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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에제 34,1-11
복 음 : 마태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매달 마감에 시달립니다. 바로 이 책, ‘쓰담쓰담’ 묵상집 때문입니다.
갑곶성지에 다시 온 뒤에 후원회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 매달 발행하는 묵상집입니다.
2016년 9월에 시작했으니, 벌써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묵상집의 모든 글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 혼자 쓰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 이미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묵상 글을 써왔기에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감’이라는 단어에 힘듦을 매달 느끼고 있습니다.
마감을 지키지 않으면 제때 묵상집을 발행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기에 마감일이 가까워지면 초조해지고
몸과 마음의 피곤함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지난 6월처럼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받고 회복하는 시간까지 길어지면
몸과 마음으로 더 힘들어집니다.
솔직히 마감이 없는 경우, 글이 잘 써지지 않습니다.
편안한 상태가 아닌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어야 자극받아서 글을 쓰게 됩니다.
또 마감이 있어야 그 날짜를 염두에 두고 계획성 있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삶도 마감이 있습니다.
바로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이 죽음에 자극받아 더 발전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내 삶의 마감인 죽음을 바라보면서 더욱더 지금을 계획성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지금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을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바로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 말씀을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눈으로 볼 때, 포도밭 주인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 모두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이 부분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공평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는 그런 세상의 논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이른 아침에 장터의 인력시장에서 일할 일꾼을 뽑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낮 기온이 너무 높아서, 이른 아침을 제외하고는 인력시장을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포도밭 주인이 찾아갔던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있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선택받을 수 있었고, 그 희망으로 인해 후한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정의와 세상의 정의는 다릅니다.
하느님의 처사에 대해 우리가 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의 선택을 기다리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 영성
-사제는 사업가(businessman)가 아닌 목자(shephred)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누여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시편23,1-3ㄱ)
착한 목자 영성은 비단 교회의 사제뿐 아니라,
신자들은 물론 모든 각계각층의 지도자들, 대통령 모두에게 해당 되겠습니다.
참으로 사랑과 지혜, 온유와 겸손을 겸비한 착한 목자 같은 지도자들이 목마르게 그리운 시절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나부터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예전 장상인 아빠스님으로부터 원장 재직 시 받은 조언을 잊지 못합니다.
장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목자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규칙서에도 강조되는바, 우선적인 것이 아빠스의 목자로써의 자질입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어제 소개해 드린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을 통해서 착한 목자의 모범을 만납니다.
마르타의 집 청소 담당 자매의 증언입니다.
-“저는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일하면서 교황님을 매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요.
정말이에요. 그분은 결코 혼자 있는 걸 원하시지 않는 듯해요.
어느 날 아침, 우리 청소팀은 청소도구를 가득 싣고 엘리베이터에 모두 탓죠.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어요.
우리 앞에 누가 있었는지 아시겠어요? 네, 바로 교황님!
본능적으로 우린 그분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하여 내리려고 하는 찰나에,
‘아녜요. 아닙니다. 그냥 있으세요. 우리 좀 당겨서요. 자 됐어요!’
교황님과 우리는 모두 목적지에 다가갈 수 있었지요. 제겐 꿈같기도 하였고, 사건 그 자체였어요.”-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의 인터뷰 기사 중 감동적인 부분을 나눕니다.
“교황님께서 저를 임명하실 때
‘교황청에 아시아인 장관이 한 사람밖에 없어 새로운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에 유 주교님의 이름이 떠올랐을 때, ’아, 찾았다!‘라며 기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추기경은 교황청을 거닐면서 보이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자신을 ‘돈 라자로’라 소개한다.
직책이나 신분의 높낮이 없이 그저 한 사람의 신부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형제로서 사람들을 만나고 친교를 나누고자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황청에서 돈 라자로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물론 후에 유 추기경이 ‘성직자부 장관’임을 알고 깜짝 놀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런 착한 목자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배우게 되니,
이렇듯 보고 배우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2021.7.20.),
무려 1년 전 집무실 게시판에 써 붙인 글이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공동체 형제 하나 하나에게 좋은 점을 보고 배우니 공동체는 제 스승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우리는 참 많이 보고 배우며 깨닫습니다.
이 또한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이처럼 착한 목자 영성으로 살 때 실현되는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이렇게 살 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되는 하늘나라입니다.
아니 이런 이들의 삶 자체가 하늘나라입니다.
오늘 복음과는 대조적으로 제1독서 에제키엘서에서
주님의 이스라엘의 고약한 목자들에 대한 개탄이 흡사 하느님의 육성을 듣는 듯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었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대로 오늘날 본분에서 이탈한 목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모든 분들이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제 착한목자 영성이 보편화되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복음에서 제시되는 착한 목자상은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포도원은 세상을, 포도원에 고용된 이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선한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착한목자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눈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고용된 당신의 백성이요 성소자들입니다.
일한 시간이나 노동량에 상관없이 아침 일찍 온 사람이나 끝 무렵에 온 사람이나
모두에게 똑같은 하루 한 데나리온 일당을 지급합니다.
사람마다 다 고유의 사정이 있기에 불림 받은 시간이 동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인은 예외 없이 똑같은 일당을 지급하니 흡사 요즘 회자 되고 있는
'안전 그물망'과도 같은 기본소득제의 실현처럼 생각됩니다.
모두에게 최저 생계비를 지급함으로 모두가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
기본적 인간 품위를 누리며 일하며 살 수 있게 하는 제도로 언젠가는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계산법입니다.
산술적 공정과 정의의 잣대가 아닌 사랑의 잣대입니다.
각자 불린 자들은 남과 비교할 것 없이,
하느님 은총의 사랑을 자신의 이기적 잣대로 잼이 없이,
아니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를 크게 깊이 깨닫고 배우며
자기 본분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면 될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맨 먼저 불림 받아 고용된 자들은 일견 합리적이고 타당해 보입니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자신의 분수를 너무 몰랐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일견 맞는 것 같지만, 감사가 전무 합니다.
다른 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할 시간,
하루 종일 일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늦게라도 일자리를 찾아 적은 시간 동안이라도 부지런히 최선을 다해 일한 이들에게도
이들의 내적 처지를 헤아린다면 시간의 양에 관계 없이
그대로 일당을 지불함이 자비로운 주인의 마음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이런 주인처럼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며 지혜롭고 깊으신 분입니다.
이어지는 주인의 답변은 우리에게는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바로 하느님의 자비를 헤아리지 못한 무지無知에,
제 분수를 모르는 월권越權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래서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지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초심을 잃어 한결같지 못했을 때 첫째가 꼴찌가 될 수 있고,
늘 초심의 자세로 살 때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마태20,16)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내적 현실을 점검케 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여전히 내적으로 무너짐 없이, 불림받았을 때
내 본연의 첫째의 초심의 삶에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누구와 비교할 것 없이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이 내 책임을 다하며 사는 것입니다.
조용히 속삭이며 한결같이 깨어 반짝이며 맑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하루하루 깨어 반짝이며 평범한 섬김의 일상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나를 따르니리,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23,6). 아멘.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의 목자를 거슬러 하신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에제 34,2-3)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슬러 말씀하십니다.
양 떼를 보살피는 목자는 아픈 양을 고쳐주고 다친 양을 싸매주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못된 목자의 양 떼는 길을 잃고 헤매며 흩어져서 들짐승의 먹이가 되고 약탈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 양 떼를 돌볼 목자가 되시겠다고 하십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에제 34,11)
요한은 예수님께서 구약시대부터 예언되었던 착한 목자이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4-15)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에서 일할 일꾼들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주권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한 포도밭 주인이 아침에 일할 일꾼들을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자기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다시 아홉 시쯤, 또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 나가서 일할 사람들을 구해 자신의 포도밭으로 보냅니다.
저녁때가 되지 품삯을 주는데 모두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더 받으려니 기대했기 때문에
늦게 와서 일하는 사람도 똑같은 품삯에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 20,12)라고 투덜대는 것입니다.
주인은 불평하는 그들에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5)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은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20,16)라고 덧붙여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비유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선 이스라엘 사람들을 빗대어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민으로 선택된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적으로 오래된 이 사실을 자부심과 타민족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갖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은 시간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각자가 현재에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집안이 역사를 들추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나는 구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는 '우리 집안에 순교자가 있다.' 라고 말하며
자부심과 함께 은근히 자랑까지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면 그 사실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이야기에는 열심하면서 정작 자신의 신앙생활은 뒷전이라면
그 사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통해 구원은 인간의 계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따지는 것을 앞세우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주권이며 선물인 은총과 사랑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조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어온 유대인들 뿐 아니라
구원은 이방인들과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에 대해 이런저런 뜻으로 해석하려고 하지만
사실 하느님께서 구원을 좌지우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부르시는 주님께서 그 권한을 갖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한인 것입니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를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 속에는 하느님의 보화, 곧 하느님 자비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신비는 첫째로,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하루 일과가 다 끝나갈 저녁 무렵까지,
다섯 차례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손수 장터로 나가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일의 능력이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오히려 병들고 노쇠해서 팔려 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입니다.
도대체가 계산이라고는 모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주인입니다.
사실은 애시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다기보다,
그들을 살게하기 위해 불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이는 하늘나라가 당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쌍한 우리를 위하여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자비입니다.
둘째로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줍니다.
상식적으로는 이른 아침부터 온 품꾼에게 먼저 주는 것이 타당할 것이지만,
굳이 순서를 바꾸어 품삯을 주는 것은,
오후 늦게서야 일터로 부름받게 된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없는 까닭에 하느님의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가장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인 선택을 말해줍니다.
곧 가장 불쌍한 자에게 가장 먼저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냅니다.
셋째로는, 모두에게 똑같이 고루 품삯이 주어집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의 형평에 맞게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셈 쳐주지 않았습니다.
일한 시간이나 일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똑같은 품삯을 고르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온 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
계약으로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 되었으며,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입니다.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는 이러한 포도원 주인의 권한 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하늘나라가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이요, 자비임을 밝혀줍니다.
결국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비유’는
이 지상에서의 꼴찌들에게 대한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교회로 불러들이십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큰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비천한 신세를 자비로 돌보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꼴찌들부터 품삯을 주십니다.
애시 당 초 일을 부리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부르심이 이미 은총이오며, 은총은 계산이 아니라 자비시오니, 주님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아멘.
포도밭의 일꾼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 시에, 아홉 시에, 열두 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교부들은 이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 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저녁에,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준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그들은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가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어떤 일이든 사랑을 담아서 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하였는데 누군가 챙겨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합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을 세상의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가 잘못이 아닐까요?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가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람이 시키는 일과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일의 차이; 일이 수단이 되거나 목적이 되거나!
전삼용 요셉 신부
‘내일의 죠’(1980)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죠는 본래 길거리에서 주먹 쓰기를 좋아하는 건달이었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코치가 그를 훌륭한 권투선수로 키워냅니다.
그런데 죠에게는 항상 내일을 향한 목표가 생깁니다.
일본 챔피언을 꺾는 것을 넘어서서 세계 챔피언이 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매우 힘든 과정을 거칩니다.
자신의 라이벌과 경기하던 중 라이벌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큰 실의에 빠진 그는 그 후 사람의 얼굴을 때리면 구토 증상이 생겼습니다.
결국 그는 큰 노력으로 동양 챔피언이 되었고 세계 챔피언과 시합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손이 떨리는 증상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챔피언전에 나서지 말라고 청합니다.
그렇지만 죠는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꿈이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라운드까지 접전을 펼치고는 숨을 거둡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후후…. 불태웠어…. 모두 새하얗게….”
다 타버린 연탄재가 연상됩니다.
뜨겁게 어떤 목적을 위해 달려왔던 죠. 하지만 죠에게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다 타버린 연탄재에게 고마워합니까? 치워야 하는 골칫덩이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죠”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오늘 권투경기를 하는 것을 즐기며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에 목적이 부여되면 그 일을 하며 자신을 소진합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이 그렇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직장인들이 그렇습니다.
일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면 지치고 소진되고 결국 꼴찌가 되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서 첫째였던 사람이 꼴찌가 되고
꼴찌였던 사람이 첫째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어떤 사람이 첫째이고
어떤 사람이 꼴찌인지 말씀해주십니다.
한 데나리온씩 자기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 일당으로 내어주었을 때
고마워하는 사람이 첫째고 그것밖에 안 주냐며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꼴찌입니다.
그 이유는 일 자체에서 행복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실 때는 그 일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시키시는 것입니다.
보통 사제가 유학을 나가서 공부할 때 목적은 학위가 됩니다.
학위가 목적이 되면 공부가 재미없습니다. 자신을 소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공부가 목적이 됩니다.
학위는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가며 학위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
그러면 공부하는 동안 자신을 소진하지 않습니다.
허태균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고의 착각’에 빠져있다고 말합니다.
자녀가 시험을 보면 엄마도 같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종교에 귀의하여 잠도 자지 않고 치성을 드립니다. 왠지 그래야 자녀가 잘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기도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힘이 들어서 아이들 시험이 끝나면 더는 그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군 생활을 할 때 틈틈이 열심히 영어단어를 외웠습니다.
잠꼬대를 영어로 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차로 사고를 내고 난 다음에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이었다면
그 자체를 최대한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즐기지 못하고 군 생활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꼴찌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정임 씨는 두 아이를 하나는 서울대에, 하나는 카이스트에 보냈습니다.
유 씨는 아이들에게 공부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가다가 미끄럼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었습니다.
도서관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온 적도 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이 도서관에 가는 일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책을 재미있게 읽게 하고 공부도 재미있게 하게 하였습니다.
공부하였으면 ‘폐인 데이’라는 것을 만들어
폐인처럼 게임도 하고 TV도 보는 시간을 허락했습니다.
공부한 시간보다 두 배를 놀게 했습니다.
공부가 목적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도 좋게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욕탕에 때 밀러 갑니다.
그런데 때는 저절로 시간이 지나면 떨어져 나갑니다. 굳이 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만 밉니다. 이런 사람은 목욕탕에 오래 못 있습니다.
목적만 달성하면 바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목욕탕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오래 즐깁니다.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고 사우나도 하며 잠도 잡니다.
그렇게 피로를 풉니다. 누가 목욕을 즐기는 사람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 하신다면
그분은 인간과 똑같이 우리를 이용하시는 분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더라도 그 일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어서 시키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하고 싶은데 할 수 없어서 큰 고통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떤 봉사를 하든 행복해야 합니다.
사제로 살면 사제로 사는 하루하루가 목적입니다.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 때 감사할 수밖에 없는 열매가 맺힙니다.
결혼생활도 그렇고 자녀를 키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 하지 말고 그것 자체로 만족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하게 지내라고 만들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