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병을 앞에 두고 있으면 늘 이런 농담이 떠오릅니다.
나는 와인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데, 너는 그런 초능력이 있니?
웃고 넘길 수 있는 말이지만, 문득 잔을 내려놓게 만드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영국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와인은 병에 담긴 시다."라고 했습니다.
처음 이 말을 읽었을 때는 멋진 표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거듭할수록 그 문장의 의미가 조금씩 마음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작은 와이너리에서, 프랑스의 포도밭 사이에서, 낯선 마을의 광장 카페에서 마주한 와인 한 잔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같은 포도로 만들었어도 흙이 다르고, 바람이 다르고, 햇살이 다르니 맛도 향도 달랐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같은 세상을 살아도 어떤 길을 걸었는지, 어떤 계절을 견뎌냈는지에 따라 삶의 향기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좋은 와인은 서둘러 마시지 않습니다. 향을 느끼고, 색을 바라보고, 함께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음미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잠시 걸음을 늦추면 눈에 들어옵니다. 여행도 목적지보다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 풍경이 오래 기억되듯, 인생도 결과보다 과정이 더 깊은 향기를 남깁니다.
병 속의 와인은 언젠가 비워지지만, 그날의 대화와 웃음, 함께한 사람들의 온기는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와인의 맛이 아니라, 그 와인을 함께 마셨던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병을 비우고, 누군가는 시를 읽습니다.
부디 우리의 삶도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 한 병이 아니라 오래도록 마음에 머무는 한 편의 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으로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포도밭과 와인잔, 프랑스 부르고뉴의 작은 와이너리, 또는 해 질 무렵 와인 한 잔을 앞에 둔 유럽의 노천카페 풍경이 이 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