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종점, 목포는 항구다
누가 뭐래도 목포는 항구다.
부산이, 여수가 항구가 아닐 리 없지만 항구와 아귀가 딱 맞는 한 문장을 만들기엔 목포만 못하다. 노래 한 곡의 강렬한 힘, 그 정의(定意) 때문이다. 남진이 “눈물 얘긴 그만하자”고 하지만, 눈물 없이 어떻게 ‘오래된 목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목포의 노래들이 유달산과 노적봉, 삼학도와 영산강이란 삼각대 위의 견고한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연락선을 타고 사랑과 함께 사라져 남이 된 님이 거나 돈 벌러 화물선을 타고 떠나간 님이거나, 항구의 님은 쓰라린 이별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눈물이 말라붙은 비릿한 항구를 ‘발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대의 저인망이 비켜 갔기에 오래된 목포는 근대사의 거리에 남아 있는 적산(敵産)을 지킬 수 있었다.
유달산이 빠진 ‘목포의 노래’는 없다
유달산은 목포의 상징이자 중심이다. 228m에 불과한 산이지만 노령산맥이 끝맺음하는 산줄기의 종점이다. <산경표>에 따른다면 호남정맥의 한 줄기인 영산기맥의 시발지이자 종착지다.
돌산의 뼈대가 그대로 맨살을 드러내는 형국이니 금강이나 설악의 바윗돌이 떠내려오다 큰 덩어리는 영암 월출산이 되고, 작은 덩어리가 여기 목포 바다로 빠지기 직전에 간신히 붙잡은 거라고 ‘유달산’의 전설을 만든다면 허풍이 될까.
원도심에 살던 일본인들이나 구도심에 살던 조선인들이나 목포 사람들은 유달산을 바라보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목포가 곧 유달산이었다. 그러자니 숱한 목포의 노래는 유달산과 노적봉, 삼학도와 영산강의 견고한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익숙한 지명이 소절마다 자리를 잡는 순간 목포의 노래는 완성된다.
유달산은 신선이 춤을 추고 영혼이 거쳐 가는 바닷가의 산이다. ‘일등바위’와 ‘이등바위’가 주 법정이고, ‘삼등바위’는 북서쪽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다. 사람이 죽으면 일등바위에서 심판을 받고, 이등바위에서 대기를 하다가 극락행이 결정되면 3마리의 학을 타고 삼학도로 간다. 아니면 고하도 용머리에서 용을 타고 승천하거나 거북섬으로 가서 거북 등에 업혀 용왕님을 알현(謁見)하게 된다는 전설이 숨 쉰다.
노적봉에서 몇 계단만 오르면 대학루(待鶴樓)다. 여기만 올라도 목포 시내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고하도, 해남, 영암 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육지가 되어버린 삼학도는 물론이다. 바쁜 관광객들이 유달산에 올라, 이난영의 노래비를 찾아 3절까지 가사를 음미하는 동안 애절한 노래<목포의 눈물>이 해무처럼 에워싼다. 일본 사람들도 즐겨 불렀다는 노래, 이 시대 평양사람들도 부른다는 대단한 노래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1935년, 오케레코드)
<목포의 눈물>의 노랫말은 1935년 조선일보와 오케레코드사가 함께한 ‘10대 도시 향토노래 현상모집’에 응모한 와세다 대학 출신의 20대 무명시인 문일석의 <목포의 사랑>이 원작이다.
3절까지 있는 가사 가운데 2절의 스타트는 일제의 눈에 거슬릴 것이 뻔했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은 바로 ‘임진왜란’을 뜻하지 않는가. 노적봉의 유래는 이 큰 바위봉우리가 볏짚노적가리처럼 보여 “저렇게 많은 군량미가 있다면 전투를 해도 승산이 없다”고 왜적이 물러갔다는 전설까지 안고 있으니 말이다.
‘삼백년 원한 품은’은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이란 알쏭달쏭한 신조어로 바꾸어 경찰의 검열을 통과했고, 흥행의 귀재인 오케레코드 이 철 사장이 ‘사랑’을 ‘눈물’로 고쳐 탄생했다. 노래비에 이렇게 원래의 가사와 오늘날의 가사가 함께 새겨진 것은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4분의 2박자, 라단조의 약간 빠르기를 지닌 이 노래가 프로야구 해태구단의 응원가가 된 것을 보면 눈물도 응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노래의 작곡가 손목인(본명 손득렬)은 1930년에 이미 음악에 뜻을 두고 일본 동경음악학원을 졸업한 신예였다. 1934년에 고복수의 대표곡 <타향살이>를 힛트한 데 이어, <목포의 눈물>까지 레코드 5만장(당시 경제나, 인구를 감안하면 일본 기준으로 30만 매 이상)을 팔아 재낀다. 민족의 노래를 만든 진주사람 손목인과 목포사람 문일석과 이난영이 와서 본다면 여전히 아물지 못한 영·호남 지역감정의 깊은 상처를 보고 뭐라 탄식하겠는가.
이난영에 대한 이야기는 <이난영 생가터>와 <이난영 공원>을 둘러보면서 더 이어가기로 하고, 또 하나 목포의 노래를 불러본다. 이미자의 <유달산아 말해다오>이다.
꽃피는 유달산아 꽃을 따는 처녀야/ 달뜨는 영산강에 노래하던 총각아/ 그리움을 못 잊어서 천리 길을 왔건만/ 님들은 어데 갔나 다 어데 갔나/ 유달산아 말해다오 말 좀 해다오
옛보던 노적봉도 변함없이 잘 있고/ 안개 낀 삼학도에 물새들도 자는 데/ 그리워서 보고파서 불러보는 옛 노래/ 님이여 들으시나 / 못 들으시나/ 영산강아 말해다오 말 좀 해다오
<유달산아 말해다오> , (반야월 작사, 고봉산 작곡, 이미자 노래, 1967년, 지구레코드)
어쩌면 이렇게도 <목포의 눈물> 속의 지명이 판박이처럼 그대로 등장하는가. 민족의 혼과 일제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비장미가 빠진 반면, 그 자리에 잃어버린 사랑과 애절한 추억을 꼭 같은 유달산과 노적봉, 삼학도와 영산강에다 노래하고 있다. 트로트 가수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불러봤을 ‘목포의 노래’다.
이난영이 태어난 목포 양동 그 언덕
유달산 순환도로를 따라 이난영이 태어난 곳으로 향한다. 자전거통행을 금지한다고 서있으나 아무도 지키지 않는 금지표다.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하물며 사람도 다니는 길을 ‘자전거만 오가지 말라’는 횡포는 40년간을 무단히 자전거를 박대한 서울 ‘북악스카이웨이’랑 너무 닮아 있다. 하기야 그 길도 십수 년 전 필자가 “못 가는 근거를 대라”며 끈질기게 요구한 나머지 풀린 금지다. 왜색이라는 이유로, 비탄조라는 잣대로 묶였던 ‘방송금지곡’의 해금(解禁)처럼말이다.
이난영의 생가는 유달산 순환도로에서 내려와 북교초등학교를 건너 양동 언덕 위에 있다. 생가는 헐리고 그 자리에 이난영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세모꼴 슬레이트 지붕이 철거 전 마지막 사진으로 남아 있는 것을 봐도 가난에 이골이 난, 그 시절 흔한 집이었다.
1916년에 태어난 이난영은 본명 이옥례는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었고 북교초등학교 학적부에는 이옥순으로 남아있다. 목포시 양동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원도심과는 달리 서양 선교사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어서 소녀 옥례가 유성기 소리와 서양음악의 오르간 반주에 친숙했을 거라는 추측이다.
2살 위 오빠가 이봉룡이다. 국민학교만 마치고 솜 공장 직공으로 있다가 무능한 아버지를 못견딘 어머니를 찾아 제주로 가서 일본인 극장 주인집에서 요즘 말로 베비시터를 하며 유성기 노랫소리에 흠뻑 빠진다. 오빠 봉룡도 극장의 영사기사 조수 일을 하다가 실수로 필름에 불이 붙어 극장을 홀랑 태워 먹고 육지로 도주했다. 극장을 단장한 첫 공연이 ‘삼천리 가극단’이었고, 이옥례는 거기서 막간 가수로 박수를 받으면서 극단의 유랑 길에 나선다. 그 후의 이난영 시대는 삼학도에 새로 단장한 ‘이난영 공원’에서 마저 이어가기로 한다.
삼학도가 유달산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전설에서 출발한다. 유달산에서 수련하던 청년무사를 사랑한 한 마을 세 처녀가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배를 멈추게 하려고 쏜 화살에 배가 침몰하는 순간 세 마리의 학이 되어 솟아오른 처녀의 혼은 그 자리에 떨어져 삼학도 세 개의 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죽어서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이 맺힌 것이어서 유달산 이난영 노래비 아래에 학을 기다린다는 정자 ‘대학루(待鶴樓)’는 뜻을 알고 나면 남다르게 보인다.
조용연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