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한일 근대사 이야기
-졸저 <한일 근대인물 기행>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에서 발췌-
제1장 암흑에서 개명으로1850년~1863년
1. 개항과 구체제 동요(일본)
페리의 내항 이후 철수까지의 전 과정은 당시 에도 시민들 사이에 연일 큰 화제였다. 시민들은 전쟁 발발, 막부 대응 등 향후 정치∙군사적 예상은 물론 군함∙대포 등 신병기와 페리 제독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목격담이나 들은 얘기에 조미료를 뿌려가며 소문과 화제를 증폭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지대한 관심은 다음해 페리가 돌아올 때까지 개항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막부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에도막부 개설 이래250년간 이어져 온 쇄국정책을 양이의 위협으로 한순간에 풀어버린다면 백성들은 물론 막부의 지지기반인 무사들로부터도 전투 한 번 못하고 적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난과 조롱을 받을 게 뻔하기에 막부의 체면과 위신이 서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만일 조약을 거부하면 바로 전쟁인 마당에 페리 함대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한 이상 증기선 한 척 없는 막부가 패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무사계급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급 무사들은 전쟁론을 펴고 있었다. “신국 일본은 가미카제(신풍)로 보호받는다”고 주장하는 등 목소리 큰 자들이 훨씬 더 많았으며 이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에도막부 창설 이래 250년간 한 번도 전쟁다운 전쟁이 없었던 태평성대였기에 이번 기회에 전투를 통해 사무라이로서 존재의 의미를 보여주려는 자가 대다수였다. 오랫동안 쉬었더니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반응이 이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막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격론으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일본 전체 260여 개의 번(지방정권)을 지배하는 무사정권의 최고 지휘부의 이렇게 난처한 처지를 밖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쓰는 막부의 노력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었다. 4척의 페리 함대에 놀라 고민하는 막부의 처지를 풍자한 노래가 에도 시민들에게 유행하고 있었다.
“태평스러운 잠을 깨우는 조키센(카페인이 많은 일본차, 증기선과 발음이 같다) 불과 4잔에 밤잠을 잘 수 없다네”
(에도막부에 관한 기초지식)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1603년 교토의 천황으로부터 쇼군에 임명되어 에도막부 시대를 열었다. 천황은 연호 제정 등 의례적인 업무만 하고 실제 통치는 쇼군이 담당했다.
막부 체제(또는 막번 체제)는 쇼군의 중앙(막부) 정치와 다이묘의 지방(번) 정치를 총괄하는 의미다.
다이묘(번주)는 석고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하사받은 무사로서 쇼군을 섬기는 자를 말한다. 다이묘는 쇼군의 부하이지만 영지에서는 가신과 영민을 지배하는 통치자였다. 다이묘의 영지 지배 조직 또는 영지를 번이라고 한다. 법의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분야에 걸쳐 다이묘에게 결정권이 있던 점에서 번의 내부 정치는 막부로부터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다이묘가 쇼군에게 지는 첫 번째 의무는 전쟁 발발 시 병력을 출정시키는 군역이었다. 병력의 수와 무장 정도는 영지의 석고에 따라 정해졌다. 두 번째 의무는 에도성의 축성, 천재지변의 복구 등 국가 중대사에 막부의 명령에 의해 번이 노동력을 동원했다. 번에 대한 징세권이 없었기에 막부는 직할령을 최대화하고 무역 이권을 독점했다.
또 주요 도시(에도, 교토, 오사카, 나가사키)와 항구, 금, 은, 구리, 광산 등의 이권을 독점해 체제 유지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따라서 막번 체제라는 것이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번들이 연합해 세를 키우면 언제든지 막부를 위협할 수 있었기에 막부는 늘 다이묘를 경계하며 통제의 대상으로 삼았다.
1615년 제정된 무가제법도는 다이묘들이 지켜야 할 법도로서 다이묘 가문 간 혼인 금지, 성의 축성과 개보수 금지, 큰 배의 제조 금지 등 막부에 대한 반역 가능성을 사전 차단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가장 강력한 통제책은 참근교대제였다. 다이묘들이 1년씩 에도와 영지를 번갈아 가며 의무적으로 거주하게 했으며, 영지로 내려갈 때는 정실부인과 후계자는 에도성에 남게 하여 사실상의 인질로 삼는 제도다.
가신과 무사들도 대부분 다이묘와 같이 생활하고 움직였기에 연례행사인 참근교대 행렬은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번의 체면과 위신이 깎이지 않도록 다이묘들은 경쟁적으로 화려하게 행차를 했다. 에도 생활비와 참근교대 행차비 지출 등으로 번 재정은 점점 열악해졌고, 인질로 있는 가족 때문에 반란을 꿈꾸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 후계자는 어려서부터 에도 생활이 익숙하고 영지와는 친밀감이 떨어져 후일 번주가 되더라도 에도 생활을 정서적으로 우선시하여 에도막부 체제가 260년간이나 공고하게 유지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쇼군은 통상 5명 내외로 구성된 로주들의 의견을 들은 후 중요한 사항을 결정했다. 권한과 세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로주는 석고가 크지 않은 다이묘 중에서 선임했다. 막부에 중대한 현안이 발생하거나 긴급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로주 중 명망과 능력을 갖추 사람을 간혹 다이로에 임명하기도 했다.(다음에 계속)
* 사진 설명
페리 제독 사진(좌)
소문을 듣고 일본인이 그린 페리 제독(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