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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리라.>
▥ 요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22-24.26ㄱㄴㄷ
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광야의 풀밭이 푸르고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풍성한 결실을 내리라.
23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24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26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리라.>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4,13-16
나 요한은
13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14 내가 또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셨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습니다.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16 그러자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5-21
그때에 예수님께서 15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요엘 예언자는, 우리가 한껏 배불리 먹고,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고 한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본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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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고 한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본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수확’입니다. 씨앗 하나가 싹이 트고 나무에 과일이 열리는 것은 인간의 계획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시설 재배를 통해서 겨울에도 과일이나 채소가 나오지만 그래도 농사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에 추수를 할 때는 하느님의 손길을 기억하게 됩니다. 요엘서에서 말하듯 추수를 하여 배불리 먹으면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많은 소출을 거두고도 하느님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곡식과 재물에만 관심이 있어 그것을 쌓아 두려 하고, 그 재산을 즐기려고만 합니다. 그가 거두었다는 그 많은 소출을 위해서 하느님의 손길이 얼마나 많이 닿았을까요?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요한 묵시록에서는 마지막 때의 심판을, 주님께서 낫을 들고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것으로 나타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곡식이라면, 그들의 삶에는 또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손길이 닿았을까요? 그러나 모든 이가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요엘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놀라운 일을 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어떤 이들은 복음의 부자처럼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즐길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한 일에 대하여 서로 다른 심판을 맞게 됩니다. 재산이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며(복음 참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독서 참조).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거두어들이실 때를 생각합시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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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과 사랑을 나누는 한가위에,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노고를 축복하시고 손수 풍성한 결실을 내주셨음에 감사드리며(제1독서 참조), 세상에서 고생한 의인들을 그분께서 수확하여 거두시는 심판의 때를 선포합니다(제2독서 참조).
오늘 복음은 그러한 하느님의 심판을 합당하게 준비하는 삶에 관한 가르침(루카 12,1─13,9 참조)입니다. 부자의 속마음에는 유독 ‘모으다’(17.18절)와 ‘쌓아 두다’(19절) 같은 표현들이 가득합니다. 자신이 거둔 소출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감사의 마음은 커녕, 그 재산에 기대어 안심하고 즐길 생각뿐입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하느님도, 나눔을 실천할 이웃도 없습니다. 더 벌어서 계속 더 큰 곳간을 짓고 그것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 탐욕은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 가장 큰 유혹이며 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부자를 “어리석은 자”,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꾸짖으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줄지 않는 보물을 쌓으라고 자주 말하면서(루카 12,33; 16,9; 18,22 참조), 그 방법으로 이웃에 대한 자선을 제시합니다. 한편 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19,17).
모을 줄만 알고 통장에 찍힌 금액에서 만족과 안정을 찾는 세속적인 부자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믿음 그리고 이웃을 향한 나눔과 자선을 통하여 가진 것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하느님 나라의 부자로 살아갑시다.(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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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한가위에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쁨과 형제애를 나누는 것은 큰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과 조상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도 당신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라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은 아름다운 이론이나 추상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명절에 가족이 함께 모여 나누는 사랑은 신뢰를 쌓고, 소통을 통하여 이해와 깊은 유대를 형성합니다. 하상욱 시인은 가족을 ‘영어’ 같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게 표현이 잘 안 되기” 때문이랍니다. 또 때로는 ‘한국어’ 같다고도 합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참 모르겠기” 때문이랍니다. 우리 가족은 어떠한가요? ‘영어’ 같은가요? ‘한국어’ 같은가요? 우리가 마음으로 대화한다면 우리 가족은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나눔과 희생을 통한 사랑의 언어’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이를 이웃과 나눔으로써,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풍요로운 한가위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의 마지막 날을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 죽음 앞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 덕분에 살아갑니다. 하느님과 이웃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눈다면 더욱 행복한 한가위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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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하느님께서는 왜 부자를 두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시며 그의 목숨을 되찾아 가시려 하실까요? 사실 그가 특별히 죄를 지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데 말이지요. 가령 일꾼들을 무임금으로 부렸다던가, 탈세하였다는 식의 불의한 모습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땀을 흘려 수고하였고 그 결과로 많은 소출을 거두게 되었으니, 어떤 면에서 그는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 눈으로 볼 때 열심히 일한 만큼 안락과 편안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부자가 자신에게 던진 질문을 다시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이에 대하여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은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는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더 큰 곳간을 짓고 모든 곡식과 재산을 쌓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소출이 있기까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제물을 바칠 것이고, 자신을 도와준 일꾼들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하며 평소에 주는 품삯에 상여금을 얹어 줄 것입니다. 또 주변 이웃과 친지, 특히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도 자선을 베풀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에 등장한 부자는 탐욕의 노예였기에 어리석게도 하느님과 이웃에게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눈길이 쏠려 있었습니다.
한가위입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맺어 주신 햇곡식과 햇과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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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사도가 인도에 선교하러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는 세공과 건축에 뛰어난 기술자였습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임금이 자신을 위한 새 왕궁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돈도 다 지불하였지만 토마스는 그 돈을 임금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화가 잔뜩 난 임금은 토마스 사도를 죽이려 하였습니다.그때 임금의 동생이 찾아와 말하였습니다. “형님, 어제 꿈에 제가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제가 살 집은 매우 초라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 어디서라도 볼 수 있는 큰 궁궐을 보았는데 천사는 그것이 형님의 것이고 토마스 사도라는 인물이 지어 준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우리는 집을 사기도 하고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과 비신앙인은 집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 집을 하늘 나라에 짓고, 비신앙인은 땅에 짓는다는 것입니다. 땅에 지은 집은 이 세상과 함께 사라지지만 하늘에 지은 집은 영원히 남게 됩니다.오늘 예수님께서 곳간을 넓히려는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이란 이 세상에 큰 집을 짓던 사람입니다. 지상에 큰 집을 지으려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롭지 못하게 되면 하느님 앞에서도 가난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과 가난한 이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한가위에는 모든 것이 풍부합니다. 추수한 것들이 많아 기쁜 날입니다. 이 추수한 것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내가 부유하게 살 집을 짓는 건축 자재들입니다. 이것들을 이 짧은 생애를 위하여 소진해 버릴 것인지 영원히 지속되는 집을 짓는 데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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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가위입니다. 예로부터 한가위 밤이면 보름달을 보고 소망을 빌곤 하였습니다. 달은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처럼 차고 기울고 사라졌다가는 또다시 나오지 않습니까? 달은 마치 탄생, 성장, 쇠퇴, 죽음, 그리고 또다시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종교성을 띠게 됩니다. 아울러 한가위에는 한 해의 결실에 감사드리곤 했지요. 우리도 보름달을 바라보며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떠올렸으면 합니다. 보름달이 어두운 밤길을 비춰 주듯이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어두운 면을 밝게 비춰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한가위에는 떨어져 살던 가족들을 만나려고 고향으로 갑니다. 이는 새로운 힘을 받기 위함이지요. 신앙인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의 품입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한가위를 맞아 우리 삶의 근원과 최종 목적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또한, 한가위에는 돌아가신 이들을 기리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과거 추억만을 회상하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과거 사건이 지닌 의미를 오늘의 삶 안에서 되살려 내는 것이지요. 그가 나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살아 움직이게끔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조상을 비롯하여 먼저 가신 이들을 기억하는 일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가 됩니다. 동시에 온 집안을 한 식구로 묶는 구심점도 되는 것이지요. 비록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들이 피운 꽃에 이어 지금 우리가 꽃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또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를 대신해서 꽃을 피울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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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신라 시대부터 내려오는 한가위 명절에 우리 선조들이 표현한 풍요로움과 감사의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한 해 정성껏 가꾸어 거둔 곡식을 함께 기뻐하며, 이 곡식을 얻기까지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함께 나누고 즐기는 민족 고유의 명절입니다.
감사의 마음은 무엇보다 먼저 받은 것에 대해서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하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만족과 기쁨이 없다면, 내가 드리는 감사도 의미가 반감될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오로지 나 혼자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으로, 그리고 주변에서 함께해 준 모든 이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아는 것이 감사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또한 감사의 마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에, 당연히 그 몫도 함께 나누어야 하고, 그 나눔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감사의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부자는 인간의 욕심이 무한함을 보여 줍니다. 그 욕심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교만에서 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에서 옵니다.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곡식을 보고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곳간을 지으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바벨탑이며 하느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안을 떨쳐 버리지 못하며, 이것이 또한 탐욕의 출발점입니다. 한가위 명절에 추수한 것을 함께 나누며 감사와 기쁨을 나누는 것은, 나 자신을 돌아보며, 이웃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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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는 음력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며 달빛이 가장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가을에 지내는 큰 명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송편과 토란국, 운이 좋으면 송이로 만든 전과 산채 나물을 먹는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표현이 나왔나 봅니다.
한가위는 고대 농경 시대부터 내려와 신라 시대에 국가의 명절로 자리 잡았습니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어 추수의 기쁨을 나누며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산업화 이후 농촌 사회가 축소되면서 창조주를 섬기는 옛 전통이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오곡백과를 내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냅니다.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형제들과 우애를 나눕니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후유증이 있지만, 그래도 한가위는 우리에게 소중한 명절입니다. 추석은 개인의 탐욕을 버리고 가족 사랑을 확인하며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전통과 미풍양속을 잇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한가위 명절을 지내면서 하느님께 아름다운 희생과 사랑의 열매를 바칩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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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명절 한가위입니다. 그러나 오늘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수없이 되풀이되는 질문들 때문입니다. “대학은 어디 갈 거야?” “연봉은 얼마나 되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더 나아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는 어느 학교에 들어갔어.” “○○네는 이번에 고급 아파트 장만했더구먼.” “○○는 이번에 부장으로 승진했다고 하더라.”
이렇게 비교하고 또 자랑을 늘어놓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너는 잘 사는 게 아니야. 분발해야지.’ 하는 식으로 무시하는 것 같아 속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 부자는 부지런히 살았고, 땅에서 소출도 많이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잘 보관해 두고는 먹고 즐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소출을 많이 거두어 무언가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생명은 이미 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고자 이러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그 생명이 풍요로워지려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 뜻이란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에서 말하는 ‘잘 산다는 것’은, 땅의 소출이 아니라 사랑의 소출을 많이 거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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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부유함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곧,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으로 전락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일 친한 친구는 그가 매일 만날 정도로 절친하였습니다. 그다음으로 친한 친구는 그가 아주 소중히 여기기는 했으나 첫 번째 친구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세 번째 친구에 대해서도 참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앞의 두 친구와 만나는 바람에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가장 친한 첫 번째 친구는 죽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그의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면서도 그의 무덤까지만 같이 가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친구는 그가 죽는 순간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인도되는 순간에도 함께하였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친구는 돈이고, 두 번째는 가족이며, 세 번째는 선행입니다. 우리가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친구가 실제로는 결정적으로 함께해 주기를 바랄 때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 삶이 제대로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보장되지 않는 것이 많을뿐더러 돈 때문에 더 큰 가치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아니, 참된 삶은 돈이 아니라 또 다른 가치로 보장됩니다. 우리는 과연 그러한 가치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 가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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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명절인 한가위는 멀리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음력 7월 보름부터 서라벌 여인들이 편을 갈라서 길쌈놀이를 하다가 8월 대보름이 되면, 길쌈을 거두어 서로 견주어 승자와 패자를 가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날은 승자도 패자도, 모두 서로의 노고를 칭찬하면서 축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날의 절정은 동산 위에 크고 둥근 달이 떠오를 무렵, 임금이 문무백관들과 백성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제사 음식을 골고루 나누면서, 한편으로는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상의 은덕을 기렸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맨 먼저 천지신명이신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렸고, 그다음으로 선조에게 감사를 드렸으며, 마지막으로 형제자매들이 서로 함께 기쁨의 축제를 보냈던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세월이 흐를수록 이러한 미풍양속은 점차 사라져 가고, 오늘날에는 개인주의와 못된 탐욕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씁쓸해집니다. 조상 제사라는 의무감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일가친지들과 주변의 이웃들과 서로 기쁨과 생활을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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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것과 ‘잘 못 사는 것’의 구분은 어렵습니다. 재물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한 삶이 될지는 몰라도, ‘잘 사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대개는 잘 못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진정 ‘잘 사는’ 삶이 됩니다. 주님께서 그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영혼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재물을 모으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육체는 할 일이 많았지만, 영혼은 억눌려 지내야 했습니다. ‘영과 육의 균형’이 맞을 리 없습니다. 결과는 불안과 허무입니다. 영혼이 보내는 ‘목마름’의 신호인 것이지요.
잘 사는 삶이란 ‘감사드리는 삶’입니다. 감사의 시각으로 보면 ‘어느 것 하나’ 고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축복이 돌아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불평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잘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와 비교해 ‘못 산다’고 생각합니다. 잘생긴 용모인데도, ‘어느 누구’와 비교해 못생겼다고 판단합니다. 상대적 빈곤감입니다. 비교함으로써 ‘스스로’ 가난해지는 모습입니다.
감사드리는 생활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극복됩니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추석 명절을 만들어 억지로라도 감사드리게 했습니다. 감사만이 하늘의 기운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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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하느님께 감사하고 진정 풍요로운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성찰하며 마음을 채우는 날이기도 하지만 맛깔스럽고 푸짐한 추석상에 둘러앉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누는 가족의 정담은 한 해의 시름을 잊게 합니다.
이 민족의 명절에 덴마크의 소설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두 차례나 노벨상 후보로 올랐던 이자크 디네센의 단편 소설 『바베트의 만찬』입니다. 이 이야기는 작가의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예술가의 소명에 대한 원숙한 성찰, 그리고 여성의 섬세함이 잘 조화된 작품입니다.
주인공 바베트는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 노르웨이의 시골 마을로 몸을 피한 프랑스의 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착하게 살아가는 어느 두 자매의 하녀이자 요리사로 지냅니다. 알 수 없는 베네트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충실함과 깊은 인품은 점점 바닷가 작은 마을 사람들의 신뢰와 사랑을 자아냅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녀가 프랑스에서 어마어마한 금액인 1만 프랑의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축하하면서도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고 슬퍼합니다.
바베트는 ‘열두 명’의 이웃을 위하여 ‘마지막 만찬’을 준비합니다. 그날의 식탁은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황홀한 음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사실 프랑스 제일의 식당 ‘카페 앙글레’의 일급 요리사였던 것입니다. 혁명의 와중에 가족도, 친구도, 명예도 잃고 무명의 망명객이 된 바베트는 이제 자신을 환대한 이들에게 일생의 만찬을 대접합니다.
참으로 행복했던 만찬이 끝나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에게 이제 떠나는지 묻습니다. 베네트는 자신의 소중한 것들은 프랑스에서 이미 다 사라졌을뿐더러 1만 프랑을 이번 만찬에 다 썼기에 그대로 남을 것이라고 답합니다. 또한 그 큰돈을 어찌 다 쓸 수 있었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답합니다. “카페 앙글레에서는 12인분 저녁 식사 재료비가 1만 프랑이에요.”
바베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 그날의 저녁은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아름다운 상징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성체성사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가위의 풍성함을 누리면서 우리와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진정한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강론 중에 종종 제 어렸을 때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 시대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공감하십니다. 아마 그 시대에는 모두 힘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전혀 공감하지 못합니다. 아이들과 라면 봉지를 모아 공을 만들어 야구했다고 하면, “왜요?”라고 묻습니다. 재래식 화장실 이야기를 하면, 자기는 절대로 그런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30년 전만 해도 모두 비슷하게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지 않고 또 경험도 하지 않았으면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대 간 격차가 크다 보니 대화가 되지 않아 현대 사회는 더 외로운 사회가 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혼자 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30년 전에 10% 미만이었던 1인 가구가 현재는 전체 인구의 30%를 넘어섰고, 수년 내에 40%를 돌파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외로운 사회 안에서 더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을 공유할 수도 없고, ‘함께’라는 것을 하나의 짐처럼 생각하기에 정서적인 고통이 커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분열만 보이게 됩니다. 생각의 차이를 서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삶을 사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다른 삶도 궁금해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다른 삶도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들도 함께해야 할 이웃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인데, 지금의 우리는 점점 혼자라는 틀에 자기를 가두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도 그 틀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말하는 한가위입니다. 독서와 복음에서 말하는 수확의 풍요로움과 더불어 보름달처럼 밝고 훈훈한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만나고 하느님과 조상님들과 함께하는 감사의 마음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좋은 날인데 가족의 붕괴로 혼자서 이날을 지내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가족과의 다툼으로 전화 통화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삶을 인정하지 않고, 지지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가족인데도 함께할 이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 마지막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이 세상에 머물 것으로 생각하지만, 복음의 말씀처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가 다른 삶을 인정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 사랑의 삶만이 언제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예.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힘차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김종해).
남은 날들을 보다 품위있고 고상하게 엮어갑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다보면 가끔 죽음 체험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임사 체험, 죽음 유사 체험, 죽음 근사 체험이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그쪽 세상을 살짝 맛을 보고 온 분들입니다. 요르단강을 건널까 말까 하다가 되돌아온 분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임사 체험은 끔찍한 불행을 겪었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보통 사람들은 평생 발버둥 쳐도 하기 힘든 은총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분들이 임사 체험이후 보이는 특별한 변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삶의 우선 순위가 변경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우선 가치들이 재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죽음 체험을 통해 일종의 삶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목숨 걸고 추구했던 그 모든 것들이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아니었구나. 다 지나가는 것들이었구나. 그렇게까지 목숨 걸 대상이 아니었구나.”
그런 깨달음을 통해 여러 대상이나 가치들에 대한 재구성 작업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재물과 사회적 위치, 학벌과 스펙, 사람과 만남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삶의 방향이 더 가치있고, 더 고귀하고, 더 영원하고, 더 불변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결국 영적인 삶, 사랑의 삶, 봉사와 헌신의 삶, 주님 안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도 언젠가 그런 대대적인 삶의 전환점이랄까 분기점을 마련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먹고 즐기며, 그저 이 한 몸 겨우겨우 부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보다 이타적이고, 보다 영적이고, 보다 주님 마음에 드는 그런 방향에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공동체 형제들과 주변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부모님과 가족을 찾아 고향을 향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제 집도 절도 없는 영감님들만 공동체에 남아 있습니다. 추석 연휴를 맞아 몇백년 만에 사무실에 편안히 앉았습니다.
몇 년전부터 순차적으로 주님 품으로 가신 아버지, 어머니, 형의 영정 사진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그 눈빛들이 뭔가를 말하고 계신 듯 했습니다. “이제 자네 차례라네!” 어쩌다보니 저도 저희 가족 가계도 안에 최고 높은 꼭대기에 위치해 있습니다.
비록 재물은 아니지만, 그 무엇인가를 모으고 또 모으고, 끝도 없이 쌓아 올리며 살아온 지난 날을 가슴 치고 있습니다. 이런 제게 주님께서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민족의 대명절 한가위를 맞아 우리보다 먼저 떠난 조상님들,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의 영원한 안식과 구원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다가올 우리들의 죽음도 생각하면서, 남은 날들을 보다 품위있고 고상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엮어가기를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탐욕에서 벗어나는 법: “그래도 숙제니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가위는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왜 시스템적으로 매년 이렇게 하도록 모든 나라에서 명절을 지낼까요? 그 이유는 시스템적으로 감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탐욕에 시스템적으로 잠식되기 때문입니다.
1997년 수원 소재 전교 1등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갑자기 오른 성적 때문에 수군거리는 친구들의 태도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 학교 가기가 무서워요. 애들이 무서워요. 말투와 눈빛이, 행동들이….”
300명 중 100등 하던 아이가 한 학기 만에 전교 1등을 하니 그럴 수밖에요. 그렇다면 다음 시험으로 전교 1등을 할 실력임을 증명하면 되지 않았을까요?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시선보다는 다음 시험의 부담 때문에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이뤄낸 것들은 이렇게 잃을까 봐 불안합니다.
1997년 같은 해 성남시에서도 1등을 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1등일 때 죽고 싶다.”라는 말을 많이 했고, “나는 최고인 이 순간 자유를 얻었다.”란 유서를 남기고 베란다에서 뛰어내렸습니다. 1등을 유지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내가 이뤄낸 것은 이렇듯 지푸라기처럼 잃어버릴까 봐 나를 두렵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탐욕이 많은 부자는 자기 재산을 잃을까 봐 곳간을 넓히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부질없습니까? 내가 이뤄놓은 것이나 가진 것들이 부질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죄는 탐욕에서 비롯되는데 탐욕은 가만 있으면 저절로 나를 잠식합니다. 건물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허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탐욕을 이기는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1946년 최초의 마취제 ‘에테르’가 발견되었습니다. 의대 2년생 모턴입니다. 그가 특허 신청 때 지도교수인 ‘웰치’와 실험실을 내어준 화학과 교수 ‘잭슨’이 자신이 특허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셋은 법정 싸움까지 갔습니다. 잭슨은 정신병에 걸렸고, 웰치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모턴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뇌출혈로 사망합니다.
나의 것이면 뭐 하겠습니까? 목숨을 잃게 된다면. 성경에는 ‘못된 소작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소작인은 추수철마다 소출 일부를 주인에게 봉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하였지만, 주인은 외아들을 보냈습니다. 이는 감사의 봉헌 시스템 안에 자신을 넣지 못하는 사람은 성체를 영해도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선악과와 뱀 앞에 서 있는 하와와 같습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못하면 뱀에게 자기를 바치는 것이 됩니다. 선악과는 매년 열매가 맺힐 때마다 바쳐야 합니다. 부모를 기억해야 하는 명절이 규칙적으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잡초가 나고 건물이 허물어지는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잡초를 뽑고 건물을 다시 재건하는 일도 규칙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시스템을 이기는 것은 시스템밖에 없습니다.
유대교에서는 부모 공경 의무(키부드 아브 바-엠 Kibbud Av Va-Em)를 규율로 정해 실천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앉는 자리나 사용하는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부모가 있는 자리에서는 자녀가 함부로 발언하지 않는다. 자녀는 부모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즉시 이를 제공하며, 필요시 부모를 돌볼 책임을 진다.”와 같은 규정들입니다. 법으로 정해져 있기에 유대인들의 부모 공경은 대단합니다. 그렇게 규율로 자신을 얽어매면서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빠는 아이에게 과자를 사 주면 규칙적으로 하나만 아빠 달라고 말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아이는 아빠에게 하나를 주기도 아까워할 것입니다.
EBS ‘엄마가 울었다’는 어느 중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번 칭찬하고 그 내용을 적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30번을 다 채우니 자신이 자랑스럽고 집이 좋아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래도 숙제니까….”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 ‘한가위, 추석’입니다. 추석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눔입니다. 농경사회에서 가을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오곡백과가 풍성한 계절입니다. 가을에 거둔 곡식과 과일을 이웃과 특히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능력과 재물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매일 추석을 지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감사입니다. 좋은 날씨를 주시고, 적당한 비를 내려 준 하늘에 감사드리는 겁니다. 좋은 땅을 물려준 조상에 대해 감사드리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일 추석을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추석과 비슷한 명절이 미국에도 있는데 ‘추수감사절’입니다.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온 이주민들은 낯선 환경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겨울을 지낸 이주민들은 가을에 첫 곡식을 수확했습니다. 신앙인들이었던 이주민들은 하느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고, 음식을 이웃과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은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명절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이 귀성, 귀향길에 오르는 우리의 추석과 비슷합니다.
유년시절 제게 추석은 ‘심부름’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형편이 어려우면 돼지고기를, 형편이 좋으면 소고기를 친척들과 나누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친척 집에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면 친척들도 형편에 맞게 추석 명절을 지낼 수 있도록 선물을 주었습니다. 추석날 가족들은 조상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쳤고, 추석 합동 위령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제게 추석은 ‘가을 방학’이었습니다. 신학교는 매년 가을 추석이면 신학생들이 집에서 며칠 쉴 수 있도록 방학을 주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추석 연휴를 보내야 했기에 주어지는 방학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는 신학생들이 사제관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신학생들에게 추석 선물을 주었습니다. 양복 기지를 받기도 했고, 옷을 받기도 했습니다. 추석 방학이면 동창 신학생들과 등산도 하였습니다. 지리산도 갔었고, 덕유산도 갔었습니다. 한번은 동창 신학생의 집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동창 신학생의 집이 서산이었고,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저는 서툴지만 벼 베기를 도와주었습니다. 추석은 ‘영화’를 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극장들은 추석을 맞이해서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영화를 개봉했습니다.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는 추석에 맞추어서 개봉되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추석을 지내는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주신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내게 주신 모든 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재화를 쌓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주의하십시오. 모든 탐욕을 경계하십시오. 아무리 부유하더라고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러합니다.” 오늘 제2 독서는 우리가 누려야 할 천상의 영원한 안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행한 선행, 나눔, 희생,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밝게 비치는 둥근 달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한 한가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 너 우리 한가위만 같기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나 너 우리
높푸른 하늘이 되어
고운 벗님들
정성껏 품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넉넉한 땅이 되어
고운 벗님들
고이 모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둥그런 보름달이 되어
고운 벗님들
부드럽게 감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소담한 송편이 되어
고운 벗님들
살맛 돋우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너 우리
도란도란 밥상이 되어
고운 벗님들
오붓하게 보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 한가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속에서 나오는 하느님께서는 곳간에 재산을 가득히 쌓아놓은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없으면 안 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돈’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그렇게 돈을 모으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어디에 보관하고 또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도 바로 그렇게 끌어 모은 재산에 관해 고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의 마지막에는 기막힌 반전이 있는데 너무나도 허망하게도 하느님께서 큰 곳간을 지은 그 날 밤에 그 부자의 목숨을 되찾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시대에도 이와 같은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곧 평생을 돈을 벌면서 살았는데 결국 쓰지도 못하고 늙고 병들어 죽어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행여나 자식들이라도 그 돈을 물려줘서 잘 살길 바라지만 결국 그 돈 때문에 자식들 간에 분쟁이 있고, 그렇게 부모로부터 쉽게 얻은 돈을 또 쉽게 날려버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돈을 모으는 것보다 그 돈을 정말 잘 쓰는 데에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곧 우리가 돈을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선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곧 주어진 삶 속에서 선을 위한 위대한 투자, 곧 사랑의 나눔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을 위한 투자를 이루어갈 때 당장은 인간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것은 세상의 어떤 재물로도 얻을 수 없는 하느님 안의 영원한 행복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기억하고 삶 속에서 선을 위한 투자, 사랑의 나눔을 항상 이루어가며 언제가 하느님 안의 영원한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길 기도했으면 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추석입니다. 한국에서 추석을 가족과 함께 지낸 지가 오래되었네요! 여러분은 가족들이 모여서 즐거운 추석을 보내고 계시지요.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대해서 잠시 적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탐욕에 대해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특별히 주의하라고 하신 이유는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을 망치고 하느님과 멀어질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의하라고 하는 것은 바로 탐욕입니다. 욕심도 나쁜 것인데 탐욕은 욕심이 너무 지나쳐 탐내며 만족할 줄 모르는 상태를 말하지요. 바로 이것이 사람을 망치게 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이러한 상태의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의하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이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에 나오는 이가 했던 말이 우리의 말이 아닐까요.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하지요. 특히 돈도 많이 벌고 하지만 이렇게 오직 개인의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오직 지상에서의 삶만을 위해 사는 이들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명예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시는 것이며 동시에 답을 주시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삶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필요하지만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전부임을 잊지 맙시다. 아멘!
오늘 네 목숨 되찾아 갈 것이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평생 잘 사는 걸 성공인 줄 알지만 욕심엔 한계를 두고 살아야합니다.
재물이면 세상 문제들이 해결되는 줄 알지만 생명권한은 하늘에 있죠.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재물욕심만 부린다면 세상인생이 불쌍해집니다.
예수님은 그런 재물 욕에 빠지지 말고 하늘 뜻을 따라 살라 하십니다.
세상육신생활은 재물이 있어야하겠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의미 없어요..
내 인생 주역은 육신 아니고 마음이라 생각한다면 하느님 섬겨야해요.
하느님 사랑 믿는 사람들은 이웃 사랑도 함께 베풀 줄 아는 현인이죠.
바로 신앙인들은 이런 하느님 존경 이웃 사랑으로 살려는 위인들이죠.
톨릭알림 말: 인류가 모두 하느님 자녀라 믿고 산다면 평화는 옵니다.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 - “찬양, 심판, 지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시편67,1)
지혜로워야 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무지로 인해, 탐욕에 눈이 멀어 지옥을 자초해 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평생 배우고 깨닫고 실천해야 할 공부가 지혜입니다. 평생 배우고 배워도 여전히 배워야 할 공부가 지혜입니다. 오늘 옛 현자들도 지혜를 가르칩니다.
“버려야 할 것을 못 버리는 것은 스스로를 내다 버리는 것이다.”<다산>
날마다 불필요한 것을 버려가는, 비워가는, 내려 놓고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공자는 네가지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억측을 버렸고,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일을 버렸으며, 고집을 버렸고, 이기심을 버렸다.”<논어>
한마디로 지혜로웠던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로웠던 현인 공자입니다.
오늘은 한가위 추석입니다. 오늘은 삶의 여정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10년전에 끝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느낌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여정이요 참 많이도 강론에 등장했던 주제입니다. 오늘 주제는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이르기까지 귀가 여정중인 우리들이요, 계속 배워가야 하는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늘 강조했던 바가 일생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했을 때, 일년사계 사계절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검이 삶의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날로 “위에로의 여정(an upward journey)”을 살게 합니다. 저로 말하면 오후 5시, 계절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오후 3-4시쯤, 가을철에 속하는 인생들 역시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현역으로 수확의 계절,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인 가을철 답게 부지런히 노력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내외적 수확은 어느 정도이고 갈수록 기도생활, 공부생활에 치열한지 묻고 싶습니다.
믿음의 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졸업이 없는 평생 공부요, 제대가 없는 평생 현역의 영적전투이기 때문입니다.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중 어떻게 하면 보람있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네 측면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찬양입니다.
찬양의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저절로 샘솟는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수확의 계절, 기도의 계절인 가을철에 걸맞는 찬양의 삶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감미로운 세상에 경탄하는 삶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태양의 찬가를 불러 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 찬양 감사의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고귀한 품위의 삶을 살게 합니다. 세상맛이 아닌 하느님 맛으로, 진리맛으로 살게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하느님 중심의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요엘서의 말씀, 오늘 세상에 주시는 주님 말씀입니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이런 하느님을 잊어 자초한 불행입니다. 도대체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샘솟는 찬양과 감사, 그리고 참된 겸손의 삶입니다.
둘째, 심판입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여정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끝날 여정에 늘 심판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하루가 모두인 듯 사는 것입니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철, 언젠가는 주님도 우리 인생을 수확해 가실 것입니다. 과연 신망애(信望愛)의 열매들 잘 익어가는 인생들인지요? 오늘 제2독서 묵시록이 실감나게 종말 심판 수확의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찼습니다.”
그러니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충실했던 이들은 심판의 날은 구원의 날이자 안식의 평화이기에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들려오는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하늘에 쌓았던 보물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선행, 섬김, 자비, 찬양, 감사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상급과 더불어 행복한 천국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아니 이미 지상(地上)에서부터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에게 펼쳐지는 천상(天上)의 삶입니다.
셋째, 지혜입니다.
탐진치(貪瞋癡)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우리 모두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탐욕의 무지가 우리를 눈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해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무욕의 지혜로운 자입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하는 삶이 자유로운 삶, 지혜로운 삶입니다. 소유의 쾌락이 아닌 존재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부자가 참 어리석습니다. 무지의 병이 참 깊습니다. 무지의 탐욕으로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같습니다. 하늘을 향한 창도, 이웃을 향한 창도,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느 창도 없습니다. 완전히 고립단절된 이런 상태가 바로 지옥입니다. 스스로 자초해 이런 부자같은 지옥을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부자였더라면 땅의 곳간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았을 것입니다. 부단히 하느님을 찬미하며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자선의 삶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땅의 곳간에 곡식과 재물을 가득 쌓아두고 자족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조롱하는 하느님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이러하다.”
세상의 부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촉구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삶을,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귀가의 여정,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찬양의 삶, 늘 심판을 염두에 둔 삶,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의 삶을 배우고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로운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곡 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우리 주 하느님이 복을 주심이로다.”(시편57,7). 아멘.
김준수 신부님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2,15)
오늘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 추석 명절입니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모든 분에게 주님의 풍성한 축복이 내리길 바라면서 인사드립니다. 물론 수도원 문화도 예전과 달리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한 가지가 바로 명절에 친가 방문이 허락되었습니다. 물론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신 저와 같은 고아들이야 갈 곳이 없으니 당연히 수도원에 머물지요. 어쩌면 외롭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조용한 수도원에 머무는 것도 참 좋습니다. 다만 저는 3년 동안 원외 거주 관면을 받고 안성에 머물고 있기에, 금년에도 안산 여동생네 집에서 명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흔히 한가위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년 12달 오늘만 같아라, 라는 한가위 덕담이 단지 말이 아닌 실제 우리네 삶의 현실이 되었으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추석 차례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너무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 “남아넘치는 재물을 쌓아 두기 위해 넓고 큰 곳간”(12,18)을 새롭게 짓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그보다는 이미 있는 헌 곳간에 넣을 만큼만 쌓아 두고, 남은 재물일랑 춥고 배고픈 형제자매와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길 기대합니다. 너그럽고 정다운 사람 되시어 이번 명절만큼은 마음도 화통하게, 씀씀이도 넉넉하게 이웃에게 베푸시길 바랍니다. 사람의 인생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고 하니 썩어 없어질 세상 곳간에 쌓아 두지 말고 영원히 썩지도, 없어지지도 않을 하느님의 곳간에 쌓아 두는 게 참으로 지혜롭고 축복받는 사람이 아닐까, 싶네요. 입으로는 형제요 가족이네, 라고 말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여러분은 없는 가난한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말이 아닌 나눔을 통해서 더 풍성한 명절을 맞이하고 보내길 바랍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12,17)라고 고민할 필요가 어디 있나요. 또 누가 가진 재물을 가지고 무엇을 한다고 비난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충분히 쓰실 재물이 있으시다면 충분히 쓰시고, 남는 수확물을 보관하기보다 나누고 베풀면서 몸도 마음도 충만한 기쁨과 보람 느끼도록 인심 팍팍 쓰세요. 베푸는 것이 남는 것입니다. 노인 요양병원에서 원목 신부로 일했고 3년 동안 생활하면서 경험했지만, 제대로 잡수지도 못하고 새 옷 한번 사 입지 못하고 보약 한번 제대로 해 잡수지 못한 채 아끼고 아껴서 모아 둔 재산, 그 남은 재산 때문에 자녀들 간에 재산 싸움으로 인해 재산은 재산대로 남 좋은 일 시키고, 자식들 서로 간에 불화와 불목을 남기고 떠난다면 편히 눈이라도 감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정말로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2,15) 지금 가지신 재산일랑 돌아가신 조상님들 생각해서 그들의 은덕이며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라 생각하신다면 가난한 친형제 자매들과 기꺼이 나누는 게 조상들에 대한 마땅한 보답이 될 것이며, 더욱 이웃의 가난한 이웃에게 아름답게 나누신다면,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기뻐하실 것이며, 덤으로 더욱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부디 행복하고 기쁨과 사랑이 넘쳐나는 한가위 명절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시67,7)라는 노래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 마음에 새기면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추석 연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만큼은 한시름 다 내려놓고 행복하세요~~~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휘영청 밝고 아름다운, 축복 가득찬 한가위 되셰요.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입당송에서는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라고 노래합니다.
본기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또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노래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주며,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는 것,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베풂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창조와 축복과 선사로 시작된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베풀어졌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외아드님을 건네주심으로 구원을 베풀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은총에 은총을 덧입은 이들입니다.
또한 지금도 우리가 만난 모든 것들 안에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당신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비유 안의 이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인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마치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과 집착’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이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의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재물에 집착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신만의 것인 양 여기고, 이웃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마치 자신이 자기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 양 착각하고 오만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곧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임을 깨닫고 되고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유당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게 되어 ‘전부’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소유하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가지게 되면 ‘전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 그 누구에게도 소유당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전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보다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을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소유당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내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놀라우신 일을 하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주님!
탐욕의 온상지인 제 자신을 경계하게 하소서.
제 곳간이 아니라 당신 곳간에 희망을 두게 하소서!
제 곳간이 비워지고 당신 곳간이 채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비워지고 당신 뜻의 거룩함을 이루소서.
주님, 당신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합동 위령미사를 봉헌하며 기억하는 분들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들과 조상님들, 대부 대모님들,
우리의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던 가족과 친척, 친지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 선생님들, 은인들, 후원자들, 이웃사촌들, 수호천사들,
우리나라의 국토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던 순국선열들, 독립투사들, 의사들, 호국 열사들, 무도인들, 드러나지 않아 이름조차 모르는 의인들,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 침략 전쟁에 끌려가고 억울하게 징용된 남녀 민간인들, 6.25 남북전쟁과 외국에 파병 나가 생을 마감해야 했던 무명용사들과 화학 전쟁 등의 참여 폐해로 한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상이군인들과 남녀 피해자들과 유가족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와 우리 사회와 문화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애쓰신 선열들, 순교자들, 신비가들, 영성가들, 사상가들, 군자들, 철학자들, 예술가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 사회의 질서와 유지를 위해, 남보다 이렇다 할 큰 소득이 없어도, 대대손손이 이어오는 작업을 통해 우리 사회와 인류의 존속과 유지와 발전을 위해 희생해온 공직자들, 사회복지사들, 자원봉사자들,
우리 사회의 설립과 재건을 위해 장시간 과로하며 안전장비도 제대로 없는 산업현장에서 애쓰는 주역이면서도 이렇다 할 임금이나 적절한 치료나 의료혜택이나 보상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살아가는 노동자들,
농어촌과 광업 등지에서 큰 소득이 없어도 사회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꾸준하고 묵묵히 수행해 왔던 우리 사회의 숨은 일꾼들,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더불어 알게 모르게 사회의 문제와 병고와 아픔을 우리 대신 짊어지고 희생하며 살아야 했던 장애우들,
이러저러한 차별과 박대를 당하며 우리 사회에서 밀려난 난치병 환우들, 철거민들과 도시 빈민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사람들,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한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떠밀려 나간 소외된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일하면서도 존경과 칭찬은커녕 무시를 받으면서 불평등한 조건에서 살아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합동 위령미사를 드리며 기억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무한하신 자비로 품어 안아 주시고, 그 고통과 아픔을 다 씻어주시고, 위로해 주시며, 주님 사랑으로 갚아 주시고 채워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여러분의 조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셨습니까?
조부모님을 그릴 때 기억나는 상황이나 사건이 있으신지요?
여러분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여러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셨습니까?
아버지를 그릴 때 기억나는 상황이나 사건이 있으신지요?
저희 아버님은 제가 어릴 때 장기놀이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님은 장기판에서 장기돌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시며 운용하셨는데, 저는 장기를 잘 둘 줄 모라서 제 졸도 제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상이고 마고 잘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어떤 이에게는 가족과 일가친척 그리고 함께하는 이들이 선물이요 형제자매가 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원수요 짐이 되기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살라고 보내주신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장기판의 돌처럼 도구가 되기도 하고 짐이 되기도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저를 참으로 귀하게 귀하게 키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전의 어느 본당에서는 신자들이 제 어머니가 저를 하도 귀하게 키워 주셨다는 의미로, 저에게 ‘귀돌이’라는 별명마저 지어 주신 기억마저 납니다.
예전에 어느 본당에서 오영진 신부님이시라고, 올리비에 드 브랑제라는 외국 신부님과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훗날 본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주교님이 되셨는데, 추석 같은 이런 명절에 텔레비전에서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의 고향행렬을 보면서 참 부러워하셨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18세가 돼서 독립하면 그만인 데 반하여, 10시간 12시간씩 걸려서라도 고향을 찾는 한국인들에게서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상 어디서도 이처럼 가족과 부모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지닌 민족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참 아름답습니다. 부모를 찾는 것을 인간의 예와 자식 된 도리로 여겨 전통이 되다시피 한 이 행렬은 마치 하늘나라를 향한 행렬과도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하게 되는 가족 간에도 섭섭함과 원망이 싹틀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원수처럼 지내기까지 하여, ‘차라리 가족이 아니었더라면’ 하는 마음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인간관계 속에 적용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나마 살아있으니까 원수도 되는 것이지 상대가 죽어 없으면 그나마 원망할 대상도 없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관계가 어려울 땐 참으로 부딪히기 싫어서 아예 만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인간의 생애가 그렇게 무한정 남아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작 상대가 이승을 떠나버리면, 살아생전에 다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내 남은 평생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무덤만이라도 정성껏 꾸미려고 하지만,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살아생전에 잘 할 것을 하는 아쉬움이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가족을 만날 때마다 이번에는 화해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만나면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넘어가게 되고, 오히려 더 심하게 싸우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모든 일이 돈과 관련되어 싸우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내외적인 욕심과 시샘, 질투, 증오와 분열 및 결별과 관련하여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고 말씀하십니다.
비단 화해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일 년 내내 간직한 채 실현하지 못한 좋은 뜻들을 꼭 실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담에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조금 풀리기만 하면, 나도 명절 때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기부도 하고 봉사도 해야겠다는 꿈과 계획들을 이번 한가위, 추석에 실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신 주님과 더욱 닮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소득을 가지고 자신이 두고두고 누리기 위해, 꼭꼭 감춰두었다가 하루아침에 죽어버림으로써 쓰지도 못하고 물거품이 된 사람을 예로 들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가족뿐만 아니라 주님의 형제들인 교우들과 가난한 이들에게도 내 입을 열고 손을 내밀어 우리 사랑을 나누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과연 우리 재산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부하고 있는 재산의 1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오늘 이 험난한 세상에서 그나마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나름 무엇인가 누리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만일 일 년 내내 내게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단순히 우리가 가진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습니다.
인간 누구나 무엇을 먹던 세끼 밥은 다 먹고 살고, 어디서 자던 발 뻗고 누워서 자는데, 우리가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람이 우리의 재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아무도 우리에게 찾아 인사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었던 순간들이 우리 인생의 뒤안길에서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우리의 기쁨이요 보람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한가위 이 추석, 가족 친지들과 좋은 시간 보내시고, 여유가 있으면 어려운 이웃들과도 나눔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우리가 언젠간 빈손으로 가게 될 하늘 나라에 미리 선심공덕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조선 말기 순조 19년(1819)에 김애순이 한양의 세시풍속과 연중행사를 기록한 ‘열양세시기’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 하여라.”라고 했던 선현들의 말처럼, 이지러짐이 없는 풍요로움으로, 한가위, 추석 명절 잘 보내시고 행복하십시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참 부자는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 <루카 12, 15-21> 9월 17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추석을 풍요롭게 지내는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 복음을 통해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하시며 재산과 잠시 지나가는 세상에 사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 부자의 비유 말씀을 하시며 창고에 먹을 것, 금고에 많은 돈이 있어도 생명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돈 없으면 사는 것이 힘들지만,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를 비웃는 비유가 아니라, 깨우치려는 말씀입니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게 수천억의 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돈 많은 김건희 회장이 삼성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면서 한 벌의 환자 옷을 입고 서성이며 그 많은 재산이 지금 이 상태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고백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병원 특실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사람이나 삼등실에서 맞이한 사람이나 나무 코트를 입는 것은 동등합니다. 요사이는 대부분 화장터에서 시신이 재로 변화되는 것 같습니다.
추수감사절 같은 추석, 달 보고 맛있는 음식 먹으며 즐기는 것보다 가난한 이웃과 필요한 것을 나누고 함께 즐기고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한 가족이 모여 제사를 풍요롭게 지내는 것은 제사상에 올려놓은 음식을 형제자매가 나누어 먹고 헤어질 때 남는 음식을 나누어주는 것이 의미가 있으며 혹시 돈이 필요한 형제가 있거나 아이들에게 한 푼이라도 나누어 주는 것에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어제저녁 수도원 저녁 식탁에 올려놓은 음식은 풍족함 그 자체였습니다. 저도 떡 하나, 강정 하나, 복숭아 한 쪽 먹으면서 추석 전날을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하고 지내며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며 내일 찾아오시는 면담자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면담자에게 줄 것을 준비하여 주지만, 오늘 면담자는 특별히 풍성한 것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추석을 맞이합니다. 찾아오고 찾아가는 사람에게 있으면 빈손으로 가지 말고 나누어 주기를 바랍니다.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려 겉모양은 빵과 포도주이지만,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시며 풍요로운 잔치에 초대하고 나누어주십니다. 그 나눔은 생명이며 사랑입니다. 미사 끝나고 우리는 주님에게 받은 자비, 일치,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주시듯 오늘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체가 “복음 선포”와 더불어 가진 바를 나누며 사는 것이 참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추석 명절 “무엇을 얻을까?”가 아니라, “가진 바를 어떻게 나눌까?”가 문제입니다. 저는 받은 바를 이미 나누었고 무엇이든지 주는 형제를 위해 나눔을 주며 사흘을 지내려고 합니다.
가진 바를 나누며 풍성한 추석을 맞이하고 지내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함승수 신부님
우리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인생이 내 뜻과 계획대로 되지 않고, 내 힘만으로는 원하는 걸 이룰 수 없음을 수많은 실패 체험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깨달아 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욕심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느님 뜻에 철저히 순명하며 그분 손에 자신을 내어맡겨야 하는데, 자꾸만 그 반대로 하려고 들지요. 내 손에 쥐고 있는 얼마 안되는 세상의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더 강하게 움켜쥐는 겁니다. 그렇게 움켜쥐고 집착한다고 해서 하늘나라에서 가져갈 수 있는게 아닌데도, 손을 쫙 펴고 나누어야 하늘나라에 있는 내 창고에 내가 그곳에서 누릴 기쁨과 행복이 차곡차곡 쌓이는건데도, 오늘 복음 비유 속 부자처럼 이 세상에 있는 창고를 그득그득 채우는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겁니다.
성경 속 지혜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잠언’에는 그런 우리들 보라고 이런 경고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습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잠언 27,1).” “사람의 마음속에 많은 계획이 들어 있어도 이루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뿐이다(잠언 19,21).” 더 잘 살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우리의 모든 계획들과 노력들은 철저히 주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과정에 최선을 다하며 겸손한 자세로 주님께 결과를 맡겨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가 계획하고 바라는대로 될 것이고,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일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우리 삶이 주님 뜻과 섭리 안에서 그분 보시기에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지요.
그러나 오늘 복음 비유 속 부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곳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소출을 거두었으면서도, 부족한 자신을 통해 그토록 놀라운 결실을 맺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그 많은 소출을 어떻게 저장하고 어떻게 누릴지에만 관심을 두지요. 본인의 삶에 얼마 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도 모르면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당장 ‘오늘 밤’ 자기 목숨을 거두어 가시리라는 것도 모른 채, 한껏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에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이 부자처럼 자기가 세상에서 누리는 재화를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얻어낸, 온전한 ‘자기 것’으로 여기는 이들은 자기 ‘인생’도 자기 것이라고, 자기가 많은 재산을 소유한 만큼 그것을 쓸 충분한 ‘시간’도 당연히 주어질 거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라는게 그렇지 않지요. 우리 삶과 생명은 우리가 소유한 재산이 아니라 하느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재화를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삶 속에서 하느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기뻐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종말의 순간 수확을 위해 심판의 낫을 휘두르실 때, 우리 삶이 그분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풍성한 수확물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하느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니 풍성한 수확의 명절인 한가위가 여유롭고 넉넉한 나에게만 기쁨이 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 되도록, 가난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어야겠습니다.
풍요를 만드는 나눔
최용감 안젤로 신부님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풍성함을 만끽해야 하는 한가위 미사 복음에 ‘탐욕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가득합니다. 열심히 일한 후에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여기던 것들에 대해서도, 인간의 운명이란 하느님 손에 달려 있음을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경고하며 내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라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우리들은 언제나 살아 있을 요량으로 손에 쥔 것을 꼭 잡고 놓지 않으려 합니다. 복음은 그런 자들을 어리석다고 합니다. 한가위에 우리는 성묘를 갑니다. 우리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 조상님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묘지를 방문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을 부대끼고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이 지금은 땅 아래 묻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 역시 결국 그러하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해집니다. 나 자신에게 말해봅시다. “자 이제 나누며 즐기자!”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들판은
더 한층
깊어지며
황금들녘으로
노랗게
물들어 갑니다.
다시 뜨거운
한가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계절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한가위의
중심에는
은총으로
거두어들인
수확으로
차례를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지나온 시간은
언제나
가장 좋은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따뜻한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이와 같이
감사로
이어져
있습니다.
행복은 재산에
있지 않고
생명을
허락하시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은총 가득한
발걸음으로
가을들판이
아름답게
물들듯이
내맡기는
우리의 삶도
욕심없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생명 그 자체로
돌아가는
순리의
시간입니다.
마음을 숙여
하느님께
정성들여
기도드리는
한가위
명절입니다.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목숨이 하나이듯
하느님께서도
한 분이십니다.
탐욕이 아니라
목숨이며
목숨은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오늘의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지나가는
길마다 감사의
한가위가
되게하십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고마운
축복의 한가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안수정동이란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달려드는 코끼리를 피해 도망치던 중에 우물을 만났습니다. 등나무 줄기를 붙잡고 우물 아래에 내려가자 바닥에 뱀들이 가득한 것이 아닙니까? 머리 위를 올려보니 설상가상으로 흰 쥐와 검은 쥐가 나무줄기를 갉아 먹는 중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갈등하고 있을 때, 머리 위로 무엇인가가 떨어졌습니다. 손가락을 찍어 맛을 보니 달콤한 꿀입니다. 이 남자는 죽을 위기에 처한 것도 잊고 정신없이 꿀만 받아먹었습니다.
이 남자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 상태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냥 꿀만 받아먹다가 의지하고 있던 나무줄기가 끊어져 우물 바닥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살 가능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줄을 타고 올라가 코끼리와 싸우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꿀만 받아먹을 사람은 없겠지요. 그런데 이 우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 모습을 빗대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겠습니까? 달콤한 꿀과 같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다가 죽겠습니까? 아니면 나의 의지와 능력을 키워나가면서 위험이 있어도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기껏 돈 벌라는 것일까요? 기껏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는 것일까요? 분명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활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가위 미사를 봉헌합니다. 우리의 옛 조상님들은 한 해를 마무리해가는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그 절정에 자리한 팔월 한가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잘되었든 못되었든 간에,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것은 조상님 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미사를 봉헌하면서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는 하느님께, 그리고 지금 여기 있게끔 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감사의 마음과 함께, 우리도 언젠가는 갈 수밖에 없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즉,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것에 온 힘을 쏟는 삶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에 온 힘을 쏟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참 좋은’ 모습의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상상하고, 상상하는 것을 추구하며, 추구하는 것을 창조한다(조지 버나드 쇼).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오, 거두어가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또다시 추석입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이 크신 분들도 많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친지들 가운데서 바이러스 여파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분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걸맞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관대한 나눔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또한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는 부자를 향해 엄중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사실 재물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은 우리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부여하신 능력과 달란트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정직하고 깨끗하게 부(富)를 축척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야 봉사활동도 할 수 있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재물에 대한 과도한 욕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전 생애를 오직 재산 축척에만 몰두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전노처럼 돈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재물을 하느님의 위치에 올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은 때로 마약과도 같아서 우리 인간의 오관 기능을 마비시키고 판단 능력을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결국 재물은 우리를 거룩함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해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속을 가장 잘 대표하는 재물이 우리 영혼에 끼치는 이런 악영향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재물을 지혜롭게 잘 사용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준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복음 12장 20절)
따지고 보니 그렇습니다. 냉혹하지만 진리입니다.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오, 거두어가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축복도 주시지만 고통도 주십니다. 생명도 주시지만 죽음도 주십니다.
사실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우리의 생애는 덧없이 시들고, 우리는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때 우리가 모아두었던 재산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쌓아온 재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과 세상,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했던 나눔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행하고 있는 소리 없는 나눔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실 봉헌인 것입니다.
매일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의 재물에 죽고,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자존심에 죽고, 나만의 영역에 죽고, 내 울타리에 죽을 때, 우리의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잘 왔노라’ 하시며 우리를 환영하실 것입니다.
누구나가 다 고상한 죽음, 남 보기에 민망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합니다. 더 나아가서 고귀한 죽음, 향기로운 죽음, 이웃들의 뇌리에 강한 긍정적인 각인을 하는 죽음을 맞이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런 죽음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매일 부단히 죽는 사람들, 매일 자아 포기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 부단히 자기 혁신을 위한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한 가위’입니다. 더 쉽게 다가오는 말은 ‘추석’입니다. 멀리 타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추석이면 ‘선물’을 준비해서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심부름은 주로 제가 했습니다. 고모님 댁, 외할머니 댁에 선물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이렇게 서로 나누는 것을 ‘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제가 되면서 추석이면 가족들이 모여 함께 가정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어머니에게 가정 미사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조상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고, 준비한 음식을 나누면서 추석의 밤은 깊어갔습니다. 이젠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멀리 타향에 있으니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추석을 지낼 수는 없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2년 전에 하느님 품으로 가신 어머니의 기일입니다. 추석 ‘둥근달’처럼 넉넉하고, 풍요로운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서품기념일에 동창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 것이 제게는 ‘추석선물’과 같았습니다. 강론을 대신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랜 시간 군종사제로 있었던 동창은 지난 31년 본인의 뜻대로 지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기치 않게 군종사제가 되었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20년 가까이 군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단순한 군대에 있었기에 사제생활을 더욱 충실하게 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저의 서품성구를 나누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가 저의 서품성구입니다. 지난 31년 땀과 노력으로 결실을 맺기 보다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처럼 남에게 기대면서 열매만 얻으려고 했던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 사목하는 동창은 언제나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교우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것에는 인색했다고 하였습니다. 지친 몸을 의지하고, 머물 수 있는 곳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들 아쉬움과 후회를 이야기했지만 돌아보면 감사한 일들이 참 많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추석을 지내는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주신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내게 주신 모든 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재화를 쌓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주의하십시오. 모든 탐욕을 경계하십시오. 아무리 부유하더라고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러합니다.” 경주의 최부자 집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에 재화를 쌓아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산은 1년에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내라. 가문에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 이웃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오늘 제2 독서는 우리가 누려야 할 천상의 영원한 안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한가위 보름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여러 가지이듯이,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서게 될 때도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사람들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려고 마음은 먹지만 전혀 실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대로 살고,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따라 살겠다고 다짐을 하다가도 곧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자갈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사람입니다. 작심삼일인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지점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 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받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행한 선행, 나눔, 희생,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밝게 비치는 둥근 달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한 한가위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곳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거둔 것은 많은데
모아 둘 데가 없어
고민하는 사람아
그대 곁에는 늘
여전히 빈 곳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대의 좁아진 곳간을
굳이 힘들여 헐어 내고
애써 다시 지으려는가
그럴 정성이라면
그대 곁의 빈 곳간들에
차곡차곡 모으시게나
나의 곳간 너의 곳간
어디 따로 있겠는가
모두 하느님의 곳간인 게지
하느님께서
그대의 곳간에서 빼내어
다른 곳간으로 옮기시기 전에
그대가 몸소 기쁘게
나의 곳간 너의 곳간 허물어
골고루 채우시게나
그대가
당신이 하실 일을 알아서 하니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그대가
벗들의 빈 곳간을 채워주니
벗들은 또 얼마나 기뻐하겠나
그대 덕분에
하느님도 벗들도 모두 기뻐하니
그대도 마냥 기쁘지 않겠는가
풍성하고 행복했으면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김삿갓은 윤씨 집성촌에 시 한 수를 남겼으니 그 연유로 후손들이 부끄럽다.
'동림산 아래 봄 풀이 푸르니
큰 소 작은 소 모두 긴 꼬리 휘두르네 오늘 단오에는 잡힐까 두려워
근심 속에 보내고 팔월 추석 역시 두려워 하네.'
김삿갓은 윤씨 집성촌 동림산 아래 마을에서 하룻밤 재워주길 청했으나 거절 당하였다. 화가난 김삿갓은 소 축(丑)자에 꼬리를 달면 윤(尹)자가 되므로 윤씨를 소에 비유하여 사람에게 잡아 먹히지 말고 오월 단오와 추석명절을 잘 넘기라며 풍자시를 써서 화풀이를 하였다.(방랑시인 난고 감삿갓 한시집, 엄흥용 편저, 책과 공간, 2014, 56쪽)
동림산이라, 내가 잘 아는 그 산 어래 그 윤씨 집성촌이 아닌가? 어째튼 동림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윤씨 집성촌에서 일어난 일이라니 창피도 하다.
나그네를 문전박대, 허기지고 피곤이 쏱아지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쌍놈이나 하는 일이 아니던가? 더구나 팔월 한가위에 그랬다면 이들은 죽일 놈이 아니던가?
안동김씨 김삿갓의 후손과 영월에 위치한 감삿갓면에 들렀을 때, 나는 이 시를 만나 함께한 친구에게 정중히 사과를 했었다. 일반대학생 시절 경제학 교수는 나를 보고 축씨라고 불렀는데 그 호칭이 윤씨 집성촌에서 김삿갓이 당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얼마 뒤에 알게되었다.
'민들레 국수집' 서영남 주인장과 봉사자들이 후원자 덕에 VIP 품바들이 건강히 살고, 김하종 신부의 '성남 안나의 집'에서 가난한 자들을 벗으로 맞이하며 풍성히 사는데 우리들은 그곳에서 숨어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청주의 '행복밥집' 연규순 라파엘 주인장이 많은 가난한 이들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니 고맙고 감사하다.
한가위가 풍성한 것은 고향을 찾아 서로에게 오랫만에 사랑과 감사를 주고 받으니 그 안에서 숨어계신 하느님을 만나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의 윤씨도 부끄러워 보기가 싫다. 전체를 살펴 잘헤아려 주길 바란다. 소가 웃을 일 하지 말고, 또 현대판 감삿갓이 부끄러운 시 한 수 후대에 남길까 심히 걱정이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어리석은 부자가 자신이 거두어들인 수확을 모아두기 위해 더 큰 곳간을 짓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신앙의 기본은 하느님께서 삶의 주인이신 분, 곧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곧 신앙인은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의 것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 하느님 안에 참된 자유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생명, 내 가족, 내 재산 등등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임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신앙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경우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처럼 자신이 가진 소유물들에 대해서 그것이 자신의 힘만으로 쟁취한 것처럼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하고, 그것이 영원히 자신이 소유할 것처럼 어리석게 집착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본 예화겠지만 우산장사와 짚신장사를 하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 어머니는 두 아들의 업종 때문에 매일매일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갔습니다. 햇볕이 쬐는 날이면 큰아들의 장사가 안되는 것을 걱정해야 했고,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짚신을 파는 작은 아들의 장사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곧 그 어머니는 해가 떠도 걱정, 비가 와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 그 어머니에게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날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해가 뜨면 작은아들의 장사가 잘되는 것에 감사하고, 비가 오면 큰아들의 장사가 잘되는 것에 감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의 어머니는 과연 그 사람의 말대로 그렇게 감사를 드리기 시작하니까 걱정이 사라지고 행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파우스트의 저자 괴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말하길 하느님께서는 촛불의 소중함에 감사하는 이에게 별빛을, 별빛의 소중함에 감사하는 이에게 달빛을, 달빛의 소중함을 감사하는 이에게 햇빛을, 햇빛의 소중함에 감사하는 이에게 구원의 빛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며, 하느님 안에 참된 자유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근상 시몬 신부님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 중에 지켜야 할 것과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을 구별하는 기준을 알려주는 복음. 지키기 위해서 안달하거나, 떠나갈 것만같아 불안한 것은 지킬 수도, 지킬 필요도 없다. 돈은 말할 것도 없고, 건강도, 또 달달한 관계도, 세상의 평화(?), 마음의 평온(?)도, 이들을 지킬 수 있는 것도, 또 지켜야만 할 것도 아니다.
받은 선물 중에 떠나갈 것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지키기 위해 창고가 필요없는 전능한 선물을 믿는 이들은 '아가페'라 고백한다. 거룩하신 그분이 주셨기에 그 사명을 다하기까지 우리에게서 결코 떠나지 않으리라 믿는다. 끈질기게 우리의 회심을 기다렸다가 결국 우리를 이기리라 희망한다.
선배 한 분이 아주 몹쓸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투병이 2022년 한가위에 시작되었다. 한가위, 가득 채워진 달에 희망을 두어야 하는데, 가득 채워진 달에 얼룩이 가득하다. 사랑은 서글픈 날에도 쉼이 없다. 그가 살아낼 아가페가 진하고 깊을 것이라 확신한다.
어떤 적이 그에게서 선물을 빼앗아 갈 수 있으랴.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곡식이 익어가는 가을 걷이 시기
1년중 가장 풍성하고 여유로운 한가위는
가족과 가족이 모여 나눔과 친교를 이루는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올 해는 어느 때 보다도 어려움을 겪으시는 분들도 많고
세대와 시대의 갈등이 첨예한 시기이도 함을 생각해 봅니다.
유다의 풍요로운 소출의 축제가
서로 서로를 보듬어주고 감싸 안아주며
하느님께 대한 감사 안에서 자비를 실천했던 시기였던 바와 같이
우리의 한가위도 조상님들의 영혼에 대한 기도와 더불어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며 회복하는
진정한 감사의 축제가 될 수 있기를 청해봅니다.
아멘.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Take care to guard against all greed
삶은 여행
신중호 베드로 신부님
예로니모 성인은 당신 어머니 장례미사 때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성인의 행동은 죽은 이들이 단순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라지지 않으며,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욕심을 채우는 일에만 온 정성을 쏟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우리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갈 때가 언제일지 모르니 허상을 좇지 말고 참된 것에 힘을 쏟으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새 신부 때 은퇴를 앞둔 70대 신부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한번은 식사 시간에 신부님께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라고 했더니, 신부님께서 “신 신부 시간은 30km로 가지만, 내 시간은 70km로 지나가.” 하셨습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시간의 속도를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 삶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영원을 생각할 때 삶은 잠시의 여행에 불과합니다. 하느님 품으로 먼저 가신 우리 가족들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매일의 시간이 본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임을 알고,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참 부모이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물을 들고 고향집으로 향해 가야겠습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함승수 신부님
민족의 대명절 추석(秋夕)입니다. ‘가을 추’(秋)자에 ‘저녁 석’(夕)자를 씁니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추수하는 계절인 가을에, 하루를 마무리하고 그 결실을 헤아리는 시간인 저녁이 더해지니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하고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상태가 주는 기쁨에 겨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외칠 정도지요. 그런데 이처럼 풍족한 상태 자체에 취하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바로 ‘감사’의 마음입니다. 지금 내 손 위에 들려있다고 나 혼자 힘으로 이뤄낸게 아닙니다. ‘지금’이 있을 수 있게 만들어준 존재가 있었기에 그런 결실을 얻는게 가능했지요. 그러니 감사의 인사를 드림이 당연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신 조상님들과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마다 풍성한 소출을 내어주는 땅과 그 과정에 알게 모르게 기여하는 온갖 피조물들에게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을 섭리하시고 보살피시며 주관하시는 사랑의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나 하나 감사를 드리며 자기 삶을 돌아봅니다. 내가 삶의 목표를 올바르게 설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잘 나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 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어떤 부자’는 그런 것들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원래 소유했던 곳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양의 소출을 거두었음에도, 그토록 풍성한 결실을 허락하신 만군의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습니다. 마치 제 능력과 노력만으로 그런 대단한 결과를 얻은 것인양 착각하며, 그것들을 자기 창고에 꽁꽁 감춰둔 채 자기 혼자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지요. 그처럼 제 손에 쥔 재화를 자신의 힘이나 노력, 혹은 행운의 결과로 여기는 이들은 자기 능력 밖의 것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분께서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하루 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유한한 인간 존재로서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그 삶을 어떻게 살아야 더 보람차고 의미있게 보낼 수 있을지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그저 지금 먹고 마시며 즐기는데에만 몰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가 이처럼 유흥과 쾌락에 몰두하는 사이, 그가 미쳐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는 사이, 죽음은 그의 바로 뒤에 다가와 있습니다. 그에게 생명을 맡겨주셨던 하느님께서 ‘때가 되어’ 그 생명을 되찾아 가시려고 오시는 것이지요. 그 때 그분께 돌려드리는 생명에는 내 삶의 흔적들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며 따른 사랑과 자비의 흔적이라면 하느님께서 거기에 참된 기쁨과 행복을 더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돌려주실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 뜻을 나몰라라 하고 욕망과 쾌락만 쫓은 이기심과 나태함의 흔적이라면 하느님께서 거기에 절망과 후회를 더하여 ‘영원한 고통’으로 돌려주실 겁니다.
그러니 세상에 곡식창고를 지을 생각말고 하늘에 사랑창고를 지어야 합니다. 내 삶에 많은 소출이 있기까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의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고마운 은인들에게 내가 입은 은혜에 감사라는 이자를 얹어 돌려주어야 합니다. 또 주변 이웃과 친지, 특히 가난에 허덕이는 어려운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영원한 생명은 내 손에 움켜쥔 재산이 아니라, 내가 아낌없이 베풀고 나눈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한 30여년 전에, 아마도 명절 근처의 어느 날 본당의 성모회장님이 한복과 두루마기를 맞춰서 가져오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저 초짜 신부로서 검소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성모회의 한복 선물을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성모회장님과 임원들이 제가 선물을 거절했다고 울고 계시다는 소식을 본당 수녀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수녀님의 간절한 청원을 못 이겨 한복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받기는 했지만, 제가 한복을 따로 입고 있을 일이 없어서, 착용을 차일 필 미루고는 옷장에만 걸어놓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왕이면 새해와 한가위 명절 등 우리나라의 고유명절 때 한복에 영대를 걸치고 미사를 봉헌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복을 입고 미사를 봉헌해왔습니다. 저는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저를 이곳 한반도에서 태어나시게 하셨기에 제가 이 나라에서 태어났고 이 민족의 일원이 되었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한복, 국악 등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여타 문화와 비교하여 차등으로 여기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끔 외국의 전통의상을 색다른 맛으로 바라보듯이,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고유의상인 한복을 아주 신기한 모습으로 바라보며 감탄해 마지않습니다. 외국인들과 함께 국제모임을 할 때 가끔 한복을 입고 각 나라의 문화행사를 하게 됩니다. 요즘 광화문 등지에 나가보면 한복을 입고 나들이를 하는 분들을 보면 참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우리 신자들이 개인적으로는 다소 번거롭기도 하겠지만,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이나 성모의 밤, 순교자 현양의 밤, 그리고 대축일인 성탄과 부활 및 성모승천대축일에 한복을 입고 미사를 봉헌하시는 모습을 보면, 주님께서 참 기쁘고 어여쁘게 바라보시리라고 여깁니다.
명절 때마다 부모님과 은인들이 새롭게 맞춰준 옷을 입으면서 새사람이 됩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도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다 못해왔던 것, 지금까지 뭔가 자식으로서 어른으로서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미뤄왔던 일들을 이번 추석 한가위를 맞아 실행하여 새사람의 첫걸음을 시작해 봅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추석 한가위에 무엇을 하고 놀았나 생각해 봅니다.
서민들은 '줄타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씨름', '소맥이 놀이', '널뛰기', '농악' 등을 하면서 놀았고, 양반들은 '바둑두기', '시조·창하기', '자수 놓기', '글씨쓰기', '가야금 연주', '투호 놀이' 등을 하면서 여가를 보냈습니다.
여자들은 주로 '자수 놓기', '그네뛰기', '널뛰기', '강강술래', '놋다리밟기', '투호 놀이' 등을 하였고, 남자들은 '줄타기', '고싸움', '소싸움', '씨름', '농악놀이', '바둑두기', '북 놀이' 등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바둑두기', '장기 두기', '씨름', '강강술래', '소싸움' 등을 했고, 아이들은 '비석 치기', '연날리기', '윷놀이', '제기차기', '말타기 놀이', '가마싸움', '팽이치기', '풀각시 놀이', '구슬치기', '썰매 타기', '달맞이' 등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놀이를 가나다순으로 간단히 살펴보면;
‘가마싸움’은 일명 가마 놀이라고도 하는 학동들의 놀이입니다. 추석전각 서당의 학동 중 대표를 뽑고 각기 가마와 기를 만들며 가마싸움 준비를 합니다. 15일이 되면 가마를 끌고 마을을 누비고 다니며 기세를 올리고 나서, 넓은 마당에 나가 달려가 가마를 부딪쳐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되는 놀이입니다. 이긴 편에서 그해에 등과가 나온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강강술래’는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와 도서지방에 널리 전승되고 있는 여성들의 집단놀이로서 주로 한가위 밤에만 놀아왔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 밤을 비롯하여 달이 밝은 밤에 수시로 놀아온 놀이입니다. 이 놀이의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고대 농경시대의 공동 축제 때 노래를 부르며 춤추던 놀이형태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면서 점차로 변화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 강강술래를 의병술로 이용해서 왜적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돌아가게 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사람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져 내려왔다고 봅니다.
‘반보기’는 옛날 시집간 여자들이 시집살이하면서 마음대로 친정에 갈 수 없자,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날짜와 장소를 미리 정해서 서로 좋아하는 음식을 장만하여 한나절 동안 회포를 풀었다고 합니다. 중간에서 만나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뜻으로 반보기랍니다. 또 이웃 마을의 여인들과 어울려 지내기도 했답니다.
‘밭고랑 기기’는 추석 전날 8월 14일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나이 수대로 밭고랑을 기어가는데 이렇게 하면 그 아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밭농사도 잘된다는 뜻으로 전라남도 진도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때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고 하기도 한답니다.
‘소맥이 놀이’는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난 뒤 알맞은 시간에 소 놀이가 진행됩니다. 멍석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가 소의 형상으로 꾸며서는 그 소를 끌고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부농 집이나 그해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대문 앞에서 '소가 배가 고프고 구정물을 먹고 싶어 왔으니 달라.' 고 외치면 주인이 나와서 일행을 맞이하고 술과 떡과 찬을 차려 대접합니다. 거북놀이와 비슷하지만, 개인이나 가정의 복락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이 놀이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깊이 들어 있습니다. 중부지방에 널리 퍼져 있으며 황해도 일부 지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올게 심니’는 추석을 앞두고 잘 익은 벼나 수수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 기둥이나 대문 위에 묶어 걸어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해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 는 기원의 뜻이고, 올게 심니를 한 곡식은 다음 해에 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당에 올렸다가 먹었다고 합니다.
‘원놀이’는 설이나 추석 명절 때 청장년들이 하는 놀이로서 지금으로 말하면 모의재판 같은 성격의 놀이입니다. 한 사람을 원님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학동들은 백성이 되어 사건을 놓고 판결을 받는 놀이입니다. 경북 영양 예천 문경 등지에서 전해 내려오던 놀이이며, 안동에서는 주로 서당 학동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원님은 사건을 잘 해결하지만 서투른 원님은 백성들의 놀림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시대가 다른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면서 명절을 보내십니까? 여러분의 가족 친지들과 어떤 식으로 명절을 보내십니까? 평소에 못 찾아뵈었던 집안 어른들과 은인들을 찾아뵙거나 여행을 하거나 가족끼리 음식을 나누며 담소라도 하시면서 쉬기도 하시겠지요. 어떤 식으로 명절을 보내시든지, 행복한 순간이기를 빕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여러분의 내일에, 그리고 여러분을 바라보고 여러분과 함께하는 이들에게 전해지는 행복이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명절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함께하셔서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3-24.26)
좋은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잠시 멈춰
추석 보름달을
바라보자.
세상이 바뀌어도
생명의 고향은
항시 존재한다.
추석명절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삶의 의미는
생명의 기쁨이다.
생명의 기쁨은
모두가 하나같이
소중한 생명의
기쁨들이다.
사람의 삶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생명 존중은
생명 중심이다.
생명이 있기에
행복과
여러 가치들을
추구하며 살 수 있다.
다시 우리의 삶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깨닫는 시간이다.
생명의 기쁨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쁨이다.
진정한 사람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기쁨이다.
고향을 고향으로
여길 줄 알며
생명을 생명으로
여길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과 자연이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상생하는
것이다.
욕망이 빚어내는
욕망의 결과물들은
참으로 우리를
아프게한다.
고향을 찾는
추석 명절이
참으로 큰
가슴속 울림이
되는 것은
우리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기쁨은
마음을 만나는
기쁨이다.
어머니의 모습을
만나고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만나는
마음의
만남이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
고유한 역사가
있다.
가장 소중한
사랑의 마음을
만나는
추석명절이길
기도드린다.
우리의 그리움을
찾고 만나는
시간이다.
사람의 생명은
그리운 마음에
달려 있다.
그리움을 잃어가는
우리들 삶이다.
마음을
되찾아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리운 이들을
그리며 진심으로
기도하는
마음의 고향
마음의 추석이다.
얼마 전에 글을 쓰다가 갑자기 꽉 막히는 기분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적이 이제껏 없었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느낌이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옛날에 썼던 글들을 펼쳐보았습니다. 거의 20년 전에 썼던 글인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이것도 글이라고 인터넷에 자신 있게 올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글을 봐주신 신자분들에게 너무나 큰 감사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른 살이 막 넘었을 때의 ‘젊은 나’와 쉰 살이 넘은 ‘중년의 나’는 같은 ‘나’일까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전혀 다른 ‘나’입니다. 왜냐하면 외모, 능력, 성격…. 모두가 다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변하는 ‘나’입니다. 언젠가 책에서 보니, 우리의 유전자도 쏵 바뀐다고 하더군요.
과거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종종 만납니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면서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과거의 나만 바라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며 후회하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나’도 나이지만, 현재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발전하는 ‘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발전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때로는 후퇴하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자신의 노력을 통해 충분히 변화되면서 더 나은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감사의 이유를 많이 찾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변화되었음에 감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이 한가위의 핵심 키워드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가족들이 모여서 먹고 즐기는 날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감사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서 예전과 같이 명절 때의 만남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가위는 분명히 아래와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를 드리는 것,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 주기 위해 해마다 온갖 곡식과 과일을 제공해 주는 자연에 감사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하나 감사를 드리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즉, 내 삶의 목표를 똑바로 두고 있으며, 그 올바른 목표를 향해서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많다면 그만큼 자신의 변화를 이루며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일이 없다면 불평불만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으면서 자신의 변화도 이룰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라는 한가위입니다. 이 한가위를 잘 지내기 위해 특히 감사를 많이 외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미 죽은 자처럼, 지금까지의 생을 끝낸 사람처럼, 앞으로의 인생을 자연의 순리에 맞게 덤으로 받은 생인 듯 살지 않으면 안 된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중독되지 않기.
전철을 타면 책이나 신문 읽는 사람을 이제는 보기 힘듭니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고 있지요. 뉴스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고, 재미있는 영상도 또 E-Book도 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시간이 나면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봤었습니다. 문제는 잠깐 보는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시간을 이 기계에 쓰게 되더군요.
스마트폰은 우리의 자투리 시간을 가져가는 일종의 시간 흡수기가 아닐까요? 심지어 자기 전에도 ‘무슨 새로운 뉴스가 있나?’라면서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 역시 이런 모습을 보이기에 아예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바꿔 놓고 보지 않았습니다. 괜히 불안한 마음이 밀려들기도 하고, 반드시 봐야 하는 어떤 정보를 놓칠 것만 같은 불안감도 생겼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중요한 정보가 없더군요.
코로나 예방 차원에서 자주 실내 공기 환기를 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귀찮지만 건강을 위해서 필수입니다. 스마트폰에 매달리지 않는 날도 있어야 합니다.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필수입니다.
몸을 쓰지 않아 건강에 좋지 않고, 사회성도 떨어지고, 진짜의 나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신 건강에 안 좋은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그래서 창문을 자주 열어 공기를 환기하듯이, 자주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날을 자주 만들어 내 정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느님께 삶의 최 우선권을 두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 추석입니다. 나도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돌아봐야 하는 절기입니다. 시의적절하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관대한 나눔을 강조하십니다.
어리석음의 반의어는 지혜로움입니다. 학식을 갖춰 다방면에 걸쳐 유식한 것, 식별력이나 판단력이 출중한 사람도 지혜롭다고 하지만, 진정한 지혜는 좀 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인생에 있어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무엇이 영원불변한 것이고, 무엇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인지를 잘 파악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느님께 삶의 최 우선권을 두는 사람입니다. 결국 지혜로운 사람은 재물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 재물을 하느님 위에 올려놓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유 있는 재물을 주인이신 주님께로 돌려드리는 사람, 가난한 이웃들과 기쁘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서의 저자 솔로몬은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사람에게 우호적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결국 지혜는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에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조금 더 깊이 있게 다섯 가지 측면에 걸쳐 지혜를 소개합니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입니다. 지혜는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입니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입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입니다. 지혜는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입니다.
솔로몬은 살아생전 언제나 지혜를 추구했고 그리워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지혜를 찬미했고,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하느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지혜를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라고, 그래야 자신의 손에 맡겨진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고, 구원에로 이끌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서 7장에서 장엄한 어조로 지혜의 본성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의 지혜 찬미’입니다. 그는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 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 없이 맑습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한가위는 이렇게 묻는다: “돈 버는 이유가 뭔데?”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한가위 명절입니다.
모든 것이 풍성한 때에 조상에게 감사하고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마음을 키워주기 위해 모든 나라에 존재하는 추수감사절과 같은 명절입니다.
지금까지 돈을 벌기 위해 살았다면 이날 만큼은 나눔을 위해 살게 만든 조상들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추석에도 감사하고 나눌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그냥 세상에 속한 사람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한 부자가 많은 수확을 하여 그것을 모아둘 커다란 곳간을 짓지만, 그날 그의 생명이 끝난다는 비유입니다. 탐욕과 생명, 혹은 죽음. 이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탐욕’도 하나의 ‘법’(法)입니다. 자신이 그 규칙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탐욕을 법으로 따르는 사람이 사는 곳은 ‘지옥’이란 나라입니다. 모든 나라는 법이 있고, 그래서 내가 어떤 법을 따르는지 알면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지전’(2011)은 백마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내내 자신들끼리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싸우는 이유가 뭔데?”
줄거리는 대충 이렇습니다. 배경은 여러 차례 휴전협정이 결렬되는 시기였습니다. 장교였던 신하균은 높은 분 앞에서 그만 군인에 합당하지 않은 발언을 하여 그 벌로 전방으로 발령이 납니다. 전방의 악어 중대에 북한군과 내통하는 군인이 있으니 조사해 보라는 임무였습니다. 중대장이 죽은 사건이었는데 심지어 그 총이 아군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하균은 신임 중대장과 함께 악어 중대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같은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쟁에 지친 군사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 전쟁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신하균은 전쟁의 실태를 눈으로 목격합니다. 금지된 약물을 투여하며 약의 기운으로 독하게 죽여대는 임시 중대장. 여자라 살려준 사람이 그 은혜와는 상관없이 한국군을 마구 죽여대는 북한군 저격수. 자기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즉결처분하려는 새로운 중대장. 그리고 휴전이 조인되고 그 휴전이 발휘되는 하루 동안 고지를 다시 점령해야 한다며 마지막 전투를 시키는 고위 간부 등...
그런데 이들과는 다른 전장에서 만난 친구, 고수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좀 특이했습니다. 알고 보니 북한군과 내통하는 군인이 바로 자기 친구였습니다. 내통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수는 전쟁판에서 유일하게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생명을 존중하는 이였습니다.
그는 동료들과 후퇴할 때 막사에 땅을 파고 그들을 위한 초콜릿등 음식을 넣어놓습니다. 그리고 다시 탈환해 땅을 파보면 그들이 남한에 있는 자기 가족들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들이 있고 감사의 표시로 술도 들어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나눔이 실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다른 사실은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오만한 중대장을 그가 죽인 것입니다.
고수는 군인으로서 나라의 배신자입니다. 신하균은 자신의 친구가 군법을 어기고 북한군과 먹을 것을 나누어 먹고 편지를 전해주고 심지어 동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군 장교를 총으로 쏘는 것을 목격하고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러다 자기가 살려준 여자 저격수에게 친구가 살해되자 본인도 도대체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전쟁의 의미에 대해 다시 묻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성탄절을 맞아 그날 하룻밤만 휴전하며 성탄절을 즐기려 했다가 모두가 군법에 따라 처분된 실화가 생각나게 합니다.
독일군 한 병사가 불렀던 크리스마스 캐럴은 자기 동료들을 죽였던 적군과 비무장 상태로 서로 포옹하고 보급품을 나누며 축제를 즐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군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고지전’에서 고수는 저격수의 총에 맞아 죽어가며 신하균과 이렇게 대화를 나눕니다.
“오지 마. 오면 너도 죽어. 가끔 그런 생각해? 난 아주 오래전에 죽었다는 생각. 우리 악어 중대 모두. 아주 오래전에 죽었다고. 그렇게 많이 죽여댔으니까 당연히 지옥에 가야 되는데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없어서 그냥 여기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은표야, 우리 엄니 얼굴이 기억이 안 나.”
여기서 북한군 간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죽어가는 그 앞에서 신하균은 묻습니다.
“도대체 싸우는 이유가 뭔데?”
“확실히 알고 있었어. 근데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신하균은 그 잔혹한 북한군 간부에게, 어쩌면 전쟁이란 명목으로 살인 기계들을 배출하는 북한과 남한 정부에 말하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주저립니다.
“개새끼!”
이 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지속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잠시 한가위를 맞아 이 전쟁에서 벗어나 어머니 얼굴도 떠올리고 서로 경쟁하던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누고 사랑의 캐롤을 부르며 지냅니다. 이 짧은 행복이 끝나면 다시 전쟁터로 나가 피조물의 법인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싸우겠지요.
탐욕이라는 법은 피조물 세계에서는 피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이 법은 생명을 경시하게 만들고 그래서 자기 생명도 지키지 못하게 만듭니다. 모두가 이 법의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눔의 법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 계십니다.
사랑의 법은 탐욕의 법과 반대입니다. 탐욕은 모으는 것이고 사랑은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눔의 법을 실천하면 이 세상에서는 군법에 넘겨지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매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어떤 법을 따르느냐가 어떤 나라에 속하는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싸울까요? 그건 그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속한다면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도 날마다 한가위처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피조물은 사라지지만 천국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탐욕은 피조물의 법이지만 사랑은 창조자의 법입니다. 생명을 창조한 분이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죽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매일 한가위처럼 나누는 사랑의 법을 실천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에 속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짧은 행복을 알게 하려고 나눔의 한가위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뉴욕에서 3번째 맞이하는 한가위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추석합동위령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한지에 미사지향을 적어서 제대 앞에 놓았습니다. 조상들에게 드릴 음식도 차려놓았습니다. 향을 드리며 조상들에게 예를 올렸습니다. 강론은 본당에서 존경받는 어르신이 덕담을 해 주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한가위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뉴욕의 둥근 달도, 한국의 둥근 달도 모두 같은 달이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온 세상에 가득하기에 이곳 뉴욕에서도 기쁨이 가득한 한가위를 보내려 합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고 안전하게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뉴스가 많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제국의 무덤’이라고 불렸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제국은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영국, 소련, 미국은 모두 막강한 힘을 가진 제국이었습니다. 그 나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지만 결국은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이 험준하고, 국민들의 저항이 컸기 때문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19억 명이라고 합니다. 여성들에 대한 인권탄압과 성전이라는 이름의 테러는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하고, 경건하게 기도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1400년 전부터 우리 민족과 인연을 맺은 이슬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라비아나이트의 한국 편’입니다.
이슬람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페르시아는 침략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의 왕자는 중국의 당나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제국과 당나라가 외교를 맺으면서 페르시아 왕자는 당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결국 도착한 곳은 신라였습니다. 이 왕자는 신라의 공주와 결혼하였고, 페르시아의 군사적인 전략과 기술을 알려주었습니다. 신라는 이런 도움으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페르시아 왕자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다시금 페르시아로 갔지만 더욱 막강해진 이슬람제국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낯선 땅에 정착하여 작은 나라를 세웠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자는 신라의 공주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에게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책이 최근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책의 상당부분은 신라에 관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고려사절요에 ‘쌍화점’이라는 가요가 나옵니다. 여기서 쌍화점은 이슬람식 만두가게라고 합니다. 고려시대에 이슬람식 만두가게가 있을 정도로 이슬람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이슬람이 조선시대에도 많았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이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이슬람의 문화를 우리의 것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우리의 역법과 중국의 역법이 달라서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때 어려움이 많은 것을 알고, 신하들에게 조선의 상황에 맞는 역법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집현전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법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칠정산 외편입니다. 당시 집현전의 학자인 정인지가 중국으로 가서 이슬람역법을 연구하였습니다. 중국의 역법 또한 이슬람의 역법을 중국의 상황에 맞게 적용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문화와 문화가 만나서 조화를 이루면 새로운 문화의 꽃이 피게 됩니다. 그것이 세종대왕이 이룩한 문화의 꽃입니다.
한국의 지하철에는 대부분 한국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뉴욕의 지하철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곳, 뉴욕에서 첨단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가위의 둥근 달이 모든 곳을 비추듯이,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곳에서 사랑이 꽃 피울 것입니다. 사랑이 가득한 한가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가위에 나에게 건네는 덕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네가
한가위만 같아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높푸른 하늘처럼
정성껏 품어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넉넉한 땅처럼
아낌없이 내주어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둥그런 보름달처럼
따스하게 밝히어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도란도란 밥상처럼
오붓하게 보듬어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소담한 송편처럼
맛나게 먹히어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시원달큰한 식혜처럼
부드럽게 스미어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네가
한가위만 같아라
하늘 나라의 삶, -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어제 한국 순교 성인들 대축일 축제에 이어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 추석입니다. 어제까지 그 좋던 날씨가 한가위 새벽에는 많은 비가 내립니다. 빗소리 하느님 생음악을 들으며 쓰는 강론입니다. 그동안 대지가 가뭄으로 메말랐는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가 하늘 은총처럼 느껴집니다. 문득 ‘봄비’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이 시를 읽은 어느 수녀님이 ‘내 아들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가을비’로 하겠다는 유머에 크게 웃은 일이 생각납니다. 고요히 인생 가을을 반추하게 하는 가을비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풍성한 수확의 계절에 맞이하는 추석이 참 고맙습니다. 코로나에 이런저런 시련과 고통이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 축제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초대송과 찬미가 다음 두연도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한가위를 맞이하여, 오곡 백과를 지어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올해도 우리일손 축복하여서, 이모든 곡식을 거두어들여
우리삶 이어가게 힘을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리세.
마음을 곱게곱게 가다듬어서, 이세상 열매들을 추수하면서,
천상의 주님잔치에 참여하는날, 고운옷 차여입게 보살피소서.”-
살만한 세상입니다. 천상의 주님 잔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내 삶의 자리에서 지상천국의 하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 시편이 고백이 실현되어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오늘 연미사를 통해 봉헌되는 영혼들 또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윗 시편 그대로 하느님의 뜰에서 꽃들로 피어나고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행복기도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늘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참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주님을 만나 하늘나라를 살아야 할 내 삶의 자리,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결코 고해인생이 아닌 날마다 추석날처럼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하느님 찬미에 저절로 따르는 하느님 감사입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축복된 삶이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우리 영혼이 하느님 창공을 날 수 있음도 찬미와 감사의 양날개 덕분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쁨은 그대로 하느님의 기쁨이요 영원합니다.
찬미와 감사의 삶에서 마음의 순수와 열정이요, 내적 힘도 샘솟습니다. 찬미와 감사의 빛이 두려움의 어둠도 몰아냅니다. 운명을 바꾸는 찬미와 감사의 삶이요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을 형성해 줍니다. 그러니 ‘알렐루야’ 찬미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끝맺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요엘 예언자를 통해 영적 ‘시온의 자손들’인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참고로 예언자 ‘요엘’의 뜻이 심오합니다. 요엘이라는 이름은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요는 야훼의 준말이고 엘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요엘은 “주님은 참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 이름 역시 또 하나의 ‘요엘’입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친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공교롭게도 내리는 은총의 가을비가 메마른 대지와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십니다. 우리 모두 ‘요엘’이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축복 가득한 한가위 추석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이렇게 찬미와 감사의 축제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늘 심판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둔 삶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시험이자 시련이요 심판이 죽음입니다. 마지막 순종이자 봉헌이 죽음의 심판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들이요 아무도 최후의 죽음 날은 모릅니다. 그러나 갈수록 분명한 사실은 우리 모두 늙는다는 것과 죽는다는 진리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요한묵시록은 우리 모두 최후의 심판날을 상기시킵니다. 참으로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에 항구했던 믿음의 사람들에게 심판은 그대러 구원임을 말해 줍니다. 요한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하늘에서 울려 오는 주님의 목소리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믿다가 죽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이제 이들은 안식을 누릴 것이며, 그들이 한 일도 그들을 따라갑니다. 새삼 우리 인생이 맺어온 열매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가을에는 우리 인생 가을을 묵상함이 참으로 유익합니다. 과연 찬미와 감사의 믿음의 삶중에 잘 익어가고 있는 신망애의 가을 인생 열매들인지요.
속절없이 세월은 흐르는데 가을 인생이 되고도 열매 부실한 노년이라면 그 인생 얼마나 허무하고 쓸쓸하고 마음 쓰리고 아프겠는지요. 텅빈 허무가 아닌 텅빈 충만의 기쁨의 가을 인생을 맞이하기 위해, 늘 심판의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거품이나 환상이 사라진 찬미와 감사의 본질적 믿음의 삶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섬김과 나눔의 삶입니다.
섬김과 나눔이 구체적 사랑의 구원입니다. 탐욕의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예방제와 차유제는 섬김과 나눔의 사랑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섬길수록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며 하느님의 사랑과 포옹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강력히 경고하시는 바 탐욕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악마는 탐욕을 통해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노예로 만드는 탐욕입니다. 탐욕의 맹목이라 탐욕에는 눈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우리 모두에 해당됩니다. 보편적 무지의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무지의 탐욕에 눈멀으니 완전히 탐욕에 갇힌, 이기적 나의 감옥에 갇힌 불통의 수인같습니다.
위로 하느님과 좌우사방 이웃과의 관계가 완전히 차단된, 스스로 자초한 고립단절의 혼자의 삶, 바로 이것이 지옥입니다. 세상과 유리된 고립단절의 혼자의 은둔형 젊은이들이 무려 37만에 육박한다 합니다. 복음의 부자와 양상은 다르지만 참으로 우려스러운 현상입니다.
섬김과 나눔의 사랑의 실천은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부자는 땅에 보물을 쌓고 자족하며 스스로 독백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 부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곧장 이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자가 바로 이러합니다. 이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독자들인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탐욕의 자기 감옥에서 탈출하여 쌓고 모으는 삶이 아니라 나누고 비우는 삶으로의 구원의 초대말씀입니다. 시간 되시면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를 감상하며 하늘나라의 삶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주님은 이 거룩한 한가위 추석미사 강론을 통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으니 바로 찬미와 감사의 삶, 섬김과 나눔의 삶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뿌릴 씨를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6). 아멘.
한가위 명절 단상 - 대군(大君) 대부(大父)이신 하느님
이기우 신부님
오늘은 한가위 명절입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조상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예를 차리고, 부모와 형제자매들 그리고 손주손녀들까지 화목함을 듬뿍 느낄 만한 가족 모임을 하는 날입니다. 조선 사회 양반들은 이 날에 조상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곡백과가 풍성한 이 계절에 정성껏 준비한 제사 음식을 차려 놓고 조상들께 절을 올리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덕담을 건네주면서 제사 음식을 정겹게 나누어 먹던 가족의 날이 추석 명절이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성리학을 내세워 신분을 차별하고 개인의 양심을 무시하며 공동선이 짓밟히던 상황에서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해 들여온 천주교가 역설적으로 그 취지를 공격당하고 박해까지 받게 된 명분은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상 제사의 우상숭배적 요소들, 그러니까 제사를 드릴 때에 조상들의 혼을 불러 온다는 이유로 뒷문을 열어 두어야 한다고 규정하고는 조상들이 잡수시도록 밥과 국과 반찬 그리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는 초혼(招魂)의식의 문제점들은 외면한 채, 조상 공경이 인간의 기본 도리라는 점만 강조하면서 조상 제사의 우상숭배적 요소를 버리고 천주교식으로 조상을 공경하려던 신자들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 즉 임금도 몰라보고 아버지도 없는 패륜 무리로 몰아붙였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터무니없는 누명은 벗겨졌고, 조상 제사도 간소화되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먼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 돌아가신 조상들을 위해 연도를 바치며 한데 모인 가족들이 음식을 나누며 서로를 축복해 줍니다. 이런 조상 공경의 예절만으로도 천주교 신자들은 매우 모범적인 명절을 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했으며 돌아가실 때에 병자성사도 받고 장례미사까지 치룬 조상이나 부모를 위해서라면 이미 천당에 계실 것이기에,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보다는 묵주기도를 통해 남아 있는 후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느님과 조상들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이며,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로 갈 것임을 각오하는 일이기에 부질없는 욕심일랑 접어두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느님의 뜻을 부지런히 채울 다짐을 하는 것이 한가위 명절의 뜻이겠습니다.
순수해서 즐겁고 행복하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빨간날, 길게 이어진 추석 연휴이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우리는 ‘고향에 간다. 못 간다.’ 하고 있었다. ‘거리는 멀리, 마음은 가까이’ 하라는 행정지시이다. 빨간날이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석연휴의 빨간날은 그냥 일상과 같이 똑같은 날은 결코 아니다. 자발적 그리움이 발동되어 고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차량행렬을 보면 그 어떤 세력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목표가 뚜렷한 빨간날이다.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피조물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조상님과 부모님의 음덕에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보답의 빨간날이다. 그래서 모두가 일상을 내려놓고 자발적 원의로 고향을 향해 바삐 움직인다. 모처럼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하고 사는 순수함이 담긴 날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아라’ 우리는 모처럼 모든 것 내려놓고 순수해서 마음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황이 몹시 어렵다. 특히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의 생계가 어렵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를 생각하고 돕는 마음이었으면 한다. 으스대고 뽑내는 물질적 부가 아닌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정신적 부를 더 많이 나누며 지내는 빨간날이길 기도한다. 천둥 번개에 비가 내려 보름달은 볼 수 없지만 우리의 보름달은 순수한 내 마음 안에 크게 떠오른다.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고 풍성한 추석 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 한가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여전히 코로나 추석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위기의 시간을 지내면서도 하느님 안에 늘 감사를 드리면서 언제나 풍성한 삶의 결실을 맺어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속에서 나오는 하느님께서는 곳간에 재산을 가득히 쌓아놓은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없으면 안 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돈’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그렇게 돈을 모으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어디에 보관하고 또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도 바로 그렇게 끌어 모은 재산에 관해 고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의 마지막에는 기막힌 반전이 있는데 너무나도 허망하게도 하느님께서 큰 곳간을 지은 그 날 밤에 그 부자의 목숨을 되찾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시대에도 이와 같은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곧 평생을 돈을 벌면서 살았는데 결국 쓰지도 못하고 늙고 병들어 죽어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행여나 자식들이라도 그 돈을 물려줘서 잘 살길 바라지만 결국 그 돈 때문에 자식들 간에 분쟁이 있고, 그렇게 부모로부터 쉽게 얻은 돈을 또 쉽게 날려버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돈을 모으는 것보다 그 돈을 정말 잘 쓰는 데에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곧 우리가 돈을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선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곧 주어진 삶 속에서 진정 선을 위한 사랑의 나눔, 선을 위한 슬기롭고 위대한 투자를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선을 위한 투자를 이루어갈 때 그 투자는 인간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것은 세상의 어떤 재물로도 얻을 수 없는 하느님 안의 영원한 행복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기억하고 삶 속에서 선을 위한 투자, 사랑의 나눔을 항상 이루어가며 언제가 하느님 안의 영원한 행복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길 기도했으면 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 자리에 재화를 놓다니!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인간들이 욕심내는 것 중 그 대표적인 것은 재물이라고 보겠습니다.
사람들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신 예수님 멋지십니다.
하느님이 오늘밤 네 생명거두겠다 하시면 아무 쓸모없는 것 맞지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꽤나 많거든요.
하느님 자리에 재화나 권력 같은 보이는 걸 놓은 사람들 참 낭패죠.
안 보인다고 내 존재의 근원이신 최초의 힘님을 무시하면 인생패망!
그리고 하느님 믿는다고 외면 멸시 죽인다고 하느님 안 물러납니다.
내 근원 최초의 힘님이 내 존재의 주권자이신데 무슨 헛소리합니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 12, 15-21(한가위)
보름달처럼 휘영청 밝고, 아름다운 멋지고, 축복 가득 찬 한가위 되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라는 <입당송>으로 시작하여 , <본기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줍니다.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하고, <복음>에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것을 깨우쳐줍니다.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인류역사는 베풂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창조와 축복과 선사로 시작된 역사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외아드님을 건네주심으로 구원을 베푸시고, 우리는 그 베풂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은총에 은총을 덧입은 이들로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보은지정의 감사)
. 또한 그렇게 하여 은혜를 입고 이미 새 생명으로 태어난 구원된 존재라는 사실에 더 더욱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존재론적 감사).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만난 모든 것들 안에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당신의 현존과 활동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종말론적 감사).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비유 안의 이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인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마치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이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의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재물에 의탁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것인 양 여겼고 이웃들에게 무관심하고, 마치 자신이 자기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 양 오만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은 어떤 사람일까?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이 되고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곧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 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보다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이 무엇인가를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주님!
탐욕의 온상지인 제 자신을 경계하게 하소서.
제 곳간이 아니라, 당신 곳간에 희망을 두게 하소서!
제 곳간이 비워지고 , 당신 곳간이 채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비워지고, 당신 뜻의 거룩함을 이루소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집회서 저자는 인간의 허무함과 하느님의 자비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수명은 기껏 백 년이지만 영면의 시간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바다의 물 한 방울과 모래 한 알처럼 인간의 수명은 영원의 날수 안에서 불과 몇 해일 뿐이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보이시고 그들에게 당신 자비를 쏟으신다(집회 18,9-11).”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을 허무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어 주는 힘입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쓸어 내시면’ 우리는 먼지처럼 사라질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면, 우리도 하느님처럼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저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잠언 27,1).”
“사람의 마음속에 많은 계획이 들어 있어도 이루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뿐이다(잠언 19,21).”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잘난 체 하지 말고 ‘좋은 일’(주님의 일)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3-17).”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은, 뜻으로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또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허무한 존재라고 해서,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내일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단, 모든 것은, 즉 우리의 모든 계획들과 노력들은 주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겸손하게 주님께 결과를 맡겨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계획하고 바란 대로 될 것이고, 허락하시지 않으면 일을 마치지 못하거나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1) 하느님과 이웃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2) 그의 마음속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없으니, 그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또 이웃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없으니 이웃과 나누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재물을 혼자서 차지하고 있는 것이, 즉 ‘탐욕’이 그 부자의 두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3) 그는 ‘여러 해 동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오늘 밤에’ 그의 목숨을 되찾아 가시겠다고 예고하십니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의 세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지혜는, “시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4) 영혼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그의 네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5) 하느님께서는 그의 목숨을 ‘되찾아’ 가시겠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되찾아 가신다는 표현은 하느님이 그의 목숨의 주인이시라는 것과 하느님께서 잠시 그에게 맡겨 주신 목숨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목숨을 포함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그의 다섯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씀의 뜻은, “아무도 차지하지 못한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주인이신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6)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시간은 몇 시간입니다. 그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말로만, 또는 생각으로만 하는 회개가 아니라, 사랑과 나눔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만일에 그가 회개하지 않고 그 몇 시간을 그냥 허비한다면, 그것은 그의 여섯 번째 어리석음이 될 것입니다.
7)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모으는 일에만 집착하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 그래서 결국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나는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다르다.” 라고 큰소리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정인들만을 겨냥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어리석음을 성찰해야 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들’을 깨닫고 바로잡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 쌀 창고가 아니라 사랑 창고를 짓고 채우는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저는 지난 일을 잘 기억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제가 앞일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에 지난 일은 금세 잊어버리게 되는 현상이지요.
그런 저인데도 저도 나이를 먹는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줄어들고 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들과의 만남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 영화를 잘 보지 않고, 새로운 영화는 더더욱 보지 않는데 가끔 지난 영화가 TV에 나오면 이 또한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보곤 합니다.
그래서 벤허도 봤고, 그저께는 쿼바디스도 봤는데 쿼바디스 장면 중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군의 뒤에서 "메멘또 모리/Memento Mori"를 외치는 장면이 눈에 탁 들어왔습니다.
지금 성취한 승리에 도취하지 말고 죽을 때를 기억하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보통 과거를 기억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미래 그것도 죽을 때가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즘 저에게는 큰 관건입니다. 제가 비록 미래지향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나이 먹을수록 미래보다는 과거를 먹고 살게 되는데 과거적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적 현재를 살아가야겠지요.
그런데 미래라는 것도 전처럼 새로운 일을 많이 벌이는 그런 가까운 의미에서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벌였던 일도 갈무리하는 그런 먼 의미에서 또는 제 인생의 끝으로서의 미래를 생각해야겠지요.
나바호족에게 이런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한가위 명절에 왜 이런 얘기를 제가 할까요?
설 명절이 한 해의 시작에 우리 인생의 시작, 근원을 생각하는 명절이라면 한가위 명절은 한 해의 수확을 갈무리하는 시점에 단지 한 해의 갈무리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갈무리를 잘해야 함을 생각하는 명절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부자는 한 해 농사를 잘 지은 것 때문에 크게 만족하며 창고를 더 늘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쌀 창고가 아니라 사랑 창고를 짓고 채워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제가 그제도 얘기했지만, 우리의 최후가 단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마는 끝이 아니라 천국에 닻을 내려야 하는 끝이라면 쌀 창고는 천국에서 아무 쓸모가 없고 사랑 창고만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쌀 수확이 아니라 인생 수확을 추구해야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곧, 인생의 끝이 가까울수록 내 인생의 끝에 나는 무엇을 많이 수확해야 하는지 성찰하며 살아야 하겠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망가지고 도난도 당하는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이것을 뒤집어 이해하면 쌀을 이 세상 창고에 쌓으면 똥이 되지만 하늘에 쌓으면 주님과 이웃을 위한 진정한 보물 곧 사랑이 되지요.
한가위 명절에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어제 제가 아는 삼회원 한 분이 이 명절에 교통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것 때문이었는데 그 교통 사고가 명절이면 오히려 외로운 그 지역분들에게 떡을 나누는 일을 하러 가다가 일어난 것이었다고 합니다.
제게도 충격이었으니 가족분들에게는 얼마나 충격일지 같이 마음 아프지만 돌아가신 분에게는 천국의 사랑 창고에 사랑 쌓는 일을 마지막까지 하다가 돌아가신 것이니 복된 죽음이라는 묵상도 하는 이번 한가위 명절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독서들마다 각각의 수확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풍성한 결실을 선사하십니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
주님께서 "정의에 따라" 때에 맞춰 내려 주시는 가을비와 봄비로 세상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쳐흐릅니다. 그저 듣기만 해도 행복한 광경이 그려지네요.
이 세상에서 맺어지는 모든 결실은 인간의 손과 발품과 수고를 빌리기는 하나 결국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도 굶주리는 이 없이 모든 이가 영육으로 충만하고 흡족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 앞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이르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드릴 건 감사와 찬양입니다.
복음은 비유 속 부자의 수확 이야기입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루카 12,17)
예수님의 비유 속 어떤 부자는 그해에 원래 소유했던 곳간이 모자랄 정도의 엄청난 소출을 거둡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수확에 놀란 그에게서 만물의 지배자이신 분을 향한 감사나 찬양은 드리지 않습니다. 그저 그는 이 많은 소출을 어떻게 저장하고 어떻게 누릴지에만 관심이 있지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생명의 주인이신 분께서 당장 오늘 밤에 목숨을 거두어가실 줄도 모르는 그는, 마냥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에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재화를 온전히 자신의 힘이나 노력, 행운의 결과로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도, 생명과 죽음의 인간 실존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이 없지요. 잠시 지날 이 지상에서 물질적으로는 두 손 가득 뭔가를 움켜쥐고 있지만, 어쩌면 그들의 하늘 나라 통장 잔고는 거의 0원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제2독서의 추수는 우리에 대한 주님의 수확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여기서 땅은 이 세상을, 한창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된 곡식은 우리 인류를 가리킵니다. 이 수확은 종말인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의 표상입니다.
농부가 잘 여물고 튼실하게 자란 열매들을 수확하며 기뻐하듯 주님도 이 지상에서 달릴 길을 다 달린 우리의 무르익은 영혼을 보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최대한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건만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이들의 쭉정이 같은 상태에 가슴 아파하실 테지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처럼, 그날에는 다 자라 구별이 확실하게 된 상태에서 가라지는 따로 거두어 불에 태우고, 밀은 주님의 곳간으로 모아들이게 될 겁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수확에 기뻐하고 감사하듯 우리를 수확하실 그분께도 그런 기쁨을 안겨드릴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비록 세상 재물은 그리 풍족히 누리지 못해도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이들, 그분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사는 이들이라면 그분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세상을 떠난 조상들과, 서로서로를 성장시켜주는 부모, 형제자매, 친지, 지인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이 한가위는, 주님께서 맺어 주신 모든 영적 물적 결실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축복의 날입니다. 유한하고 나약한 인간인 우리 자신의 시작과 끝을 관상하며, 부족함 없이 돌봐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도 그분 때문에 흡족하고 그분도 우리 때문에 흡족해하시니, 함께 행복하고 충만한 명절 되시길 기도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함승수 신부님
본당에서 사목하다보면 신자분들께서 주시는 사랑을 넘치게 받습니다. 갖가지 음식, 화장품, 영양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챙겨주시지요. 하지만 주시는 분들은 여럿인데 그것을 쓰는 사람은 저 하나이다보니 미처 제 때 다 먹지 못하고 다 쓰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때에는 그 선물들을 나름 잘 보관해보겠다고 서랍 깊숙히 넣어두었다가 깜빡하여 다음 본당으로 이동하기 위해 짐을 챙길 때에야 발견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쌓아두고 묵혀둔 사이 '사용기한'이 지나버려 포장을 뜯어보지도 못한채 눈물을 머금고 버리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그 선물을 주신 분에게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언젠가부터는 당장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남겨두고 되도록 필요한 분들에게 나눠드리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물을 주신 분들의 정성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드리면 되는 것이고, 그 선물들은 더 필요한 분들께 전해져 잘 쓰이도록 하는 것이 선물을 주신 분들의 마음에 더 충실하게 응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은 비단 사람들에게서 받은 선물에만 국한되지는 않겠지요. 이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아낌없이 베풀어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을 통해 얻는 참된 기쁨은 그것을 그냥 쌓아둔채 먼지만 쌓이게 하는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 선물을 주신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생각하며, 그것을 나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잘 사용해야만 선물을 주신 하느님도, 그 선물을 받아 누리는 우리도 모두 마음이 흡족한 가운데 충만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유한 사람'은 탐욕을 채우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데에만 정신이 팔려 그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리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삶의 '소출'을 자신의 수고와 능력만으로 이룬 결실로 착각하여 제 욕심대로 하려는 마음을 품습니다. 심거나 물을 준 것은 자신이 한 일이지만, 작물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간과한 탓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에 감사하며 자신이 소유한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려는 봉헌의 자세가, 자신에게 필요한 몫 이상을 욕심내서 챙기지 않으려는 겸손하고 검소한 자세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악착같이 재산을 모으면 그 재산을 떵떵거리며 누릴 시간이 여유있게 주어지리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듯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이 아닌, 그에게 은총의 선물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주어질지 모를,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은 '돈 쓰는 시간'을 준비하느라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기 보다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확실히 나를 찾아올 종말의 순간을 제대로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뜻에 맞게 내가 지닌 재물과 능력과 시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 명절은 그렇게 보내면 좋겠습니다.
자문자답
김현 F.살레시오 신부님
“어떻게 하나?” 부자의 첫 마디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묻고 답합니다. “이렇게 해야지!” 부자의 문제는 하느님께 “제가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지 않았던 데에 있었습니다. 넘치는 재산도, 창고 지을 계획을 세운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계획 속에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뿐입니다. ‘내가 수확한 것’, ‘내 모든곡식과 재물’이란 표현으로 그가 자기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그가 외면했던 원칙을 알려주십니다. “전부 나의 것이다!” 자줏빛 옷을 즐겨 입었던 부자도 자기 자신만 보았다가 지옥의 불길 속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루카 16,19-31 참조). 예수님은 재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관심을 두십니다. 그분은 재물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을 기회 있을 때마다 하셨습니다. 재물은 하느님과 이웃에 의지하지 않고도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니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부자는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어서 가여운 가난뱅이이고 어리석은 사람임이 밝혀졌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어리석은 부자의 정신을 가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시편 14,1)
풍성과 퐁요를 함께 즐기자< 루카12/15-21> 9월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저 높이 든 달이 내 달이 아니고 그 밝은 태양이 나만위해 있지않고 청명한 가을 하늘이 나만 위해 있지 않고 모든 이가 모두 즐기고 기뻐하고 행복해 지기 위해 있듯이 풍요와 풍성은 나만 위해 있는 것아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이며 함께 나누고 함게 즐기라는 것입니다. 한가위 추석명절을 정해 5세나 쉬는 날은 돈많은 사람들 해외 여행가고 자기들 끼리 즐기고 춤추기 위하 것이 아니라 온누리가 이계절의 풍요와 풍성을 특별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이 내리고 함께 즐기라 함입니다. 누구와 지냅니까? 무엇을 나눔니까? 죽은 조상 에게 감사와 보은의 마음으로 제사를 들이며 옆에 있는 형제나 나이들어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을 소외시키며 즐기는 것은 참 즐거움이 아니라 천지가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살지만 내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적어도 팔없는 사람에게 팔이 되어주고 발없는 사람에게 발이 되어주고 먹을 것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물한 잔이라도 함께 합시다.
축제는 만인을 위한 것입니다. 권력자 재력가 이름있는 사람만 아니고 보잘 것 없는 사람도 함께 즐기어야 합니다. 아파트에 사는 사ᄅᆞᆷ 코로나 때문에 자기 집에서만 가쳐 있지 말고 옆집을 찾아보는 시간 만든 움식을 나누는 시간도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창고에 산처럼 쌓아 놓고 오늘 죽으면 그것들이 어떻게 되는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형이 동생을 죽이려다가 상처입혀 잡혀가는 말을 듣고 유산 때문에 더 가지려고 싸우는 형제의 현실은 더 이상 비참이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이며 모두가 반성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매일 축제입니다. 주님의 삽자가의 제사가 최후만찬의 예식과 함께 자비와 일치와 사랑의 잔치입니다. 근본은 함께 하며 함께 나누며 주님 안에 하나가 되어 이 기쁨을 미사 끝에 삶을 통해서 기쁨을 나누고 함께 합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함께 모이지도 못하고 나누지도 못하지만 공공장소에 자기것을 가져다 놓고 각기 자기 필요한 것을 가져가는 장소를 마련하여 나눔의 시간을 가지면 주는 기쁨 받는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수도원은 옷이나 생활 도구를 내어놓고 나누는 방이 있어 필요없는 물건이나 옷을 내어놓고 필요한 사람 가져가도록 나눔 방이 있습니다. 성당 공동체도 이런 장소가 있어 오래 보관 못하는 음식이나 괴일 농산물 나눔 장터 같은 것 있으면 더 즐거운 명철 한가위가 될 것입니다. 저는 본당 사목을 할 때 잔치를 중요시하여 큰 축일은 소도잡고 산되지도 잡고 온갖 음식을 나누는 시간을 많이 만들 었습니다.
각 가정도 오늘 모임이 있으면 귀한 것 자기 집에서 필요없지만 다른 사람은 필요한 것을 내어놓고 나누는 삶이 즐거움을 더할 것입니다. 저는 제 방을 청소 하러 오는 사람에게 빈손으로 말만 감사합니다 하지않고 가진 것을 내어주고 감사를 나눕니다. 사실은 오늘 ㅊ수감사절은 하느님이 마련하신 날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하는 날입니다. 오늘 함께 즐기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행복한 날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풍요로운
생명의
때이다.
우리의
가을은
봄과
여름 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생명의
질서이다.
처음으로
수확하는
햇곡식과
햇과일의
정성어린
계절이다.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은총의
하느님이시다.
은총은
따뜻한
인간미를
동반한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가르쳐주는
한가위의
명절이다.
힘든
현실안에서
맞이하는
한가위의
마음이다.
대자연의
신비를
바라본다.
자연의 선물은
거짓을 나누지
않는다.
진실된 나눔은
언제나
욕심을 배제한다.
탐욕을
경계한다.
생명에
감사하는
감사의
시간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한가위의
넉넉한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이다.
하느님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을
향한다.
사람의 마음은
인정이 넘치는
나눔의 마음이다.
나눔의 마음은
잘 익은
차례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한다.
하느님의
질서 안에
사람의 마음도
있다.
마음의 질서를
회복하는 넉넉한
한가위가 되길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기도드린다.
마음이
생명이다.
마음을
나누기에
가장 좋은
한가위다.
어렸을 때 친구와 놀다 보면 종종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구름 사이를 지나는 비행기를 보면서, 이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마치 명나라 때의 장편소설 『서유기(西遊記)』에서 손오공이 타고 다니는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있는 느낌이 아닐까 싶었지요.
부제 때, 졸업 여행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지요. 긴장되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꿈꾸었던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에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서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어땠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생각처럼 근두운을 타는 느낌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구름 사이를 지나가는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을 통과할 때는 마치 옅은 연기 사이를 지나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실제와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생각이 실제에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실망에 이르게 될 때가 참 많습니다. 또 이로 인해 갖지 않을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울 때도 많아집니다.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탐욕은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의 한 형태로 우리가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보다는 나의 욕심을 채울 탐욕에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지금 약간의 손해가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랑 대신 탐욕을 취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선물 받은 것을 쌓아 둘 뿐이었지요. 지금의 행복이 재물을 쌓아 두는 것에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물 받는 것을 나누는 것만이 탐욕의 죄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특히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이들은 준비 없이 최후를 맞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것이란 재물이 아니라 덕행을 사랑하는 것이며, 생명과 구원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가난한 사람의 모습일까요?
오늘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 중의 하나인 한가위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고 수확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이웃과 서로 나누며 살아왔던 조상님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낯선 사람에게 길을 알려 준 순간을 떠올려 보자.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친절함이나 관대함이었을 것이다. 그 행위로 분명 당신도 행복에 가까워졌다(캐서린 센더슨).
자신감을 북돋우는 최고의 방법
자신감을 키워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그 최고의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전문가들의 표현에 의하면, 나의 능력을 믿고 지지해 줄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족, 친구, 선생님 등 나의 응원자가 있으면 자신감을 느끼게 되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변화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탁할 사람이 없다고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선생님도 그리고 그밖에 어떤 사람도 자신을 응원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눈물 흘리십니다. 이를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해줍니다.
“부탁할 사람이 없다면, 스마트폰의 시리나 빅스비 등의 개인 인공지능 비서에게 도움을 청해보세요. 이것도 괜찮습니다.”
우선, 도움을 청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서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 말을 듣고자 할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서라도 말입니다.
이런 노력만으로도 자신감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명절은 자녀에게 감사를 교육하는 장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한가위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축제의 시기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함께 모이는 것도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가족끼리 오랜만에 모이지 못하고 사람들이 더 많은 곳에 놀러 가는 것도 썩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힘든 상황이지만 우리나라의 큰 명절을 잘 지키며 힘을 얻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축제를 지내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축제라도 어떤 때는 뒤끝이 좋지 않고, 어떤 때는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끝이 좋은 축제를 지향해야 합니다. 뒤끝이 좋지 않은 축제 안에는 항상 인간의 욕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946년 미국의 한 의과대학 2학년생 ‘모턴’은 실험을 하던 중 강력한 마취기능을 가진 에테르라는 약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마취 없이 수술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에테르의 발견은 외과 수술 역사상 획기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해 낸 사람은 축제를 즐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에 에테르 특허를 신청하려 했던 모턴은 그의 지도교수인 ‘웰치’와 그에게 실험실을 내어준 화학과 교수 ‘잭슨’에게 저지를 당했습니다. 서로 자신의 이름이 의학 역사에 기록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명은 결국 법정 싸움까지 갔고 축제가 되어야 했던 이 발명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잭슨은 정신병에 걸렸고, 웰치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모턴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마취시키는 물질을 개발해 낸 그들이 명예욕으로 곪은 정신은 마취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참조: 『멈추어야 할 때 나아가야 할 때 돌아봐야 할 때』, 쑤쑤, 유튜브 채널: 책읽는 다락방]
아무리 축젯날이 되어도 인간의 욕심이 개입하면 축제가 비극으로 끝납니다. 물론 장례식은 축제는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어떤 장례식에서는 돈 문제로 가족들이 다투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모습은 아닌듯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말합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듯이, 돈을 사랑하면 믿음에서 멀어지고 결국 고통으로 끝나고 맙니다. 아마 모든 것이 가장 풍성할 때 추수감사절이나 추석 명절이 있는 이유는 돈에 대한 욕심이 가장 줄어드는 풍요의 시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브라질은 삼바축제로 엄청난 관광소득을 올리는 나라입니다. 매년 2월에 열리는 이 축제에 약 4천만 명이 몰립니다. 그러니 경제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 축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올해 2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확산할 위험에 있었습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축제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축제가 끝나는 무렵에 첫 확진자가 발생했고, 현재 확진자가 470만 명을 넘었습니다. 사망자도 14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코로나는 그저 감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도 걸리고 가족도 걸렸습니다. 그런데도 마스크 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등 거친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겉만 보고 이렇게 말해서는 온전한 판단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삼바 축제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라는 명확한 근거도 없습니다. 다만 그런 축제를 지내는 정신이 코로나 확산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제가 오염되었음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보통 삼바축제라고 하는 ‘카니발’은 ‘카르네 발레’(Carne val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카르네 발레는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입니다.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전에 당분간 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 그 전에 충분히 먹어두려고 하는 가톨릭 전통이 축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로 시작된 이 축제가 그 정신은 사라지고 돈과 쾌락의 축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뒤끝이 좋지는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명절과 축제의 참된 의미를 되살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 전통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축제’는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해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그 기억을 자손들에게 전해주는 ‘교육’적인 차원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식 때마다 자녀들이 그 예식은 왜 행하는 것이냐고 부모에게 묻고, 부모는 하느님께서 이래저래서 그 감사를 잊지 않기 위해 이런 예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자녀를 교육합니다. 교육하면서도 부모 자신도 더 배우고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2천 년간 나라 없이 떠돌면서도 이런 축제 기간을 중요시 여기며 후대에도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잊지 않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 없이 살면서도 축제를 통해 하느님은 감사한 분이심을 자녀들에게 교육했기 때문에 지금의 이스라엘이 있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설과 추석이라는 좋은 명절이 있습니다. 설에는 세배하며 감사하고 추석에는 풍요로움이 있게 해 준 조상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왜 그런 제사를 지내야 하고 성묘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하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부모와 조상들의 덕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 제주도에 30만 명이 몰린다고 합니다. 제주도 주민은 자녀들에게도 이번 명절엔 오지 말라고 했는데, 30만 명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아름다운 전통의 축제 정신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명절이 어떤 교육보다 자녀들에게 큰 교육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부모를 공경하고 물려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을 여러 번의 명절을 거치며 배워왔던 것 같습니다. 놀러 가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이런 특별한 때야만 가능합니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부모도 자신들도 없었음을 깨닫게 하십시오. 그 감사가 진정한 예배로 이루어질 때, 명절은 기쁘게 끝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명절이 자녀에게 감사를 교육하는 장으로 길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날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사진을 모아 놓은 앨범을 보곤 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 후배들이 만들어 준 ‘추억록’이라는 앨범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 동창들과 함께 했던 앨범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간직하신 몇 장 안 되는 사진도 있습니다. 동생 수녀님과 고양이를 앞에 두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저는 6살, 수녀님은 4살 때인 것 같습니다. 형들과 장화를 신고 뒤뜰에서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저는 4살, 작은 형은 7살, 큰 형은 9살 때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시간이 흘러 빛바랜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예전에는 사진을 찍을 일이 많지 않았고, 찍었던 사진들도 이사를 다니면서 없어지곤 하였습니다. 사진기에 필름을 넣고 뚜껑을 닫고, 사진을 찍으면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그렇게 바빴는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본당 별로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이 8권의 앨범에 사제생활 29년이 담겨있습니다. 보좌 신부 때의 사진에서는 열정과 순수함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주일학교 교사, 청년, 주일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행사에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사진 속의 모습은 모두 밝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젊은 날이었고,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나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본당 신부 때의 사진에는 여유와 웃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로 어른들과 함께한 사진이 많았습니다. 사목위원, 노인대학, 구역 봉사자, 성가대, 전례 봉사자, 구청직원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식사하는 자리, 마이크 잡는 모습이 많았습니다. 본당에는 행사가 많고, 사람 좋아하는 저는 가능하면 함께 했습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는 사진 찍을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사목이기보다는 직장과 같았습니다. 교구장님과 교구청 신부님들과 함께 낚시 가서 찍은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5년 동안 교구청에 있으면서 1번 여행을 같이 갔습니다. 그만큼 각자의 자리가 바빴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사진 찍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저장하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에는 너무 많은 사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안 보게 됩니다. 스마트폰 때문인지, 게을러서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앨범도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지만 나의 삶이 저장되는 곳이 있습니다. 나의 글이 저장되는 곳이 있습니다. 인터넷의 공간입니다. 제가 있던 본당 홈페이지에, 교구청 성소국의 홈페이지에 저의 글과 사진이 저장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억하는 자리에, 기억하지 못하는 자리에 삶의 추억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내가 저장하는 곳의 추억과 기억들은 더 오래 간직할 수 있고,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원하지 않아도 계속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걱정되거나 두려워서는 아니지만 이왕 세상에 왔으니 좋은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따듯한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위로해 주었던 추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가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들 보내고 계시는지요? 여성분들은 음식 준비를 하시느라 바쁘실 것입니다. 남성분들은 모처럼 가족들과 만나서 한잔 하시느라 즐거우실 것입니다. 남성분들이 설거지를 도와 드린다면 더욱 행복한 추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윷놀이, 고스톱을 하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 대화를 나누고, 시간이 있으면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은 둥근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고향 가는 모든 분들이 가족들과 정겨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안전하게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도 자기가 살던 곳으로 가서 다시 안 오면 좋겠습니다. 치료약과 백신이 개발되면 좋겠습니다. 예전처럼 일상의 기쁨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마음으로 바라는 것들을 하느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쌓아 놓은 많은 추억과 기억들이 어쩌면 하늘에도 앨범으로 기록되는 것은 아닐까? 부자가 세상의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보관하며 즐거워했지만, 우리가 쌓아야 할 것은 하늘의 창고가 아닐까?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창고에 보물을 쌓으려하지 마십시오.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안전한 하늘의 창고에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 모든 재물과 물질의 진정한 소유주는 바로 하느님이심을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물과 물질을 이웃과 나누며 우리 마음의 창고에 사랑과 희생 그리고 나눔과 섬김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추석을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조상과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풍요와 여유로움의 이면에는 땀 흘리는 노력과 수고가 있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겠습니다. 아울러 말뿐인 사랑보다는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추석이 감사와 고마움의 축제가 되고, 풍요와 기쁨의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조상을 공경하며 가족과 이웃과 화목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나의 곳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피땀 어린
나의 결실은
당신의 피땀 함께 깃든
당신의 결실
소중한 나의 결실을
정성껏 모아놓을
나의 곳간은
바로 당신
인생셔터가 내려지는 날 행복이 결정된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행복하고 싶다면 가난하게 죽지않을 만큼만 살아라.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4) 강남의 아파트 가격이 하루 사이 천정부지를 이루고, 공사를 독점해 수주하고, 주가를 조작하고, 재산을 숨겨 탈세를 하고, 욕심이 끝이 없다.
피땀흘려 모은 돈 같으면 좋으련만 불노소득 챙겨 흥청망청이고 좋은 차 굴리고, 좋은 옷 걸치고 명품빽 들고 폼잡고 사람 안하무인으로 대하고 자본주의 극치를 산다고 폼 잡아 본들 과연 행복할까? 재물이 가져다 준 자기 생각의 행복은 불행이 되어 비참하게 나타난다.
왜, 우린 물질적으로 풍요해지고, 몸뚱아리 한없이 편한데도 외롭다, 부족하다, 없다, 아우성치며 발악하는가? 모두다 내려 놓고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면 충분히 먹고도 행복하게 살텐데 말이다. 자본주의가 내 안에 커가면 정신이 피폐해지고 육체는 병들어 간다. 부자가 3대를 못간다고 했는데 왜 그럴까? 노력하지 않고 물질을 공짜로 윗대에서 얻은 덕에 재물에 흥청망청 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산은 세습해서는 안 된다 하지 않았던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6,24) 말씀이 진리이다. 오늘 하느님 말씀 들어보라! 행복하려면 그 해답은 예수님께서 하신 산상설교, 진복팔단의 행복론(마태5,3-12)에 잘 포함하고 있다. 말씀에 충실하라.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12,20-21)
풍작은 모든 이를 위한 나의 과제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이 추석이지만 금년은 코로나19에다 장마태풍으로 큰 흉작입니다.
하늘이 돕지 않으면 이런 꼴이 된다는 건 예부터 알지만 참 힘듭니다.
풍작일 경우 자기 욕심만 생각하고 머리 굴려봐야 죽으면 그만입니다.
풍작이면 혼자의 곳간 말고 하늘 감사 이웃 희사 같은 곳간도 있지요.
운이 좋아 풍작이면 내 욕심만 말고 이웃 보살피는 새 곳간 말입니다.
내 곳간 지킬 걱정 또한 작은 일 아니란 것쯤 아는 큰 사람 많답니다.
내 욕심 채울 풍작을 모든 이를 위한 나의 과제물이고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하늘뜻 따르는 사람 되어보겠다 하시면 당신은 큰 인물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민족 최대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오늘 한가위 명절을 지내면서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허락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또한 우리를 낳아주신 조상님, 부모님께도 감사하며 친지 이웃들과도 행복한 나눔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어떤 시골 마을에 이런 현수막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불효자는 옵니다.” 불효자는 ‘웁니다’가 아니라 ‘옵니다.’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시기라 확산 방지를 위한 의미 있는 현수막 문구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이번 한가위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종종 덕담을 나눌 때 많이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시대에도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되는 모습은 아마도 다른 이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성실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비유 속에 부자의 경우는 왠지 불행하게 보입니다. 비유 속의 부자는 자기 재산을 모아서 큰 곳간을 짓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그 부자가 그동안 재산을 모으고 나서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려고 했을 뿐인데 야속하게도 그 날 밤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셨을까?’ 문제는 그 부자의 모습 속에는 자신만을 위한 안위의 모습만 보일 뿐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모습도 없었고, 다른 이웃을 위한 나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한가위 명절을 보내고 있지만 오늘의 가장 큰 주제가 바로 감사 그리고 나눔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한가위 때 가족들이 한 데 모여 조상님께 제사를 드리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도 그런 차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실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되고, 비롯되어진 것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께서 왔고, 하느님으로 인해 존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가족, 재산이 있었고, 그리고 나중에 결국에는 죽어서 하느님께로 되돌아 갈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때 그 모든 것은 더 커다란 은총으로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을 믿습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한가위>(2020. 10. 1. 목)(루카 12,15-21)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3-6).”
인간이라는 존재는 먼지보다 나을 것이 없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원성을 인간들이 나누어 받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1베드 1,23-25).”
복음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면 하느님의 영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미합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시편 8,4-7).”
믿음 없는 자들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같은 말을 하면서 마치 무엇이나 된 것처럼 우쭐거리지만,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교만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을 이렇게 높여 주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필리 2,12ㄷ-16ㄱ).”
신앙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신호등과 같은 등불이 되라는 뜻인데, 이 말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마태 5,13-16) 예수님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5-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야고보서에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야고 4,13-16).”
여기서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주님께서 허락하시면”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라는 ‘어리석은 부자’의 말은, “재산이 많이 쌓여 있으니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 라는 뜻인데, 그가 생각한 ‘여러 해’는 그의 헛된 욕심이고, 허세이고, 쓸데없는 자랑이고, 악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시간은 ‘오늘 밤이 되기 전 몇 시간’입니다. 그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만일에 그가 그 몇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즉 회개하지 않고 그냥 낭비해 버린다면, 그의 인생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라는 하느님 말씀은, 우리 목숨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씀은, 지금 내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는(하느님 앞에서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목숨과 인생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잠깐 동안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재산, 명예, 권력, 무엇이든지 간에 다 마찬가지입니다.
<몇 시간 전이라도 미리 예고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루카 12,46) 하느님 앞으로 불려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지금 살아서 회개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의 것이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어리석은 교만과 허세를 버리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함승수 신부님
토마스 사도가 인도에서 선교하던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토마스가 세공과 건축에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임금이 그에게 자신을 위해 새 왕궁을 지어달라고 요청했지요. 공사비도 넉넉하게 주었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눈에 띄게 진척되는 것이 없자, 초조해진 임금은 사람을 보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토마스가 받은 공사비를 모두 임금이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화가 잔뜩 난 임금이 토마스 사도를 죽이려 하자 그의 동생이 그를 말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 사실은 제가 어젯밤에 죽어서 천국에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천사가 제가 살 집을 안내해주어서 가보니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집이었습니다. 속상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으리으리하게 크고 화려한 궁궐이 보이길래 ‘저것은 누구 집이냐’고 물으니, 그것은 형님이 지내실 집인데 토마스라는 사람이 지어준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요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법석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나 집 사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요. 누군가는 집 값을 올리기 위해 애를 쓰고, 다른 누군가는 집 값이 오르기 전에 자기 집을 마련하려고 애를 씁니다. 언제 죽어서 떠날지 모르는 이 세상에 집을 마련하는데에는 이처럼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가, 정작 영원히 살게 될 하느님 나라에 집을 마련하는데에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하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많은 재물을 모아 그것을 보관할 더 큰 곳간을 지으려는 부유한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그런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상에 큰 집을 짓는데에만 정신이 팔려 아등바등하느라 힘 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을 소홀히 하면, 세상 종말 때에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분 앞에 당당하게 내어놓을 것이 없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토마스 사도처럼 재물을 쟁여두고 있기보다 그것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자비를 실천한다면, 세상 종말 때에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이만큼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했노라’고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들려드린 이야기 속의 왕은 토마스 사도 덕분에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지혜로운 사람이 된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한 해의 풍성한 소출을 함께 나누는 기쁨의 명절 추석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그리고 몇 차례나 우리를 할퀴고 간 집중호우와 태풍 때문에 모두가 함께 나눌 몫이 너무나 적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유한 사람보다, 가진 것을 나누고 자선을 실천하겠다는 마음이 더 주눅들고 작아지는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은 풍족할 때보다 부족할 때에 더 살기 팍팍하고 힘든 법입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울수록 내 가족만 챙기기보다,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안된다고 지갑을 닫기보다, 작고 평범한 것이라도 이웃들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베풀고 나누는만큼 하느님 앞에서 더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나라 은행은 경기가 어려울수록 이자를 더 높게 쳐주는 곳이니까요.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재산을 다루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게 해 주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탐욕은 인간의 기본적 도리와 품위가 무너질 정도의 지나친 욕심을 가리킵니다. 탐욕이 지나간 자리에는 분배와 소유의 균형이 깨어지고 착취와 손해의 상처가 남지요. 누군가의 이득이 누군가의 상실을 부릅니다. 그래서 탐욕은 얻은 재산의 수량 문제가 아니라, 탐욕한 만큼 누군가 공격받고 소외됨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과도히 탐욕을 부리는 이의 존엄성도 실은 당하는 이 못지않게 훼손됩니다. 소유의 쾌락에 들떠 천박해지고 무도해지고 병드는 영혼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따름이지요.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색하게도, 많은 이들은 생명이 재산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돈으로 첨단 과학과 의학의 결실을 우선 점유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이야기이긴 하지요.
하지만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는 명백히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은 육적 생명뿐 아니라 영적 생명까지 포함하니까요. 오늘 비유 속 부자의 잘못은 그가 영적 생명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
자신을 위해 모은 재화란 제 만족을 위해 쌓은 지상 재화를 의미하지요. 그 재산을 허락하신 만물의 주인을 잊고 모든 것이 제 것인 양 즐기고 누리면서, 협력하고 양보하고 기여한 이웃들의 몫을 염두에 두지 않은 실책입니다. 그들의 가난에 무심히 눈 감은 탓에, 그 부유한 이의 천상 곳간은 기초가 놓일 땅조차 얻지 못한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인간을 배불리고 풍요롭게 하는 모든 열매들이 어디서 오는지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요엘 2,23)
땅의 곡식과 과일은 주님께서 내려 주신 비를 먹고 자랍니다. 그리고 사람은 주님의 은총과 도움, 축복을 먹고 자라지요. 세상에는 이 진실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이와 망각하는 이가 있을 뿐입니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요엘 2,26)
이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 애써 일한 보람으로 한껏 배불리 먹어도 좋고 신나게 즐겨도 좋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좀 더 부여된 주님의 은총을 당연하다고 여겨서는 안 되지요. 자격 없고 합당치 못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에 놀라워하고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그분께는 찬양이 필요하지 않지만, 감사와 찬양은 이를 바치는 이의 영혼이 숨을 쉬는데 꼭 필요한 양분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의인들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묵시 14,13)
주님에게서 받은 것에 대해 우리가 올린 탄성과 감사와 찬양은, 심판하시는 분 앞에 서게 될 우리를 따라옵니다. 이미 우리 영혼에 아로새겨졌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감사의 마음으로 사심 없이 내어준 자선과 희사의 자취는 심판하시는 분의 심장에 인장처럼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지상의 가난한 이웃들을 거쳐, 거쳐서 결국 그분이 받으셨고 그분이 누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의 빈부의 격차는 소유한 물질로 생기지만, 영혼의 격차는 비우고 나누고 내어준 자취로 생기기 마련입니다.
흔히들 풍요와 결실의 한가위라고 하지만, 올해 추석은 예년의 흥겨움을 떠올릴 때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실직과 병고와 소외를 겪는 이들이 늘어가고, 단절과 고립이 키우는 마음의 병 역시 중차대한 현실이지요. 가난한 이들이 더욱 처절한 빈곤의 늪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모두가 어려운 이 시기에,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시는 오늘 되면 좋겠습니다. 국가와 사회, 교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굶주리고 외로워하는 이웃, 형제는 없는지요... 올 추석은 국가적, 세계적 위기 속에서도 더 따뜻한 사랑이 피어나길 소망합니다. 없이 살아도 성체와 성혈로 배부르고 흥겨운 우리가 그 작은 불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가위 명절을 축하드립니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 준 조상들과 부모님들께 감사하며 보름달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두루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추석이면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로워집니다. 논밭에 영근 곡식을 보아도 그렇고, 탐스럽게 열린 열매들도 우리를 흐뭇하게 하지요. 그런데 이 풍요로운 한가위에, 우리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라는 말씀과 함께, 많은 소출을 거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 부자는 늘어난 수확만큼 더 큰 곳간을 짓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 하지만 부자의 바람과 달리 그렇게 모은 곡식과 재물은 결국 그의 차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창고가 안전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배가 자신의 곳간보다 더 안전한 창고”라고 하셨습니다. 필요 이상의 재물은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통해 하늘의 곳간에 안전하게 저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풍요와 넉넉함의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기억한다면, 이 모든 것을 혼자서 움켜쥐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히 받은 선물을 너그럽게 나누어서, 하느님의 풍요가 확장되도록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란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는 넉넉한 마음으로 보다 풍요로운 한가위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혜로운 삶, -찬양, 종말, 이웃-
이수철 프람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참 좋은 날입니다. 두루두루 경사가 겹친 축복 충만한 날입니다. 10월 묵주기도 성월이자 전교의 달 첫날, 첫주일이자 성녀 소화 데레사 학자 기념일이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 추석입니다.
제가 늘 감동하는 바는 가톨릭 교회 전례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전례의 아름다움이요, 전례의 은총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삶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한가위 하루를 활짝 연 성무일도시 새벽 초대송과 찬미가, 그리고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과 시편은 얼마나 한가위 축제에 잘 어울리고 아름다운지요!
-“한가위를 맞이하여 오곡백과를 지어내신 주님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올해도 우리일손 축복하여서 이모든 곡식들을 거두어들여
우리삶 이어가게 힘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리세
마음을 곱게곱게 가다듬어서 이세상 열매들을 추수하면서
천상의 주님잔치 참여하는날 고운옷 차려입게 보살피소서.”
-“오곡백과가 땅에서 났으니, 우리주 하느님이 복을 주심이로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 창생이 하느님을 높여 기리게 하소서.”-
온통 찬미와 감사로 가득한 아름다운 축제일인 오늘 한가위 추석이 우리를 한껏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고무시킵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삶입니까? 지혜로운 삶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배울 삶은 지혜로운 삶이자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탐욕을 경계하라’는 말씀과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 두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음 주님의 구체적인 말씀이 우리의 탐욕을 경계하게 하고 어리석음을 일깨워 줍니다. 역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복음의 예화가 꿈중에 이뤄진 일이라면 어리석은 부자는 꿈을 깨는 순간 회개하여 하느님과 이웃에 활짝 개방하여 나눴지 싶습니다. 문득 부자 스쿠르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스크루지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돈욕심이 아주 많은 고리대금업자로 남에게 늘 인색하게 굴었으나, 어느날 밤 죽은 친구의 유령과 함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본 뒤 깨달음을 얻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는 인물입니다.
좌우간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는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역시 무지의 병, 무지의 죄를 깨닫습니다. 탐욕에 눈 먼 무지의 어리석은 부자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녹색평론 잡지 표지 그림 안에 글귀가 좋아 나눕니다.
“내 목소리부터 낮춰야 새들의 노래도, 벌레들의 소리도 들린다. 그래야만 풀들의 웃음과 울음도 들리고, 세상이 진실로 풍요로워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 먹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다.”
세상 모두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관계속에 살아갑니다. 지옥은 장소 개념이기 보다는 관계 개념입니다. 연결되어 있지 않고 끊어져 있는 고립단절의 관계라면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바로 오늘 어리석은 부자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단절이요, 이웃으로부터의 단절이요, 참 자기로부터의 단절이요, 역사로부터의 단절입니다. 더불어가 아닌 혼자의 삶입니다. 완전히 이기적인 자기 안에 갇힌 수인의 삶같습니다.
저는 오늘 2개의 독서와 말씀을 묵상중 십자가 안의 원이 떠올랐습니다. 십자가 수직선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 찬양이고. 십자가 수평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상징하고, 십자가의 중심을 에워싸고 있는 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 이웃과 더불어의 삶을 상징합니다. 바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 차원의 삶을 삽니다. 이에 대해 자세히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십자가 형상으로 하면 하늘과 땅을 잇는 수직선입니다. 바로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하늘길이, 하늘문이 닫혔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가 전무합니다. 완전히 하느님과 연결이 끊긴 단절된 삶입니다. 하여 어리석은 부자는 하늘에 쌓아야 할 보물을 땅에 쌓고 독백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고 즐겨라.”
완전히 육적인 삶입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영적 삶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습니다. 참 무지한 현실주의의 육적 만족의 탐욕의 삶입니다. 이렇게 산다면 참으로 인생 허무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지 않습니다. 제1독서 요엘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셨다.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바로 어릭석은 부자에겐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찬양이 없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삶은 찬미와 감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과거와 현재, 미래의 종말을 아우르는 깊고 넓은 안목의 시야입니다.
이런 시야를 지닐 때 지혜로운 삶입니다. 십자가 형상으로 하면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수평선입니다. 복음의 탐욕에 눈먼 어리석은 부자는 완전히 이런 시야가 차단되어 있습니다.
과거는 물론 미래도 없고 온통 현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종말 의식이 전무합니다. 언젠가 있을 죽음의 종말을, 심판과 죽음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땅에 재물을 쌓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묵시록이 우리의 종말의식을 일깨웁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은 행복하다’ 기록하여라.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천사의 보고후 사람의 아들이 수확하는 장면은 역시 그대로 최후심판의 상징입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언젠가 우리 삶을 수확하실 죽음의 종말입니다. 하여 깊고 넓은 영적 시야를 지닌 이런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의 조상들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더불어 미래의 죽음의 종말을 생각하며 깨어 준비된 삶을 삽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종말을 두루 조망하는 넓고 깊은 영적 시야를 지닌 사람입니다. 부단히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종말의 미래를 내다보며 하루하루 진실하고 성실하고 절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탐욕에 눈이 멀어 이런 영적 시야가 없습니다.
셋째, 오늘 지금 이웃과 더불어의 삶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십자가 중심을 에워싼 원의 형상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는 이웃이 없습니다. 땅에 보물을 쌓을 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선과 나눔이 삶이 없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삶은 위로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삶이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삶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삶입니다. 주고giving, 배려하고caring, 섬기고serving, 지지하고supporting, 나누는sharing 삶입니다. 여기에다 4s의 행복한 삶도 추가하고 싶습니다. 작고small, 단순하고simple, 느리고slow, 미소짓는smile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면에서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한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삶, 미래의 종말을 내다보는 영적 시야를 지닌 삶, 주변의 이웃과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선명히 드러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지혜로운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아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 루카 12/ 15-21> 10/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봄에 산과 들에 땀흘려 뿌린 씨 나무에 새싹들이 꼿 피고 열매 맺고 익어 온갖 곡식 온갖 과일이 풍성하게 거두어들이는 계절
우리는 강강 수례야 하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있어야 할 시기 코로나 전쟁은 우리를 움츠리며 간격을 두고 서로 멀리하며 음침한 빈약한 한가위가 되어간다고 생각되며 찾아가던 사람들 발길 끊고 어둡고 침묵의 시간을 맞아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가위의 의미를 살리고 우리는 수도가족이 모여 어제부터 우리 식탁에 풍성한 음식이 나오며 식사시간 침묵을 께고 서로 이야기는 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면서 밖아 세상의 소식은 고향에는 못가고 각자 자기 식구들만 관관지가 미어 떠나진다는 소식을 들으며 잘된 한가위를 생가하게 합니다.
오늘 현실은 코로나로 인하여 위축된 경제 모두가 죽겠다는 아우성 그러나 이럴수록 서로 사랑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메세이지는 풍성함이 네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것이 되는데 자기 혼자 큰 창고를 지어 백년 만년 살 것처럼 사는 어리석은 자들에 경고합니다. 풍성한 추수를 이웃과 즐기는 시간은 풍요로움을 나누는 데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보내오는 추석 선물 나누며 하나둘 들어오든 것이 빈 창고가 되어 있는데 어떤 자매가 추석날 아침에 찾아오시겠다는 소식 필요한 것 없는데 필요한 것 가지고 오시겠다는 전하는 말은 저를 기쁘게 합니다. 이는 받고 나누는 것이 있어 나를 기쁘게 합니다.
봄에 우리는 보리 고개를 지낸 시간이 있어 굶주리다 한가위를 맞아하여 가을 추수를 맞아 풍성하게 되지만 어떤 이는 병으로 가난으로 슬퍼하고 외로움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나눔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인심은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민족인데 요사이는 다른 이의 손에 든 콩을 동체로 빼앗아 자기 것으로 하는 시대를 사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슬롭게 넘기는 지혜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누는 삶이라 생각합니다. 어제 어는 자매가 저와 상담하다가 전날 식사시간에 복숭아 간식이 나왔는데 사람은 다섯에 4개가 나왔는데 다른사라이 먼저 하나 씩 집어가고 자기몫이 없어 혼자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데 하며 자신은 복숭아을 먹지 못하였다고 하여 수도원은 복숭아 빈쩍씨기 나누어 머어 넉넉히 4개를 내어주었는 데 혼자 먹는다고 하여 못 먹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말을 듣고 엊[ 수도원 밥상에 나온 복숭이 먹지 않고 들고나가 제가 대산 사과하고 상징 적 의미로 가져왔으니 자녁에 드시라하고 마음을 펀하게 해드렸습니다.
몇일 전 방에서 먹으리고 당가실엣 준 배즙을 몇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니눔은 한가위만 아니라 평상시 모든 것에 따라야할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있는 자가 나누면 공산주의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산주의나라가 싫다 하면서 있는 사람이 나눔의 정신이 부족하면 우리는 공산주위 위협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 자유 시장 경제를 좋아하지만 있는 자들이 나누지 않고 자기 창고에 쌓아두는 한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유지 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발란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풍요로움은 혼자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나누며 즐기려는 걋입니다. 오늘 만이라도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며 나눔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체험... “형제들은 하느님의 선물”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추석, 한가위입니다. 매년 이 날이 되면 특별히 더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부모님이 만들어 준 새 옷을 입고 지금과는 달리 조금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길가에 나가 친척 어른들을 맞으며 제사를 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추석인지 명절인지 모르게 시끌벅적하게 지내왔던 과거와는 달리,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소박하고 단촐하게 주님 품 안에서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은공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부모님과 조상님을 온전히 기리는 오붓한 오늘이 새삼 귀하고 값지게 다가옵니다.
제 자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강론을 준비하다가 문득 교황님께서 새로 펼쳐낼 ‘형제애’라는 글에 꽂혀 참으로 가족과 형제를 기리는 추석 한가위에 알맞은 글귀라고 여겨서 여기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번에 발표하는 문헌의 주제는 ‘형제애 그리고 사회적 우애’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형제들’이란 누구인가? 이에 대해 내밀하게 밝히는 성인의 대답을 그의 유언의 시작 부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언에서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끄심으로 그가 역겨워 했던 나병환자들과의 만남 이후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셨지만 아무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거룩한 복음의 형태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형제들은 하느님의 선물과 같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이었으며, 고통 없는 선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인이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도록 이끌었으며,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우리의 ‘전리품’이 아니며, 우리가 원하고 상상했던 모습도 아닐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창조주의 살아있는 작품이며, 그분의 자유로 우리 각자에게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형제들은 주어지는 이들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택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형제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뿐입니다. 그들의 약함과 다양성까지도 말입니다. 그 차이 혹은 가끔은 불협화음은 결국 주님만이 조화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던 것처럼 “조화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명확히 드러나고 그의 지상여정의 마지막 유언에서 확인되는 것이 ‘형제애’입니다. 성인에게 형제애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 사건이며 인생을 변화시킨 체험입니다. 이 사실과 함께, 그 출처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이 사실과 함께,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한 자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있어서 형제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모두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공통된 사랑의 계획을 깨닫지 못하면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친형제자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벨을 죽인 이는 친형이었습니다. 카인은 자신의 눈을 닫아버린 미움 때문에 동생을 살해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동생조차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형제애’는 ‘정적인’ 선물, 곧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형제애는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커집니다. 그리고 언제나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형제들과의 관계는 ‘길’, 곧 ‘친교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시작하는 길’을 걷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프란치스코 성인으로 하여금 그의 형제들과의 만남을 겪고 난 뒤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나아가 그는 복음을 따라 사는 차원을 넘어 복음과 자신을 일치시켰으며 거룩한 복음이 지닌 그 형태를 취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근본적인 방법으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살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애용하는 적절한 표현인 ‘진정제 없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주보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다른 이를 자기 자신처럼 돌보는 것은 복음선포를 위한 길이며 특별한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한 형제가 고립된 상황에 놓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모순이고, 증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성인에게 있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커질수록 형제들을 향한 사랑도 커졌으며, 그 형제들의 얼굴에는 하느님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안에서 사랑은 우주적 사랑으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형제애는 모든 피조물을 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태양을 형제로, 달을 자매로 불렀습니다. 8세기가 지난 지금, 이기주의가 불어나고 갖가지 형태의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형제애와 아버지의 사랑에 목마릅니다. 세상은 이것들을 끊임없이 찾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형제로 맞아들이고자 했던 아시시의 가난한 성자의 증언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며, 또 다른 한 명의 프란치스코(교황)와 함께 형제애의 길을 함께 걷자고 권합니다.
바티칸 뉴스/ Alessandro Gisotti / 번역 이재협 신부
(출처: https://www.vaticannews.va/.../papa-enciclica-fraternita...)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 고유명절인 추석 한가위를 맞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가득하시길 바라며, 형제들과 행복한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은 추석 한가위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가득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감사드리는 생활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2,15-21: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그 동안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생명의 길을 가도록 신앙을 전해주시고, 이 땅을 물려주신 조상들의, 또 친지들의 영혼들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우리 조상들은 오늘 추석을 지내면서 일 년 동안 제 때에 비를 주시고, 태양을 비추어 주시어 오곡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또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지내온 분들이다. 그리하여 이 날은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술과 음식을 서로 나누며 지냈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로 많은 분들이 가기도 했지만, 또한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이때를 기해서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더욱 가족들 간에 화목한 사랑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이렇게 서로 가족들이 만나는 것은 기쁘고도 감사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감사드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하루 동안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 한 주간을 마치면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 감사드리고, 한 달을 감사하면서 지난 날 모두를 감사드릴 수 있는, 그래서 오늘 추석,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드리면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형제들, 은인들과 친척들 모두를 기억해 드릴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신앙 안에 우리의 모든 형제였던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로 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바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면서 그 외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더불어 주실 것을 믿으며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진 바를 이웃과 나누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다짐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쁨이 넘치는 한가위가 되도록 하자.
오늘 복음에서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가? 세상의 재물이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자기의 재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 순간에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영적으로 파산을 했다고 하셨으며, 하느님의 눈에는 그가 전혀 부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무엇이건 좋은 것이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옛 성인은 재물이란 것이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지, ‘소유하는’데 있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주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과 부모 형제 친척 은인들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시도록 기도하자. 또한 지난 1년간의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지금 우리와 함께 이 참 제사를 봉헌하지 못하며, 이 기쁨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잠깐 머리 숙여 눈을 감고, 그분들을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각자 기도 드리자.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안에
생명이 있고
한가위가 있다.
빠르게 지나가는
계절의
변화속에서
우리들 삶을
바라본다.
생명을
돌보아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한가위 날이다.
감사와
사랑 사이에
우리가 있다.
지금 이순간을
함께 기뻐하고
기도하는 날이다.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는
마음의 날이다.
마음은 하느님을
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이란 욕심을
통과하는 일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가장 좋은 것을
빼앗고 죽이는
우리들 아픈
욕심이다.
그리하여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
사랑임을 깨닫고
그 사랑을
잊지 않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깊고
깊은 의미를
다시 묻게되는
시간이다.
생명의 질서는
서로를 위하는
사랑의 질서이다.
사랑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하느님의 간곡한
뜻이다.
사람의 생명은
신비롭게도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 더욱
충만할 수 있다.
생명은 물질이
아닌 하느님께
머물러야 아름다운
사랑과 존중이 된다.
한가위 마음에서
생명의 길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한다.
생명의 마음
감사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한가위의 미사이다.
무너진 감사를
다시 일으키는
뜻 깊은 올해의
한가위 날이다.
주님, 한가위를 통해
찬미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