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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2일(주님의 수세주일)
요한복음 1:29~39
비록 알지 못할지라도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 세례 요한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설교 목적: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한다.
최근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과 과연 누구신가?”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어둠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는 자는 그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라고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또, 그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을 때,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살던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기 위해 그에게 나왔습니다.
세례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 여기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먹을 것이 없는 자와 나누어 주는 것이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이었습니다.
또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온 세리들을 향해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당시의 세리들이 부과된 것 외에 부당한 세금을 더 거두었던 것을 비판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또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온 군인들에게 강탈하지 말고,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며,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가르쳤습니다. 군인들이 힘으로 가난한 자를 착취하거나 고발하는 것은 죄이며, 그들에게 자족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정의를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촉구합니다. 이처럼 거룩한 삶은 ‘세례’라는 종교적 예식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사람들로 회개케 하기 위해서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1절에는 세례 요한이 베푼 물세례의 또 다른 강조점이 드러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베풀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죄를 지적하거나, 예수님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베푼 이유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통해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이 있습니다. 31절과 33절에는,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는 표현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분이 누구신지, 그분의 고향이 어디인지, 그분의 부모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세례 요한은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을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었을까요?
혹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많은 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도할 수 없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전하고는 싶지만, 제가 성경을 잘 알지 못해서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예수님의 제자 중 한명이었던 빌립도 처음에는 성경을 잘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친구였던 나다나엘을 전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라며, “그 사람이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은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물론, 당시 나사렛이란 지역이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의하면, 메시아는 나사렛이 아닌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다윗의 동네인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어린 시절을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런 사실을 빌립이 미처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빌립은 당시 세간의 평가대로,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 정도로만 소개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성경 지식만 따지고 본다면, 빌립보다 나다나엘이 한수 위였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확신 있게 말했습니다. “와서 보라” 나다나엘은 성경 지식은 자기보다 조금 떨어져 보였지만, 그날따라 평상시 모습과는 다른 빌립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에게서 확신에 찬 모습을 보았습니다. 결국, 나다나엘은 그의 확신에 찬 모습에 이끌려 예수님께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혹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일을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세례 요한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전부터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세례 요한이 잘 알지도 못했던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담대히 증언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세례 요한이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표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보여주신 표적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34절).”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문 일’은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심을 증언합니다. 이같이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표적을 본 후에,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표적을 보지만, 그 안에 말씀이 없어서 시험에 들거나 교만에 빠져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표적은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표적은 이성의 한계에 갇힌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표적은 우리를 믿음의 자리로 이끌어 줍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2:11).
그러나 우리가 표적만 구하는 신앙은 유대인의 신앙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께 표적만을 구하며, 도무지 예수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 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릴 짐승을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짐승을 다 쫓아내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던 이유는 그분을 믿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이런 일을 행하는지 꼬투리를 잡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밤 중에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니고데모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사람이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육신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표적만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당연히 표적만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 요한은 표적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담대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자기의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드렸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처음에는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하자,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안드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자기 형제 베드로를 전도해서 예수께로 이끌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공동체가 예수 제자 공동체였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유대 지역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실 때, 세례 요한도 요단강 서편 지역인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스승에게 나와서 “사람들이 다 예수에게로 가더이다.”라며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제자는 적어도 세례에 있어서만큼은 자기 스승이 예수님보다 원조(元祖)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역자 간에 묘한 경쟁심리가 발동한 것입니다. 이 제자는 자기 스승보다 더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의 말을 듣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해야 할 사람은 너희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이 잘 되니 나는 더 기쁠 뿐이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세례 요한의 고백을 들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불필요한 경쟁이나 시기심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친한 사람들을 엮어서 세력을 만들고 누군가를 은근히 소외시키려하거나, 내 주장만을 관철시키려고 한다면 이 또한 우리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떠한 자로 부르셨고, 어떤 위치로 부르셨는지를 잘 깨닫고, 자기의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이 충성된 일꾼입니다.
영국 리버풀에 위치한 워커 미술관에 가면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Faithful Unto Death>(죽을 때까지 충성)입니다. 이 그림은 1865년에 에드워드 포인터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완전무장한 군인을 모티브로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의 배경은 ‘폼페이 최후의 날’입니다.
폼페이 성안 쪽에 용암이 우박처럼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혼란 속에서도 성문을 묵묵히 지키는 병사가 있습니다. 병사의 시선은 화산을 향하고 있지만, 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자 그는 움직이지 않고 성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충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출처: 안희묵, 「회복의 빛 예수」(두란노, 2022);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3년 12월호), 97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세례 요한 이야기를 들으며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비록 우리가 잘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표적과 말씀을 따라 순종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잘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귀히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Faithful Unto Death> (1865, Edward John Poynter)
출처: https://www.wikiart.org/store/faithful-unto-death-18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