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
정이 많이 든 물건이다. 대구에 이사 와서 처음 산 것이니 20년이 넘었다. 손잡이의 플라스틱은 빛바래서 본래의 색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가끔 쓰레기를 담아 버리러 나갔다가, 수레를 잊어버리고 그냥 집으로 돌아올 때가 있다. 나중에 가 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이제는 아무도 탐을 내지 않을 만큼 수레가 낡은 것이 분명하다.
일주일에 한 번 아파트 주변에 장이 선다. 싱싱한 채소와 생선, 과일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구경만 하겠다며 집을 나서도 막상 시장에 가면 하나, 둘 살 것이 늘어난다. 올망졸망한 보따리를 양손에 가득히 들어야 하는 수고를 수레가 대신해준다. 수레가 있었다면 머리에 물건을 이고 다니셨던 할머니도 허리가 굽어지지 않으셨을 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나는 늘 불만 속에 살았다. 김치를 먹다가 생강을 씹은 것처럼 인상을 쓰고 다녔다. 공연히 눈물이 나기도 했다. 어머니는 까다롭기가 밤송이 같다고 나무라셨지만 왜 그리 못마땅한 일이 많은지. 내 마음을 나도 몰랐다.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시던 날이면 나는 어디로 숨고 싶었다. 공장에서 일하다 돌아오신 아버지의 허름한 모습이 부끄러웠다. 영미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했다. 위인전에 나오는 간디나 세종대왕이 아니고 아버지를 존경한다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생각해보았다. 여름에는 늘 런닝구 바람인 아버지는 검댕이 칠도 씻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었다. 말씀이 별로 없고 무뚝뚝하셨다. 아버지는 다혈질이어서 가끔 불안정해 보였다. 뒤끝이 없다고 하지만 성격이 급한 아버지가 화가 나면 내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주사가 심하셔서 술을 많이 드시는 날은 집안의 평화가 십 리 밖으로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집을 떠날 생각을 자주 하였다. 대학을 서울로 가게 된 것이 좋은 기회처럼 생각되었다. 가족을 떠난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출발은 달콤한 것처럼 여겨졌지만 자취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스스로 자청한 생활이었지만 낯선 곳에서의 삶은 쓸쓸하였다. 저녁 빈방에 들어와 피곤한 몸을 누이면 눈물이 났다. 세상은 떫은맛이었다. 현실은 꿈꾸었던 나의 이상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의 삶은 비속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자취방에서 아버지의 짧은 편지를 발견하였다. 내가 없을 때 아버지가 다녀가신 것이다. 나의 안부를 걱정하시는 아버지의 서투른 글씨를 보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돋보기도 없이 급하게 몇 자 적었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글귀가 안개가 낀 듯 흐릿하게 보였다.
내가 결혼한 후 우리 집에 처음 오셨을 때, 아버지는 제일 먼저 달성공원에 가보고 싶어 하셨다. 무일푼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돌던 청년 시절의 추억 때문이었다. 홀로 객지를 방황하던 아버지에게 공원은 갈 곳 없는 사람도 따스하게 품어주는 안식처였다. 햇볕을 쬐며 풀밭에 앉아 졸던 아버지는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빵이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서 달려가셨다. 손을 내밀었지만 잡히지 않았다. 바람에 신문지가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빈 하늘을 움켜잡고 주저앉은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옛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외로웠던 시간이 하나, 둘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췌장암 진단을 받으시고도 담담하셨다.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 주셨다. 치매 걸린 어머니를 대신해서 자식들의 생일을 일일이 챙겨주시고 살림살이를 걱정해주셨다.
이 세상을 내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아버지에게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그늘이 얼마나 컸는지 몰랐다. 아버지의 장점뿐만 아니라 이해되지 않았던 단점조차도 내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내 짐을 가볍게 해주었던 수레가 이제는 낡아서 안타깝고 때로는 가슴이 찡하기까지 하다. 우리를 위해 고생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 간다.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겨울날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내가 만든 보양식을 드시고 좋아하셨던 것이 어제 같은데. 내 삶의 한 페이지가 닫힌 것처럼 느껴졌다.
“인생이 길지 않구나.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아라.” 아버지의 말씀이 유언처럼 남았다. 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는데 떠나시고 나니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