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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나해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나쁜 사람’ 안 되는 법: 사랑은 ‘나’를 포기하게 만든다>
- 전삼용 요셉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xq0XTZF2by0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왕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헤로데가 되살아난 것이라 여깁니다. 두려움에 머리가 이상해진 것입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와 살기 위해 그것을 비판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중이 두려워 죽이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잘 추자 그녀의 뜻대로 요한을 처형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왕이면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생각을 하고 군중과 가족들에게 휘둘립니다. 그리고 결국 예언자를 죽이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 자신의 주인공으로 살다가는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이 됩니다. 나뿐인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주인공으로 삽시다.’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남에게 휘둘리지 말고 자기 주관대로 살자는 말입니다.
책 제목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나』,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 『잊지마,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는 걸』 등의 제목으로 책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나’로 산다는 것의 깊은 의미를 성찰하지 못한 말들입니다.
헤로데도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나의 주인공이 되어 살려는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나’라는 말은 나의 정체성과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사귈 사람을 규정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화 ‘트와일라잇’은 ‘벨라’란 한 인간 여인을 사랑한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늑대인간 ‘제이콥’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영화이지만 ‘나’라는 정체성이 어느 세계에 속하게 만들고 누구와 사귀게 되느냐를 말해주는 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집니다. 뱀파이어지만 착한 뱀파이어입니다. 동물들의 피만 먹고 사람의 피는 먹지 않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로 작정한 몇 안 되는 뱀파이어 가족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벨라 옆에는 사람의 피를 먹는 뱀파이어들도 득실댑니다. 자신을 사랑하다가는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 그녀를 떠납니다.
이때 늑대 인간 제이콥이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뱀파이어가 아닌 한 보통 인간을 사랑하고 싶어 조금씩 그에게 의지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처음에 사랑했던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제이콥은 벨라가 걱정돼 전화를 건 에드워드에게 벨라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에드워드는 살 의욕을 잃고 햇빛에 자신을 노출시켜 자살하려 합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벨라는 자살하려는 에드워드를 구해주고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에드워드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뱀파이어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인지 알면서도 그 청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인간들 안에서 숨어 살며 인간을 해치지 않고 모든 위협을 참아내며 살아가야 하는 뱀파이어의 삶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벨라도 이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둘의 사랑이 너무 강렬했기에 뱀파이어는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듭니다.
여기서 ‘나’는 늑대, 인간, 뱀파이어로 나뉩니다. 그리고 뱀파이어도 좋은 뱀파이어와 나쁜 뱀파이어로 나뉩니다. 이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은 ‘나’라는 정체성입니다.
내가 뱀파이어를 사랑하고 뱀파이어의 세상에서 뱀파이어를 사랑하려면 ‘나’가 뱀파이어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에드워드는 뱀파이어지만 인간을 사랑하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인간은 뱀파이어가 되기 위해 인간의 삶을 포기합니다.
헤로데는 이 세상에 살며 이 세상 사람들과의 친교를 위해 예언자 요한을 죽였습니다. 나를 바꾸지 않기 위해 나를 바꾸기를 원하는 이를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믿는 ‘나’가 ‘사람’이라는 인간들이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친교를 넘어서는 더 높은 수준의 친교가 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새장이나 어항에 머물며 그 안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것이 아닌 바다와 창공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고 그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음을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길은 나를 이 세상에 가둬놓는 ‘나’라는 정체성을 더 큰 ‘나’와 교환하는 것입니다. 벨라가 인간이라는 협소한 세상을 벗어나 영원히 죽지 않는 뱀파이어의 사랑을 하기를 원해 한 일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한 것입니다.그녀는 이제 “나는 뱀파이어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주어 교환하는 행위입니다.
나뿐인 사람은 나를 지키기 위해 누구와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이는 나쁜 사람이 됩니다.
인간인 ‘나’를 포기하고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나’로 삼으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나’로 살면 나를 살리기 위해 ‘나’가 속은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노예가 됩니다. 헤로데처럼 괜히 삶의 주체가 ‘나’가 됨으로써 세상의 노예이면서도 자기가 왕이라고 착각하며 세상의 노예로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겐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른다는 말은 우리 전 존재의 정체성이 이제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하느님 자녀들이라 믿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세상에 속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위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나도 그리스도요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umbrella]
가톨릭평화신문에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의 한 장면’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그림을 설명하면서 당시 교회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림도 감상하면서 당시 교회의 모습을 이해 할 수 있기에 꼭 챙겨 읽습니다. 오늘은 지난 7월 4일에 연재된 ‘환자를 돌보는 성 가밀로’라는 그림과 설명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500년대 초가 혼돈의 시대였다면, 1500년대 후반은 성인(聖人)들의 시대라고 합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혼돈의 시대에 많은 성인이 등장했습니다. 당시에는 경직된 교회제도, 유럽을 초토화 시킨 전염병, 교회의 타락, 새로운 계급(상인)의 등장이 있었습니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는 교회의 가르침과 권위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지 질문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불꽃이 교회를 갈라놓았습니다.
교회는 트리덴트 공의회를 소집하여 시대의 징표를 읽고, 식별하여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트리덴트 공의회의 주된 결정은 ‘복음’의 가치를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권위와 조직으로 굳어진 교회의 심장에 영성(靈性)의 바람을 불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영성의 바람을 일으킨 성인, 세상 속에서 복음의 빛을 실천한 성인들이 흔들리는 교회를 바로 세웠습니다.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나, 성녀 안젤라 메리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필립보 네리,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성 가롤로 보로메오, 성 루이지 곤자가, 성 알렉산드로 사울리, 십자가의 성 요한, 성 베드로 가니시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있습니다. 유럽의 진흙탕 속에서 탄생한 성인들은 유럽 안에서는 물론, 세계로 나가 이전 시대에 발전한 유럽의 인문주의 휴머니즘을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문득 500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은 2000년대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 졌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이 있었습니다. 이념의 갈등으로 냉전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으로 빈곤해지고 있습니다. 유럽과 북미는 성소자가 급격하게 줄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품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조직은 견고하지만 성령의 바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본과 물질의 거대한 흐름이 교회에도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1500년대보다 더 큰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굳게 닫힌 교회의 창문을 열자고 하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사목방문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성인이 되셨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는 가난한 이들에게 깊은 위로를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목자는 양 냄새가 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혼돈의 시대에 희망은 있었다고 평가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도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가 탄생했습니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영신수련 23항’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시대가 변해도,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내비게이션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사용할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무익하면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한 것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 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2021년 07월 31일 토요일
[백]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가 되었고,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에 시성되었다.
입당송
필리 2,10-11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네.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널리 전하도록
복된 이냐시오를 교회에 보내 주셨으니
그의 도움으로 저희가 그를 본받아
이 세상에서 복음을 위하여 열심히 싸우고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그와 함께 승리의 월계관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뒤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인 희년으로 선언하고 해방을 선포하라고 하신다(제1독서). 헤로데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맹세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건네준다(복음).
제1독서<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25,1.8-17
1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11 이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자란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12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
13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14 너희가 동족에게 무엇을 팔거나 동족의 손에서 무엇을 살 때,
서로 속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희년에서 몇 해가 지났는지 헤아린 다음 너희 동족에게서 사고,
그는 소출을 거둘 햇수를 헤아린 다음 너희에게 팔아야 한다.
16 그 햇수가 많으면 값을 올리고, 햇수가 적으면 값을 내려야 한다.
그는 소출을 거둘 횟수를 너희에게 파는 것이다.
17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7(66),2-3.5.7-8(◎ 4 참조)
◎ 하느님,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 당신의 길을 세상이 알고, 당신의 구원을 만민이 알게 하소서. ◎
○ 당신이 민족들을 올바로 심판하시고, 세상의 겨레들을 이끄시니, 겨레들이 기뻐하고 환호하리이다. ◎
○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세상 끝 모든 곳이 그분을 경외하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5,10
◎ 알렐루야.
○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10,31―11,1)와 복음(루카 14,25-33)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 기도
주 하느님,
복된 이냐시오를 기리며 바치는 이 제물을 받으시어
모든 거룩함의 샘인 이 성사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로 이끄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루카 12,49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복된 이냐시오를 기리며
이 찬미의 제사로 감사를 드리고 비오니
저희가 영원토록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모든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생각 가운데 언제나 내 생각이 옳은 것은 아님을 인정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많은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그 의견들을 절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서로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다 보면 다툼도 있고, 공동체에 분열도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양보하고 한 발 물러서서 서로 타협하고 절충점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 모습입니다.
타협은 그렇게 각자의 것을 내어놓는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절대 양보하지도, 물러서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예수님의 가치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타협하는 헤로데 임금과 타협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인륜과 가족에 대한 사랑 앞에서 헤로데는 타협합니다. 또한 요한의 목숨 앞에서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 힘과 권력에 타협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과 가치, 신념과 믿음 앞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과 세상의 가치와 타협합니다. 그렇지만 세례자 요한은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타협하지 않았고 국가의 절대 권력이나 무력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기나 부와 명예와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 다른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양보하고 절충하면서 타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만은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 앞에 중립이 없듯이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아파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 돈과 경제적 원리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양보하고 타협할 수 없습니다. 지금 무엇인가에 타협하고 있습니까? 스스로에게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