콜이 왔다. 11월 말 후보 등록 며칠 전, 이회창 후보의 최측근인 서정우(徐廷友)
변호사가 모 신문사 정치부장을 앞세워 찾아왔다. 그 정치부장은 평소 이회창 후보 측에 입버릇처럼 “당신들이 선거할 줄 아나? 이기택 같은 사람을
끌고 오지 않으면 이 후보는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서 변호사는 “이회창 후보를 용서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회창 후보가 공천이라는 정치적 무기로 나를 학살한 경위를 아느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듣고 판단해보라”한 후, 합당 이후 공천 탈락까지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물러갔다.
서청원 의원도 찾아왔다. 그는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과 함께 이회창 후보에게 나를 끌어들이라고 강권했다고 한다. 이 총재는 “만나기는
해야 하는데 일정이 꽉 차서…”라고 했다고 한다. 서 의원은 “이 후보에게 ‘새벽에라도 가서 만나야 한다. 안 그러면 이기택 총재는 노무현에게
간다’고 했다”면서, 이회창 후보와 만나보라고 부탁했다. 나는 “만나봐야 소용없는 걸 왜 만나겠느냐”며 거절했다.
12월 1일쯤으로
기억하는데, 노무현 후보도 나를 찾아왔다. 김정길 의원 등이 중간에서 애를 많이 썼다. 노 후보는 “제가 선배님을 모시고 정치를 하면서 충성을
다 하지 못하긴 했습니다만,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직을) 잘하도록 하겠습니다”라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며칠 후 나는 노무현 후보 지지를
결정했다. 내 사무실을 찾은 노 후보는 눈물을 보였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노 후보를 도왔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지도자로서 소양이나 도덕성이 부족했다. 언행도 비상식적이었다. 민주당 시절 회의 때에도 자기 얘기만 하고,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곤 했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그에게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자리를
거절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런 사람을 왜 지지했느냐고? 이회창 후보는 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朴槿惠) 후보와 MB 모두 지지를 부탁해 왔다. 나는 “경선에서 후보가 결정된 후에 ‘한나라당 후보’를
돕겠다”고 했다. MB가 후보가 된 후에는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으로 선거를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