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00/200229]‘백 년 동안의 가족사진’
서울 올라가는 길에 대형 사진앨범을 샀다. 동묘앞 문구 도매전문점에서 35000원이라는데, 22000원까지 준단다. 한쪽에 넉 장씩 넣는다면 족히 200장은 넘게 들어갈 듯. 지난해 고향집을 고치면서 안방의 3면 벽에 빙 둘러 걸어놓은 액자의 가족사진을 따로 보관해 놓았었다. 고향이 시골인 친구들은 안봐도 비디오, 상상이 갈 것이다. 선대 영정사진부터 시작해 총생들의 성장 사진, 통과의례인 자녀들의 결혼식, 손자와 증손자들의 탄생사진 등 추억의 사진들이 채곡채곡 배열된 가족사진 액자들. 한때 대가족의 상징이랄 수 있는, 어느 집에나 있는, ‘인간극장’에서 자주 보이던 낯익은 광경이 아니던가.
아버지와 함께 지낸 2개월여, 그 사진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텅빈 벽만 쳐다봐도 뭔지 모르게 허전하고 허탈한 마음이 들 것은 뻔한 일. 장롱에 켜켜이 쌓인 부모님과 우리 칠남매의 사진은 모두 몇 천 장이나 될까? 앨범은 삭을대로 삭아, 도저히 그대로 봐줄 수 없이 낡았다. 하여, 모처럼 큰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모든 사진을 털어놓으니, 산더미가 따로 없어 한숨부터 나왔다. 하긴 해야는데,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 산 앨범에 정선精選을 하여 아버지께 ‘선물’할 생각인데, 보통일이 아니었다. 근 100년 동안의 사진이 다 모인 것이다. 딱 두 장뿐인 할아버지 사진, 10여장의 할머니 사진 정리는 아주 쉬운 일이지만, 부모님의 사진 고르기는 정말로 난감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일을 감당할 사람은 솔직히 나밖에 없지 않은가.
1. 앨범에 꼭 넣어야 할 사진들 2. 그냥 종이상자에 보관해야 할 사진들 3. 아무 의미없는 스냅사진 등 태워 없애야 할 사진들로 구별하는 원칙은 정했지만, 5시간을 매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얼른 선별하여 앨범에 배열을 해야겠는데, 1주일도 더 걸릴 것같다. 골머리 썩히지 말고 어지간한 것은 싹다 태워버리라는 동생들의 충고忠告는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 아니, 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 사진을 다 태우라니? 안될 말이다. 당신이 간간히 들춰보며 추억을 곰씹을 수 있는 수많은 사진들을 어찌 태울 수 있단 말인가?
부모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면서, 새삼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도 짓고, 우리 형과 나와 동생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서 피붙이 혈육血肉의 끈끈하고 원초적인 정情을 느낄 수 있던 것은 가외加外의 소득이자 기쁨이기도 했다. ‘맞아, 그런 때도 있었지’ ‘이렇게 대가족이 소풍을 간 적도 있었는데…’ ‘아이고, 우리 엄마 미인이었데, 키도 훤출하시고’ ‘여기가 어디였을까? 이렇게 아무 걱정없이 흐드러지게 웃으며 놀았던 때도 있었구나’ ‘어쩌다 우리는 훌쩍 어른이 되어 모두 제 식구들을 만나고 애기들을 낳아 기르고, 그러다 서서히 남남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을까’ ‘이웃사촌보다 못할 수도 있는 게 피붙이라던데, 정말 그렇게 되었을까’ 온갖 소회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부모에게나 형제들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같기도 했다. 부계父系로 유일한 친척인 숙부와 숙모의 결혼식 사진도 있었고, 사촌동생들의 사진도 있었다. 작업이 더딜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옛사진을 찰칵찰칵 찍어 동생들에게 카톡으로 전송했기 때문이다. 사촌동생은 “역사속로의 여행이군요. 흥미롭습니다”는 댓글을 보내왔다. 외할머니의 사진과 외가집 사진은 또 다른 감회을 안겼다.
나도 이럴진대, 홀로 되신 아버지는 연대별로 정리한 당신들이 사진과 가족사진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 90여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추억追憶의 편린片鱗들을 더듬으며 사뭇 그리워 하시리라. ‘천상 효자’인 우리 아버지는 할머니의 사진을 대하며 눈물바람도 몇 차례 하실 것이다(2000년 성균관장과 호남지역 33개 향교 전의들의 통문通文을 받아 동네입구에 할머니 효열비孝烈碑를 세운 분이다). 서른에 돌아가신 당신의 아버지 흑백사진(가로세로 10cm도 안되는)을 보며, 회한悔恨에 젖기도 할 것이다. 삼베상복을 입은 단 둘 형제의 사진, 앞서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사진을 보며 그리워하기도 할 것이다. 네 아들과 세 딸을 기르고 가르치고 분가시켜줄 때까지의 수많은 애환哀歡들이 여기 사진 속에 고스란히 기록記錄되어 있지 않은가. 이것은 한 가족의 역사歷史 그 자체가 아니던가.
이런저런 생각까지 겹쳐 ‘작업’은 전혀 속도가 붙지 않았다.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허리까지 아파, 침대에 올라 한참을 되작거리다 다시 해보지만, 아무래도 너무 힘든 일이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새벽 3시에 일어나 지금까지 하고 있지만, 언제나 끝이 나려나? 나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임을 새삼 느끼며 속도를 내본다. 다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참이다. “아버지, 지금은 안방 벽에 주우욱 사진들을 액자에 담아 걸어놓는 세상이 아니어요. 성인도 세상 따라 산다고 그랬어요. 이렇게 깔끔하게 한 권에 정리해 놓았으니 무료하시면 가끔 들춰 보세요. 나머지 사진들은 한 장도 안버리고 이 종이상자에 넣어놓았응개 보고 싶을 때 꺼내보세요.” 그렇다. 글이 아닌, 사진으로 보는 한 가족사家族史. 한 가정家庭을 이루고 가꾸어나간 구십 평생의 세월, 간난신고艱難辛苦는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고진감래苦盡甘來 웃은 세월은 또 무릇 기하였을 것인가. 아버지, 그리운 어머니, “참말로” 그동안 애썼구만요.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두 아들과 손주 등 핵가족 사진들은 언제나 정리해 깔끔히 남겨놓을 것인가? 바쁜 아들들에게 이런 ‘숙제宿題’를 남겨놓을 수는 없다는 게 오늘의 힘든 ‘작업作業 교훈敎訓’이다. 휴우-. 오호라, 추억 먹고 살기도 힘든 ‘산 넘어 산’이 바로 ‘사진 정리’로구나. 이제부터는 어지간하면 찍지 말자. 이것도 공해公害 이고 민페民弊가 될지어다. 나무관세음보살.
첫댓글 효자 냄새가 폴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