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신이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난을 타파하겠다는 의지와 집념이 남달랐다. 또한 그런 의지를 농민들은 알고 박정희 대통령을 신뢰했다. 이러한 바탕 하에 새마을 운동이 시작하게 되었고 성공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5.16 혁명 이후 박정희는 농민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새마을 운동의 원조격인 재건 국민 운동 본부와 그 지방조직을 구성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 60년대의 한국 경제의 실정으로는 정부가 농민들에게 물자를 공급해줄 정도로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농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재건 국민 운동 본부가 주력으로 펼쳤던 계몽적인 각종 캠페인에 대한 반응도 높지 않았다.
일부 정치인들은 1960년대에 이룩한 경제개발의 성공으로 60년대 말기에 와서도 쌀의 이중 곡가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입장으로 볼때는 그것은 시기상조였다. 여기에서 박 대통령은 쌀 이외의 경제작물이나 축산을 개발함으로써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기로 결정하고 소득 증대 특별사업을 계획했다. 이 특별 사업은 전국 각지에 비닐 하우스나 양잠, 양송이, 과일나무, 담배 등의 주산지를 조성하고 지역마다 정해진 일련번호가 매겨졌는데 박대통령은 일련번호 별로 일일이 점검할 정도의 열의를 보였다.
또한 자기 고장의 농가 소득 증대 방안에 책임을 지게된 지방의 말단 공무원들은 농촌 개발에 몸을 사리지 않았고, 이러한 경험의 축적이 새마을 운동이 성공하게된 주요인이 되었다.
특별 사업의 실시로 한국의 전통적인 영농은 상업영농으로 바뀌었고, 많은 농가에서 성공사례가 속출했다. 이들 성공 사례들에 힘입어 박대통령은 새마을 운동을 일으켜야 할 때를 느꼈고,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특별 사업의 성공에 고무된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70년 3월 12일의 연설에서 그의 의지를 표출했다. 그리고 1970년 11월 11일에는 제2회 농어민 소득 증대 특별 사업 경진 대회가 서울의 시민 회관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새마을 운동에 대해 발표를 했고, 그 후 1970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전국의 3만 5000 여개의 마을에 300여 포대의 시멘트를 나누어주게 되었다. 이것이 새마을 운동의 제1차 연도가 되었다.
정부의 자조사업에 대한 농민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기도 했는데,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정부의 투자 외에도 그들 마을의 자체적인 투자로 마을의 숙원사업이 이루어진 곳이 많았다.
여기에 박대통령은 성공에의 자신감을 얻었고, '새마을 운동의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함으로써 농민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새마을 운동의 열기로 후끈거렸던 1973년 11월, 제1차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열렸고, 드디어 운동은 시작되었다. 처음 시멘트를 나누어줄때 정부는 주로 생활 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예를 들면 마을 주변의 도로 확장, 소교량 건설, 지붕 개량, 담장 개선, 우물 시설 개선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 이유는 농촌의 환경 개선이 농민들의 시급한 요망이었고, 마을 주민 모두를 참여시키는 데는 생활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들이 비교적 용이하기 때문이다.
제2차 연도에는 1차 연도에 반응이 좋았던 1만 6,000개 마을에 대해 시멘트와 철근 1톤씩을 배분해 주었고, 전국의 마을들에 새마을 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참여도에 따라 기초마을, 자조마을, 그리고 자립마을의 세 가지로 구분하고 경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웃 마을의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며 서로서로 열심히 노력하게 되었다.
제3차 연도에도 마을당 약 300포대의 시멘트와 철근 1톤씩이 공급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마을 안길을 포장하는 마을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1971년~1980년 사이에 정부는 주로 시멘트와 철근을 지원해 주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했다. 그밖에 우수 마을에 대해서는 포상금을 지급하였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70년도만 해도 전국 농가들의 대부분은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었고, 전깃불이 들어간 마을은 불과 몇 가구밖에 없었다. 이렇게 낙후된 마을을 주민들의 참여와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몰라보게 발전시킨 것이다.
우선 이룩한 여러 가지 새마을 사업들 중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마을 주변의 도로를 개발한 것이다. 새마을 사업이 있기 전만해도 마을의 도로는 좁고 꼬불꼬불해서 경운기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한 도로를 넓게 고치고 교량을 건설하는 일을 초기에 했다. 또한 전국의 소하천의 둑들을 많이 개·보수했고, 지붕의 대부분이 볏짚으로 된 초가지붕을 1975년에는 전국의 모든 농가들의 지붕을 달라지게 했다. 이 지붕 개량으로 농촌의 모습은 변하게 되었고, 농촌의 주택도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농가들의 20%정도만이 전등불 밑에서 살았다. 그러던 것이 1979년에는 전국 농가의 98%가 전화되었고, 농가의 상수도 시설도 변화해서 농촌의 식수 공급은 크게 개선되었다.
초기에는 새마을 연구에 대한 회의를 할 장소를 구하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새마을 운동의 제3차 연도부터 마을 회관이 건립되었고, 이로 인해 미약하나마 민주주의의 기틀이 생기게 되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농촌에서 일어난 새마을 운동은 농촌이 발전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제약을 제거함으로써 시작이 되었다. 또한 여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도 놓칠 수 없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농가의 소득도 증가하게 되었고, 평생의 숙원이던 농촌의 잘 살아보자는 의지가 현실로 실현되기도 했다. 처음에 농민들의 잘 살기 운동으로 시작한 새마을 운동은 해를 거듭할수록 농촌과 도시뿐 아니라 공장, 학교 등으로 번져 전 국민의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국력신장의 원동력이 되었고, 정신개발, 생활태도 개선, 소득 증대 사업 및 사회 개발 사업 등의 성과 또한 대단히 컸다.
게다가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 정신은 부존 자원이 적은 한국이 잘 사는 나라로 되기 위해 꼭 지켜져야 할 생활 철학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한국인들의 자질이 선진화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력이 새마을 운동의 성공으로 나타났다.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낳은 결과였다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고, 그것이 새마을 운동의 역사적인 성과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이 짧은 시간에 새마을 운동의 성공으로 경제적 근대화를 이루게 되자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한국을 후진국 경제 개발의 모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발전하게된 요인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고, 한국은 그러한 경제 개발의 모형으로 더더욱 빠른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 나라는 모든 면에서 크게 나아졌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있는 나라들과 자유경쟁을 하기에는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다. 그들을 앞서기 위해서는 과학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한국인들의 생활자세도 중요하다. 이른바 70년대의 새마을 정신을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 경쟁력이 높아져야만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한 경제력도 확보할 수 있다. 새마을 운동은 비단 70년대만의 운동이 아닌 것이다. 그 시대의 정신을 본받아 현실에 적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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