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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5일 월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제1독서 : 묵시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제2독서 : 1코린 15,20-27ㄱ
복 음 : 루카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네이버 뉴스 기사에 올라온 댓글로
사람들의 추천을 많이 받아 ‘베스트 댓글’이 되었다고 합니다.
과연 얼마나 잘 쓴 댓글일까요?
“빌 게이츠? 그저 운이 좋아 프로그램 하나 만들고 억만장자가 된 사람이잖아.”
“사실 아이폰을 만든 건 스티브 잡스가 아니지.
잡스는 진짜 천재인 워즈니악한테 빨대 꽂은 인간이지.”
“왜 다들 워런 버핏을 현자니, 뭐니 치켜세우는지 이해가 안 돼.
그 사람 그냥 주식으로 해서 돈 번 사람 아닌가? 개미들 피 빨아먹는 투기꾼일 뿐이야.”
어떻습니까? 진짜 공감이 가는 댓글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남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가짜 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감할 필요도 없고, 공감할수록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부족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족한 사람의 평가가 완전할 리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많음을 스스로 깨달으며 자기편을 만들어 갑니다.
이 세상에서 할 새로운 일도 더불어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어머니 성모님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아직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분명 기뻐할 일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기뻐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간음죄로 공개적으로 처형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느님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세상의 시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엘리사벳 역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했던 두 사람은
우리 구원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을 낳게 되었습니다.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시선에 집중하고 있나요?
세상의 시선에 집중할수록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아, 어머니! 성모 마리아
-교회의 어머니, 신앙의 어머니-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정인보(1893-1950) 작사, 윤용하(1922-1965) 작곡-
성가처럼 느껴지기도 할 광복절 노래 한 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8월 15일은 제77주년을 맞이하는 광복절이자,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72년 전,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는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림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계시된 진리”라고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이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며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에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 받으셨다”(교회헌장59항),
성모승천 교리를 교회의 정통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자 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을
주제로 발표한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 메시지도 은혜로웠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을 모범 삼아, 험하고 힘든 세상에 다리를 놓아야 하며,
교회 자신이 다리가, 신앙의 다리, 사랑의 다리, 통합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교황님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가 ‘폰티펙스’(Pontifex)인데,
이는 ‘다리(pons)’와 ‘만들다’(facere)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그 어원이 ‘다리를 놓는 사람’이란 뜻이라 하니 참 의미심장합니다.
교황님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다리를 놓는 소통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세상에 신앙의 다리, 희망의 다리, 사랑의 다리,
즉 신망애의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교회의 어머니, 신앙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닮는 일입니다.
성모님이야말로 기쁨과 희망의 어머니요, 찬미와 감사의 어머니요,
승리와 영광의 어머니로 우리 믿는 이들의 믿음의 모범이요 영원한 어머니가 되십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 시 찬미가와 후렴 노래도 은혜로웠습니다.
“태양의 빛 입으신 동정녀시여, 열두 별 머리 위에 꾸미신 이여,
저 달을 발판 삼아 우뚝 서시니 환하게 빛나도다. 당신의 광휘”
바로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 근거한 찬미가요,
이어지는 후렴 및 즈카르야 노래 후렴도
한결같이 성모님께서 하늘에 올림 받으셨음이 강조되었습니다.
“기뻐하라, 오늘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시는도다.”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곳에 왕 중의 왕께서, 별빛 찬란한 옥좌에 앉아 계시는도다.”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으니 천사들이 기뻐하며, 주를 찬미하는 도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또한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아, 이 모두는 성모님의 지상 생애를 반영합니다.
참으로 치열히 일편단심 하느님과 아드님께 자신을 남김없이 헌신했기에
이런 승천의 영광으로 하느님께서 보답하신 것입니다.
이런 성모님을 하늘에 불러올리신 하느님께,
희망의 표징인 성모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우리 또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기다리고 인내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참 좋은 이웃의 다리가 되어 살 수 있을까요?
첫째, 겸손과 소통의 어머니 마리아를 닮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과의 만남과 우정이 이를 입증합니다.
영적 도반 엘리사벳을 친히 찾아 나선 겸손과 소통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참 은혜로운 만남입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의 태중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참 그림 같은 아름다운 영적 도반들의 만남입니다.
두 어머니들과 더불어 태중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인생 광야 여정 중 이런 영적 도반과의 만남은 그대로 오아시스입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더불어 영적 도반들인 형제들을 새롭게 만나
영적 우정을 새롭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 시간 그대로 오아시스 같습니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참으로 깊은 영적 우정관계에 있는 두 어머니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새삼 그 어머니에 그 아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 찬미와 감사의 어머니 마리아를 닮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의 응답에 감격한 마리아의 찬미가 참 아름답습니다.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바로 오늘 마리아의 노래는 초대교회 가난한 이들, 즉 아나뵘의 노래였습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에 대한 노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유일한 자산이 바로 이런 찬미 感謝歌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이어지는 마리아의 노래는 늘 불러도 새로운 힘과 감동을 줍니다.
평생 날마다 저녁 성무일도 끝 무렵에 성모님과 함께
아나뵘의 영적 후예들인 우리 믿는 이들이 바치는 노래 기도입니다.
이런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을 통한 주님의 은총이 성모 마리아를 닮아
우리 모두 외로움과 고독의 광야 세상에서 참 좋은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게 합니다.
信望愛의 수련에, 훈련에 하느님 찬미와 감사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찬미와 감사의 맛에, 기쁨에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셋째, 승리와 영광의 어머니 마리아를 닮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사신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궁극의 승리는 하느님께 있으며 성모님처럼
주님 향한 신망애의 삶에 항구할 때 영적 승리에 영광의 삶입니다.
바로 성모님의 승천은 성모님의 영적 승리와 영광을, 희망과 기쁨을 상징합니다.
그대로 성모님의 평상시 삶의 성취가 바로 성모님의 승천입니다.
바로 이런 어머니의 승리와 영광의 삶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으로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그대로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살만한 세상입니다.
그리스도님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기쁨과 희망의 표징이자
승리와 영광의 표징인 성모 마리아님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성모님을 닮은 살아계시거나 이미 세상을 떠나신 우리 어머니들입니다.
오늘은 이미 돌아가신 제 어머니 신마리아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 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내 어머니,
신 마리아!
삶 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었고 종교였다.
이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상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어머니를 그리며” 기도시 중 떠오른 한 대목입니다.
알게 모르게 신망애의 삶을 사셨던 우리 어머니들도
모두 성모님과 함께 승천의 승리와 영광을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승리와 영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오늘 아름다운 감사송을 나눕니다.
오늘 하루 깊이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며 지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늘에 오르신 분, 하느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나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의 아드님께서
동정 마리아 몸에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에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이 무덤에서 썩지 않도록 섭리하셨나이다.”- 아멘.
정용진 요셉 신부
대형 유람선을 탄 승객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보다
그날 식단과 놀거리에 더 관심을 보인다고 합니다.
“영원성을 삭제하면 지평선은 언제나 좁게 보인다.”라는
어느 이탈리아 주교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먼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들에게는 올여름에 어디 갈 것인지,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어떤 클럽에 갈 것인지,
오늘 저녁을 먹고 나면 무엇을 할 것인지가 더 흥미로운 관심사입니다.
이런 현상은 어른들 탓이 큽니다.
어른들의 생각과 삶 속에서
점점 ‘힘들지만 참는다’, ‘영원하다’, ‘결정적이다’ 등과 같은 말이 사라졌고,
그 영향이 젊은이들에게서 보이는 듯합니다.
우리는 점점 ‘지속’, ‘충실’, ‘인내’와 같은 낱말을 멀리하려 합니다.
현재가 영원할까요? 현재를 영원한 것으로 믿고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한 여인을 소개합니다.
그는 한 아기를 낳은 빛나는 옷을 입은 여인입니다.
붉은 용이 이 여인을 적대시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그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하지만,
아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여인은 광야로 숨습니다.
이 여인은 명백히 교회를 상징합니다.
또한 구세주 메시아를 바라는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용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뱀을 떠오르게 합니다.
모든 악이 폭력을 휘두르며 아기와 교회를 반대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교회는 아기를 지켜 내고 우리는 광야로 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귀의 시련과 유혹에 시달리겠지만 그가 우리를 죽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성모님께서 광야로 피신한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하늘에 올라가셨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성모님의 위대함을 알리는 진짜 이유를 알려 줍니다.
바로 그분의 믿음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믿음은 성모님의 온 생애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가 썩을 몸으로
끝날 인생이 되지 않게 하시리라는 것을 믿으셨고,
마침내 하늘로 불려 올라가시어 우리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인생입니까?
우리가 탄 배의 종착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귀양살이하는 하와의 자손들이
슬픔의 골짜기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성모 찬송’ 참조)라는 말처럼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이 길의 끝은 성모님 생애의 끝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어머니처럼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인생이 거룩한 순례길임을 믿으며
하늘에 오르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깊은 사랑과 공경을 드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을 각별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을 지내면서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을 선포하셨던 예수님, 많은 표징과 말씀을 전하셨던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으로 믿었습니다.
성부와 성령과 성자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 되셨으니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인 마리아는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두 번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의 몸은 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 역시 거룩한 몸이라는 믿음입니다.
성모님은 루르드에서 발현하셨을 때에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여인’이라고 벨라뎃다 성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리아의 승천입니다.
첫 번째 인간인 하와는 죄를 지었고,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거치지 않고 승천하셨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네 번째는 동정이신 마리아입니다.
교회는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가복음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도 있지만
성모님께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순명’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들었던 성모님은 당혹스러웠지만, 하느님의 뜻임을 알았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순명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순명은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열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열정이 있었고, 가야 할 길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 굶주린 이를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는 ‘중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혼인 잔치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청을 받아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미래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은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분단된 조국은 절반의 광복입니다.
언젠가 하나 되는 조국으로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기쁨인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1950년 11월 1일, 한국에서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있을 때,
교회는 '성모님의 승천' 교리를 선포함으로써 인간의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진 기쁨인 광복을 기념합니다.
이 광복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이 파티마 성모님의 전구로 종결되었듯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 역시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을 찬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는 첫 여인인 하와와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납니다.
두 분 다, 맨 먼저 먹는 일, 곧 식사에서 출발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탐욕을 부려 따먹고 자신이 높아지기를 도모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아채고
다른 이들이 마시고 즐거울 수 있도록 도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와는 탐욕을 부리는 인류의 어머니가 되고,
마리아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땅에 묻혀 한 줌 흙이 되어 사라졌지만,
마리아는 하늘에 올라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이토록 불신으로 자신을 배불려 기쁘고자 한 자와
믿음으로 타인을 배불려 기쁘게 하도록 한 분의 결과는 참으로 큽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의 승천이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고 여전히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심을 드러내주듯이,
성모님의 승천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돌보시며
함께 하고 계신다는 축복이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곧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요 사랑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승천은 하늘에 올라감임과 동시에
우리에게로 되돌아와 우리와 함께하시며 여전히 우리를 돌보심을 말해줍니다.
또한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에 오르심의 영광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하늘에 오를 것을 보여 줍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에페 2,6-7).
그렇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바로 이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들은 '성모님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일 뿐 아니라 그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찬미 노래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님의 자애와 돌보심을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사부 베네딕도께서도 수도승들이 찬미의 생활을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하느님을 찬미하기를 원하셨고(시전례 성무일도),
특별히 <수도규칙> 머리말에서는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머리말 30절)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구원)을 이루고 계시는
주님과 주님의 자비를 찬미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만나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주님을 찬송하고, 구원자 주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시고,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신 마리아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모승천 대축일
오늘은 육신과 영혼이 함께 영광을 받으신 동정 마리아의 승천 대축일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마리아에게서 결정적으로 완성되고 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업적에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마리아의 영광은 마리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될 일의 표징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을 준다.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바오로는 마리아도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로부터 부활을 얻는다고 말한다.
마리아와 우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마리아는 죽음의 지배를 전혀 받은 분이 아니다.
죄가 마리아를 스쳐 가기조차 하지 않았다.
마리아에게 있어 마지막 원수(1코린 15,26)는
이미 원죄에 물들지 않은 잉태의 순간부터 파멸되고 말았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이미 영원으로부터
당신의 아들을 잉태하실 수 있도록 마련하신 분이시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땅에서 흙을 빚어 만드셨는데
그 땅은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깨끗한 “처녀지”였다.
그 땅의 흙으로 첫 아담을 지어내셨다.
마찬가지로 둘째 아담이신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으로 태어나시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순결한 죄에 물들지 않은 처녀, 동정녀가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에 물들지 않은 성모님은 죽음의 고통 없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셔야 마땅했다.
묵시록은 마리아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메시아가 태어나야 할 메시아 공동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여인으로 나타나는 메시아 공동체는 박해와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면한 교회이다.
교회 헌장은
“은총의 계획 속의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하신 그 순간부터
-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 없이 지속되었다-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주신다.
당신 모성애로써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이 지상 여정에서의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돌보시어 복된 고향으로 인도해 주신다.”(62항) 말하고 있다.
이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야말로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싸움과 승리의 가장 고귀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복음: 루카 1,39-56: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신 마리아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실과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믿음과 신적 모성에 대해 찬양하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2-45절).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다름없는 여인이었지만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그것은 자신의 위대성을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선은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요한에게 봉사하시지만,
나중에는 인류 역사 안에서 모든 사람을 섬길 것이다.
오직 생명과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만이 어머니가 될 수 있다.
마리아는 자신 안에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것을 나누신다.
사실 마리아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신적 모성에 대한 소식을 알리는 순간에
발하신 동의로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어 하느님의 가장 충실한 도구가 되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사람이 되신 말씀”(요한 1,14)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종이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승천에 이르기까지 마리아 안에서 충만히 실현되었다.
다음에 엘리사벳의 찬사에 대한 응답으로 ‘마리아의 노래’가 나온다.
모든 내용은 하느님께 다시 바쳐지고 있다. 그분만이 찬미를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마리아가 이 세상의 역사의 한 가운데 있음을 깨달았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48절).
그것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마리아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인간의 생각과 가치관과는 다른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1-53절).
하느님은 인간들의 길을 따르는 분이 아님을 마리아는 알려 주고 있다.
마리아의 위대함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시고,
다른 사람을 위해 당신의 것을 나누시는 구체적 사랑의 행위이다.
거기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마리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그 마리아의 모습이 모든 생의 의미를
현세에서만 찾으려는 우리가 깊이 알아들어야 할 점임을 생각하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항상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닮을 수 있는 삶을 노력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나의 마니피캇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모승천 대축일‘은
주님성탄, 주님부활, 성령강림 대축일과 더불어 교화의 4대 의무 대축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성모승천 대축일이 이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다른 세 가지 대축일과는 달리 많은 신자들에게 조금은 멀리,
그리고 낯설게 여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는 전자의 3대 축일이 하느님 예수와 성령에 관한 대축일인 반면에
오늘의 대축일은 우리와 같은 인간 마리아에 관한 대축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모승천 대축일‘을 정확히 표현하여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이라고 한다.
’성모몽소승천 대축일‘이란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신 후
그 육신과 영혼이 마리아의 자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하늘에 올려짐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주님 성탄, 주님 부활, 성령강림 대축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에 펼치신 인류구원 사건인데 비하여
성모승천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 마리아에게 베푸신
최고의 은총을 기념하는 사건이다.
둘째는 오늘의 대축일이 3대 대축일과는 달리 성서상의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기록은 성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거룩한 전통인 聖傳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마리아에 관한 축일은 동방교회에서부터 시작되는데,
4세기 중엽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제정하여 마리아의 죽음과 승천을 기념하였다.
이를 본받아 서방교회에서도 7세기초 로마의 황제 마우리씨오(582-602)가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을 8월 15일로 정하였다고 한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성모 마리아는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에페소 지방에서
요한 사도와 다른 몇몇 사도들과 함께 사시면서,
그곳의 신자들에게 당신 아들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날이 덕행과 믿음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셨다고 한다.
당시 마리아의 소망은 단 한 가지로서, 천국에서 당신 아들 예수를 다시 뵙는 것이었다.
성모 마리아는 15년 동안 이곳에서 사시다가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리아가 임종할 그때에 공교롭게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와 같이
토마 사도를 뺀 다른 모든 사도들이 모여 마리아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돌아가신 후 무덤에 안치했다고 한다.
3일이 지난 후 마리아의 임종 소식을 들은 토마 사도가 급히 돌아와서,
성모 마리아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려야 한다면서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무덤을 다시 열어보았더니
마리아의 유해는 온데 간데 없었고 수의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목격한 사도들은 마리아께서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여 당신 아드님처럼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을 믿고,
이러한 영광을 마리아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이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성모몽소승천은 초대교회 때부터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믿어왔던 은혜로운 신앙 조목으로서,
여러 차례 성모님의 발현과,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과 더불어
성모께 대한 공경과 신심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해온 것이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힘입어
’성모 무염시태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이는 천주의 어머니이시며 동정녀이신 마리아가
그의 양친 요아킴과 안나로부터 잉태되는 그 순간에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온 신자들이 믿어야 할 교리로 선포한 것이다.
나아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가장 풍요로우신 하느님‘이라는 사도헌장을 반포하여,
마리아가 죽은 후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는 교리를 믿어야 할 신앙 교의로 선포하고
전통에 따라 8월 15일을 성모몽소승천 대축일로 정하였다.
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서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
원죄의 결과가 가져다주는 죽음에 예속되지 아니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셨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로써 전 세계의 교회는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은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께 나누고 있음을 경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리아보다 앞서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업적, 그리고 공로로써 부활 승천하셨지만,
마리아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의하여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시는 은혜를 받으신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부활과 승천은 마리아의 개인적인 영광일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인간이 미구에 받게 될 부활과 승천의 원형이며 모델로서,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기뻐하며 기념하는 대축일의 크나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낱 인간인 마리아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틀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광이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영광과 은총은 마리아 편에서 볼 때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하느님 편에서 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마리아의 굳건한 믿음과 겸손이다.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동정녀의 잉태였을망정
전능하신 하느님의 능력에 전적인 신뢰와 온전한 믿음을 걸었던
마리아의 태도가 구세주의 탄생을 가능 케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 사업에 지대한 협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찬미를 받는다.
엘리사벳의 찬미에 이어서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를 노래하는
마리아의 ’마니피캇‘에서 우리는 그분의 지극한 겸손을 알 수 있다.
주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어 기뻐했던 마리아의 겸손,
자기에게 주어진 온갖 영광과 은총을 다시금 주 하느님께 돌리면서
모든 것이 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하시는 마리아의 겸손,
이는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덕행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생활 속에서 나의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기뻐 설레어지는가?
우리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와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다시금 돌려 드리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그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대답이 ’그렇습니다.‘라면, 우리도 틀림없이 성모 마리아 곁에 성큼 다가서 있을 것이며,
마리아의 마니피캇이 바로 우리의 마니피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광복절을 함께 경축하면서.....
사람은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천재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마지막 작품이고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힙니다.
그는 1600년경에 귀족들의 그림을 도맡아 그리던 가장 유명하고 실력도 완벽한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술만 취하면 욕설과 폭행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돈을 대어 그를 빼내 주고는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간 횟수가 열다섯 번이나 됩니다.
자기 실력을 믿고 그렇게 자만하던 중,
1606년 5월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가 다시 후원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번엔 모두 등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탈옥에 성공하여
이태리 가장 남쪽의 섬 몰타로 도주하여 몸을 숨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지긋지긋한 나머지
유일한 사면권이 있었던 교황을 설득해보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1610년 세계 처음으로 조명을 사람에게 직접 비추는 기법을 이용해
어린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들어 올리는 그림을 완성해냅니다.
이 그림은 교황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그림 속의 다윗은 어렸을 때의 순수하고 겸손했던 자기 모습을 의미하고
목이 잘린 흉측한 골리앗의 머리는 지금의 자신을 상징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성직자들의 말에 불순종하여
끊임없이 범죄를 저질러왔던 자기 자신을 죽였음을 의미하는 회개의 증거품이었던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그 완성품을 들고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랐으나
중간에서 경찰들이 카라바조를 연행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를 도둑으로 오인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만 그림을 배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경찰들은 카라바조가 도둑이 아닌 것을 알고 놓아줍니다.
그러나 그림을 가지지 않고서는 교황에게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배를 쫓아 걷고 또 걷습니다. 그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길거리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카라바조는 왜 그 그림에 그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그 그림이 아니면 교황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그림 안에 자기 뜻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넣기 위해 피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니 소중한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뜻이 들어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를 사랑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점점 커감에 따라 부모의 뜻이 아기 안에 더 들어갑니다.
아이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부모의 뜻을 아이를 통해 실현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주시는 부모에게 감사해서 그분들 뜻을 따라줍니다.
그렇게 두 발로 걷고 말도 하고 공부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부모는 그 아이 안에서 자기 살과 피로 넣어준 그 뜻, 그 보석을 보며 아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피 흘리고 고생한 자녀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 아니실까요?
인간이라고 해서 다 천국에서 살게 하실 수 있을까요?
그러면 가리옷 유다도 지옥으로 보내면 안 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리옷 유다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넣어주시기는 하였지만, 자신을 죽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 뜻이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불이 났을 때 내가 들고나오는 것이 내 피가 가장 많이 섞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체를 영해도 그분 뜻을 실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께 귀하게 쓰일 수 없습니다.
‘시몬과 페로’라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나이 든 시몬은 감옥에 갇혀 젊은 여인의 가슴에서 젖을 먹는 음란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젊은 여인은 시몬의 딸 페로입니다.
페로는 아사형을 받은 아버지를 위해 아기에게 주어야 하는 젖을 아버지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성모님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성모님을 육체적으로 칭송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모님께서 칭송받으셔야 할 더 큰 의미를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모님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잉태하실 때 주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서약한 것입니다.
그렇게 페로처럼 비난받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런 분에게 영광이 주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있습니다.
수수한 옷차림에 커다란 귀걸이를 한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 영화에서는 이 소녀가 가정부로 묘사됩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젊은 나이에 남의 가정부로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것은 가난한 화가뿐입니다.
그 화가도 능력이 부족하여 아내 집에 얹혀삽니다.
아내와 딸, 장모님은 화가가 그 여자와 빠지지 않도록 빈틈없이 감시합니다.
소녀는 그들에게 지쳐갑니다.
그 소녀를 노리는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 화가에게 돈을 대는 부자입니다.
그는 그 소녀를 그리면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소녀를 그리는데 화가는 아내의 진주 귀걸이를 귀에 걸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어찌 될지 뻔합니다.
그리고 소녀를 좋아하는 연인도 그 집에서 나오라고 합니다.
그 연인은 그 화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임신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녀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하는 행동으로 그 화가만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인간적으로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그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기로 합니다.
화가는 그 그림으로 매우 유명해집니다.
덕분에 소녀는 쫓겨나고 연인과도 사이가 안 좋아집니다.
몇 년 뒤 화가의 하녀가 그 소녀에게 선물을 전해옵니다.
그 진주 귀걸이입니다. 화가는 자신의 영광을 그 소녀에게 돌린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이런 희생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뜻이 성모님 태중에 잉태되시고 그분의 피 흘림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진주 귀걸이의 영광을 받아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성모님께서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갑시다.
그 피 흘림이 영원한 승천과 영광의 유일한 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