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지구여행 - 남방 탐험 금성을 관측하고 미지의 땅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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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7. 19:51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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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지구여행
남방 탐험
금성을 관측하고 미지의 땅을 찾아라
네덜란드 사람들에 의하여 오스트레일리아가 확인된 다음에도 사람들은 보다 더 큰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은 지구가 회전 운동을 할 때 한쪽으로 쏠리지 않으려면 북반구의 거대한 대륙처럼 남반구에도 큰 대륙이 있어야 균형이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발간된 지도나 지리 관련 도서에 남극 대륙을 뜻하는 글이나 그림이 어렴풋이 표시되어 있기도 했다.
1769년 6월 금성이 태양을 가로지른다는 계산이 발표된 후 영국 왕립지리학회1)는 이를 관측하기 위하여 남태평양 타히티에 사람을 보내기로 하였다. 가서 금성을 관측하고, 간 김에 미지의 땅(남극)도 탐험하여 수수께끼를 풀어 주기를 바랐다. 게다가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1596) 이후 세계를 제패하려는 영국인들의 속마음에는 태평양에 점점이 떠 있는 섬에 대한 정보가 들려오는 것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 그래서 금성 관측과 미지의 땅 탐험에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때 제임스 쿡(James Cook, 1728~1779, 일명 캡틴 쿡)이 선발되었다.
제임스 쿡은 요크셔 지방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잡화상 점원을 거쳐, 8살 때부터 북해의 거친 바다를 오가는 석탄 운반선에서 일을 했다. 성실하고 수학 공부에 뛰어났던 그는 그 뒤 항해사가 되었다. 1755년 영국 해군에 들어가서 하사관으로 진급한 뒤, 캐나다의 세인트로렌스(St. Lawrencw) 만의 바닷길을 잘 측량하여 프랑스군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해양 측량사로 일했으며, 뉴펀들랜드에서 일식을 관측하기도 했다. 해군에서는 쿡의 이런 경력에 비추어 금성 관측과 미지의 땅을 찾는 일에 쿡보다 더 나은 적임자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선임하게 되었다.
1768년 5월에 쿡은 대위로 진급하였고 그가 만든 368톤짜리 탐험선인 엔데버(Endeavour)호에 동물학자ㆍ식물학자ㆍ화가 등 94명의 선원을 태우고 그해 8월 26일 플리머스 항을 떠났다. 탐험대는 대서양을 거쳐 남아메리카의 마젤란 해협을 돌아 1769년 4월 10일에 타히티에 도착하였다. 약 2달 동안 금성 관측을 마치고, 그의 두 번째 임무인 미지의 땅을 찾아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타히티에서 남쪽으로 향하던 중 소시에테(Société) 제도를 발견하고 뉴질랜드의 해안에 다다랐다.
이때 뉴질랜드가 남섬과 북섬으로 나누어진 것을 처음 확인하고, 두 섬 사이의 해협(후에 쿡 해협으로 명명함.)을 지나갔다. 그 후 그는 1770년 3월 말 네덜란드인들이 ‘뉴홀랜드’라고 이름 붙인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서 한 섬에 영국기를 꽂았다. 그러고는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이 영국 땅임을 선포하고 이름을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라고 붙였다. 그곳에서 한 달쯤 머물며 배를 수리한 후 인도양과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거쳐 1771년 7월 12일 2년 11개월 만에 영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조지 3세를 배알한 뒤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쿡의 항해
쿡은 영국을 떠나 남아메리카 극단을 돌아 1769년 4월 10일 타히티에 도착. 다시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뉴질랜드에 다다랐고, 1770년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하여 영국기를 꽂고 왕의 땅임을 선포하였다.
1년 뒤인 1772년 7월 13일, 이번에는 오직 미지의 대륙(?)을 찾기 위하여 탐험에 나서게 되었다. 462톤짜리 레졸루션호와 340톤짜리 어드벤처호에 지난번보다 훨씬 좋은 과학 장비(해리슨의 경도 측정용 크로노미터)에다 천문학자까지 동반하여 1차 탐험 때와는 정반대로 아프리카 희망봉을 경유하여 갔다. 1772년 12월 초에 남극권(남위 60°)에 도달하였으나 산처럼 큰 빙산과 매서운 바람에 떠밀려 이리저리 떠돌다가 재도전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뱃머리를 뉴질랜드로 돌렸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험한 바다’라고 전한 쿡은 뉴질랜드에서 약 1년간 남극 탐험에 필요한 준비를 한 후 재출항하여, 1774년 1월 30일에는 지금의 아문센 해 부근(남위 71° 10′, 서경 106° 54′)까지 도달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쪽은 보통 기온일 것으로 추측했지만 너무나도 추웠으며 거대한 땅(흙)도 보이지 않았다. 남극에서도 태양이 북반구에서처럼 넘어가고, 남극이 북극처럼 추운 곳이라는 사실도 이때 처음 확인되었다. 쿡은 다음 해 겨울 돌아오는 길에 남태평양 일대를 누비며 이스터 섬, 누벨칼레도니아(뉴칼레도니아) 섬, 통가, 사우스조지아 섬 등 여러 섬을 발견하였다. 탐험을 떠난 지 3년 만인 1775년 7월 30일 영국으로 돌아온 후 남태평양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발견한 섬들을 지도에 그렸다.
1776년 2월 왕립 지리학회는 평민 출신인 그를 정회원으로 선출했고, 최고 영예인 코플리 메달(Copley medal)까지 주었다. 이것은 그토록 오랜 항해를 하고도 단 한 사람의 괴혈병 환자를 내지 않고 무사히 귀국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같은 해 7월 쿡은 영국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을 찾기 위해 북서 항로를 찾으라는 해군 본부의 명령을 받았다. 물론 약 50년 전에 베링에 의해 유라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 대륙 사이는 바다로 갈라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베링 해에서부터 영국까지 뱃길을 연결하기 위해서 쿡은 레졸루션호와 새로 만든 디스커버리호를 이끌고 세 번째 탐험을 시작하였다.
쿡의 탐험대는 영국에서 북극해로 바로 들어가서 베링 해를 통하여 태평양으로 가려고 하였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위험하고 험한 뱃길을 고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희망봉을 돌아 뉴질랜드까지 가서 보급을 받고 배를 수리한 후 태평양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뉴질랜드에서 북상하던 중 1777년 12월 24일 조그마한 섬을 발견하고 크리스마스 섬이라고 명명하였고, 1778년 1월 하와이(샌드위치 제도)를 발견하였다. 그 후 북미의 서해안을 거쳐 알래스카까지 올라가서 6월 말경 북태평양의 베링 해협을 통과하였다.
매서운 추위와 싸우며 얼어붙은 얼음을 깨면서 나아가 8월 18일에는 북위 80° 41′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두꺼운 얼음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자, 1779년 1월 일단 하와이로 되돌아왔다. 재도전을 위한 휴식과 준비를 하던 쿡은 그곳에서 원주민이 훔쳐 간 선단의 보트를 찾기 위하여 나섰다가, 원주민이 던진 창에 맞아 1779년 2월 14일 사망하였다. 하와이 사람들은 쿡이 죽은 지 150년이 지난 1928년 하와이의 케알라케푸아(Kealakepua) 만 물속에 쿡의 위령판을 만들어, 8년 반 동안 30만 ㎞의 바다를 누빈 그를 애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방 탐험 - 금성을 관측하고 미지의 땅을 찾아라 (대단한 지구여행, 2011. 8. 1., 윤경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