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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가객 배호,
그의 노래와 남산을 한 바퀴
배호의 열성 팬들은 그의 생일이 들어 있는 4월에 술렁인다. 스물세 번째 ‘배호가요제’는 그가 짧은 생을 거의 보낸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렸다. 29살 봄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 가수의 노래가 50여 년이 넘도록 대중의 노래로 애창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난과 병마, 그 신고(辛苦)의 세월에 기대어 부른 절절한 노래에는 모창으로는 복사할 수 없는 눈물의 비표(秘標)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내게 배호의 노래는 흘러간 노래의 절반 이상이다. 애국가속 남산, 목멱대왕(木覓大王) 남산을 한 바퀴 돌며 배호의 노래를 따라가 보는 길은 그를 추억하는 나만의 트레일이다. 중절모를 눌러쓴, 건방지게 멋진 배호는 여전히 팬들의 가슴에 살아있다.
사라진 서울의 명물 삼각지 입체로타리, <돌아가는 삼각지>
1967년 12월 삼각지에는 회전 입체교차로가 들어섰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고, 참석 예정이었던 배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총연장 1085m의 이 돌아가는 공중 로터리는 순식간에 전국적 명소가 되었다. 한 바퀴를 돌아가다 시골 관광버스는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한 바퀴를 돌면 1년을 더 산다고 해서 7번을 걸어서 돌았다는 시골 노인 이야기도 있다.
덕분에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돌아가는 삼각지>를 레코드 가게마다 틀어댔다. 해병대에서 제대한 작사가 배상태가 삼각지 근처 통술집에서 지은 가사를 이인선이 손을 보아서 공동 작사·곡이 된 노래다.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 도는 이 발길/ 떠나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하며/ 눈물 젖어 불러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몰래 찾아 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돌아가는 삼각지>, 이인선·배상태 작사, 배상태 작곡, 배호 노래, 아세아레코드, 1967
비에 젖은 사나이가 찾아온 삼각지 주변에는 선술집이 빼곡했고, 양색시들도 많이 살고 있어 별의별 사연이 다 있었다. 어쩌면 근처 문배동 어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일지도 모르겠다. 배상태는 잃어버린 옛사랑이 난리 통에 헤어진 부인이거나 애인일 수도 있고, 부모 형제, 자식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1994년, 지하철이 지나가며 연약지반에다 세워진 노후 입체교차로는 철거되어 사라진 명물이 되었다. 그러나 회전로의 이미지는 너무나 강해서 ‘울면서 쓸쓸히 돌아가는’ 노랫말 속 사나이의 그림자는 더욱 서글프게 팬들의 가슴에 박혀 버렸다.
광복과 6.25의 그늘, 강인한
삶과 계단식 주택 <해방촌>
전쟁기념관 입구를 지나 남영역에 이르기 전에 뒷골목으로 빠지면 미군 부대 담장 사잇길이다. 적산가옥 몇 채가 일인들이 살던 한 시대 용산의 마지막 징표로 남아 있다.
해방촌은 남산 자락에 매달리듯 살아가는 계단식 논을 닮았다. 원래가 일제 때 일본군 20사단 사격장과 일본 육군 형무소와 일본군 막사가 차지하고 있던 땅이다. 광복이 되면서 미군정청 소속이 되었다. 관리가 느슨했던 터라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들이 들어왔고, 6. 25 피난민들까지 악착같이 달라붙어 살게 된 마을이다.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기약 없는 짐보따리를 풀어헤친 자리였다. 오늘날 제집 갖기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청춘들이 더디게 진화하는 독특한 마을 풍경에 매력을 느끼면서 옥탑방으로 또는 쪽방으로 찾아 든다. 젊은 세대의 박탈감과 가늠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쩌면 오래전 해방촌 원주민들이 터를 잡으면서 느끼던 막연함과 닮아 있어 안쓰럽다.
용산고등학교 정문에서 남동쪽을 올려다보면 그 유명한 ‘해방촌 108계단’이다. 무릎이 성치 못한 노인에게 고역일 수밖에 없는 계단에 경사형 승강기가 최근에 만들어졌다. ‘복지만세’이긴 하나 구청장 이름을 떠억 하니 새겨 놓은 꼴불견도 참아내야 한다. 자전거의 매력을 후암동 뒷골목에서 유감없이 즐긴다. 후암시장은 서울역 앞의 고층건물들 속에서 더욱 낮아 보이지만 사람 냄새만은 더 물씬 풍기는 뒷골목이다.
이별과 상봉의 원표 서울역,
보내야 할 <당신>
서울역이다. 1900년에 경성역으로 태어난 서울역은 조선호텔을 지은 일본인이 비잔틴 건축양식의 펜던티브를 이용한 중앙돔 양식으로 1925년에 지어졌다. 서울역 시계 아래서 근·현대사속에 살아온 사람들의 수많은 이별과 상봉이 이루어졌다.
내가 처음 본 서울역 앞 풍경은 지금도 여전한 순화동 방향 낮은 건물 위에서 돌아가던 아이디얼 미싱의 네온사인 실물 광고였다. 서울의 화려한 이미지에 끌려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처녀·총각을 벗겨 먹고 사는 족속들의 은거지도 서울역 앞이었다. 힐튼호텔 아래 카지노 자리에 있던 양동 골목에는 사창가의 희미한 적색등 불빛이 새어 나왔고, 쪽방의 어둠은 지금껏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서울역 철길을 가로질러 고가도로가 생겨날 때 재건 한국의 망치질이 조국 근대화를 강건하게 했다. 배고픈 사람들은 대한민국 제1호의 파출소 서울역전파출소 북쪽 의주로에서 염천교 방향의 길가에 앉아있는 떡장수 앞을 서성거렸고, 먼 길 떠나는 이는 신문지에 싸서 주는 바람떡과 시루떡을 사들고 밤 열차를 타곤 했다.
이제 서울역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는 ‘서울로’라는 이름의 공중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남대문시장 상인들과 만리동 사람들의 반대도 잊혀져 버렸고, 이 사업을 자랑하던 서울시장은 자진(自盡)으로 생의 마지막 열차를 앞당겨 타고 말았다. 땡볕에 그늘조차 없으니 찾는 이가 줄었다고 비난하지만 전국 팔도는 물론, 이름도 낯선 외래 식물까지 가꾸어 가는 당국의 노력만은 평가해 주어야 할 일이다.
배호가 서울역에서 부르는 노래는 어떤 곡이 제격일까. <안녕>? <굿바이>? 모두가 어디에서나 있음직한 이별이어서 너무 확장성이 큰 노래다. 배호를 생전에 만나면서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언론인 이태호의 해설을 듣고 보니 <당신>이 바로 서울역에서 부르는 노래여야 한다는데 무릎을 쳤다.
보내야할 당신 마음 괴롭더라도/ 가야만할 당신 미련 남기지 말고/ 맺지 못할 사랑인 줄을 알면서도 사랑한 것이/싸늘한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의 상처 되어/ 다시는 못 올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할 당신/ 지 못할 사랑인 줄을 알면서도 사랑한 것이/ 싸늘한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의 상처 되어/ 다시는 못 올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할 당신/ <당신>, 전우 작사, 나규호 작곡, 배호 노래, 신세기레코드, 1969
그냥 불러보면 애절한 이별의 노래다. 신분의 차이이거나 맺지 못할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절함 정도의 노래로도 볼 수 있다. 시작부터 ‘보내야 할‘ 당신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다시는 못 올 머나먼 길’이란 대목은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떠나는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여야할 운명까지 예감한 다짐인지도 모른다.
배호의 아버지 배국민이 광복군의 특수임무 전사였다는 점에서 이 노래를 해석하면 저 떠나는 이는 조국광복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해 지평선은 말이 없는 북만주나 남중국 머나먼 땅으로 가야 하는 <당신>일 수 있다. 남편의 무운 장구를 비는 비장한 다짐으로 얼굴을 쓰다듬어 보는 눈물 젖은 아내의 손길, 그 기약 없는 이별이 역두에서 이루어진다.
서울시민이 사랑한 국민의 산 남산,
<비오는 남산>
숭례문을 돌아 남산언덕으로 오른다. 남산의 정수리에는 세 개의 뿔이 심어져 있다. 남산타워와 방송·통신용 송수신 철제 탑이다. 작가 김훈이 “거대한 주사기 같은 남산타워는 인류가 대도시에 세운 구조물 중 가장 추악한 기념비”라고 말했다.
풍수학자 최창조는 “남산 정수리에 쇳덩이가 꽂히고, 속에 구멍 3개가 뚫려 있어 남산의 기가 다 빠져나간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제 산을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바라보며 달려 내려간다. 골동품 수준의 케이블카라서 가끔 공중에 매달리기도 하지만 1970년대에는 남산의 상징이자 남산데이트의 필수 코스였다.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가야 하는 계단에는 사주팔자를 봐주고 용돈을 챙기는 노인들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총 찬 놈을 만날 것’이라는 점괘를 뽑아준 덕인지 바바리코트 자락을 휘날리던 처녀는 군인의 아내가 되기도 했다. 수많은 옛 노래들이 남산을 배경으로 삼았다.
<남산 마님>(이미자), <서울의 모정>(패티김), <달뜨는 고아원>(박재홍), <남산 부르스>(오기택), <추억의 남산>(남상규), <남산 엘레지>(양부길), <남산 나그네>(명국환), <추억의 남산길>(정석풍), <남산 팔각정>(서동진), <남산의 화가>(남미랑)외에도 더 숨어 있으리라. 우리의 배호는 남산에서도 혼자 밤비에 젖는다.
눈물을 흘려서 강물을 더해주고/ 한숨을 쉬여서 바를 더해져도/ 야속한 그대에 가버린 후에는 / 너무나 무정하여라/ 차욱차욱 추억만 쌓여진 거리 나 혼자 거닌다 // 그 님을 불러서 메아리 더해주고/가슴을 치면서 슬픔을 더해주어도/ 떠나간 그대 또 다시 못 올 때 / 너무나 가슴아파라/ 주룩주룩 밤비만 내리는 남산 나 혼자 왜 왔나 <비오는 남산>, 이인선 작사, 배상태 작곡, 배 호 노래, 아세아레코드, 1967
아무래도 사랑이란 머무르기보다 떠나가기 쉽다. 사랑의 속성이 본디 그렇다. 사랑이 완결된 환희는 이내 가정의 테두리에 갇힌 일상이 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세월이 갈수록 그 미완의 테두리가 더 선명해진다. 그렇게 배호는 ‘나도 아프다’고 상처받은 사나이들을 위로하고 있다.
옛 동보성 자리에 들어선 중국대사관 영사부 골목으로 내려오면 퇴계로다. 불타던 대연각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미 은퇴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1971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흑백텔레비전으로 일본에까지 생중계되던 대형건물의 화재, 침대 매트리스와 함께 뛰어내려 숨지는 사람들, 거기서도 살아나온 기적도 있었다.
무학성 캬바레가 있던 건물에 화재가 나면서 새로 지은 건물이 대연각이었다. 두 번이나 불이 나기도 드문 일인데 그 터에는 강한 불(火)기운이 서려 있었나 보다. 배만금(배호의 본명)이 큰외삼촌 김광수가 운영하던 무학성 캬바레 사환으로 취직하여 드럼을 배우기 시작한 곳이었다.
사교춤이 광범위하게 퍼졌던 1960년대, 신문 하단의 손톱만한 광고는 모조리 ‘땐·땐·땐’ 댄스 교습광고였다. 전쟁의 상흔이 조금씩 아물어가며 세상이 조금씩 여유를 찾게 되던 때에, 밥을 굶어가며 드러머로, 가수로 배호는 커갔다. <배호와 그 악단>을 만들고 8년간 200여 곡의 빛나는 노래를 선사하고 20대에 생을 마친 가객 배호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마저 해야 하겠다.
그 시절 청년 문화의 메카 명동,
<비 내리는 명동거리>
충무로 입구, 옛 본정(本町)통에 들어선다. 진고개 길의 시작이다. 중국대사관 앞으로 난 뒷길로 접어들면 평일에도 시끌벅적한 명동이다. 이 땅에서 값이 가장 비싼 땅의 영예를 지니고 있는 곳, 젊음은 예나 제나 명동의 불을 밝힌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물건을 사고, 서로의 눈길을 마주하며 커피를 마시지만 박인환이나 이봉구 시대의 명동이 주는 예술적 아취는 고사하고 오비스캐빈의 통기타와 생맥주의 분위기조차 찾기 어렵다.
국산 화장품이 차지한 길목, 손수레에 실려 나온 먹거리들이 막아선 차 없는 거리는 이미 베이징의 왕푸징거리를 닮아 있다. 사회주의 중국이 우리의 사드배치를 트집 잡아 ‘한국단체여행금지령’을 내린 여파는 코로나로 이어져 명동거리의 힘을 여전히 빼고 있다.
비 내리는 명동거리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사나이 두 뺨을 흠뻑 적시고 말없이 떠난 사람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이 순간까지 나는 너를 믿었다 잊지 못하고/ 사나이 가슴 속에 비만 내린다 // 비 내리는 명동거리 사랑에 취해 울던 밤/ 뜨거운 두 뺨을 흠뻑 적시고 울면서 떠난 사람아/ 나를 두고 떠났어도 이 순간까지 나는 너를 사랑해 잊을 수 없다 /외로운 가슴 속에 비만 내린다 <비 내리는 명동거리>, 백영호 작사· 작곡/ 배호 노래, 지구레코드, 1970
이제 이 명동거리에는 떠나버린 사랑을 애달파 하며 추억에 가슴을 쥐어뜯는 별리(別離)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갈 테면 가라지’ ‘너보다 잘난 여자, 남자 쌓이고 쌓였다’는 마지막 막말이 엔딩으로 등장하는 쓸쓸한 시대가 나는 낯설다. 배호의 노래 다섯 곡만으로 남산을 감싸안고 돌아왔다.
자전거는 타는 코스보다 걷는 코스가 더 길었으나 추억에 잠기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다른 노래를 끼워 넣는다면 배호와 나만의 공감대가 끊어질 것 같아 오로지 그의 노래만을 나직이 불렀다. 배호의 노래가 하나같이 비나 눈물에 젖었다고 사랑과 이별의 비탄이 전부라고 말하지 말기 바란다.
그의 노래는 사랑을 깊이 새긴 마음, 이별을 녹여낸 아픔, 행복을 비는 진심의 송가다. 사나이기에 통곡 대신 어깨를 들썩이는 밀봉된 울음으로 참아야 하던 배호 그 시대의 사랑과 이별법을 우리는 따뜻하게 기억해야 마땅하다.
조용연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