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말기 어느 장원의 비극적인 운명인, 육윤상(陸潤庠)
이야기의 주인공은 영기발랄했던 한 소년이다.
그는 청포장삼(靑布長衫)을 입고, 변발을 하고, 약상자를 들고, 부친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강남의 청산녹수 사이를 돌아다니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가 마음 속으로 품은 이상은 부친과 마찬가지로 평생동안 편작, 화타와 같은 명의가 되어서 사는 것이었다. 명의가문출신인 그에게 있어서 이는 아름다운 꿈이다. 부친은 그러나 다르게 생각했다. 부친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과거시험을 보아야 한다.”
청나라 동치12년, 육윤상은 31세의 나이로 계유과 순천부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이 된다. 다음 해에는 장원으로 합격한다. 그의 인생을 이렇게 또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된다.
육윤상은 산동학정, 국자감제주의 직을 거쳤고, 1896년 모친이 병사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강남재자들과 시를 짓고 놀면서, 관료로서의 생활과는 다른 풍취를 느낀다. 이때 기회가 온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청나라조정은 어쩔 수 없이 ‘마관조약(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소주, 항주등은 통상개방항구로 지정되어, 일본사람들이 공장을 지을 수 있게 된다. 양무운동에 열심이었던 호광총독 장지동은 여러븐 총리아문에 전보를 보내어 중국이들이 민족공업을 창업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육윤상을 소주상무국으로 보내고, 장건을 남통상무국으로 보내어 중국근대의 면방, 사직공장을 건설하게 한다.
이때가 아마도 육운상이 가장 잘나가던 2년이었을 것이다. 그는 소주에서 자금을 모아 소륜사창(蘇綸紗廠)을 만들어 사정(紗錠) 1.82만매, 직공 2000여명을 둔다. 얼마후에 만든 소경사창(蘇經紗廠)은 소사차(?紗車) 208대, 직공이 500여명이었다. 이러한 규모는 청말의 공업사상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만일 이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였다면, 그는 아마도 중국근대공업에 하나의 길을 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와 동시에 시작한 남통의 장원 장건은 청나라말기 관료사회의 부패무능을 꿰뚫어보고, 관직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한다. 이렇게 하여 민족자본주의의 개조이상을 실현하고, 중국근대공업사상의 비조격 인물이 된다.
그러나, 관직은 여전히 유혹이 컸다. 육윤상이 평생 받아왔던 전통교육은 그의 사상이 너무나 전통도리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1898년, 육운상은 모친상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가서, 내각학사, 서공부시랑이 되어 다시 한번 관직에 나선다. 그가 자신의 손으로 창업한 기업은 떠났으니 분명 마음 속으로 애수는 있었을 것이다.
육윤상은 말년에 황제의 스승이 된다. 육경궁에 남아서 마지막 황제 부의와 함께 지낸다. 부의는 만인지상으로 여러가지 나쁜 버릇이 있었다. 독서를 하는 것을 귀찮아 했다. 신발은 멀리 벗어던지고, 양말도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육윤상은 할 수 없이 책을 탁자에 놔두고, 이 특수한 학생의 신발과 양말을 주워야 했다. 나이든 육윤상이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인채 자신의 앞을 오가는 것을 보면서 부의는 발을 들어 발가락으로 육운상의 하얀 수염을 집었다. 육윤상은 아파서 눈을 찡그렸고, 부의는 이를 보고 가가대소했다.
마지막 황제 부의는 당시 너무 어렸다. 왕조몰락의 쓴맛과 처량함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부의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육윤상은 아마도 대청왕조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황색의 궁전에서 그는 바깥의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았고, 아마도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을 것이다.
1915년 9월, 이미 중화민국의 천하였다. 육윤상은 어느날 부의에게 떠나겠다고 인사를 한다: “신은 병이 들어서 내일부터는 출근하지 못하겠습니다.” 육윤상에게 병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여러해동안 천식을 앓았다. 그러나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육윤상은 의사집안출신이므로 자신이 어떤 약은 먹어도 되고, 어떤 약은 먹어서는 안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소주의 고향집에 돌아온 후, 굳이 먹어서는 안되느 약들만 먹고, 여러날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10여일을 금식하다가 결국 죽는다. 육윤상의 죽음은 병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자살인 셈이다.
육씨집안의 휘황함은 육윤상이 죽은 후에 막을 내린다. 사람들은 흩어지고, 넓다란 무대위에는 몇 개의 도구만이 남아있었다. 육씨집안의 후손들에 대하여 얘기해보자면, 그것도 처량한 결말이다. 장녀가 홍락(홍균의 아들)에게 시집갔으나 나이젊어서 미망인이 된 외에 육씨집안의 장남 육가진은 폐결핵으로 병사하고, 차남 육종진은 백혈병으로 사망한다. 일찍이 잘나가던 집안이 국운이 바뀌면서 신속히 쇠락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