火田民
변종 호
황사로 뿌옇게 보이던 사물들을 봄비로 말갛게 씻어 내린 아침, 맑은 햇살아래 부모
산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아름답기만 하다 서쪽에 보이는 오송 북쪽에 보이는 오창,
손을 뻗으면 곧 닿을 듯한 청주역. 그 부근의 땅을 사려고 애쓰던 기억이 새로운 감희로
다가선다.
사람은 대부분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고, 그런 고향에는 내가
태어나서 자라던 집이며, 바라보며 꿈을 키우던 산과 들이 있고, 그리운 친구들이 있
다 그래서 고향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고, 그 품에 안기고 싶어하며, 비록 고향땅은 아
니더라도, 내 소유의 작은 땅이라도 없으면 불안해하는 게 우리의 정서가 아니던가.
산을 내려오다 보니 봉분이 없어진 묘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발길이 잦고, 큰 나무
가 많아 잔디가 없던 그곳. 그 무덤을 파서 어찌 했을까 궁금해진다. 화장을 해서 납골
당으로 안치했을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장(移葬)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
다 파 헤쳐져 까맣게 드러난 흙을 바라보자니, 몇 년 전 억척스럽게 살다 먼 길을 떠
난 친구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휴전 이후 곤궁했던 민초(民草)들이 산속을 찾아 든 것은 60년대 초였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를 베 내고, 불을 질러 밭을 일궜던 화전민. 그들은 나무의 잔해와 돌덩
이를 손이 부르트도록 들어내며 밭을 만들어 나갔다.
화전민 1세대로 불리는 영진이 아버지 형제가 자리를 잡은 곳은, 해발 700미터가 족
히 넘는 '구룡산'이라는 높은 지대였다. 화전으로 일군 밭에는 강냉이와 콩을 심었고,
오랫동안 낙엽이 쌓이고 썩어, 부엽토(腐葉土)가 된 땅에는 곡식이 잘 자랐다.
눈만 뜨면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소 돼지를 키웠으며, 늦가을부터 겨울동안은 시오리
가 넘는 장터를 매일 오르내리며 추수한 곡식과 장작을 등짐으로 져다 팔기도 했었다.
오죽하면 동네 어른들은 박 서방네 형제는 사막에 던져놔도 잘 살 거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었다.
정부의 화전민 강제 이주정책으로 집과 땅을 버려두고,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와서는
면사무소에 다니는 아들과 사슴을 기르고, 많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불을 놓아 밭을 일
구고 살았던 구룡산을 못내 그리워했다고 한다.
가끔은 살던 곳을 찾아가 흔적만 남은 집터며, 거의 산이 된 묵정밭을 둘러보던 당신.
아들에게 혼자만 알고 있던 송이 밭이며, 귀한 산약초가 있는 곳을 알려주기도 했다. 아
마도 그런 곳을 알려주며 자식에게 땅의 소중함을 잊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깊은 가르
침이 아닌가 싶다.
화전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그는 생전에 늘 입버릇처럼 구룡산 화전(田)에 묻
히기를 원했다고 했다 이승의 마지막 밤이었던 그날도 칠순을 넘긴 늙은 아내의 무릎
을 베고 잠이 든 채 멀고도 먼 길을 떠났다.
동네사람들이 묘 자리를 팔 요량으로 구룡산 화전 터에 올라가 보니, 이미 당신의 손
으로 아담한 가묘(假墓)가 만들어져 있었다고 했다 당신으로선 가장 소중한 땅이었기
에 그렇게 뼈를 묻고 싶었나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갈 수도 없는 가파르고 조붓한
길, 상여(喪輿)는 엄두도 못 내고 임시방편으로 운구를 하게 만들어 서너 명이 메고 앞
뒤에서 당기고 밀며 올라갔다.
스님의 목탁소리를 들으며, 숨 가쁘게 발걸음을 내딛던 오르막길 운구하는 사람들은
오십 발자국을 떼놓기도 힘겨워했었다 산으로 오르는 흔들리는 관속에서도 당신은 마
냥 행복해 하지 않았을까? 그가 돌아가는 흙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흙에서 태
어나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이제 편안히 쉴 수 있는 그
품에 안겼다.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삶의 근원이었던 화전(田) 땅의 고마움을 누구보다도 감-
사하게 느끼던 화전민(田民)이 아니던가 몇 년을 눈물과 땀이 배인 그곳은 바람소리
청청(淸聽)하고, 멧돼지가 대낮에도 나 다니고, 산새와 고라니가 친구해 주는 그런 곳
이다 그런 당신은 오늘도 잡목이 우거져 산이 되어가는 화전(田)과 일손이 없어 점
점 버려지는 땅들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지나 않을까.
2005/21집
첫댓글 몇 년을 눈물과 땀이 배인 그곳은 바람소리
청청(淸聽)하고, 멧돼지가 대낮에도 나 다니고, 산새와 고라니가 친구해 주는 그런 곳
이다 그런 당신은 오늘도 잡목이 우거져 산이 되어가는 화전(田)과 일손이 없어 점
점 버려지는 땅들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지나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