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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41) 빨래터
빨랫방망이 두드리며 삶의 고달픔과 설움 씻어낸 빨래터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빨래하는 여성’, 1925,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빨래터에 모여 수다 떨며 서러움 달래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 년 만에/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 아가/ 진주 낭군 오실 것이니 진주 남강 빨래 가거라/ 진주 남강 빨래 오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 퉁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 소리/ 고개 들어 흘끗 보니 하늘 같은 갓을 쓰고/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더라.
흰 빨래는 희게 하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소요하다/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야야 아가 며늘 아가/ 진주 낭군 오셨으니 사랑방에 건너가거라/ 사랑방에 건너오니 웬 갖가지 안주에다/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더라/ 이것을 본 며늘 아가 아랫방에 물러 나와/ 아홉 가지 약을 먹고서 목 매달아 죽었단다.
이 말 들은 진주 낭군 버선발로 뛰어 나와/ 내 이럴 줄 왜 몰랐던가 사랑 사랑 내 사랑아/ 화류객 정은 삼 년이오 본댁 정은 백 년인데/ 내 이럴 줄 왜 몰랐던가 사랑 사랑 내 사랑아/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 되어/ 푸른 청산 찾아가서는 천 년 만 년 살고지고/ 어화둥둥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
경남 일대에 전해지는 민요 ‘진주 난봉가’ 노랫말이다. 옛 시절, 이 지역 여성들이 빨래하고 길쌈·바느질·다듬이질할 때 남녀 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은 이 노래를 부르며 가사의 고됨을 함께 달랬다고 한다. 일종의 가사노동요인 셈이다.
또 조선 시대 경북 영천 임고면에서 수집된 규방가사 ‘여자 탄식가’는 “여자몸이 되어나서 인들아니 원통한가/ 누대종가 종부로서 봉제사도 조심이오/ 통지중문 호가사에 접빈객도 어렵더라/ 모시낳기 삼베낳기 명주짜기 무명짜기/ 다담일어 베를보니 직임방적 괴롭더라/ 용정하여 물여다가 정구지임 귀찮더라/ 밥잘짓고 술잘빚어 주사시에 어렵더라/ 세목중목 골라내어 푸재따듬 괴롭더라/ 자주비단 잉물치마 염색하기 어렵더라/춘복짓고 하복지어 빨래하기 어렵더라/동지장야 하지일에 하고많은 저세월에/ 첩첩이 쌓인일을 하고한들 다할손가…”라며 가는 허리 부러지고 열 손가락 다 파이도록 일만 해야 하는 여성의 신세를 한탄했다. 이처럼 옛 여인들은 빨래터에 모여 수다를 떨고 노래 부르며 지난한 일상의 고달픔과 매운 시집살이의 서러움을 함께 달랬다. <사진 1>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개울에서 빨래하는 여성들’, 1925,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물동이가 있는 빨래터’, 1925,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옛 여인들 치유와 연대의 공간 빨래터
세탁기가 없던 시절, 빨래는 여인들에게 고단한 노동이었다. 빨래는 유난히 품이 많이 든다. 그래서 옛 여인들의 손은 겨울엔 곱고, 여름에 흐무러져 늘 퉁퉁 부어 있다. 순우리말인 ‘빨래’는 물로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행위 자체를 뜻한다고 한다. 여기서 놓쳐서 안 될 게 바로 ‘물’이다. 요즘처럼 스팀과 바람을 이용해 옷을 관리하는 건 빨래가 아니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동네 어귀 제법 물살이 세고 너럭 바위가 있는 곳엔 영락없이 빨래터가 있었다. 샘이 많은 서울 도성에도 이름을 날린 빨래터가 있다. 청계천·원서동·삼청동 빨래터는 ‘서울 도성 3대 빨래터’였다. 이 중 창덕궁 후원 뒤에 있는 원서동 빨래터를 최고로 쳤다. 궁궐에서 쌀 씻은 물이 북영천으로 흘러들어와 빨래가 잘됐다고 한다. <사진 2>
빨래도 요령이 있다. 때를 빼기 위해 무턱대고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천연 면인 무명천에는 잿물을, 명주와 같은 귀한 직물엔 팥이나 녹두를 갈아 썼다. 흰옷을 더 희게 하고, 색깔이 있는 옷은 더 윤이 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무명은 우선 삶아야 한다. 장작불을 지펴 가마솥에다 빨래를 넣어 푹 삶은 후 빨래터에서 마무리한다.
제대로 땟물을 빼고, 빨래의 손맛을 느끼려면 ‘빨랫방망이’를 사용해야 한다. 귀하디귀한 아들 딸들의 옷은 한겨울에도 두 손으로 조물조물 주물러 정성껏 빨지만, 남편과 시부모·시누이의 옷들은 애벌빨래 없이 냅다 빨랫방망이로 조진다. 거침없이 엎어 치고 넋 없이 되치다 보면 명치 아래 깊숙이 박혀 있던 응어리가 빨래 땟물과 함께 쑥 빠져 흘러간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힘으로 빨래를 두드려선 안 된다. 옷감이 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솜을 넣은 겨울옷이나 이불 같이 두꺼운 빨랫감은 발로 밟아 빤다. 깨끗이 헹군 빨랫감은 두 손으로 힘껏 비틀어 짜서 너럭 바위나 싸리 울타리에 널어 말린다. 명주나 모시는 비틀지 않고 손으로 콕콕 눌러 물기를 제거한 후 널어 말린다. <사진 3>
-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그네가 있는 빨래터’, 1925,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 한복의 염료와 색채 예찬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복의 염료와 색채를 예찬했다. “한국인의 삶에서 색채의 세계는 뚜렷한 변화를 겪는다. 자연의 현란한 붓놀림 덕분이라고 한다. 봄이면 자연은 온갖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색색의 꽃들을 화려하고도 어지럽게 그려놓고, 여름이면 결실의 계절을 예비하며 만재한 꽃들이 작열하다가 점점 차분한 색조로 조화를 이룬다. 가을에도 많은 색깔이 불꽃을 발산하지만, 만발한 꽃들은 천천히 시들어간다.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이는 겨울이면, 삭풍은 마지막 잎사귀마저 떨어뜨린다.
한국의 옷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이들 옷은 풍요롭고 정열적인 봄꽃의 다채로움으로 빛난다. 아이가 어릴수록 색상이 풍부하다. 저고리 소매는 알록달록한 색동 줄무늬로 꾸민다. 아이가 자라면 옷 색깔도 옅어지고 문양도 단순해지지만, 색의 풍요에 대한 열망은 자라면서 더 커지는 것 같다. 색을 쓰는 면이 갈수록 넓어지고, 기왕이면 색을 맞추어 입으려는 것을 보니 그러하다… 청년기에 접어들면 이 봄빛 같은 색깔들이 사라진다. 혼인 적령기의 처녀는… 두껍고 하얀 쓰개치마로 얼굴뿐 아니라 덧없는 청춘의 화사한 색깔까지 가려야 했다. 그들은 혼례 날에나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었다. 이날 새색시는 길고 화려한 혼례복을 입고 어릴 적 동무들과 유년의 찬란한 색채에 둘러싸인다. 한국의 뙤약볕에 빛 바랜 듯, 그날 이후 남녀는 흰옷만 입는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83~284쪽)
빨래터는 여인들만의 공간이다. 암묵적으로 남자들이 출입할 수 없는 자리였다. 김홍도와 박수근이 그린 ‘빨래터’에도 남성이 여인들과 함께하는 공간은 없다. 사교와 놀이, 위로와 치유,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속에 담아뒀던 설움을 토해내고, 질펀한 입방아로 남편·시댁·이웃의 흉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즐겼다. 또 빨래터에 마련된 그네를 타고 힘껏 발을 굴러 하늘 높이 올라 동네 너머 저 먼 세상을 바라보고, 바람에 실린 삶의 향기를 맡으며 해방감을 느꼈다. <사진 4>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와 독일인 선교사들은 우리 옛 여인들의 삶의 자리인 빨래터를 소박하게 사진으로 남겼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42) 한복
한복, 우리 민족의 예스러운 멋과 조화미 품은 전통의상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한복 입은 소녀’, 1911,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볏단 위의 아이들’, 1911. 05. 황해도 청계동,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버 총아빠스, 한복의 조화미 단숨에 간파
한복은 멋스럽다. 직선과 완만한 곡선의 단순한 조형미가 참으로 곱다. 단아한 깃과 정갈한 고름, 색동 장식이 조화롭다. 넉넉한 품과 과하지 않은 주름이 소박하다. 옷맵시를 드러내는 끈과 고름, 대님 또한 그 넓이와 길이·색의 변화로 여유롭다. 한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예스러움을 품고 멋을 드러내는 ‘전통 복식’이다. 따라서 옷은 물론 장신구와 신발 등을 제대로 갖춰야 한복이라 할 수 있다.
한복이 멋스러운 이유는 단순히 예스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입어온 옷 속에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문화가 켜켜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정서와 문화의 조화가 한복의 멋으로 드러난 것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우리 민족의 삶을 반영해 지어진 옷이 바로 한복이다.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복의 조화미를 단숨에 간파했다. “옅은 꽃들이 봄의 첫 전령인 양 잠든 자연을 깨우고, 들판의 흙빛 풀들은 화사한 봄빛으로 갈아입고 햇살 고운 봄의 생기와 정취로 초대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봄꽃처럼 화사하고 매혹적인 아이들의 옷이었다. 부드러운 아네모네의 흰빛과 수줍은 제비꽃의 보랏빛, 다홍치마와 파랑 저고리, 이 모든 것이 붉고 푸르게 빛나는 풀모나리아 꽃처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저기 한 아이가 초록 잎 위에 나부끼는 연노랑 앵초 같은 옷을 입고 있다. 금세 다시 연두와 주황이 되었다가 여기에 보라·초록·빨강이 뒤섞인다. 저기 긴 초록 옷은 어느새 연두로 변해 있고 흰색 끝동이 달린 주황과 자줏빛 옷 위로 검은 댕기 머리가 춤추고 있다. 젊은 봄기운과 흥겨움만이 마법을 걸어 만들 수 있는 색채의 향연이다. 물론 옷 군데군데 흙먼지와 때도 묻어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 소나기에 흙이 튄 작은 봄꽃 같다. 비록 몇 주 전 한 독일 신문기자가 조잡한 자연색의 배합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래도 한국 아이들 옷의 아름다움은 현란한 색상에서 단연 독보적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71~72쪽) <사진 2>
깨끗한 옷은 ‘정결’을 상징한다. 구약의 사제들은 속죄 예식을 할 때 정해진 곳에서 몸을 씻은 후 깨끗한 아마포 옷을 입고 사제직을 수행했다.(레위 16,32 참조) 목화에서 뽑아낸 실로 짠 아마포는 우리 조상들이 즐겨 입던 흰옷의 무명천과 같다. 성경에서 ‘흰옷’은 거룩함과 승리를 상징한다.(2마카 11,8; 묵시 3,4-5 참조)
정결은 ‘정숙’을 요구한다. 교회 영성가들은 정숙함이 절제의 완벽한 구성 요소라고 가르친다. 정숙이 사람들의 내밀한 면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정숙은 정결을 지향하고 정결의 신중함을 드러낸다. 그래서 정숙한 사람은 단정하게 산다. 그리고 점잖은 옷을 골라 입는다.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남바위를 쓴 여성들과 여아들’, 1911. 03. 하우현성당,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한복 입으면 몸가짐 단정하고 걸음 단아
한복은 점잖다. 몸가짐을 얌전하게 하고, 걸음도 단아하게 한다. 한복 입은 여인들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치마 뒷자락을 살짝 걷어 올려 잡고 사뿐히 걷는다. 이처럼 한복은 늘 품격을 유지하게 한다. <사진 3>
“나는 밝은색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심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음울한 천에 무늬를 넣은 띠로 매무새를 다잡은 일본 옷과 비교하면 알 것도 같았다. ··· 한국인은 꿈꾸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연을 꿈꾸듯 응시하며 몇 시간이고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다. 산마루에 진달래꽃 불타는 봄이면, 그들은 지칠 줄 모르고 진달래꽃을 응시할 줄 안다. 잘 자란 어린 모가 연둣빛 고운 비단을 펼치듯 물 위로 고개를 살랑인다. 색이 나날이 짙어졌다. 한국인은 먼 산 엷은 푸른빛에 눈길을 멈추고 차마 딴 데로 돌리지 못한다. 그들이 길가에 핀 꽃을 주시하면 꽃과 하나가 된다. 한국인은 이 모든 것 앞에서 다만 고요할 뿐이다. 그들은 꽃을 꺾지 않는다. 차라리 내일 다시 자연에 들어 그 모든 것을 보고 또 볼지언정, 나뭇가지 꺾어 어두운 방안에 꽂아 두는 법이 없다. 그들이 마음 깊이 담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자연에서 추상해 낸 순수하고 청명한 색깔이다. 그들은 자연을 관찰하여 얻은 색상을 그대로 활용한다. 무늬를 그려 넣지 않고, 자연의 색감을 그대로 살린 옷을 아이들에게 입힌다. 하여, 이 소박한 색조의 민무늬 옷들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원숙하고 예술적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84~285쪽)
-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아기를 업고 있는 소녀’, 1911. 03. 하우현성당,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5> 노르베르트 베버, ‘황해도 청계동 여자들과 아이들’, 1911. 05. 청계동,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일제 강점기 시절 한복은 저항의 상징
한복 이름도 다양하다. 형태에 따라 겉막이, 회장 저고리라 불리고 옷감에 따라 갑사·숙고자·양단·무명·모시 저고리 등으로 불린다. 또 색깔에 따라 노랑·분홍·색동저고리로, 문양에 따라 연화 문단·보상화 문단 저고리라 한다. 바느질 방법에 따라 홑·겹·깨끼 저고리라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한복은 저항의 상징이었다. 일제는 식민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말과 글뿐 아니라 머리 모양새와 옷차림을 강제로 바꾸도록 했다. <사진 4>
“이 진기한 거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사람들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헐렁한 흰옷으로 휘감았다. 이 옷에 어떤 장식물을 달아 본디의 순수성과 특성을 손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네 의복과 머리 모양을 신식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런데 그 동기가 옛 것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일본과 일본을 연상시키는 것들에 대한 증오다. 덧붙여 말하면 한국인들은 외국인을 혐오하거나 혁신에 적대적이지 않다.”(지그프리트 겐테, 「한국 여행기」 , 1905년 출간, 203~222쪽 참조)
복식연구가들은 한복의 멋스러움은 ‘정중동(靜中動)’에서 우러난다고 한다. 옷맵시에 대한 감성적 향수보다 내재한 정서를 더 깊이 성찰한 표현일 것이다. <사진 5>
“새로운 정신이 밀려들고 있다. 옛 성벽이 허물어지고 당당한 성문들이 헐리고 있다. ··· 문화의 증거들은 포악하게 짓눌려 으깨진다. 연기를 피워 올리는 굴뚝 위로 우뚝 솟은 현대식 건축물들이 새 시대의 도래를 알려준다. 과거의 엄정한 윤리 도덕이 섬나라 풍속을 들여온 지배 세력의 강력한 영향하에 흐트러지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변화와 생성, 소멸과 개조가 진행 중이다. 여러모로 운이 따른 덕에 나는 소멸할 운명에 처한 문화사적 보물들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히 포착할 수 있었다.”(노르베르트 베버, 「분도통사」 196쪽)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44) 공주(公州)
충(忠)·의(義)·예(禮)의 고장 공주, 282위 순교 성지로 거듭나다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공주 충청 감영 옥’, 1911년 4월 25일. 유리건판.
박해 시기 282명 이상 순교한 거룩한 땅
충남 공주는 백제의 옛 수도였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잡혀 죽임을 당하자 그 뒤를 이은 문주왕이 그해 10월 도읍을 웅진 지금의 공주로 옮겼다. 이후 공주는 538년까지 63년간 백제의 수도로 번성해 백제 중흥의 중심지가 됐다.
공주는 지리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잘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지였다. 백제 공산성이 이미 축조돼 있었을 뿐 아니라 금강 일대 나루터들이 발달해 군사 거점을 설치하기에 쉬웠다. 웅진 백제 시기 가장 전성기를 누린 임금이 바로 무령왕이다. 그의 왕릉도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에 자리하고 있다.
공주는 또 고려 시대 무신정권의 압제에 항거해 명학소 주민들이 민란을 일으킨 곳이다. 이 민란을 ‘망이·망소이의 난’이라 한다. 고려 시대 지방 행정 단위 중에는 특정 직업을 갖고 있는 장인들이 모여 사는 소(所)·향(鄕)·부곡(部曲)이 있었다. 향은 주로 특정 농경에 종사하는 이들이, 부곡은 왕조에 저항해 차별받던 양인들이 모여 살았다. 소는 기와·숯·소금·먹·비단·옹기 등 특산물을 생산해 공납하는 이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오늘날 공주 탄방동·둔산동 일대인 명학소는 숯을 생산하는 마을로 추정된다. 이곳 숯을 만드는 장인들이 무신 정권의 수탈에 직접 항거해 신분 해방을 외치며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조선 시대 공주가 낳은 대표 인물이 ‘김종서’다. 그는 1383년 충청도 공주목 요당면 비계곡(현 세종시 장군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양대군의 정변으로 71세에 처참하게 살해될 때까지 세종대왕과 함께 국경을 두만강까지 확보하고 6진을 개척했으며,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을 주도해 ‘문신관료’로 존경받았다.
충(忠)·의(義)·예(禮)의 고장인 공주는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 ‘거룩한 땅[聖地]’이다. 조선 왕조 치하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80년 병인박해 막바지까지 282명(기록상 실제 이보다 더 많은 신자가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됨)의 가톨릭 신자가 공주에서 순교했다.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비롯한 281명의 신자가 공주 충청 감영 옥에서 교수형으로, 독살로, 돌에 맞아서, 매 맞아서 순교하고,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형으로 치명했다. 황새바위 순교자 36위를 제외한 246위가 공주 감영 옥에서 순교했다.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공주 공산성 진남루’, 1911년 4월 23일,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공주 충청 감영 옥과 황새바위 순교지 순례
공주 충청 감영 옥과 황새바위 순교지에 처음 관심을 가진 이가 바로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다. 그는 1911년 4월 25일 공주 충청 감영 옥과 황새바위를 순례했다.<사진 1> “지름 30m의 둥근 마당 한복판에 초라한 옥사가 있고, 그 앞에 지금은 일본인 간수들의 숙소로 쓰인 양철지붕 집이 보였다. 그게 전부다. 그러나 독실한 순교자들의 인고와, 굳건한 신앙을 비는 뜨거운 기도와,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영웅적 기상에 대해 비바람에 씻긴 감옥의 돌들은 입을 열어 증언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말마의 고통을 겪은 후 마침내 더러운 차꼬를 차고 형장으로 끌려왔다. 신앙을 위해 차마 형언하지 못할 고초를 겪고서, 기어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시 문밖으로 빠져나오는데, 모종의 야릇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로마 카타콤바의 어둡고 서늘한 통로를 빠져나올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열망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이 문턱을 넘었던가! 그들은 목에 큰 칼을 씌워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였다.
(⋯) 내를 따라 몇백m 더 내려가면 좁은 평지에 성긴 숲이 나타난다. 이곳이 형장이다. 순교자들의 피가 도적들의 피와 섞여 마른 모래를 적셨다. 냇물이 넘치면 피에 젖은 모래가 나무 밑까지 쓸려 왔다. 목 잘린 시신들이 묻히지도 못하고 뒹굴었다. 장마에 냇물이 불으면 시신들은 물살에 떠밀려 모래톱에 파묻히거나 인근 백마강까지 떠내려갔다. 숱한 시신이 가까운 언덕에 매장되어 무덤이 온 언덕을 뒤덮었다. 순교자의 무덤과 범죄자의 무덤이 한데 섞여 구별되지 않았다. 무덤가에 수줍게 핀 푸른 제비꽃이 숨은 영웅들의 고귀한 정신을 상기시켜 주려는 듯 달콤한 향기를 뿜는다. 향은 우리 알프스의 제비꽃과 비슷했다. 여기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소리 없는 인사를 알아들었다. 이 제비꽃을 집으로 가져가 여기 잠든 성인 성녀와 죄 없는 아이들의 굳은 신앙을 기억하려 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34~336쪽)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루블레 신부와 아이들’, 1911년 4월 23일,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공주 공산성에서 바라본 강’, 1911년 4월 23일,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공주성당 주일 미사 봉헌 후 공산성에 올라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4월 22~25일 공주를 여행했다. 그와 일행은 기차를 타고 조치원에 내린 후 남서쪽으로 이어진 신작로를 이용해 공주에 도착했다. “길은 낮게 물결치는 구릉 사이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자잔한 산들이 다가왔다. 그 뒤로 육중한 산맥이 길게 버티고 있었다. (⋯) 길이 굽이쳐 산을 감고 올랐다. 모퉁이를 돌아 굽어보니 돌연 강물이었다. 강 저편이 바로 공주로구나. 길이 암벽을 운치 있게 파고 들었고, 길 왼쪽의 강물은 떨어질 듯 아득했다. (⋯) 공주는 이 뾰족바위 뒤편 넓은 분지에 있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12~314쪽)<사진 2>
베버 총아빠스는 제일 먼저 공주성당(현 공주중동성당)을 방문했다. 1909년 이곳에 부임한 앙리 루블레 신부가 한 시간 전부터 마을 어귀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공주성당은 마을 어귀 가장 예쁜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성당에 모여 베버 총아빠스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남녀 교우들이 차례로 반갑게 인사했다. 본당 어린아이들은 루블레 신부를 보자 성당 마당으로 뛰어나와 장난을 쳤다.<사진 3>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공주본당 신자들과 함께 주일 미사를 봉헌했다. 교우들은 주일 오후이지만 농번기여서 모두 농사를 지으려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서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산성’에 올랐다.<사진 4>
“산은 백마강을 따라 일어난 산맥에서 벗어나 고을과 강 사이에 끼여 있었다. 이곳에 산성을 쌓았다. 고을이 위기에 처할 때 산성은 강력한 보호막을 제공한다. (⋯) 산길은 퇴락한 성문을 통해 산성으로 이어졌다. 꼭대기에 성루가 보였고 그 바로 옆으로 허물어져 가는 성벽이 지나갔다. 갈라진 골짜기 사이는 깊은 절벽이었다. (⋯) 성벽 따라 ‘길 없는 길’을 기어올랐다. 성벽에서 떨어진 돌들이 가파른 비탈에 구르고 있었다. 성벽 틈새로 먼 능선의 보랏빛 물결을 보았다. 지는 해의 그윽한 광채를 받아 석양의 깊은 그림자가 능선을 붉게 물들였다. 이 놀랍도록 신비스런 그림 속에 우리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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