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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게 하지 말자(2025년 3월 9일 오후 찬양 예배 설교)
성 경 : 사도행전 15:12-35(신약 213)
오늘 말씀은 지난주의 말씀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이방인 성도들도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것에 대해서 안디옥교회에서 교리적인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안디옥 교회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선정해서 예루살렘 교회로 보내서 이 문제에 대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인해서 열리게 된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바리새인 출신의 성도들이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은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고 한 편에서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다는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베드로 사도가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셔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데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일이었다고 선포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인 우리도 메기 어려운 멍에를 메게 하지 말자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과 바나바가 일어나서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보고 하매 이어서 야고보가 일어나서 이방인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모두가 야고보의 말에 동의하여 결의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 고 제안을 하면서 이방인이었던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는데 또 다른 짐을 지게 하지 말고 복음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가 말한 “괴롭게 하지 말자”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1. 이방인이 돌아오는 것은 이미 예언된 일이다.
지난 주에 살펴본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은 이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오래전에 계획하셨고 이방인들에게도 우리와 같이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어서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을 비롯해서 이방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온 것에 대한 간략한 보고를 했습니다. 12절을 보면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보고를 듣고 곧 바로 야고보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4-18절에 보면
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5: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5: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
여기서 야고보가 이야기 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본문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여러 문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과 구약 성경의 일부 본문을 우리의 번역본이 아닌 유대인들이 널리 사용하고 있던 문서에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야고보가 인용한 구절들을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시대에 야고보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15-16절은 아모스 9:11-12절을 인용한 것으로
9: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9:12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야고보는 그 시대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말씀들을 인용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이란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만민이 주를 찾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함으로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과 이방인들이 돌아온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미 예언하신 일들이 지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2.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
야고보는 이방인이 돌아오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도록 도와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여기서 괴롭히고 있는 주체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며(1,5절) 그 내용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는 요구인데 이러한 요구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우월감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베드로 사도의 말과 같이 야고보도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서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의미로 그들을 괴롭히지 말자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24절에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이 말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안디옥 교회에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을 파견한 일이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나 기타 이방인 교회에 가서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고 그런 사람들을 보낸 적도 그런 사람들을 인정한 적도 없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셨고 예언하신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에 어떤 조건을 달아서 믿고 구원의 길로 들어오는 것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이방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유대인의 율법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오고 가는 모든 세대를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안식교인들은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능하면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안식교인이라고 부릅니다. 안식교란 구약의 규례에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날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입니다. 원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에서 토요일 저녁이 되기 전까지가 안식일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안식교인들은 율법에 정한대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후로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시고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면서 초대 교회는 주일을 거룩한 날로 정하여 지켰습니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유대인의 회당에 안식일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교회는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교인들과 안산홍 하나님의 교회는 구약과 같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안식교인들은 구약에서 먹지 말라고 하는 음식의 규례를 오늘날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유대인이 아닌 성도들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부정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다면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날 율법은 유대인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지켜야 한다면 그것은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각 나라마다 문화적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어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이 아이들을 축복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으면 문제가 됩니다.
반면에 필리핀은 우리가 단기 선교를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린 다음에 아이들이 와서 자기 머리를 만져달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문화적 차이입니다.
우리 예배 마지막 순서는 축도를 하는데 어느 나라에서는 대중을 향해서 손을 펴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선교하시는 분들은 축도할 때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올리고 한다고 합니다.
제 신학교 동기 중에 필리핀에서 선교하는 친구는 필리핀 원주민 지역에 가서 선교하다가 가족중에 필리핀 풍토병에 걸려서 순교했는데 원주민들이 주는 물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서 마셨는데 그 물에 병균이 있어서 결국은 순교하게 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예배와 미국교회의 예배가 조금 다릅니다. 예배 순서가 다른 이유는 문화적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문화적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인정해 주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이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그러나 금해야 할 것
야고보는 이방을 괴롭하지 말자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이방인이라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최소한 이런 것들을 금하고 지켜야 한다고 몇 가지 중요한 규정을 제시했습니다.
첫째로 우상의 더러운 것을 금하라 20절을 보면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여기서 첫 번째로 제시된 것은 우상의 더러운 것을 금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상의 더러운 것은 29절에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우상의 더러운 제물은 우상의 제단에 올려졌던 제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졌던 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후에 수정하게 됩니다. 고린도는 모든 고기들을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에 유통을 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에서 고기를 먹는 것은 모두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먹으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성도들은 가급적이면 우상의 제물 즉 제사에 사용된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믿음으로 먹으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바울도 가급적이면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하면서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기도하고 믿음으로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 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우상에 드려졌다고 해서 그 음식에 귀신이 깃드는 것도 아니고 성령 충만한 성도가 영적으로 눌리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우상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음행을 멀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절을 다시 보면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9절에도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방문화는 성적으로 타락한 문화입니다. 고대 시대에 우상의 전에서는 매춘이 이루어졌고 성적인 행위가 신을 섬기는 행위로 인정되는 종교도 있었습니다. 종교적이고 문화적으로 이방인들은 성적으로 문란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문화 중에서 성적인 방탕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음행을 멀리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셋째로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라.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라는 말씀은 뒤에 피를 먹지 말라는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고기를 먹을 때 피를 쏟아내고 먹었습니다. 그런데 목을 매어 죽게 하면 피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되고 그래서 목매어 죽은 고기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보수적인 믿음의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개를 도살할 때 목매어 주게 하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피를 먹지 말라. 우리나라 음식 문화에서는 짐승의 피를 먹습니다. 순대와 선지 경우인데 순대와 선지를 먹는 문제는 아직까지도 기독교 안에서 논쟁의 대상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있지만 보편적으로 문화적인 문제로 인정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개고기를 먹는 것과 순대나 선지를 먹는 것이 야고보가 제안한 규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이 문제에 대해서도 문화적인 측면에서 구원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인정해야 한다고 해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야고보 사도가 제안한 것에 대해서 예루살렘 총회는 공식적으로 승인을 하고 이방인 교회들에게 전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22-30절까지를 보면
15: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15: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15: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15: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15:26
15: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15: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예루살렘 교회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 이방인 교회들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31절에 보면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교회 공동체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짐을 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돌아보아 함께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하고, 위로가 되어줌으로 더 굳건한 성도로 세워져가는 참빛 교회가 되고 참빛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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