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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 창가에서] 그냥 사는 것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1월의 문턱이다. 교회는 이달의 전례력을 통해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죽음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사실, 죽음은 산 이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요즘같이 돈만 있으면 살기 좋은(?) 세상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위령 성월을 통해 죽음을 덮어둔 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슬며시 두드려 보는 게 아닌가 싶다. 교회가 마련한 삶의 지혜요 넛지(nudge, 어떤 일을 강요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더 좋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방법 - 편집자 주)라고나 할까?
마치 한 가족처럼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고유한 색채를 드러내던 잎사귀들도 결국 한 줌의 재로 사라지듯 우리도 죽음 앞에서 그렇게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상념 뒤에는 왠지 “그래, 사는 게 뭐 별건가, 죽으면 우리도 결국 그렇게 사라지고 마는 것을….”이라는 허무주의적 느낌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럼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장례 미사 때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듣는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바오로 사도의 이 고백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닌 이들에게 죽음은 영원한 끝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는 것임을 말해 준다.
우리 수도 공동체에서는 입회 동기 수녀님의 가족 특히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마치 한 가족처럼 장례 일정에 함께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 각자의 시간을 조정해서 그분의 장례 미사에 참석하곤 한다. 이렇게 돌아가신 분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노라면 마치 내 부모나 형제가 돌아가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장례 미사에 참여한 모든 수녀님은 영성체 후 묵상으로 복음 성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함께 부르곤 한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 주셨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새 희망 주심을 믿사옵니다
그 미사에 참석한 유가족들은 수녀님들의 합창에서 깊은 위로를 받았다는 말씀을 건네곤 한다. 아마 우리의 마음이 그분들께 전해지고 또 사랑의 영이 우리 모두를 감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신앙을 지닌 우리는 앞의 노래 가사처럼 “이 세상 사는 길이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신앙 안에서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에로 건너가리라는 희망을 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삶을 마무리하면서 드리는 감사
우리 수도회의 미국 관구 수녀님들은 평균 연령이 80세가 넘어 해마다 여러 분이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다. 총원에서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전자 우편을 각 회원에게 보낸다. 그 전자 우편에는 돌아가신 수녀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도 함께 적혀 있다. 여기 몇 수녀님들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남기신 말씀을 소개한다.
“수도 성소라는 선물과 하느님 백성을 섬기도록 많은 기회를 제게 주신 데에 감사드립니다”(노라 마리 디긴 수녀님, 향년 89세).
“우리 공동체 안에서 저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제가 살아온 모든 순간이 참 좋았습니다”(메리 리처드 릭스너 수녀님, 향년 88세)
“저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사도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사랑의 현존을 표현하는 데 제가 받은 선물과 재능을 나누도록 재촉받았습니다”(실라 마리 쿠퍼 수녀님, 향년 87세).
이렇듯 많은 수녀님께서 함께 살아온 이들과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남기신다. 삶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죽음을 기억하라
일생 동안 죽음에 대해 사색을 많이 한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죽음이 생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그리고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은 선이 죽음을 끝낸다.”고 했다. 곧 우리 안에 내재된 선이 죽음을 끝낸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불어 넣으신 선하심을 살 때 비로소 죽음을 넘어 서게 된다는 의미겠다.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한 농부를 통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한 가지 단초를 알려 준다. 그건 놀랍게도 아주 단순하다. “그냥 사는 것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알아들으려고 그 말을 한 농부의 삶을 그려 본다. 농부는 때가 되면 씨를 뿌리고, 때가 되면 일하고 추수할 때가 되면 거두어들인다. 이렇듯 농부는 각각의 때에 맞추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간다. 농부가 말한 ‘그냥 산다.’는 건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것이며 그게 선하게 사는 길이리라. 그러나 그냥 사는 것 뒤에 붙은 선하게 사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선하게 사는 것과 관련하여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양파 한 뿌리’라는 우화가 떠오른다. 톨스토이가 말한 것과 연관 지어 보면, ‘양파 한 뿌리’를 거지에게 건넨 보잘 것 없는 선행이 평생 어떤 선행도 한 적이 없던 할머니의 사후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삶의 한 과정임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건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리라. 이렇듯 죽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게 되지 않겠는가!
죽음은 사랑하는 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분명 크나큰 상실이다. 그러나 그건 믿는 이들에겐 죽음의 일면일 뿐이다. 신앙은 우리에게 죽음의 또 다른 면이 있음을 말해 준다. 바로 죽음이 ‘선물’이라는 점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 남긴 사랑은 그와 관계 맺었던 모든 이 안에서 또 다른 사랑의 열매로 남는다. 그 사랑의 선물이 죽음을 기억하는 이 순간 나에게 감사함으로 다가온다.
내 주변에서 돌아가신 분들과 그분들이 남기신 사랑을 떠올려 본다. 그 사랑의 선물이 오늘 나에게서 너에게로 전해지기를 희망하며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바친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은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수녀원 창가에서] 화가 풀려야 인생이 풀린다
분노의 감정은 생각 기차를 타고
큰 수도원에서 청소 봉사를 해 주시던 자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수녀님들은 기도만 하며 조용히 사시는 줄 알았는데 무슨 일들이 그렇게 많으신지 정말 바삐들 사세요.”
수도 생활을 바라볼 때 마치 유토피아나 천국의 삶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제로 활동 수도자들은 사도직 안에서 많은 이를 만나며 바삐 살아간다. 그렇게 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다 보니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다.
거기가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 뭐 그리 다름이 있으랴. 수도원도 세상 사람들이 겪는 것과 비슷하게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그 가운데 분노는 인간관계를 껄끄럽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수도 생활 20년, 30년이 지나도 사람의 성향은 그리 바뀌지 않음을 함께 살아가면서 알게 된다. 이렇듯 각자의 성격이나 기질은 변하지 않지만 수도 생활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기회를 자주 갖다 보니 자신의 약함을 조금은 빨리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전에 한 수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누군가와 의견 충돌이 일어난 뒤 빨리 화해하지 않으면 관계 회복은 그만큼 더디고 어려워져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화해하세요.” 그렇다. 인간관계에 금이 간 것을 방치한 채 지내면 결국 그 상대와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생각해 보면 생각 차이로 서로 얼굴을 붉힌 상황은 이미 지나 버린 과거의 일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지나간 것에 마음을 두고 지난날의 그림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화가 났던 지난날의 일을 곱씹으면서 자기 연민에 빠져 살아가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생각이 들어도 종래 화가 났던 상황과 유사한 일에 부딪히면 또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게 우리들이다.
우리가 분노의 문제에서 걸려 넘어지는 건 언제 분노가 일어났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화의 메커니즘이 내 안에서 너무 빨리 일어난다는 데 있다. 우리는 화를 낸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화낸 사실을 인지한다.
처음 올라온 분노의 감정은 생각 기차를 타고 계속 달려가면서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 버린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화해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될 수 있으면 빨리 화해해야 하는 이유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틱낫한 스님이 방한하셨을 때 다음과 같은 화해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먼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이다. 이때 “너 때문이야.”라고 말해선 안 되고, 그저 자신이 지금 고통스럽다는 것을 표현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솔직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 화해에 매우 중요하다.
그다음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돌보려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알리기’이다. 분노는 아이와 같아 돌봄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는 게 화를 돌보는 것인가?
그 방법 가운데 하나로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명상을 들 수 있다. 이 명상은 화가 난 다음에도 실제로 도움이 되지만 화가 났을 때에도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분노 에너지를 크게 노출시키지 않을 수 있다. 화가 났을 때 가급적 빨리 화나게 한 장소를 떠나면 일단 분노가 증폭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자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면 하나부터 열까지 세는 것도 도움이 된다.
격렬한 분노의 감정은 폭풍과 같아서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이 폭풍과도 같은 감정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면 깨어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분노는 영원히 지속되는 게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분노는 지나가는 것이고 감정일 뿐이다. 감정은 나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감정 이상의 존재다.
호흡 명상을 한 뒤 상대와 이야기할 때 대화의 주어를 ‘너’가 아닌 ‘나’로 시작하라. ‘너’로 시작하는 대부분의 말은 핀잔을 주거나 트집을 잡기 마련이다. 그 반면, ‘나’로 시작하는 말은 나의 느낌이나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하도록 도와준다.
곧 “당신 때문에 내가 화가 났어요.”가 아니라 “나는 지금 당신이 한 말로 힘들어 하고 있어요. 그러니 저를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 상태와 그 감정을 돌보려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알리고 난 뒤 상대에게 도움을 청하라. 그것이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이다.
사랑의 완성은 용서로
몇 년 전 서강대에서 ‘수양과 명상’ 과목을 가르칠 때의 일이다. 그 과목은 불교 명상과 그리스도교의 기도 방법을 소개하고 함께 명상 실습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해 종교학과 석사 과정의 목사님 한 분이 내 과목을 청강하셨다. 열심히 명상하시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각자가 한 명상에 대해 나누는 시간, 목사님은 이렇게 나누셨다. “오늘 저는 내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아이는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먼저 화해해야 할 대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신 것이다. 자신 안에 고통받고 상처받은 아이가 있지만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자기 안에 상처받은 아이를 발견했다는 목사님의 말씀은 “분노는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와 같다.”고 하신 틱낫한 스님의 말씀을 떠오르게 했다.
우는 아이를 달랠 유일한 방법은 아이를 안아 주고 보듬어 주는 일이 아닐까. 어머니와 같은 자애의 에너지로 자신을 다독거려 줄 때 비로소 우리는 분노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분노는 결국 미움과 증오를 키우기 마련이다. 미움을 택할지 용서를 택할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미움을 택할 때 나는 평화를 잃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용서는 너를 위하기 전에 나 자신을 위한 일이다. 용서하거나 용서를 청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화가 풀려야 인생이 풀린다.” 그렇다! 내 안에 화가 쌓였다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종전의 일로 왜곡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멈출 수 있는 길은 용서가 아닐까. 예수님께서 용서를 그토록 강조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정호승 시인은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려면 반드시 용서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내가 먼저 상대를 용서해야만 ‘분노의 기억’이 ‘화해의 기대’로 바뀔 수 있다.
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남북 간 냉전 체제가 북미 회담을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상대를 향한 분노와 적대의 감정을 내려놓고 화해와 대화의 물꼬를 텄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씀대로 우리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주변부터 화해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리라. 분노를 내려놓고 화해하며 용서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죽는 날까지 애써야 할 영성의 정점이 아닐까.
[수녀원 창가에서] 오직 하나 주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가톨릭 성가」 416; 시편 27,4 참조).
봉쇄 수녀원에 입회한 지도 14년이 되었다. 20대 청춘을 봉쇄 안에 심고 내 나이는 벌써 활짝 꽃핀 30대 중반이다. 입회했을 때 나는 마치 천국에 와 있는 듯했다. 예수님과 성모님, 성인 성녀, 천사들과 함께 있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수녀들이 천상의 음률로 날마다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기도가 얼마나 내 마음을 충만하게 해 주었는지! 20년 동안 세상에 살면서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그 어떤 목마름과 공허감이 드디어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내 인생의 새로운 길
초등학교 때부터 봉쇄 수녀회의 수녀가 되고 싶은 꿈을 갖고 있던 나는 세상을 떠나 모든 것을 버리고 봉쇄 안에서 침묵 가운데 기도하며 고독의 삶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모습 등을 그리곤 하였다.
봉쇄 수녀원에 가 본 적도 없었고, 부모님과 친척들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굉장히 힘든 삶이라는 얘기만 들었다. 무심코 “나는 봉쇄 수녀가 될 거야.” 하고 던진 한마디 말이 불씨가 되었다.
그 뒤 수녀원 소개에 관한 책들을 통해 봉쇄 수녀원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성소에 관한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도미니코 수도회를 통해 우리 수녀원을 알게 되었다. 수녀들의 삶을 짧게 소개했는데 그 중에 ‘한밤중에 바치는 독서 기도’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의아하면서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1년 정도 충실히 수녀원을 방문했다. 시작은 하지만 끈기와 인내심이 부족하여 끝내지 못하는 습성이 있는 나를 볼 때,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셨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내 능력 밖의 일인 것 같았고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곳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수녀님들의 친절한 환대에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첫 방문 때 내 계획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내 계획이란 먼저 4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해서 부모님을 조금 도와 드리고 입회하겠다는 것이었다. 수녀원에서는 내 입회를 두고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다만 내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입회를 결정했을 뿐이다.
어느 날 아침 전철을 타고 직장에 가는 길이었다. 내려야 할 역에 열차가 도착했는데도 나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을 차려 보니 문이 막 닫히고 전동차가 출발하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말했다. “성모님, 이 문을 열어 주시면, 저 수녀원에 빨리 입회할게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전철이 그 순간 기적처럼 멈추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성모님의 분명한 응답이고 표징이었다. 나는 잽싸게 뛰어내렸고 문이 닫히자 전철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살아 있는 표징을 가슴에 품고, 내 인생의 새로운 길을 향해 나도 단호하게 방향을 바꾸었다. 나이가 어리고, 인내심이 부족하여 안 된다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몰래 집을 나와 입회하였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고 평범한 일이나 사건과 상황,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매 순간 다가오시며 말씀하신다. 다만 우리 마음의 눈과 귀가 닫혀서 보거나 듣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안경을 통해 바로 내 옆에, 내 앞에 나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분께서 채워 주시니
어릴 때 나는 음악을 좋아했다. 오랫동안 피아노를 배운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본당 어린이 성가대에 들어가고 싶어 지원을 했다. 시험 당일 성가대 선생님과 언니들이 심사 위원으로 지켜보는 앞에서 막상 혼자 노래를 부르려니 너무나 긴장되었다. 결국, 시험에 떨어져 성가대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 뒤로는 사람들 앞에서 혼자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날마다 밤낮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다 보니 자연스레 치유된 것 같다. 도미니코회 천주의 모친 봉쇄 수도원의 수녀로서 날마다 하느님께 찬미드리는 삶은 나에게 너무나 큰 행복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밤중의 독서 기도와 새벽 5시의 기상이 두려웠다. 노래하는 것도 힘들고, 피아노를 배웠지만 전례 반주를 한다는 것도 그 자체로 너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어려움을 기쁨과 희망으로 충만히 채워 주셨다. 인간적인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를 불러 주신 그분께서 그때그때 필요한 은총을 주심을 새록새록 실감하고 있다.
밤마다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해
교회는 하루를 여러 시간으로 나누어 정해진 시간에 바치는 시간전례(성무 일도)를 사제와 관상 수녀들에게 맡겼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봉쇄 수녀들의 첫째 사도직은 바로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희생 제사이다.
우리 수녀원에서는 시간 전례를 모두 노래로 바친다. 미사는 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자 그레고리오 성가와 더불어, 신자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한국어 성가를 번갈아 바친다. 특별히 한밤중에 바치는 독서 기도는 매력적인 힘이 있다.
입회한 지 14년이 되었으니 이제 힘들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때때로 졸음과 싸우기도 하고 종소리를 못 들어 푹 잘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책임감과 사명감을 많이 느끼게 해 주는 순간이다. 그 시간에 온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그분과 함께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부 도미니코 성인은 열성을 다해 시간 전례를 바치고 밤 기도와 밤샘 기도도 항구하게 하셨던 분이시다. 우리 수녀들은 “주님, 죄인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며 부르짖던 사부님의 소리를 늘 기억하며 밤마다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한다. 나아가 고통받고 방황하는 세상의 모든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과 책임감을 느낀다.
한밤의 기도가 끝나고 각자의 수방(수도자들의 독방)으로 돌아가며 각 수녀는 세계 평화를 위해 묵주 기도 1단씩을 고리 기도로 바친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희생 제사를 드리며 영혼의 구원을 위해 몸 바친 ‘도미니칸’으로서 산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고 감사하기만 하다.
스물두 명의 우리 수녀들의 목소리는 개성이 강하다. 노래를 잘 부르는 수녀도 있고 못 부르는 수녀도 있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나 가냘픈 목소리 등 다양하지만 한목소리로 일치되어 아름다운 찬미의 노래로 울리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한마음으로 그분을 관상하며, 한목소리로 그분을 찬양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같은 빵을 나누며 마침내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삶을 함께 나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형제들이 오손도손 한데 모여 사는 것!
[수녀원 창가에서] 하느님께서 다 마련해 주실 거예요
봉쇄 수도원은 온통 산이 에워싸고 있다. 옆으로는 ‘울고 넘는’ 박달재 고개가 있고, 앞산에는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이 평안히 잠들어 계신다. 신부님은 지금도 여전히 ‘저 양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염려하시며 침묵 속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고 계심을 느낀다.
수도원이 이 아름다운 배론 성지에 자리 잡은 지 올해로 스물여덟 해가 된다. 또한 올해는 수도원 축복 25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하다.
이 뜻깊은 해를 맞이하여 수도원이 한국에 진출하던 역사적인 날들을 벗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미지의 세계로 순례의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처럼, 오직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며 믿음의 땅 스페인에서 약속의 땅 한국 배론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믿음의 여정을 말이다.
한국 땅에 뿌리내리기까지
이야기는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녀회의 한국 진출을 위해 한국에 오신 독일인 레지날드 신부님의 도움으로 첫 성소자들이 타이완에 있는 성 도미니코 천주의 모친 수도원에 입회한다. 이들은 얼마 뒤 스페인 모원으로 옮겨 양성을 이어 간다. 수녀회는 한국인 성소자들이 계속 들어오는 것을 한국 땅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뜻으로 여겼다.
이처럼 한국 진출을 꿈꾸던 중에 당시 원주교구장이신 지학순 주교님은 원주교구로 우리 수녀회를 초대하시고 배론성지 내에 1만 평의 땅을 기증해 주셨다. 그렇지만 교구나 수도원이나 가난하여 건축 자금을 마련하기란 묘연한 일이었다.
1990년 11월 29일, 여섯 명의 수녀가(스페인 수녀 2명과 대만 수녀 1명, 한국인 수녀 3명)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온전히 의탁하며 한국 땅을 밟았다. 도착하던 그날은 김지석 주교님이 원주교구 부교구장으로 임명되신 날이기도 하다. 김 주교님은 주교로 서품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최기식 신부님과 함께 임시 수도원을 찾아 오셨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교님의 방문은 큰 힘이 되었고, 이때부터 주교님은 우리들과 함께 긴긴 순례의 여정을 함께하고 계신다.
이렇게 여섯 수녀의 한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30평의 작은 임시 수도원이었지만 당시 배론성지의 소장이셨던 배은하 신부님의 배려와 보살핌 덕분에 정상적인 수도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루에 일곱 번씩, 하느님께 올리는 찬미 기도가 배론 하늘에 울려 퍼졌고, 밤 기도도 빠지지 않았다. 배론 산골짜기의 아름다움과 고요함은 관상 생활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였다.
작고 소박한 정성이 모여
미사 참례는 성지 경당으로 갔다. 스페인 수녀님들은 신발을 벗고 온돌방에 쪼그리고 앉아 드리는 미사가 낯설고 신기했을 것이다. 주일 미사는 공소 신자들과 살레시오의 집 장애인 식구들과 함께 드렸다. 그야말로 형제들이 오손도손 함께 모여 사는 사랑의 잔치다.
살레시오의 집 원장 프란치스코 형제님은 만날 때마다 “Sister, How are you? 필요한 것 없어요?” 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시며 수녀들을 챙기신다.
당시 배론성지에 계시던 성모영보회 수녀님들과도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수녀님들이 나누어 주시는 음식 덕분에 우리는 장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수녀님들이 부르시면 다 같이 내려가는 발걸음이 즐겁고 가벼웠다. 마음씨 고운 수녀님들은 이것저것 다 내어주셨다. 이렇듯 많은 분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한국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제 수도원 건립이라는 커다란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었다.
건축비를 절감하려고 큰 건설 업체 대신 배 신부님이 소개해 주신 원주의 작은 건설 회사에 공사를 맡기기로 하였다. “공사비는 어떻게 갚을 것인가요?” 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하느님께서 다 마련해 주실 거예요!” 이 천진난만한 대답에 배 신부님은 답답하셨는지 그저 한숨만 푹 내쉬셨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께서 다 해 주셨다. 서울의 본당을 찾아다니며 모금을 시작하자, 신자들의 정성 어린 사랑의 봉헌금이 모였고, 그 돈으로 수도원 건물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한 수녀님의 출신 본당 모금함 바구니에서는 금반지까지 나와서 우리의 마음을 울렸다.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마음이 찡하다.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우리의 은인이자 친구로 우정을 다지는 분도 많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분들도 기억하며 늘 기도한다. 이렇게 작고 소박한 이들의 수많은 정성이 모여 한국 땅에 우리 수녀원이 지어졌다.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목자와 은인들이 계시다. 병석에 계시면서도 기꺼이 교구로 초대해 주신 지 다니엘 주교님과 원주교구 사제들, 모금할 수 있게 문을 열어 준 서울대교구, 수녀회를 아껴 주시는 많은 벗과 은인. 수도원 성전에서 기도와 찬미를 드릴 수 있도록 봉헌해 주신 그분들의 사랑과 희생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삶의 경이로움을 노래한 에티 힐레즘은 나치의 포로 수용소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으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고백한다.
“주님, 이 삶을 주셨음에 감사드리나이다. 한밤중 제가 침대에 누워 당신 안에 쉴 때 감사의 눈물이 제 얼굴 위로 흘러내립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입니다”( 「회고록」).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승리자이신 예수님! 부활을 축하합니다. 알렐루야!
[수녀원 창가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잠들어 있던 맛의 기억
문득 지금 자신이 경험한 것이 아주 오래전에도 겪어 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 여긴 내가 언젠가 한번 와 본 적이 있어!’ ‘저 사람은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아.’ ‘아, 이 맛은 전에 먹어본 맛 같은데?’ 이런 기억은 대개 의지적이라기보다 비의지적인 기억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러한 비의지적인 기억을 다룬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마들렌 과자’ 이야기가 바로 그 예이다. 어느 추운 날 주인공은 뜨거운 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 입에 넣는다.
그 순간 언젠가 그것과 똑같은 맛을 경험한 적이 있었음을 직감한다. 차에 적신 과자의 그 맛이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맛의 기억을 일깨운 것이다.
그는 그 맛이 콩브레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낼 때 레오니 고모의 방에서 맛보던 그 차와 과자의 맛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되살아난 그 기억으로 그와 관련한 지난날의 삶이 송두리째 복원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이다!
이렇듯 기억은 어느 날 불쑥 우리 앞에 고개를 내민다. 프루스트가 경험한 과자의 맛처럼 말이다. 그 미각의 체험을 통해 유년기의 기억을 되찾은 프루스트처럼 지난날의 경험은 그저 지나간 게 아니라 현재가 되어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소금기 어린 바다 냄새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어느 장소에 갔을 때 문득 떠오르는 기억 말이다.
내게는 ‘소금기 어린 바다 냄새’가 그런 기억 가운데 하나다. 나는 비릿한 바다 냄새를 맡으면 어릴 때의 기억이 되살아 나곤 한다.
강릉이 고향인 나는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에 즐겨 가곤 했다. 동해에 가까이 다가가면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코끝에 느껴졌다. 그 비릿한 내음을 맡으며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저 너머를 바라보노라면 무언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나를 압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평선 저 너머까지 광활하고 넓은 바다는 내게 하느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게 해 준 것 같다.
그러고 난 뒤 삶에서 경험한 크고 작은 시련과 고통이 씨줄 날줄로 엮였다. 바다와 같은 그분 안에서 파도를 타며 넘어가기도 했고, 때론 그 속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했다. 그러한 삶의 경험은 하느님을 중심축으로 해석되었고 나는 조금씩 그분의 사랑에 맛을 들였다.
누군가가 한 말이 기억난다. “사랑한다는 것은 미래에 올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오래 발효한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마음속에 오래 발효된 것들, 그건 바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고통과 아픔, 절망과 슬픔과 같은 삶의 여러 굴곡 속에서 서서히 발효가 이루어진 것일 게다.
우리가 겪는 역경을 누룩처럼 발효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다름 아닌 ‘사랑’이 아닐까? 부딪히면서 깨지고 부서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시간’을 발효시키는 것은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돌이켜 보건대 내게 그 누룩의 역할을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사랑’이다. 나는 그 사랑을 통해 내 삶에 굽이굽이 굴곡진 세월을 건너올 수 있었다. 그리고 삶의 명암을 넘어 영원을 향해 시선을 두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누룩’이 내 삶에 드리운 어두움과 고통을 발효시켜 주었기 때문이리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는 건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게 된 동기를 천식의 고통 속에서 죽음과 싸우는 벼랑 끝에서 구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지병은 그에게 구원의 실마리가 되어 주고 자신의 내면 세계를 더 깊이 바라보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작가로서의 자기 소명을 발견하고 그 부름에 응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결국 자신의 예술 활동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이다.
그렇다! 우리네 삶에 드리운 고통은 우리를 구원에로 안내하는 하나의 방향키가 된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죽은 뒤에도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고 고백하듯이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그 모든 순간이 영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시간이 영원을 품고 있음을 깨닫는 데에는 우리 자신을 믿어 주고 사랑해 주는 체험이 필요하다. 우리를 믿고 신뢰하며 기다려 주는 이가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살면서 겪는 모든 것을 그 사랑의 힘으로 발효시킬 수 있으리라.
현대인의 삶이 갈수록 더 팍팍해져 간다. 그렇다는 것은 이를 적셔 줄 ‘물’이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주변을 돌아본다. 많은 이가 지쳐 있고 힘들게 살아간다. 나도 힘든데 너에게 무엇을 건네주랴!
하지만, 없는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손을 건네면 놀랍게도 어느새 내 삶이 촉촉해지는 것을 느낀다. 건네는 행위 그 자체가 우리를 촉촉이 적셔 준다는 것을 삶에서 배운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는 건 잃어버린 사랑의 물꼬를 다시 튼다는 의미겠다. 서로를 향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잃어버린 우리의 시간을 되찾게 해 주기에 충분한 까닭이다.
부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생명까지 건네신 그분의 사랑을 다시금 기억한다. 성체 거양 때 사제는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고 선포한다. 우리는 그 순간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고 되새긴다.
오월의 신록이 눈부시다! 저 하나하나의 잎들도 겨울의 한파를 견디어 내고 모진 비바람을 뚫고 세상에 나오기까지 수많은 관계망 속에서 사랑의 누룩이 필요했으리라.
지금 우리에게 눈부신 신록의 잎들도 언젠가는 시들어 말라버리겠지.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하나의 잎이 영원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안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랑을 품고 있고 그 사랑은 영원을 이어주는 그 무엇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