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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31,7-9
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8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땅에서 데려오고 땅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9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었고 에프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제2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 5,1-6
1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곧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2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4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
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기심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당신을 옷 입게 하소서!>
오늘 말씀전례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제1독서는 <예레미아 예언서> ‘위로의 책’(30-31장)의 핵심 부분입니다.
바빌론 유배 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아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어, 그들을 모아들이어 곧은길을 걷게 할 것인데, 그들 중에는 눈 먼이, 다리 저는 이 등도 있으리라고 말하면서(예레 31,7-8) 이렇게 위로합니다.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여 이끌어 주리라.”
(예레 31,9)
제 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을 아론의 혈통을 넘어선 초월적 직분을 지닌 멜키시댁과 같은 영원한 사제로 선포됩니다(히브 5,1-6).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티매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는데, 예언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 시 146,8; 마태 11,5)
그렇다면 누가 ‘눈 먼 이’인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4,13; 7,1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8,18),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6,52; 8,17), ‘따로 설명해 주어도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9,32)이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혹 지금 우리도 ‘가야 할 길 가’에 그냥 앉아 있지는 않는지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르 10, 47)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자손이시여!” 라는 외침은 용기 있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당대의 정치, 종교, 사회 지도자들이 배척했던 예수님을 감히 ‘큰 소리로’(마르 10,48) ‘메시아’로 고백하는 목숨을 건 장엄한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 뜬 이들’이 보지 못한 것을 ‘눈을 감은 장님’이 더 잘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님인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동전그릇도 버려두고 볼 수도 없으면서도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그렇습니다.
이제 움츠리고 둘러쓰고 있는 위선과 기만의 '겉옷'을 벗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움츠리고 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저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손해보지 않으려 하는 ‘나 자신의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제 생각과 이기심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당신을 옷 입게 하소서!
당신의 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도록 ‘우리의 진정한 원의’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의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르 10,51)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요?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린애가 잃어버린 엄마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하듯이, ‘하느님을 보고 싶은 것’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눈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여, 백인대장처럼 우리가 “참으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마르 15,39)라고 고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새롭게 본다.’는 것은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곧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입니다.
다름 아닌 믿음의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르 10,52)
이제는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티메오처럼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마르 10,5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니 마음이 완고하여 태양을 보지 않으려 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자비만 받고 구원은 받지 않는?>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눈먼 이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하시는 분은 당연히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눈먼 이가 구원받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의 시작은 말할 것도 없이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서는 구원을 주십사고 이렇게 청하라고 합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예레 31,7ㄹ)
그리고 오늘 복음의 눈먼 이는 청하라는 예레미야서의 권고대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ㄴ)라고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으려면 이렇게 예언자의 권고를 듣고 그대로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청하는 눈먼 이와 잠자코 있으라며 꾸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청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있다는 얘기이고, 지금 우리 가운데서도 청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이가 있습니다.
눈먼 이는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자비를 청하는 데 반해, 우리는 눈멀지 않은 것 때문에 청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니다.
볼 수 있다고 하여 자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한번 자문해봅시다.
볼 수 있어서 자비를 청하지 않는 사람과 볼 수 없기에 자비를 청하는 사람 사이에 누가 옳고 누가 궁극적으로 행복합니까?
하느님 자비가 필요하다고 믿고 청하는 사람이 옳고 행복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눈이 멀지 않은 것 때문에 하느님 자비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청하지 않는 사람은 눈멀지 않은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자문하는 것은, 제가 그런 사람일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이 나이에도 다른 분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성인병이 하나도 없고, 그래서 하느님 자비를 간절히 구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진정 두렵습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건강하기에 자비를 구하지 않는 것보다 구원을 청하지 않는 나는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사실 자비를 청하는 것과 구원을 청하는 것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열명의 나환자가 같이 자비를 청해 치유 받았지만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치유만 받고 입 싹 닦은 데 비해, 이방인 하나만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드렸지요.
자비를 받아 치유 받은 유대인들은 치유만 받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자비를 받았지만 구원받지는 못했습니다.
치유의 자비를 받고도 치유만 발생하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에게 하느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치유자 또는 의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치유만 받고 아홉 유대인처럼 입 싹 닦고 제 갈 길을 갈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병원에 가 돈 내고 치유 받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지, 그것으로 인해 의사와 평생 인연을 이어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자비와 함께 구원자 하느님을 만난 복음의 바르티매오는 오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님을 따라서 길을 나섭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마르 10,52)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본보기이고, 자비도 받고 구원도 받는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그래서 자비만 받고 구원받지는 못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의 눈을 뜨게 되기를 바랍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비를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던 바르티매오의 청을 들어주셨듯이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시리라 믿으며 주님의 사랑으로 영의 눈을 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근무할 때 졸업생의 결혼 주례를 몇 차례 하였는데, 고 가밀라라는 학생은 시각 장애인과 결혼하였습니다.
일찍부터 봉사활동을 다니다가 장애인 선생님을 만났는데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고,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하였습니다.
자녀 셋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제는 아들이 양업고에 합격하였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의 결혼 주례를 하면서‘육신의 눈보다 영적인 눈을 뜬 배우자를 맞이한 신랑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을 뜨도록 만들어 준 신랑의 사랑을 받아들인 신부도 또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의 눈을 뜨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장애는 결코 장애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생각하는 그릇된 편견이 장애일 뿐입니다.
우리 눈을 세상의 현상을 드러난 대로 보는 육의 눈, 속을 헤아리는 마음의 눈, 이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녀야 할 눈은 혜안으로 영적인 눈입니다.
다른 눈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눈을 지니지 못하면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지니면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고,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내가 만족하고 많은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느님 눈에 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 눈에 꼭 들기를 희망합니다.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얼굴이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유다인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이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자신의 바람을 밝혔을 뿐 아니라 바람을 이뤄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큰 소리로 고백한 것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겉으로 보면 눈먼 사람은 바르티매오였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눈먼 사람은 주변 사람입니다.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잠자코 있으라”고 외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마르8,18)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위신,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눈먼 거지의 절박한 사정에 공감하며 그를 도왔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영의 눈이 뜨지 못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자기를 낫게 해 줄 분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 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고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애절함과 믿음의 은총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옛말에 “마음의 바탕이 밝으면 어두운 방에서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고, 생각이 어두우면 환한 햇빛 속에서도 악마를 만나게 된다.”(채근담).고 했습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이 열려 있고 또 사랑을 하면 우리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에 무관심하면 그 자체가 어둠이요, 그 삶은 악마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고, 또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사랑을 살지 않는다면 스스로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의 기준을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1-46)라고 하시며 이웃 사랑의 실천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바르티매오를 불러오도록 명하시자 사람들은 태도를 바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합니다.
바르티매오는 그 소리를 듣고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겉옷은 그의 모든 재산입니다.
낮에는 햇빛 가리개요, 던져주는 돈을 받는 돈주머니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를 감싸주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던져 버렸습니다.
이 시점에서 겉옷은 오히려 장애가 될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는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늘 없게 마련입니다.
내 것을 희생해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모처럼 맞은 휴일 쉬고 싶지요.
당연합니다.
하고 싶은 것 해야지요.
그래서 돈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촉하시면 일어서야 합니다.
사랑이 나를 부르면 바르티매오처럼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언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바르티매오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간청은 “영적으로 눈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영으로 눈을 떠서 주님을 본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영적인 눈을 떠 주님께서 계시는 집과 주님의 영광이 깃드는 곳에 마음을 두고 마침내 주님의 얼굴을 꼭 마주하시면 좋겠습니다.
한 주간, 먼저 내가 눈먼 이라는 것을 깨닫고, 간절함으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이 커질수록 청하는 것도 커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거지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주위 많은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죄인이 어디 자기의 목소리만 들어달라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소리 지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멈추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믿음’이고, 믿음이 구원하는데 그 믿음은 내가 무엇까지 청할 수 있느냐에 결정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될 때 그만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애플 컴퓨터 설립자이고 2009년 포춘지 선정 최고의 CEO,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췌장암과 싸우다 사망했습니다.
그가 2005년 스탠퍼드대에서 '늘 갈망하라,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라는 제목으로 졸업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큰 뜻을 품었고 친구와 둘이 자동차 장고에서 시작한 사업은 10년 만에 직원 1,000명을 거느린 20억 달러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또다시 돌아와 애플을 미국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때로는 인생이 당신의 뒤통수를 벽돌로 후려치더라도 소신을 잃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 나를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늘 갈망하십시오.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의 종교는 불교에 가깝고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참 종교는 그리스도교에 가깝습니다.
무언가를 우직하게 갈망한다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도 어처구니없게 망가진 눈을 회복시켜달라는 바르티매오에게 믿음이 강하다 칭찬하셨습니다.
더 불가능한 것을 청할수록 더 강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주님께 무언가 청했던 것은 주일학교 교사 때였습니다.
한 아이에게 야단을 쳤더니 그 아이가 집에 간다고 가버렸고 저는 성당에 앉아 그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는데, 기도가 끝나자 잘못했다며 그 아이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다음은 술내기였습니다.
이미 2병을 마시고 기도하고 내기하여 각 6병을 마셨습니다.
물론 제가 이겼습니다.
신기한 것은 다음 날도 숙취가 없었습니다.
그다음은 저를 사제로 불러주시면 한 번 나타나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성모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음은 박사 논문 발표가 잘 끝나기를 청했는데, 망친 줄 알았더니 교수님들이 다 만점을 준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당에 와서는 어르신들이 많고 교적에 허수가 많지만, 이른 시일 내에 미사 참례율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3년째 되어가고 있는 지금 거의 이 기도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저는 또 개인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되는 청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저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청하는 것도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요안나라고 부산교구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불쌍한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처녀였음에도 아이들을 자녀로 삼아 키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도망친 엄마 대신 모르는 한 여자에게 엄마가 되어달라고 청하는 아이의 꿈을 모르는 체 할 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딸이 결혼도 안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가 쇼크로 사흘 만에 돌아가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습니까?
믿음과 함께 나의 청하는 것도 커져야 합니다.
그분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교황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람이 그 자매를 찍어누르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요안나 자매는 자신 앞을 이미 지나쳐가는 교황님께 온 힘을 다해 “파파, 파파”라고 불렀습니다.
교황님은 되돌아오셔서 그 자매의 두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그것을 청할 수 있고 또 상대는 그 청을 들어줄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더 큰 것을 청합시다.
이것이 그분을 인정하고 내가 믿음으로 인정받는 길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은 하늘까지 움직였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때로 우리가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장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무지 탈출구가 없을 때, 울부짖고 몸부림쳐도 헤어날 방법이 없어 보이는 그런 절박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돌아보니 저도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었습니다.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기분,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는 듯한 외로운 처지, 차라리 이쯤에서 삶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절박한 순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 그 역시 딱 그랬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호흡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했던 여행길, 길고도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느라 그의 영혼과 정신은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습니다.
어디가나 천덕꾸러기요 애물단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대놓고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의 삶은 모욕과 멸시, 천대와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바르티매오는 존재하지만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르티매오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구걸을 위해 하루 온종일 길가에 앉아있어도 관심 가져주는 이가 단 한명도 없었는데, 기껏해야 동전 한 닢 깡통 속에 던져주는 것이 다였는데,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가까이 부르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상하게 이것 저것 물어봐주십니다.
측은지심 가득한 음성으로 몇 가지를 물어보겠죠?
이름이 뭐냐? 언제부터 이렇게 됐냐? 사는 곳은 어디냐?
오늘 예리코의 눈먼 이는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결국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목이 빠지게, 정말 간절하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치 구조를 기다리는 난파선처럼, 구급차를 기다리는 응급환자처럼,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강렬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또 그의 예수님을 향한 기대감, 믿음은 또 얼마나 컸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안테나는 오로지 한 방향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말겠다는 강한 열의, 그분께 도움을 청해보겠다는 열의, 그분은 반드시 나를 더 나은 삶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 그 능동성, 적극성이 그의 외침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부르짖음이 얼마나 컸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갑작스런 외침, 돌발 상황 앞에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조용히 좀 하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 번의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 큰 소리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절박하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이 드디어 하늘에 닿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와 만나십니다.
시각 장애로 인해 비참하고 혹독했던 그의 지난 삶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따뜻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기다렸다는 듯이 눈먼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예리코에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앞에 멈추셔서 우리 얼굴을 내려다보시며,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라보시며 똑같이 질문 하나를 던지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생활입니다>
1)
오늘 복음 이야기의 맨 끝에 있는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라는 말은 바르티매오가 단순히 ‘시력 회복’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새 인생’을 원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새 인생’은 ‘새 직업’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신앙인)의 삶’, 또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이었음도 나타냅니다.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시력회복만을 원했다면?
그리고 시력이 회복된 뒤에 새 직업을 갖게 되는 것만을 원했다면?
그러면 이 이야기는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치유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면?
살던 대로 살기만을 바라면서, 특별히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그토록 간절하게 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즉 그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났을 것이고, 복음서에 그의 이름이 기록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루카 5,39)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그 선포에 관심 갖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은 ‘기득권층 사람들’이었다고 보통 생각하는데, 기득권층 사람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일반 서민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득권층 사람이든지 소외계층 사람이든지 간에, 부유한 상류층 사람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간에, 변화를 싫어하고 거부한 사람들,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회개 선포를 무시했고, 복음 선포를 외면했습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해서 그런 경우도 있고, 만족하는 것은 아닌데도 변화 자체를 두려워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회개하라는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쇄신’이나 ‘개혁’ 같은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으려고 하면 저항하고 반대하고 박해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갑니다.
2)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에게 하신 말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에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5,34).
두 이야기는 겉으로는 차이점이 많지만, 현재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는 점과 완전히 변화된 ‘새 인생’을 갈망했다는 점은 같습니다.
두 사람의 희망과 간절함에 초점을 맞추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단순한 ‘치유 말씀’이 아니라, 그들이 원했던 ‘새 인생’으로 인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더욱 굳은 믿음을 갖고 나를 따라라. 그러면 네가 구원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르티매오의 뒷이야기는 모릅니다.
십자가를 향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에, 충실한 신앙인이 되어서 ‘새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수건으로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라는 전승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도 예수님 덕분에 완전히 영적으로 변화되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신앙생활은 당장 눈앞의 일에 대한 소원이나 빌고, 소원이 이루어지면 만족하는,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생활입니다.
세례식 때 흰옷을 입는 것은 새로 태어났음을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콜로 3,9ㄴ-10)
신앙인의 신앙 여정에서, ‘새로워지는 것’은 한 번으로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개안(開眼)의 여정 - 주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이 답이다>
오늘 복음은 복음서의 요약 같습니다.
상징들로 풍부하며 복음의 위치도 아주 적절합니다.
예루살렘 상경 여정중에 일어난 일이며 이어지는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또 오늘 복음 앞에는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가 있었으니,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정은 십자가의 길 여정임을,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오늘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신 일화 바로 앞의 일화입니다.
두 경우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앞서 제베데오의 두 아들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제가 볼 때 철부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직제자들의 내적 수준이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실망이 참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와의 만남은 참 신선합니다.
‘길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눈먼 거지 바르테매오’는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가난한 인간 실존을 상징하는 듯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는 모두 ‘길가에 앉아 길이신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눈먼 거지’일 수 있습니다.
눈먼 거지였지만 영혼의 눈은 주님을 찾는 열망으로 환히 열려 있던 바르티매오였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이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자 전광석화, 응답하는 바르티매오입니다.
주님을 찾는 열정의 반영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참으로 절박한 가난하고 겸손한 이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칠 단 하나의 기도가 있다면 이런 자비송뿐입니다.
이런 자비송으로 미사전례를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바로 바르티매오와 같은 열망으로 미사참례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르티매오의 영적 통찰력이 놀랍습니다.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영혼의 눈은 활짝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히브리서가 잘 설명해줍니다.
사람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인 분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는’ 대사제가 되신 예수님이요, 하느님께서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나를 낳았노라.”하고 인정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바르티매오의 영적 통찰은 정확했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간절히 열렬히 찾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이것은 올바른 충고가 아닙니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비송 기도를 바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자비송 기도에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말씀하십니다.
만류하며 방해하던 이들이 우군이 되어 그를 격려하는 말마디도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 각자에 대한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용기를 내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자주 쓰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을 상징합니다.
운명론적 체념을 떨쳐 버리고 ‘분연히 일어나 다시 부활의 새생명을 살라’는 절호의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는 숙명의 사슬과 같은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가니 과거와의 결별과 동시에 부활을 뜻합니다.
그대로 미사 장면 중 주님을 만난 이들의 내적상태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을 이룹니다.
과연 오늘 짧은 복음은 그대로 미니 복음서로 복음서의 요약 같습니다.
앞서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한 물음과 똑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시공을 초월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화두같은 영원한 물음입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정답을 말했습니다.
삶이 진실하고 간절하고 절박하면 말도 글도 짧고 순수합니다.
“스승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앞서 야고보와 요한의 청과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역시 우리가 드릴 소원의 청도 이것 하나뿐일 것입니다.
아마 이 두 형제 제자들이 이 경우를 목격했다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잠시 10월 한달 저를 행복하게 하는 두 시를 다시 나눕니다.
피정집 자캐오의 집 3층 제의방에서 바라보는 수도원 배경의 가을 불암산 풍경은 참 장관입니다.
눈앞에 가까이 있는 산이 순간 주님처럼 느껴졌고 흡사 주님을 만난듯한 체험을 했습니다.
여기서 태어난, 찾아온 두 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하나의 고백에 이어 엊그제 또 하나의 고백입니다.
“늘
앞에 있는 산
늘
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살아 있는 주님’을 만나듯 고백하며 되뇌는 두 편의 시로 요즘 많이 행복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의 절정이요 제1독서 예레미아 예언의 실현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가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육신의 눈이 열림이 상징하는 바, 마음의 눈, 영혼의 눈, 믿음의 눈입니다.
저는 지체없이 강론 제목을 ‘개안의 여정’이라 정했습니다.
멀쩡한 육신의 눈을 지녔어도 무지에, 탐욕에 눈먼이들, 눈뜬 맹인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개안의 여정’, 이 복음을 대할 때 마다 늘 정하는 제목입니다.
우리 삶은 계속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이면 좋겠습니다.
육안의 시력은 감퇴해도 영안의 시력은, 심안은 시력은 날로 좋아져야 너그럽고 자유로워지는, 풍요롭고 행복해지는 삶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항 처방이 바로 개안의 여정입니다.
개안은 만남입니다.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과의 만남은 물론 주변 모두를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개안은 회개입니다.
개안과 동시에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개안은 깨달음입니다.
눈이 열려가면서 깨달음의 진리들이 뒤따릅니다.
개안은 방향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눈이 열려 주님을 따름으로 희망의 길이 열리고 희망의 방향이 주어졌으니 이제 방황과 표류는 끝났고 희망의 순례자로 살면됩니다.
그러니 개안의 은총은 얼마나 지대한지요!
말그대로 오늘 복음은 예레미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예레미야의 기도가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됩니다.
시편 저자도 화답송을 통해 구원의 기쁨을 함께 합니다.
그대로 바르티매오는 물론 우리의 고백과 기쁨을 대변합니다.
“주님이 큰 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유배 후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르티매오와 함께 우리도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인 눈을 뜬 것>
달라스 지역에 어쩌다 ‘우박’이 내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우박을 보지는 못했지만, 우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박이 내리면 차량과 지붕에 피해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우박이 내린 후에는 지붕 공사 업자들이 무상으로 검사를 해 준다고 합니다.
검사 후에 문제가 있으면 유상으로 고쳐 준다고 합니다.
보험이 적용되면 큰 어려움은 없겠지만 생활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는 걸 막거나, 피할 수 없다면 그것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원망한다고 우박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게도 우박과 같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0년간 별 탈 없이 쓰던 노트북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통은 전원을 껐다 켜면 되는데 이번에는 그런 정도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지붕 공사 업자와 같은 본당 청년이 있어서 노트북의 검사를 맡겼습니다.
고마운 청년은 노트북을 검사한 후에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배터리가 팽창해서 위험하기에 배터리를 교체해야 한다고 합니다.
10년 된 노트북이기에 프로그램을 바꾸고, 용량을 키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프로그램을 바꾸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예전에 있던 자료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자료는 다른 노트북에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만 최근에 준비했던 강론과 강의 자료들이 없어져서 아쉬웠습니다.
내년 2월에 있는 ‘신앙강좌’ 강의와 10일 정도의 강론이 없어졌습니다.
이것도 제게 내린 우박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고, 강론도 다시 준비하면 됩니다.
느님께서 제게 더 좋은 강의와 강론을 준비하도록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자료는 없어졌지만, 그것을 준비했던 저의 노력과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노트북도 새로 마련했고, 자료는 가끔 외장 하드에 저장하면 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고치면 좋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임께서는 당신 찬미를 즐기라 재촉하시고,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니,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불안합니다.”
우리의 건강에, 우리의 사업에, 우리의 가족에게 우박이 내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하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받아들일 것과 피할 수 있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큰 우박을 맞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라는 눈먼 거지의 이야기입니다.
눈이 멀었던 바르티메오는 일을 할 수 없기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눈이 먼 것에 대해서 세상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눈이 먼 것에 대해서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르티메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었도 은총입니다.”
열심히 얻어먹던 바르티메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걷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눈도 뜨게 해 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바르티메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티메오의 앞을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큰 소리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말렸지만 바르티메오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이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메오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바르티메오는 평생의 소원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바르티메오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아니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운명처럼 우박을 맞아서 소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르티메오가 죄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르티메오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드디어 바르티메오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보고 싶은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티메오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세상을 보는 육체의 눈을 뜬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뜬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도록,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이렇게 청하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새 영세자가 하느님의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새 영세자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면서 말입니다.
단순히 새 영세자에 대한 축하한다는 의미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새 영세자는 하느님을 소유할 줄 모릅니다.
6개월간 교리를 받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기 때문에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 곁에 있을 뿐입니다.
아직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하느님 품 안에 있는 것으로도 기뻐합니다.
순수하게 하느님 품 안에 있으니, 하느님을 영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더 커다란 은총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새 영세자와 달리 오랫동안 성당을 다니셨던 분은 하느님을 소유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저것을 요구합니다.
이제까지 했던 기도와 묵상, 봉사, 희생 등의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품에 머물려고 하기보다, 하느님을 소유하려 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만든 가짜 하느님을 만날 뿐입니다.
이런 가짜 하느님께는 아무리 요구해도 당연히 들어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크신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서 존재하시면서, 우리가 그 안에 머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종종 자기가 만든 가짜 하느님을 남에게 강요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야.”라면서, 자기만의 가짜 하느님을 상대에게 강요합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그는 볼 수 없으니 예수님 곁에 머물 수가 없어서 용기 내어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그가 예수님 곁에 머물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를 부르셨고,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갑니다.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그는 족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 의지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보게 되자마자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하느님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바르티매오처럼 우리 마음속 의지가 새로운 삶을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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