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이 재 부
더위가 시작되는 6월 하순이지만 울창한 녹음과 시원한 물소리에 기가 꺾인 듯 깨끗
한 산(山) 공기의 시원한 감촉이 부드럽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산길엔 인적이 없고, 좁
은 등산로는 숲 속에 터널을 만든다. 풀벌레 소리, 산새 소리 꾸미지 않은 시어가 더
욱 상쾌하다. 산 속에 또 산이요, 오르고 올라도 끝없는 산! 이 장엄한 자연 속에 단 두
사람이 빈 절을 찾아간다는 것은 호기심 못지않게 음습한 공포가 앞선다.
6·25사변 때 불에 탄 절터가 명당이라 10여 년 전에 어느 스님이 토굴을 보수하고,
합판과 함석으로 암자를 지어 기도 수련할 때만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비워두는 기도수
련장에 찾아왔다.
절의 위치가 정말 심상치 아니하다. 바위로 둘러싸인 산 중턱에 꽤나 넓은 평지가 국
자를 걸어놓은 듯 하늘과 입구만 열려있으며 소문대로 절경이다 석간수가 수십 길 폭
포를 이루며, 잘 생긴 바위와 노송의 호위를 받고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급히 흘러간다.
수만 년 비바람에 씻긴 정결한 반석이 대갓집 마당보다도 넓다. 천궁의 정원인 듯 높은
산중에 돌과 나무와 야생화들이 신비한 조화를 이루어 신선의 흔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송림에 어린 달빛이 절 마당에 가득한데 산새의 울음소리와 풍경소리가 욕망을 덜어
내려는 듯 가슴을 흔들며 경을 읽는다. 밤이 깊어지자 차가워진 밤공기가 피부를 자극
하고 고요한 적막은 가슴을 누른다. 달빛이 법당 안에까지 비치니 불상을 대신하여 걸-
어둔 불화가 흉몽(夢)을 펼치며 잠을 쫓는다.
밤잠을 설치고 일찍 일어나 등산 준비를 했다 “알림 글”에 써 있는 대로 절 주변을
정돈하고, 원상대로 문단속을 했다 캔 음료와 맥주, 점심밥 등 준비된 무거운 짐은 함
선생님이 지고 가벼운 장비는 내가 지고 산 정상을 바라보며 세 시간 정도면 3관문에
도착하리라 호기를 부리며 출발했다.
주민들이 일러 준 대로 능선을 타는 바위 산길을 개척하며 산에 오르니 보이는 경치
모두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발길을 수없이 멈추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경치뿐 아니라.
앞을 막아서는 절벽이다. 돌아갈 수도, 밑으로 기어갈 수도 없어 가지 많은 나무를 베어
사다리 대용으로 세우고 위험한 등정을 계속하였다 땀은 비 오듯 하는데 음료수는 떨
어지고, 정상은 아직도 멀다.
충동적 호기심, 무모한 도전을 속으로 후회하며 사고방지를 위하여 지력과 체력을 총
동원하며 침착한 듯 조금씩 전진하지만 몸과 마음은 진땀을 흘리며 떨고 있다. 천신만
고 끝에 정오가 넘어서야 잡힐 듯 가깝게 보이는 산봉우리에 도착했다.
산정에서 바라보는 산해(山海)의 파도는 산! 산의 파노라마다. 고생 끝에 얻은 환희
를 즐길 겨를도 없이 미지의 갈 길이 불안으로 다가와 조바심을 부른다. 땀에 젖은 옷을
벗어 비틀어 짜서 입고 점심을 먹으려 하니 입이 말라 먹을 수가 없다. 물을 충분히 준
비하지도 않고, 아껴 먹지 않음을 후회하며 ‘얼마 안 가면 물이 있는 3관문이겠지' 거
기 가서 점심 먹기로 하고 발길을 서둘렀다.
풍상의 시련을 힘들게 참아내는 바위가 키 작은 관목을 끌어안고 찰나의 분수령을 만
드는 능선이 연봉으로 이어지며 끝없이 펼쳐진다. 가고 또 가고, 오르고 또 올라 현재의
모서리에서 과거를 보며, 암벽에 부닥친 세월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하늘을 떠받친 태
고의 산은 자연이 만든 위대한 예술작품 같다.
솔잎을 씹어 갈증을 해결하며 길을 찾는다. 쉼 없이 육체를 압박하는 것은 갈증이다.
풍상을 헤집고 자란 노목(老木)이 사문(死門의 실족(失足)을 경계하라는 듯 암벽 사이
에서 안전을 염려하며 버팀목이 되어준다. 위험 앞에는 또 위험이요, 낯선 세상에서 찾
는 길은 외길로 이어지지 않고 판단을 힘들게 분산된다. 정신이 희미해지며 주저앉고
싶다. 정신을 가다듬지만 발길은 늘여지고 시간은 자꾸 흐른다.
오후 네 시 반이 넘어서야 3관문에 도착했다. 가뭄이 심한 탓으로 샘까지도 말라있
다 주막집에 찾아가 식수를 갈구하니 무정한 주인마님 하늘 탓만 늘어놓는다 눈에 들
어오는 호리병 동동주를 하나씩 들고 병나발을 불며 목을 풀었다. 주안상에 물 대접이
곁들여 들어왔다 물을 술대접으로 나누어 마시고 술을 따라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 마
시고 또 마신다 갈증이 사라지는 듯 긴장도 풀린다. 배고픔도 잊고 물에만 관심이 간
다. 감자빈대떡과 동동주와 물로 배를 채우니 해는 벌써 서산을 넘는다.
술이 취하는 것인지, 물에 취하는 것인지, 내 육신의 세포들은 모두 문을 열고 술 섞
인 물을 퍼 나르기에 여념이 없다. 취기에 젖는 세상이 모두가 님이요, 사랑인 듯 물오
름 환희가 절정에 이른다. 마른 세포에 물 들어가는 환희! 가뭄에 목 태우며 시들던 풀
과 나무들이 단비 맞으며 뿌리 젖을 때 내 기쁨 같으리라. 방황하다 동반자를 만나 결혼
을 하고 안식처를 꾸민 첫날밤 새 출발의 정사가 이런 것인가? 술! 물! 맛을 아는 두 남
자의 환희가 인생을 노래하며 물 따라 달빛을 밟고 걸어간다.
2005/21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