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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에제 37,1-14
복 음 : 마태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단정 짓는 태도를 보이고,
‘요즘 젊은 애들은~~’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을 어떻게 부를까요?
듣자마자 답이 나올 것입니다. ‘꼰대’라고 말입니다.
이 ‘꼰대’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젊은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또 상대에게 의견을 묻는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했는데도,
아들에게 “아빠는 꼰대 같아.”라는 말에 크게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꼰대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돈만 내고 사라지면 된다.’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자신이 이제까지 시행착오를 겪었던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야기한 것뿐인데,
이런 말을 했다고 ‘꼰대’ 취급받는 것이 억울하다고 하십니다.
또 너무 화가 나서 ‘요즘 젊은것들’이라고 했다가,
“그러니 꼰대지.”라는 말을 들었다며 세상 살기 힘들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존경받는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단정 짓는 말을 하고, 요즘 세대를 비판해도 꼰대 소리를 듣지 않는 어른이 있습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어도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키워나가면서 자기만의 영역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역이 없으면 쉽게 ‘꼰대’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영역이 있습니까?
특히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의 영역은 자기만의 소중한 영역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에 동참하며 만드는 영역은
‘꼰대’보다는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존경받는 어른이 되도록 해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 따르는 것을 몹시 어렵게 만들었지요.
예수님 시대의 율법은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잡다하고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힘들었지만,
613개의 조항을 지키느라 다른 것들을 도저히 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율법 학자가 한 것입니다.
당시 종교 생활의 고민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큰 계명을 뒤로 하고
자질구레한 외부 생활 규율에 치우치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면서
이 사랑에 집중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잘 실천하는 이는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진정한 이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
늘도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랑의 여정
-배움, 훈련, 습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감사를 이길 운명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어디서 살고 있습니까?”
“경남 양산 통도사 근처예요. 남편도 잘 있습니다.”
“부산 사직 야구장 왔습니다. 실업급여 6개월 받고 9월부터 어린이집 다닙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 주고받은 메시지와 수십 통의 카톡 사진 받고 반가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신혼부부인데, 행복하게 사랑하며 잘살고 있는
환한 부부 모습 사진이 참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참 힘들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0년간 사귀어 분이라
결혼 이후에도 참 서로 잘 맞는 것 같았습니다.
두 신혼부부는 신혼여행을 수도원 피정집에서 2박3일 조촐하게 지냈고,
무엇보다 두 분 얼굴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부부는 물론이고 친구도 그렇고 주님은 더욱 그렇습니다.
참 신비한 것이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 갈수록 자기 고유의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정 지도시 자주 한 말이 생각납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먼저 얼굴 검사합니다.
주님 얼굴을 닮았나 안 닮았나 검사할 것이고,
주님 얼굴을 닮은 이들이 하늘 나라에 입장입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할 때 주님을 닮습니다.”
마침 어제 얼마 전 찍은 수도 형제들의 영정사진 일부를 받고도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참 죽음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묘한 느낌까지 들어 잠시 착잡한 마음이었습니다.
과연 지금 죽는다면 죽음 준비는 되어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사랑의 여정에 충실하는 길만이 최상의 죽음 준비이겠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 자체가 바로 죽음 준비라는 것입니다.
문득 얼마 전 써놨던 “파스카의 꽃, 사랑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끊임없이
그만의 색깔, 향기, 크기, 모양으로
평생
세상 떠날 그 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 사랑의 꽃이다”-2022.6.9.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미워하며 어둡고 우울하게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허망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라 ‘사람’입니다.
요즘 한낮엔 덥지만 이젠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시원한 바람에 흰구름 푸른 하늘도 높아 보입니다.
배밭 사이 산책을 하다 보면 웬지 배 열매 익어가는 향기도 느껴집니다.
봄의 꽃향기도 좋지만, 가을의 열매 익어가는 향기는 더욱 좋습니다.
마음을 넉넉하고 편안하게, 초연하게 합니다.
아마 노년의 사랑은, 노년의 향기는 이러할 것입니다.
과연 사랑의 열매들이 잘 익어가는 사랑의 여정, 노년의 삶인지 뒤돌아보게 합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답이,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잣대도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사랑의 열매들이 잘 익어가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인지 뒤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교사의 물음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일생일대 최우선의 일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진정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한 사랑!
한결같은 갈림없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래야 마음의 순수요 열정입니다.
일상의 수행을 통해 표현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고 온갖 수행을 합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수행입니다.
이러면서 하느님을 닮아, 예수님을 닮아 내 본연의 참 얼굴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하느님 사랑이 빠져 버린 삶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도저히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에 나오는 넓은 골짜기에 무수히 널린 마른 뼈들이 상징하는바,
희망과 사랑이 실종된 바빌론 유배 중인 이스라엘 집안이자 우리 인간 군상을 상징합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마른 뼈들 같은 인생은 아닌지 뒤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게 하겠다.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살게 하겠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 말한다.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가겠다.”
희망의 예언자 에제키엘입니다.
살아있다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의 영이, 희망의 영이 선사 될 때
비로소 마른 뼈들 같은 죽은 인생이 살아납니다.
그대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살립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 비로소 살아있는 삶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느님이 빠지면 마른 뼈들 같은
죽은 인생이요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폐인이나 괴물 인생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이래서 살아 있는 그 날까지, 죽는 그 날까지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여정에 항구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 사랑의 학인이 되어 평생 사랑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명함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5,45).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 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명함입니다. 다른 명함은 거짓이며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3.35 참조).
우리는 지치지 말고 일치로 향하는 길과 서로를 갈라놓는 장애와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다리를 만들고 또 만들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상호 존중과 대화로서,
‘주님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누가 더 큰 사랑을 내어놓을 수 있는지를 찾는 것'(요한 바오로 2세, 2001.09.27 강론)임을 알고,
모범이 되어 서로 도와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호경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긋는 동작을 통해서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느님과 나의 사랑을,
동시에 옆으로의 이웃과 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 그것은 사랑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므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에 신부님들과 식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로마에서 유학 중인 청주교구 신부님이 뉴욕에 왔습니다.
마음이 통해서 몇몇 신부님들이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모임 날이 되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못 오는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모임의 동기를 주었던 청주교구 신부님은
한국에 계시는 가족의 장례 때문에 한국으로 갔습니다.
갑자기 면담 요청이 온 신부님은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름행사로 피로가 겹친 신부님은 다음 기회에 참석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섯 명이 모여서 맛있는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다들 이유가 있어서 두명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명이 대화하면 주제가 다양한 면이 있지만 진지한 대화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배 신부님과 둘이서 이야기를 하니
가족이야기, 여행이야기, 미국생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제게 두 가지의 질문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노후’에 대한 질문입니다.
미국에서 사제들은 알아서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 본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은 아직은 젊지만, 노후에 대해서 어찌해야 할지 궁금했다고 합니다.
저는 31년 사제생활을 하였고, 앞으로 한 텀이 지나면 원로사목자가 될 것입니다.
제가 속한 교구에서는 원로사목자들에게 공동숙소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미사예물도 지원해주고, 국가에서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경제적인 면에서 노후를 크게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시간 관리와 건강관리 그리고 영적인 생활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사목의 현장에서 떠나면 개인의 시간이 많아질 것입니다.
악기를 배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적당한 취미와 봉사의 시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건강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적당한 운동, 규칙적인 식사, 긍정적인 생각이 건강관리에 좋을 것 같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로 하루를 열고 기도로 하루를 마감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강론’에 대한 질문입니다.
매일 저의 강론을 인터넷을 통해서 읽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성당에서 영어로 강론을 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강론 준비가 늘 숙제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저는 신학생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강론의 주된 재료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읽으면 좋습니다.
말씀에 소홀한 강론은 좋은 이야기는 될 수 있지만 참된 강론은 될 수 없습니다.
‘시대의 표징’입니다.
말씀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과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책을 가까이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좋은 의사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치료를 시작합니다.
‘삶’입니다. 말씀을 강론한 대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하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남을 도우라고 하면서 욕심을 채우려한다면
예수님께서 책망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될 것입니다.
삶이 함께하지 않는 강론은 속빈 강정이 될 것입니다.
‘기도’입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고,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기도는 좋은 강론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둘이라서 단출했지만 둘이라서 영적인 대화를 더 많이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 후배 신부님도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후배의 질문에
저보다 더 현명한 대답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고 사랑은 실천이며, 사랑은 삶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언제나 낙관적이고 희망적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는 참으로 섬뜩한 광경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광활한 계곡 한가운데로 안내하셨는데,
에제키엘 예언자는 자신의 발밑을 보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곳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죽은 사람들의 뼈들로 가득했는데,
얼마나 오래 지났던지 뼈들은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
이른바 죽음의 계곡, 죽은 자들의 계곡이었던 것입니다.
그 뼈들은 억울하게 집단 학살된 사람들의 뼈들이었습니다.
에제키엘 입장에서 끔찍했을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그 음산한 곳을 빠져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에제키엘 예언자는 놀라운 주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됩니다.
무수한 마른 뼈들 사이에 힘줄이 생기더니 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살갗이 생겨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주님께서는 마무리로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시고 생명의 부여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두 다시 살아나서 자신의 발들로 걸어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숫자는 일개 연대가 될 정도로 많았습니다.
이어지는 주님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의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에제키엘 예언서 37장 12절, 14절)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이신 우리 주님이심을 다시금 똑똑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번 죽음, 그걸로 인생이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조만간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아니 영원히 다시 살릴 것입니다.
살아생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만 희망했던 우리는
언젠가 주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다 할지라도
언제나 낙관적이고 희망적입니다.
삶 전체가 고통으로 가득했던 에제키엘 예언자의 삶 또한 그랬습니다.
주님 말씀 전하느라 가족들이 곤경에 처하고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가 비명횡사했음에도
그는 주님의 언약만을 굳게 믿으며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참혹한 상황 앞에서도
에제키엘 예언자가 건네는 메시지의 결론은 언제나 희망적이고 낙관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패망을 거듭 외쳤지만,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서기만 한다면,
새로움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새 하늘, 새 땅, 새 마음, 새 기운, 새 생명, 새 계약,
새로운 미래를 선물로 주실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유배지에서의 처절한 고통과 쓰라린 절망 가운데서도 에제키엘 예언자는 새로움을 외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로움은 물질적 의미의 새로움을 넘어 존재론적인 의미의 새로움입니다.
그 새로움은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정신, 새로운 기운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존재로서의 새로움입니다.”
“새로운 존재 안에는 완고하고 무딘 돌 심장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살 심장이 뛰며 움직일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 안에는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 피가 순환되는 따뜻한 마음,
연민과 자비로 가득한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동시에 발생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박상대 마르코 신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와 부활에 관해 논쟁을 벌이다가 낭패를 본 모양이다.(마태 22,23-33)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모세오경만 경전으로 여겼기 때문에
모세오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활 신앙을 배척한 사람들이다.
부활 신앙이 경전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6세기경에서 2세기경 사이로서
이 시기에 기록된 예언서(이사야, 에제키엘, 다니엘)와 묵시문학(마카베오) 등에 부활 신앙이 나타난다.
그들이 죽은 형의 가문을 이어주는 모세의 율법,
수혼법(㛮婚法; 창세 38,8; 신명 25,5-10)을 근거로 예수께 괴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다.’는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신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세금에 관한 논쟁’(마태 22,15-22)에서 예수의 대답에
탄복을 하고 물러갔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다시 몰려왔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진다.
이 시험은 어떻게 하든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
사실 율법교사들은 모세의 율법 중 248개의 行令과 365개의 禁令 모두를 똑같은 비중으로 여겼다.
중에서 근 계명 하나를 집어내라니(35절), 우리가 보기에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를 제시하시고,
이 계명에 버금가는 제2의 계명도 잇달아 제시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알고 있는
‘하느님 사랑’(신명 6,5)과 ‘이웃 사랑’(레위 19,18)이다.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 천명하신다.
613개의 계명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계명들이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모든 계명이 똑같은 비중을 지닌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와
이에 버금가는 둘째 계명을 제시하시는 것일까?
기준은 간단하다. 무엇 때문에 계명이 존재하는가를 따져보면 된다.
계명의 존재이유는 하느님과 인간(이웃) 때문이다.
가장 큰 계명인 동시에 모든 계명의 기본적인 정신,
즉 골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셈이다.
사랑 없이는 어느 계명도 완벽하게 준수될 수 없고, 빈 껍데기로 있을 뿐이다.
사랑이 하나의 계명을 성취시켜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구약의 율법(613개)을 몽땅 지키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율법을 능가하는 행위를 수행한 셈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 사이에는 하느님은 사랑한다면서 인간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이 바로 나라면 왜 예수께서 수많은 율법들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한데 묶어 가르치시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순서(first and second)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동시(synchronize)에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중에 이웃 사랑에 대한 의지가 굳건해지며,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순명이 확증된다.”(루돌프 불트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