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의 챔피언스 리그
1999년 5월 26일. 당시 대학을 다니던 필자는 그날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대중 매체를 피해 다니느라 깨나 애를 썼다. 물론, PC통신 접속도 피했다. 이렇게 유난을 떤 이유는 그날 저녁 무렵에 케이블TV로 녹화 중계될 예정인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좀 더 재미있게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없어진 <한국스포츠TV(ch30)>에서 녹화 중계를 해줄 예정이었는데 생중계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라 볼 수 있다는 기대감만으로도 아침부터 무척이나 들 떠 있었다. 지금이야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웬만한 경기는 다 실시간 시청이 가능하고 케이블TV에서 웬만한 빅 매치는 다 생방송으로 틀어주지만 그 때는 녹화 중계로라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니, 아침에 기상한 시각 경기는 이미 끝난 상태였지만 저녁 나절에 방송될 경기를 보기 전까지는 결과를 알아서는 곤란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시간에 맞춰 TV를 켤 때의 그 떨림은 아마 요즘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종류의 감정일 것이다. 물론, 추가 시간에 터진 극적인 동점골과 역전골의 짜릿함이 (경기가 끝난 지 아마 12시간은 더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치에 달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기까지 한 해프닝이다.
안그래도 극적이던 1998/99 결승전은 녹화 감상의 설레임 덕에 더 큰 감흥으로 남아있다. |
하지만, 굳이 그렇게 유난을 떨 필요가 없긴 했다. 신문을 보거나 TV 뉴스를 보더라도 챔피언스리그 우승 소식이 나올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 테니까. 그러니, 챔피언스 리그 관련 뉴스가 온갖 신문과 TV 뉴스, 각종 포털 뉴스를 뒤덮은 요즘 분위기가 생경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9년 만에 세상이 180도 뒤바뀐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3년 전의 챔피언스 리그와 2008년의 유럽 축구
아니, 따져보면 9년이나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겠다. 3년 전, 박지성이 이영표와 함께 PSV아인트호번(네덜란드) 소속으로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올랐을 때 '박지성-이영표 4강 vs 박찬호 1승'이라는 제목으로 개인 블로그에 글을 썼다가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http://paper.cyworld.com/benign/570715/) 그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모든 스포츠 신문들이 1면에 박찬호 선수가 1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실었고 한국 선수들이 유럽 최고의 축구팀을 가리는 대회에서 처음으로 4강 무대에 올랐다는 건 작게 다뤘다. 다분히 감정적인 글이었고 당연히 비판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더 큰 성과를 이루고도 신문에 한 줄 뉴스조차 나지 않는 타 종목, 타 분야의 존경할만한 분들이 넘쳐나는데도 저런 글을 쓴 건 참으로 철이 없었다는 생각과 생중계조차 않던 경기가 실시간으로 국내에 방송될 정도로 변화된 환경에 만족하지 못한 오타쿠적 분노의 발현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매체에 쓴 기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 감정에 치우쳐 상황을 대범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합리화시킬 생각도 없다.
지난 22일 새벽에 열린 2007/08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중계를 준비하는 동안 그야말로 감개가 무량했다. 이런 경기가 국내에 생중계되고 또 그 경기를 직접 마이크를 잡고 전한다는 개인적인 감흥에 이 빅 매치에 한국 선수가 뛴다는 감격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선수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뛸 날이 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게 사실 아닌가. 한창 축구에 빠져들었던 90년대 후반만 해도 유럽 리그는 머나먼 이상향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유럽에서 뛰는 한국 선수는 한 명도 없던 시절이고, 한국 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오르는 건 고사하고 단 1승을 거두는 것조차 ‘미션 임파서블’일 때였다. 한국 선수가 유럽 명문 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고 유럽 정상에까지 오른다는 건 '차범근 전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그러니 박지성 선발 출전이 유력한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중계를 기다하면서 절로 웃음이 났던 것은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승대 캐스터(중앙)-장지현 해설위원(왼쪽)과 함께, 2007/08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시작 직전. 이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훈훈했다. |
박지성 없이 치러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착잡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양 팀 선수들이 치열한 공방전과 뒤로 이어진 승부차기의 드라마틱한 결말 덕에 잔뜩 달아올라 소리를 질러댔지만 경기가 끝나고 시상식이 진행되면서 기대했던 한국 선수의 출전이 좌절된 데에 대한 상실감이 밀려들었다. 경기가 끝나고 미니홈피에 아쉽게 적어올린 한 줄의 푸념은 바로 그러한 기분 탓이었다. 경기 자체로는 정말 치열했고 멋진 승부로 마무리가 되었으니 몇 년 전이라면 그 여운을 만끽하며 유럽 최고 수준의 경기를 관전한 기쁨을 적어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은 한국 선수 출전 경기 관전 기회가 날아간 데 대한 허탈함은 홀로 해소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 팀의 감독이 야속하게 느껴졌던 것은 비단 나만의 과장된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 축구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은 크게 변했지만 환경 변화의 속도를 언제나 앞질러 가는 게 사람 마음인 것 같다. 내 안의 '팬心'이란 건 여전히 불만투성이여서 생중계를 볼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경기가 아닌 것이, 내가 원하는 경기를 보게 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뛰지 않는 것이 불만스럽다. 그러니 한 때는 한국에서 클럽 축구가 인기가 없는 게 불만이더니 언젠가는 그 인기가 생각만큼 크지 않아 아쉬워하다가 이제는 어떤 감독이 우리 선수를 기용하지 않는 게 답답해지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이 어찌 참으로 유치찬란하면서도 럭셔리한 불평인지! 또 한 번,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이고 만다.
어찌보면 생중계를 볼 수 없던 9년 전이 가장 행복했는 지도 모른다. 귀한 경기 하나를 보기 위해 여러 시간을 설레였고 그것이 설령 중간 십 여분을 '통편집'한 버전(version)이었다 할지라도 불만은 커녕 마냥 감사했을 뿐이니까. 비록 그것이 제한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의 볼모 잡힌 심정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지난 9년 동안 별로 바뀐 게 없다면, 아마도 많은 것이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온갖 뉴스에서 챔피언스 리그 결과를 소개하고 '맨유'라는 단어를 정말 많은 사람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축구팀'의 약자로 이해하며 지구 반대편 축구팀의 '존 오셔'라는 후보 선수의 이름을 '서동현'이나 '장남석' 같은 K-리그 국내파 득점 1위 선수들의 이름보다도 더 친숙하게 여기는 일은 없었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변해도 많이 변한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박지성에게는 에브라가 있다! 결승전에 출전한 22명 가운데 최저 연봉자인 에브라에게 돈벼락 있으라! |
한 가지 덧붙이면, 그래서 다시 한번
박지성의 결승전 배제는 아쉽고 씁쓸하다. 결국 한국 내 유럽 축구의 지형을 이마만큼 변화시킨 것은 꽤 많은 부분이 그의 공이었을 테니 말이다. 힘들었던 8강과 4강에서 그야말로 말처럼 온 힘을 다해 경기장을 누빈 선수에게 벤치 말석조차 내주지 않은 노 감독의 냉철한 판단에 적지 않은 팬들이 분한 마음을 갖는 게 이해되는 것은 그래서다. 물론, 그 ‘팬들’에는 나 역시 빠지고 싶지 않다. 어차피 승부차기 갈 것, 난데없는 변칙 전술로 왜 우리 가슴을 버혀내시는가 말이다. 누가 뭐래도, 여긴 한국이고, 지구 반대편의 그들을 소비하는 방식 역시 우리 마음이니 하소연할 권리 정도는 여기저기 널려 있다. 이렇게 마음먹고 적어도 몇 일 정도는 더 아쉬움을 간직해보려 한다. 3년 전의 그 때 그랬던 것처럼.
[사진제공=스포탈코리아]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worldfootball&ctg=news&mod=read&office_id=260&article_id=0000000083&date=20080523&page=1
이건 기사가 아니라 칼럼이죠? 칼럼이야 자기 생각쓰는거니 뭐 ㅎㅎ
서형욱씨 맘이 우리들 맘..........동감합니다
모두 공감~ 어제는 잠도 안오고 너무 힘들어서 친구하고 낮부터 술나발 불고 죽는줄 알았습니다^^;오늘까지만 아쉬워 해야겠네요~ 너무 힘들어서 안되겠네요~ 다음시즌에 주전먹자! 지성 ㅎ
아.......... 진짜 아직도 아쉽네요........ 앞으로 챔스 결승전을 볼때마다 곱씹을것 같습니다.... 박지성선수가 다시 챔스 결승에 선발출전 해서 결승골 넣고 우승하지 않는 이상 .. 이 씁쓸함은 가시지 않을것 같네요.... ㅠ
오늘아침에머리감다가문득또다시울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