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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시편 23: 3
다윗은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며 주님께 감사할 것들이 여럿 있을 것입니다. 그 중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3절의 말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이 다윗의 주요한 감사제목이 될 것입니다. ‘내 영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입니다.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소생시켰다는 것은 ‘다시 돌아오게 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다’는 것은 ‘내 생명으로 다시 돌아오게 했다’ 곧 ‘나를 살려주셨다’는 뜻입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
목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양의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양은 늑대나 사나운 짐승의 먹잇감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고, 위험에 빠졌으면 거기서 구원해 내는 것이 목자의 일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동 시절의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습니다”(삼상17:34-35) 이와 마찬가지로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능력 있는 목자이신 하나님은 그 입에서 다윗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자나 곰처럼 사나운 사울 왕의 입에서, 블레셋 군대의 입에서, 사람들의 음모의 입에서 다윗을 구원해 내셨던 것입니다.
양은 사나운 짐승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목한 구덩이나 바위틈이 그러한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양은 드러누우면 스스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냥 허공에 네 발만 버둥거릴 뿐 뒤집지를 못합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순간입니다. 양과 같은 초식동물은 위에서 활발한 발효작용을 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가스가 차서 죽기도 합니다. 목자는 그래서 양들의 동태를 예민하게 살펴야 합니다. 위험하면 바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이처럼 구덩이에 빠졌던 위기의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구원해주시는 놀라운 경험을 했는데 시편 40편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40:2) 기가 막힐 웅덩이란 어떤 웅덩이를 말합니까?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무시무시한 웅덩이’(킹제임스), ‘절망의 웅덩이’(RSV), ‘끈적끈적한 웅덩이’(NIV)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는 웅덩이를 말합니다. 보통 중동 지방의 물웅덩이는 옹기 형태처럼 안이 깊고 입구 쪽이 좁도록 팝니다. 우기 때 물을 받아두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웅덩이에 빠지면 밖으로 나오기도 어렵고, 그 바닥은 진흙 뻘투성이입니다. 아마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빠뜨렸던 웅덩이가 바로 이런 기가 막힐 웅덩이였을 것입니다. 그때 요셉은 형제들을 향하여 ‘애걸하고 괴로움을 호소하였지만’(창42:21) 형제들은 몰인정하였고 오히려 죽이려하였습니다. 더 이상 헤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하나님은 그 웅덩이에서 요셉을 끌어내셨습니다. 그 웅덩이에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웅덩이가 애굽으로 향하는 그래서 총리 대신의 자리에 이르는 터널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 깊은 웅덩이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취하여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에 빠졌더라”(렘38:6) 하나님은 깊은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를 건지시고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동일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귀신들린 자가 따라다니며 귀찮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 귀신을 이용해서 점을 치던 사람이 자기 이익의 수단이 끊어지자 바울 일행을 모함하였습니다. 빌립보 관원들은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등에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중죄인도 아닌데 발에는 착고를 채웠습니다. 잘못도 없이 끌려 왔기에 화도 날 법도 하고, 절망도 할 법도 한데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렸습니다. 이를 계기로 간수가 믿음을 갖게 되었고 바울과 실라 일행은 풀려났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바울이 깨달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사방은 막혔어도 하늘을 열렸습니다. 찬송할 때 감옥 문이 열립니다.
영적 침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는 말씀은 우리 목숨을 살려주신다는 뜻도 있지만 영적 침체로,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우리의 영혼에 새 힘을 불어넣으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시편 42편 시인의 탄식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이 시편 시인은 얼마나 불안했던지 42편 5절, 11절, 43편 5절 세 번에 걸쳐 자신의 불안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영적 침체를 겪습니다. 먼저는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죄를 짓고는 살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를 짓거나 실수를 했다는 자격지심이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영적으로 침체 상태에 이르게 합니다. 또 실패를 경험했을 때 우리는 영적 침체를 겪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 소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의도대로 풀려가지 않을 때 우리는 의기소침해집니다.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느껴져 낙담하거나 절망합니다. 심하면 우울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무기력증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성공하거나 승리했을 때도 영적 침체가 따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상에 오른 이후의 허탈감이나 목표상실이 주요 원인입니다.
신앙의 위인들 또한 이런 영적침체를 경험하였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평생 동안 우울증을 안고 살아야 했던 불행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우울증은 매우 심해 언젠가는 “자기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원을 공개적으로 발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친구인 멜랑히톤에게 썼던 편지에서는 “우울증과 육체적 고통으로 일주일이 넘게 죽음과 지옥을 넘나들었다. 절망감의 돌풍과 파도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거의 잃을 뻔하였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불렸던 영국의 스펄젼 목사 또한 주기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연중 한두 달을 어둡고 침침한 런던을 떠나 프랑스 남쪽의 리비에라는 따뜻한 해안도시에서 요양을 하곤 했습니다. 스펄전이 그의 성도에 보낸 한 편지에서는 “나는 완전히 부서진 질그릇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밤을 잠자지 못하며, 낮에도 눈물을 흘리며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이런 고통 가운데서 자기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연약함을 알았기에 동일하게 연약함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설교 가운데에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의 기쁨이 생생이 묻어났던 것입니다.
양이 위기는 양 자신의 무능력도 양의 부주의에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실패는 목자를 놓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나고 실수해도 목자가 그 곁에 있으면 양은 안전합니다. 우리가 영적침체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성공해도 놓치기 쉽고 실패해도 놓치기 쉽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즈는 “모든 영적 침체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침체를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기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존 파이퍼라고 최근 한국 성도들이 좋아하는 신앙적인 글들을 많이 쓰고 있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도 교회를 운영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때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표어를 아예 “하나님을 바라라, Hope in God”으로 벽에 28년 동안이나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답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의 시인은 그 답을 알기에 하나님을 갈망하였습니다. 그 갈망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발로 바닥을 박박 긁으며 물줄기를 찼듯이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약속은 이처럼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을 보여주신다는 사실입니니다. 산상수훈에서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저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저가 배부를 것이기 때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목마른 자는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경험했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여기 개역판 성경의 ‘유쾌하다’는 번역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유쾌하다는 뜻은 영어로는 refresh입니다.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유쾌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 영적 어두움이 사라지고 우리 안에 열정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열정이라는 단어는 enthusiastic입니다. 그 의미는 그 안에 신을 모시고 있다(en + theos)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살아날 때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열정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영적 침체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42편의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가만히 있는데 내 영혼에서 낙망과 불안이 올라옵니다. 내 깊은 무의식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어두운 내 자아의 소리들입니다. 우리는 이 소리를 듣고 더 깊은 침체에 빠집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와 대화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1분당 영어 단어로 150에서 200개의 단어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 자신과 마음속으로 대화할 때는 1분당 1,300 개 단어의 속도로 말을 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소리도 나를 힘들게 하지만 내 자아의 소리가 나를 더 힘들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짜증 섞인 내 자아의 소리를 들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럴 때 우리 자아에게는 긍정적인 말이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자아에게 말하십시오. 내 자신에게 복음의 설교를 하십시오. “할 수 없어”, “어떻게 해”, “절망이야”, “끝났어.”하는 어두움의 소리 대신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내 자아야, 들어라. 하나님이 너를 위하시면 누가 너를 대적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너를 위해 내어주셨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아들과 함께 네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누가 고소할 것인가? 의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정죄하겠는가?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참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누가 너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롬8:31-35)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고 나면 이상하게 우리에게 새 힘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한다”(시19:7-8) 우리 영혼을 소성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적 침체기에는 하나님 말씀을 많이 묵상하고 쓰고 암송하십시오. 그 하나님 말씀을 내 자아에게 들려주십시오.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의의 길로
양들은 매우 고집스럽습니다. 그래서 양들은 자기들이 갔던 길로만 가고, 먹었던 장소에서만 그 뿌리가 다 드러나도록 먹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는데 그 때가 여름이었습니다. 여름철은 건기라서 풀들이 죽거나 누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산등성이를 보니 마치 줄을 그어놓은 듯 어지러운 선들이 산들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양들이 지나간 곳이라고 합니다. 양들은 앞에 간 양의 뒤를 따라서 고집스럽게 그 길을 가기 때문에 오래 되면 골이 파일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그래서 양들이 푸르고 싱싱한 꼴을 먹을 수 있도록 자주 자리를 옮깁니다. 그래야 초장도 보호되고 양도 좋은 꼴을 먹을 수 있습니다. 비단 이것뿐만 아니라 양들은 자기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절망과 배고픔으로 이끄는 길인지 모르고 무작정 갑니다. 목자는 이런 양들을 제어하며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의 길’입니다. 양들에게 의의 길은 곧 양들이 ‘잘 살고 행복한 길’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 분명한데 의의 길이 바로 내 영혼을 행복하게 하고 결국은 잘되게 하는 길입니다. 이것은 시편 1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의의 길이 살 길이고, 죄의 길, 곧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좇아가는 것은 죽을 길입니다. 신앙인들은 이 가치관을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를 시편 23편은 자기 이름, 곧 하나님 이름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부정직하며 불법을 행하며 사는 것을 못 견디십니다. 자기 이름과 명예가 달린 백성이고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들을 전멸시키고 모세를 통해서 새 백성을 일으키시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을 설득했던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하는 기도였습니다. 세상 민족들이 하나님이 무능력하여 이스라엘을 버렸다 말할까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끝내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신 이유도 자기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고 오랜 후에 그들을 다시 포로로부터 해방시키시려 했던 중요한 이유도 바로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36:22-23)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 된 상태로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무능력하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상태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행동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간구해야 할 바도 모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도 잘 분간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기 명예를 위해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못 견디십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거룩한 존재로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
시편 23: 2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고슴도치 이야기로 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둘째 아이가 고슴도치 한 마리를 사서 기르고 있는데 요 며칠 날씨가 쌀쌀해지자 안달이 났습니다. 고슴도치가 추위를 타면 동면에 들어가고 그래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작은 전기방석을 사서 그 밑에 깔아주는 것으로 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고슴도치가 그동안 추위를 좀 탔던 모양입니다. 바닥이 따뜻해서 그런지 집 밖으로 나와 열선이 흐르는 곳에서 잠을 자는데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배를 바닥에 깔고 사지를 쭉 뻗고 잡니다. 가끔은 허리를 지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자기도 합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저 게 푸른 초장이고 쉴만한 물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늘어지게 잘 수 있는 곳, 그 곳이 양들에게는 푸른 초장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노래하고 있지만 양들은 아무 환경에서나 눕지 않는다고 합니다. 양들이 편안하게 누워 되새김질을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환경이 구비되어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늑대나 자기를 노리는 세력으로 벗어나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양은 얼마나 겁이 많은지 토끼 한 마리가 뛰어들어도 수백 마리가 우르르 달아나고 맙니다. 둘째는 저희들 간에 싸움이 그쳐야 합니다. 양들 간에도 서열 다툼이 치열한데 양들은 서로 머리 들이밀기로 서열을 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목자가 있으면 싸움을 그치고 평화를 찾는다고 합니다. 셋째는 파리나 진드기나 기생충으로 괴로움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로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편히 쉴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배부르게 꼴을 먹지 않으면 또한 드러눕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양이 드러누워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양이 가장 행복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목자는 양들이 이렇게 최대한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 목자라 고백하는 이유는 이처럼 우리를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싱싱한 꼴을 양껏 먹게 하시며, 쉴만한 물가에서 맑고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들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유목민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유는 푸른 초장을 찾아서입니다. 야생의 동물들도 대이동을 하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먹을 곳이 있는 푸른 초장을 찾아서 수천리 길을 이동합니다. 기러기를 비롯한 철새들은 먹을 곳을 찾아 수만리를 날아갑니다. 양들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은 스스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한다는 점입니다. 푸른 초장을 찾기 위해서는 어느 때는 먼 길을 가야하고, 험한 산을 넘기도 해야 합니다. 4절에서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망의 골짜기가 양들의 목적지는 아닙니다. 양들을 일부러 힘들게 하기 위하여 목동이 어둠과 위험이 있는 골짜기로 몰고 가지는 않습니다. 그 골짜기를 통과해야 푸른 초장이 있는 언덕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주님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손해 보고 힘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목자로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또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려 오셨습니다. 이런 우리 주님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깐 힘들고 막막해 보여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한 후에 우리는 푸르고 싱싱한 꼴이 있는 곳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거나, 주님을 떠나 자기 길을 가다가는 더 깊은 수렁과 골짜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부요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삼서 2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은 장로 요한이 성도 가이오에게 하는 축복의 기도이지만 이는 또한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하시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건강하고 부요하고 모든 일이 잘되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처럼 물질적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 받은 자의 모습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묘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3) 이 또한 물질적인 축복이요, 현세적인 축복입니다.
배가 고프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쓸 것을 채우시되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일이 안 되고 열매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열매가 백배가 될 것을 원하십니다. 사람은 지위가 오르고 이름이 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신1:11) 작은 이라도 한 족속의 조상이 되고, 약한 이가 강한 나라를 이루도록 도우십니다. 건강하고 장수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잘 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시편 128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가정의 축복을 보십시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시128:2-6)
배가 부르고 평안해야 양들이 푸른 초장에서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듯이 인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갖고 또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이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 또한 우리들이 이처럼 행복하기를 원하시며 또 그렇게 되도록 복을 주십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들에게도 차고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보이는 물질적인 축복이 축복의 전부가 아니라 말씀합니다. 마음의 축복 또한 중요합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은 대단한 창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푸른 초장도 어느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만들어버립니다. 마음이 감사로 차고 넘치면 그 어느 곳도 푸른 초장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 말씀에서 주님이 마음의 행복에 대해서 강조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평화이며 푸른 초장은 마음이 자족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고대 철학자들 중에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습니다. 이들은 쾌락주의자들로 알려졌습니다. 쾌락주의자들이니까 이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육체적인 방탕을 추구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금욕을 더 중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만족이 오히려 진정한 쾌락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맛이 있다고 하여 마구 먹다가는 밤새도록 배앓이를 해야 하거나 결국에는 비만으로 인해 여러 질병을 앓아야 합니다. 오히려 적당한 때 절제하는 것이 더 큰 쾌락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취한 사람은 빼앗길 것을 염려해야 하고 또 빼앗긴 후에는 그 상실의 고통이 더 큽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 학파는 적게 소유하고 그것에 만족하는 것이 오히려 쾌락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이 자족의 삶을 역설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사도 바울은 비천에도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비천하고 가난해져도 비굴하지 않았고 그것에 때문에 낙망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풍부하게 되어도 교만해지거나 물질의 노예가 되거나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자족했기 때문이라 고백합니다. 스스로 족한 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상한 것을 추구하다보니 물질과 같은 땅의 것은 더 이상 만족을 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가 나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하면 부한 대로 그것에 만족하고 견딜 수 있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환경이 일시에 푸른 초장으로 바뀝니다. 먹을 것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 안에 감사가 있으면 푸른 초장입니다. 사람들이 산해진미에 만족하는 것은 잠깐입니다. 그것에 익숙해지면 또 다른 값진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 사람들은 언제든 산해진미입니다. 현대인들은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며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그들에겐 물질적으로 이미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단지 감사의 눈이 닫혔기 때문에 자기 눈앞에 펼쳐진 푸른 초장을 보지 못합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탐 존스(Tom Jones)의 ‘Green Green Grass of Home’이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조영남 씨가 ‘고향의 푸른 잔디’라고 번역하여 노래 불러서 더 유명하게 된 노래입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내가 기차에서 내려 바라본 고향은 옛 모습 그대로
그곳에는 부모님께서 마중 나와 계셨다.
저쪽 길 아래는 앵두 입술을 하고 금발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메리도 보였다
고향의 푸른 잔디의 감촉은 감미로웠다.
그 옛날 집은 페인트가 말라붙어 갈라진 채 그대로였고
내가 어릴 때 올라가 놀던 늙은 참나무도 그대로였다.
고향의 푸른 잔디의 감촉은 감미로웠다.”
연속해서 흘러나오는 Green Green Grass of Home이라는 가사는 전원적이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유발시킵니다. 마치 우리 눈앞에 시편 23편의 푸른 초장이 펼쳐진 듯합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노래는 실은 사형수의 노래였습니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3절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순간 잠에서 깨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는 것은 사방을 둘러싼 회색 벽 뿐.
나는 단지 꿈을 꾸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교도관과 슬퍼하는 늙은 신부가 있었다.
팔짱을 끼고 우리는 새벽길을 걸을 것이다.
나는 다시 고향의 푸른 잔디를 만지게 되겠지.”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어서야 돌아갈 수 있는 곳이 고향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찾아 인생의 목자를 버리고 살았던 사람의 결말입니다. 욕망에 매인 사람에게 푸른 초장은 마치 신기루일 뿐입니다. 잡으려고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멀어집니다. 그러나 탐욕을 비우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자리를 잡으면 바로 그 앞에 푸른 초장이 펼쳐집니다.
그런 점에서 산상수훈의 팔복은 우리에게 참다운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부요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지금 웃고 있는 자가 아니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배부른 자가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가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온갖 생각과 계획과 염려로 가득한 자가 아니라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싸우고 승리하는 자들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누리고 있는 자가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 마음속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그곳에서 푸른 초장을 발견한 사람은 편히 누울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형편이 좋아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3:5)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윗은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서도 편히 누워 자고 깰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신다는 굳건한 신뢰가 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쉴만한 물가는 잔잔한 물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쉴만한 물가도 좋은 번역 같습니다. 양의 만족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이 먹는 물은 대부분 아침의 이슬로 충족합니다. 양들은 그래서 새벽에 풀을 뜯습니다. 풀에 달린 신선한 이슬만 먹어도 수분은 충분합니다. 그래도 부족하면 물을 먹습니다. 양들은 매우 겁이 많은 동물인지라 급한 물살에서는 물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야 하고, 물살이 급하면 목자는 바위를 굴리거나 하여 물의 흐름을 완만하게 만든 후 양들이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아무래도 잔잔한 물가 근처에는 신선한 풀도 많을 것입니다. 중동은 비가 적기 때문에 물가 근처에는 반드시 풀이 있습니다. 그러니 잔잔한 물가는 여러모로 부족함이 없고 편안하게 쉬기에 좋은 곳입니다. 싱싱한 풀을 먹고 또 깨끗한 물을 마셨다면 양에게는 더 이상의 만족감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눕고 편히 쉬는 일만 남았습니다. 쉴만한 물가라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을 좋아합니다. 여름철에 아름다운 계곡 근처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편히 쉬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편히 쉬고 있습니까? 자신이 일에 빠진 사람인지 아닌지는 다음 몇 가지 질문에 자신을 비추어보면 됩니다. ① 항상 서두르며 사는가? ② 항상 해야 될 일들이 너무 많은가? ③ 휴가를 내서 밀린 일들을 처리하는가? ④ 좀 쉬면서 일하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한 사람 이상이 있는가? ⑤ 편히 쉴 때에 죄의식을 느끼는가? ⑥ 병들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는가? 이 질문들은 미국 사람의 경우를 대상으로 한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들 중 최장 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지는 매우 오래 되었습니다. OECD 국가 평균보다 1년에 근 두 달 정도 더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잘 쉬고 노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모두가 쉬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먹고살기 위해서, 경쟁사회를 뚫고 가기 위해서, 자식들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잠을 줄이고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일벌레가 되어버렸습니다. 형편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쉴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성경은 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 주는 일곱 날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크고 복된 날로 정한 것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쉬는 날입니다. 일정한 쉬는 날이 없던 고대 사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보다 일주일에 하루씩 쉬는 것을 통해서 쉼의 중요성을 알았던 민족이었습니다. 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십계명중 네 번째 계명으로 안식일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부모공경에 앞서는 계명입니다. 쉬는 것이 게으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내가 쉬더라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쉰만큼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유태인들이 하루를 쉬면서도 다른 민족보다 월등히 잘 살고 또 노벨상도 휩쓸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쉬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편안한 쉼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얼마나 동분서주하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끊임없이 일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닙니다. 무리하면 몸이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노동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즐기라는 데 있습니다. 양이 배가 불러 편히 쉬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목자에게 흐뭇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시 고슴도치 이야기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고슴도치를 볼 때 제일 뿌듯할 때는 밥을 맛있게 먹을 때입니다. 배가 불러서 만족한 표정으로 놀고 있을 때입니다. 주인과 잘 교통하며 반응할 때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쉬고 잘 즐길 때 하나님 또한 부족함이 없어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 1
어느 교회의 주보를 담당하고 있는 인쇄소에서 담임목사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설교 제목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제목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인쇄소 직원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게 다입니까?” 평소 이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길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배달된 주보의 설교제목을 보고 목사님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설교 제목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인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정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호와가 나의 목자 되신다는 사실로 충분합니까?
가을입니다. 가을은 열매의 계절입니다. 탐스럽게 익은 과일들과 노랗게 물들인 황금 들판은 가을이 주는 풍요로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우리 인생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비유되고 중년기는 인생의 가을에 해당합니다. 자연의 가을은 풍요롭지만 반면에 인생의 가을을 맞는 느낌은 쓸쓸함이 더합니다. 인생의 열매가 별로 탐탁치 않은 사람들은 그 실패감 때문에 쓸쓸합니다. 반면에 인생에서 어느 정도 성공의 열매를 거둔 사람들도 허무해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정상에 섰고 이제는 내려가야 한다는 데서 느끼는 허무함입니다. 정상에 섰건만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상실감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정상을 향하여 땀 흘리며 달려오던 여름날이 행복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여름철에는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손에 쥔 열매가 없어서 두렵고 답답해하지 않았습니까? 열매를 손에 쥐어도 부족하고, 손에 없어도 부족한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가 읽은 시편 23편은 아마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성경 말씀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지었습니다. 다윗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지냈고, 늙어서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아들과도 싸워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시의 첫 구절을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며 시작합니다. 그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앞에 있는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목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이 우리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양의 무기는 자기 안에 있지 않다
양은 이렇다 할 무기가 없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뿔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날랜 발이나 날개도 없습니다. 몸집도 좀 커서 민첩하게 숨을 수도 없고, 머리가 좋거나 청각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양은 위기의 순간에도 큰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인해전술일 것입니다. 많은 숫자로 싸운다는 것이 아니라 일부를 먹이로 내어주거나, 한쪽이 공격을 당할 때 다른 쪽은 달아나는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양에게는 다른 동물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의 무기는 자기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습니다. 목자가 바로 그들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목자가 그들을 지키면 늑대가 두렵지 않습니다. 폭풍우나 험한 산길도 두렵지 않습니다. 먹을 것 또한 걱정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알아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밤에 이슬을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목자가 안전한 동굴이나 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마치 양과 같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불과 몇 분 몇 초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모릅니다. 조그만 바이러스나 세균 앞에 무력하게 쓰러지고 맙니다. 사업이나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자신을 보면 마치 양처럼 무력해 보입니다. 문제는 태산처럼 커 보이고 자신은 한없이 초라해 보입니다.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 있으면 자신의 무력감은 더 커 보입니다.
다윗은 오랜 세월 사울의 추적을 피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어느 때는 동굴이나 들판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이웃 나라로 망명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블레셋 지역에 피신해 있기도 하였는데 그곳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침을 흘리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해야 했습니다. 중년에는 성적인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노년에는 믿었던 아들의 반란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윗이 느꼈던 것은 인간의 지혜나 능력이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세력이나 사람이 자기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3:5)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아무리 염려하고 노력한다고 하여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맡기고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 전에 경험했던 일입니다. 비행기는 이착륙을 할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그래서 이착륙시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있습니다. 예전에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릴 때였는데 그날따라 비가 오고 구름이 잔뜩 끼었습니다. 착륙을 시도하는데 창밖에는 구름인지 안개인지 끼어서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도 약간은 긴장된 눈치였습니다. 비행기가 약간 무거운 듯이 내려앉더니, 작게 쿵 소리를 내고는 안전하게 활주로 위에 착륙하였습니다. 그 순간 승객들이 ‘와’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습니다. 승무원은 그 모습이 의아하다는 듯이 우리들을 쳐다보았습니다. 사실 그 순간에 승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비행기 기장과 비행기를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안전벨트로 내 의자를 더 동여매어도, 아무리 소리쳐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안절부절 해보았자 되는 일은 없고 자기 마음만 상할 뿐입니다. 승무원들이 평안했던 이유는 오랜 세월 비행기를 타면서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 동행에 익숙해졌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처음 비행기를 타는 것처럼 쓸데없는 염려로 힘들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모습이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도 마치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그래서 쓸데없는 염려로 스스로를 죽입니다. 우리는 양이고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목자 되신다는 사실의 의미를 최근 우리 작은 아이의 모습에서 절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작은 아이가 고슴도치 한 마리를 구입해서 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진짜 아기 하나 낳아서 기르는 엄마 같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밥도 주고, 배설물도 치워줍니다. 고슴도치 청력이 인간보다 70배나 더 밝다고 하며 그 앞에서 큰 소리도 내지 못하게 합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어느 날 한밤중에는 작은 아이가 저희 안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고슴도치가 추우면 동면에 들어가고 그러면 위험해지니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슴도치가 염려되어 잠을 못자다 급기야 저희 방을 급습한 것입니다. 결국 이 일은 전기장판을 깔아주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결을 보았습니다. 작은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위하시는데 두려워 할 것이 무엇입니까? 염려할 것이 무엇입니까? 고슴도치는 아마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상한 손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만 알지 그 손의 주인공이 자기보다 더 안타깝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며 또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위험에서 건져주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를 푸른 초장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 선한 목자를 의지하면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지만 어느 새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만약 우리가 상처받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것 또한 염려할 것 없습니다. 목자는 양의 배고픔이나 상처를 누구보다도 빨리 알고 치료해 주십니다.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는 다윗 개인의 노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시편 80편 1절입니다. “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이스라엘을 양에 비유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라 고백했습니다. 시편의 삶의 자리는 성전예배입니다. 오늘날의 찬송가와 같다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 23편의 노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노래입니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큰 차원이지만 그것이 다른 수많은 나라와 민족과 비교할 때는 양과 같이 무력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위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이 있고 아래로는 애굽 문명권이 있는, 위 아래로 세계 4대 문명 중 2개 문명이 충돌하고 있어서 바람 잘 날 없는 위험한 곳에 위치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대 왕들의 고민은 어느 쪽에 붙어야 살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무기력한 양이었습니다. 그러할 때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외쳤던 것은 “애굽의 말과 마병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 꾀와 생각을 의지하다가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30:15)
우리나라는 이스라엘과 같은 처지입니다. 위로는 중국과 러시아의 대륙세력이 있고 아래로는 일본과 미국의 해양세력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빚어진 것이 휴전선을 경계로 한 남북분단입니다. 남북은 지금 서로 한 쪽 세력들을 의지하여 첨예한 대결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그 정책방향을 결정할 중요한 선거들이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남북이 통일의 길로 갈지, 어리석은 길로 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가 의지할 분은 우리 민족의 목자 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가 깨단는 것은 역사가 인간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역사는 우연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인하여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언서는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21:3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인생은 부족함이 없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민족은 부족함이 없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환의 이 시기에 더욱 더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자와 함께 하는 행복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였는데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안전을 공급해주시기 때문입니까? 단지 목자 되신 여호와가 나를 지켜주시고, 풍성한 꼴을 주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와가 우리 목자 되신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만족을 가져다줍니다. 문제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우리 인생이 부족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 목자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목자의 보호나 풍성한 꼴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결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가 가진 무엇, 곧 얼굴이나 성격이나 물질이나 지위 때문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런 것 말고 상대방이 그냥 좋고, 함께 있는 것이 행복이 되어야 진정한 부부라 할 것입니다. 자녀도 그 자녀가 돈을 벌어오거나 좋은 성적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모와 자녀로 함께 있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도 주님이 주시는 축복 때문이 아니라 주님 당신 때문에 좋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와야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실패와 푸른 초장이라는 성공도 함께 다 맛보았던 다윗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사망의 골짜기를 걸을 때가 더 좋았습니다. 그때만큼 주님을 의지했던 때도 없었고 또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던 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성공했을 때는 죄가 그를 지배했고, 그의 집안에서는 배신과 음모, 분열과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윗이 깨달았던 것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더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타국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반항이나 호기심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찾기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부자유하게 살며 인습에 매어 사는 데서 벗어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형의 동생으로서 자기 발언권도 없는 것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습니다.
자기를 찾기 위한 여행은 처음에 성공적인 듯이 보였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습니다. 돈의 위력도 알았고 쾌락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깨닫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었고, 쾌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결국 자기를 찾기보다는 돼지보다도 못한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탕자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탕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15:17-19) 중요한 단어는 아버지입니다. 탕자는 아들일 때 비로소 자신일 수 있었습니다. 자아를 찾아 떠났지만 오히려 자아를 잃어버렸고 돈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의 아들 됨을 확인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진정한 자아와 행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삶의 의미와 신비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능력을 개발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밖에 계신 분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다른 복들도 거기서부터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축복을 다 주십니다. 처음에는 그분이 주시는 복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매우 슬퍼하십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좋기 때문에 당신 곁에 있습니다 해야 좋지, 나에게서 떨어지는 떡고물만 바라고 있는 사람은 정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패의 순간이나 성공의 순간이나 우리는 모두가 다 감사입니다. 그 순간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좋은 이유는 그분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아닌 지금의 세상도 좋은 이유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처럼 만족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