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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 7,2-4.9-14
나 요한은
2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4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11 그러자 모든 천사가 어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다가, 어좌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말하였습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13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제2독서
▥ 요한 1서의 말씀 3,1-3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에서 받을 상>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잘 익어 가는 11월의 가을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축복과 자비가 잘 익어 ‘성덕’의 열매가 맺혔으면 좋겠습니다.
정녕 가을은 ‘변화의 극점’입니다.
자신을 찬란하게 꾸며오던 일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는 일로 ‘건너감’입니다.
그것은 붙들고 있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바람 부는 대로 나뒹구는 낙엽처럼, 매여 있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영의 이끄심’에 끌려 다니는 일입니다.
임을 찾아 바삐 달리던 일에서, 찾아 만난 ‘임과의 속삭임’으로 건너가는 일입니다.
이제는 뒹구는 낙엽처럼, 강해지기보다는 약해지기를, 능력을 갖추기보다는 무력해지기를, 현명하기보다는 어리석어지기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부서져 사라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옳고도 지는 것이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비워지고서야 타인의 존귀함이 보이고, 허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자신이 비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해야 할 때입니다.
자신이 해결사가 아니라 해결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보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해 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주님 안의 자신과 홀로 고독할 줄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는 공동체에 힘입어 살아왔다면, 이제는 공동체에 거름으로 자신을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성성’에로 나아가라는 강력한 호소를 듣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 문헌’인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2)에서 밝히셨습니다.
“모든 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의 사명입니다.”(9항)
오늘 말씀전례는 ‘성성’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입니다.
그것은 ‘가난을 사는 일’입니다.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할 것입니다.
그것은 ‘슬퍼할 줄을 아는 일’입니다.
자신과 세상의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쁠 것입니다.
이미 깨어, 항상 임을 바라보며 기도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유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있어야 할 하느님 품에 안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 이토록 우리는 복된 삶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십시오.”
(수도규칙 4,62)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욕심으로는 될 수 없는 성인>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묵시 7,14ㄷ)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내며 우리 전례의 첫째 독서는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 성인들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렇지요.
성인들 가운데 환난을 겪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 많고 큰 고통을 겪은 이들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환난을 겪은 사람은 누구나 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때문에 환난을 겪지 않은 사람도 성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능력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의 가난이 거룩한 가난이라고 할 수 없듯이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환난을 겪은 것도 성인의 환난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왜 이런 얘기를 제가 할까요?
그것은 저에 대한 반성 때문입니다.
저는 일생 큰 환난을 겪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환난을 조금 겪었다고 해도 하느님 때문에 또는 하느님을 위해서 환난을 별로 겪지 않은 일생이었으니 성인은커녕 성도도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행복 선언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마태 5,10-11)
모든 성인의 날에 이 행복 선언을 듣는 것은 모든 성인은 다 이런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여기서 성인답게 행복한 사람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은 사람이요, 하느님 때문에 모욕과 박해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래야 하는데, 저는 하느님 때문에 환난이나 모욕이나 박해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저도 한때 성인이 되고 싶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저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고, 그런 뜻에서 그것들을 견디고 참아낸 적은 있지만, 하느님 때문에 또 하느님을 위해 그것들을 감수하고 감당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말하자면 성인 욕심이었던 것이지 사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는 이제 성인을 내려놨습니다.
성인은 욕심으로 될 수 없는 것이고 되어서도 아니 되겠지요.
그러니 하느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환난을 받아들이지 못할지라도, 나이 먹어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닥칠 때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봉헌할 수 있기를, 이 모든 성인의 날에 바라고 비는 오늘 저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하십시오!>
"교회가 어떤 사람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 ‘성인들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은총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성인들의 거룩한 생애나 업적을 일부라도 본을 받도록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느님과 일치하여 영생에 참여하고 있는 성인들이 아직 현세에서 구원의 길을 순례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하여 주기를 청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정하권)
다시 말하면 현세를 사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들의 모범을 우리가 살아감으로써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인을 올바로 공경한다는 것은 외적 행사의 복잡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는 “날마다 쉬지 않고 조금씩 주님께로 발길을 옮기는 것, 이것이 성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지 않는 한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자 앙투안 슈브리에도 성인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한 앎이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님을 아는 것, 바로 그것만이 성인의 길을 걷는 신앙인의 목표요, 지름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인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사신 분들입니다.”
(함께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험난한 고난의 길,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의 길을 묵묵히 걸으신 분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1요한 1,12-13)이기에 성인입니다.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
저희도 당신 집의 좋은 것을, 거룩한 당신 궁전의 좋은 것을 누리리이다.”
(시편 65,4)
그러나 그 성인의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잘 지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8가지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근원을 미래에서 찾아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기에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슬퍼함이 행복이 아니라 위로를 받음이 행복입니다.
땅을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하고 만족할 것을 기대하니 행복하고
자비를 입게 되고 하느님을 뵙게 되니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고,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으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그 큰 행복을 차지할 기회를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음의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에게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에 행복합니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고 자기의 죄에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행복합니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
온유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황, 처지, 여건에 흔들림 없이 평상심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 자제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진선미를 갈망하며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5. 행복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자비는 사랑입니다.
애간장을 녹이는 안타까움을 간직하며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람입니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주님은 ‘내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지닌 사람, 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합니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외형적인 평온에 앞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욕심과 무질서, 불의와 미움을 거두고 화해를 전해주며 갈라진 사람을 맺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선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모욕과 중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들은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사도 5,41).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행복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유혹할 수 없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성인이 어떤 분인지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그리 깨끗하고 거룩할 수 있었을까요?
일본의 오랜 민담 중에 ‘가구야 공주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지구에 내려와 인간의 삶을 경험하고 궁극적으로 천상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천상의 존재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숲속에서 빛나는 죽순을 발견한 나이 든 대나무를 잘라 파는 노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가 죽순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작고 빛나는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기뻐서 그는 그녀를 아내의 집으로 데려왔고, 그녀를 딸로 키우며 그녀의 이름을 가구야히메(가구야 공주)라고 지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대나무꾼은 숲으로 돌아올 때마다 다른 대나무 줄기에서 금과 보물을 발견하여 금세 부자가 됩니다.
가구야 공주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그녀를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로잡습니다.
노인은 시골의 친구들에게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자기 딸을 높은 귀족과 결혼시키기 위해 황제가 사는 도시로 이사 나와 커다란 집을 짓습니다.
가구야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각지에서 귀족들이 그녀의 결혼을 청하러 찾아옵니다.
모두 고위 왕자인 다섯 명의 끈질긴 구혼자가 그녀와 결혼할 것을 주장하지만, 가구야는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기를 꺼려 각 구혼자에게 불가능한 일을 맡깁니다.
그녀는 신화 속 섬의 전설적인 보석 가지와 부처의 구걸하는 돌 그릇 등 희귀한 보물을 각 왕자에게 요청합니다.
각 구혼자는 결국 속임수나 패배로 실패하고 그들의 진정한 성격과 무가치함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일본 천황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듣고 그녀에게 구혼하려고 합니다.
그는 그녀의 온화한 성격과 신비로움에 반해 그녀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냅니다.
가구야는 그를 좋아하고 그의 친절함을 존경하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그의 영역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그에게 밝힙니다.
어느 날 밤, 가구야는 자신이 실제로 달에서 왔으며 곧 천상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양부모에게 밝힙니다.
상심한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지구에 머물게 하려고 노력하고, 황제는 그녀를 다시 데려가려고 올 천상의 존재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경비원을 보냅니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천상의 행렬이 내려오고, 깃털 옷을 입은 가구야는 출발을 준비합니다.
그녀는 황제에게 줄 메모와 불멸의 비약이 담긴 약병을 남겨 둡니다.
그녀가 떠난 것에 깊은 슬픔을 느낀 황제는 비약을 마시지 않기로 했고, 그녀 없이 영원히 사는 것보다 슬픔을 안고 사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대신 그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불로장생약을 불태우라고 명령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후지산(문자 그대로 ‘불멸의 산’을 의미함)에서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정상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가구야 공주에 대한 천황의 영원한 기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가구야는 이 지상의 존재가 아님을 알고는 이 지상의 모든 유혹에 물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깨끗이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바로 믿음으로.
오늘 제2 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지상에서 하느님 자녀임을 시험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임을 믿는다면 이 지상의 어떤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는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이 잿더미처럼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모든 것’을 주시는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 독서에서는 오로지 구원이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오늘 복음은 이 시련을 이겨낸 이들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온 땅을 정복한 알렉산더가 힘과 재산으로 누르려 했을 때 그저 술통에 누워 “햇빛이나 가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구약의 욥은 다 잃었지만,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력을 잃고도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이런 성인들을 유혹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것입니다.
다 가진 이들은 죄를 짓지 않기에 성인들입니다.
다 주시는 분은 전부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이십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인(聖人) 옆에 살기 힘듭니다>
저처럼 살짝 수준 떨어지는 수도자들끼리 수군수군 이야기하는 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성인(聖人) 옆에 살다가 과로사한다!”
따지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백개의 팔을 지닌 사람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저희 창립자 돈보스코도 결코 바오로 사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가였습니다.
넘쳐나는 뒷골목 청소년들, 산업화의 착취물로 이용당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있노라니, 잠을 많이 잘 수 없었습니다.
천천히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 돈보스코가 전혀 다른 장소인 두 곳에 나타나기도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에피소드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런 돈보스코와 함께 사목했던 제자들이니 얼마나 힘들었겠는지 상상이 쉽게 갑니다.
저는 늘그막에야 철이 들어 요즘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다음 할 일, 밀려 있는 일을 생각합니다.
아침에 태안에 있었는데, 오후에는 서울 찍고, 저녁엔 대전에 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간 게으름 피운 것을 반성하며 뛰어다니니, 다른 형제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성인은 과연 어떤 분일까 생각합니다.
물론 사목 현장에서 열심히 뛰어다닌 분들도 성인의 자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게 다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번째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신 ‘성덕(聖德)에로의 초대장’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보편적 성화’를 다시 한번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전유물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건조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덕이란 예수 그리스도 삶의 신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특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친밀성, 그분의 가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평신도들께 아주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 고유한 벙법으로 성덕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최선을 다해 도마질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방법에 따라 정성껏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흡족해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리의 달인’이 되는 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거기다 조금 더 보탠다면, 요리할 때 억지로, 짜증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기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요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요리하고 계신다면 그는 이미 훌륭한 성인 후보자입니다.
저는 가끔씩 우리 형제들 가운데, 성인 후보자가 있을까? 싶어서 형제들을 살펴봅니다. 정말 깜짝 놀란 일은?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몇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로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은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늘 자주 차 한잔 했으면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그곳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행복하고 좋은 곳이어서 놀라고, 그 좋은 곳에 여러 가지로 부족하기만 한 자기가 들어왔다는 것에 놀라고, 절대로 천국에는 못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들어와 있어 놀란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곳이어서 놀라고, “남들은 다 지옥으로 떨어져도 나는 아니다.” 라고 생각했던 자기가 들어와서 놀라고, 틀림없이 천국에 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지옥에 와 있어서 놀라게 됩니다.
천국은 “제가 어찌 감히...” 라고, 진심으로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만 있는 곳, 지옥은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라고 화를 내고 항의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위선자들만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천국에 간다.” 라고 큰소리쳐도 안 되고, “천국에 가기는 틀렸다.” 라고 스스로 포기해도 안 됩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충실하게 노력하면서.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은 은총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충실한 신앙인은 매 순간 순간 믿고 회개하고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 말씀은 나중에 얻게 될 기쁨이 아니라, 지금 누리는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일시적인 위안이나 주는 진통제가 아니라,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주는 치료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바로 그 기쁨을 얻어 누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사도 5,40-42)
사도들이 박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기쁨’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콜로 1,24)
고난 자체가 기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기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뭔가 덜 하신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겪는 고난은 예수님 수난의 연속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사도들과 신자들을 통해서 지금도 진행 중인 일이고, 종말의 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 수난과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3)
‘성인들’은 ‘이곳’에서부터 성인으로 살았던 분들입니다.
‘이곳의 삶’과 ‘그곳의 삶’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아무렇게나 막 살다가 그곳에서 성인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곳에서 성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성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곳과 천국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 있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지금 이곳에서 시작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지금 이곳에서부터 ‘천국의 기쁨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곳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신앙인은 기도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성인들이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면, 이곳이 천국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일은 우리 힘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가 참여하는 일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은 그렇게 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려고 일하시는 주님의 일에 동참한 분들을 기리는 날이고, 동시에 우리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성인들(All Saints)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 '성인성월, 희망성월'>
어제 외출했다가 귀원 도중 수도원 정문을 통과하던 택시기사와 주고 받은 덕담이 생각납니다.
“천국에 들어오는 기분입니다.”
“맞습니다. 수도원은 지상천국입니다. 수도원 천국에 방문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연이어 ‘천국엔 누가 살고 있나? 성인들이 아닌가? 그럼 여기 수도원에 살고 있는 수도자들은 성인이겠다!’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천상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모든 성인들, 그리고 지상에서 살아가는 알려지지 않은 모든 성인들의 대축일입니다.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희망이자 성소입니다.
성인은 기억하고 기념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불림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여전히 좋아하는 오래 전 시가 생각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
<2001.4.16.>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인들입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참 기분 상쾌한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착한 삶을 살다가 죽어 영광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세례받은 신자들 역시 넓은 의미의 성인들이요, 양심의 확신에 따라 진실로 착한 삶을 살았던 모든 비크리스찬들 역시 오늘 축일에 포함되는 성인들입니다.
성인들은 비단 그리스도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무수한 별들처럼 곳곳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가톨릭교회의 품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넓고도 깊습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이 회색빛 11월 위령성월을 희망의 빛으로 환히 밝히는 느낌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위령성월이요, 그래서 저는 11월 위령성월을 주저없이 성인성월이요 희망성월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위령성월이 끝나면 대망의 대림시기에 돌입합니다.
11월 위령성월 한달은 오늘 저녁성무일도시 흥겨운 후렴을 끊임없는 기도로 노래하려 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 근거한 천국의 성인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이 곡을 부를 때마다 감동되어 눈물이 나곤 합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이 둘째 독서에서 우리 모두가 성인임을 기분좋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단숨에 읽혀지는 2독서 사도의 말씀 대부분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복된 신원은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인 성인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런 희망을 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바로 순결한 그리스도처럼 순결한 하느님의 자녀인 성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행복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마침 다산어록 11월은 주제어와 11월1일 오늘의 말씀도 성인다운 삶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일일청한(一日淸閑;하루만이라도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본다는 것)”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중심이 있다.
마음에 중심을 곧게 세운 사람을 어른이라고 한다.”
<다산>
어른을 성인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늘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드러나지 않는다.
섬세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 그 중심을 붙잡아야 한다.”
<송나라 진덕수의 심경>
늘 하느님 중심을 꽉 붙잡고 사는 자가 성인이요 참 어른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 산상수훈의 진복팔단이 성인이 되는 구체적 방법을 알려 줍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대영성가들이 열광하는 산상설교의 참행복입니다.
말 그대로 ‘거룩함의 대헌장’입니다.
구약의 십계명과는 비교가 불가합니다.
“...하지말라”는,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금령의 십계명은 착한 모범적 신자는 될 수 있겠지만 절대 성인은 되지 못합니다.
닫힌 금령의 십계명과는 달리 하느님을 닮은 성인의 삶으로 끝없이 활짝 열린 참행복선언입니다.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요 늘 시작임을 깨닫게 하는, 늘 우리를 앞으로, 위로 향하게 하는, 참으로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 진복팔단을 살았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참행복의 중심에 우리의 영원한 멘토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인들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가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거룩한 욕심, 청정욕(淸淨慾)의 성인들이 목표하는 참행복의 목록을 보며 여러분의 성덕 수준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머리맡에 써붙여놓고 평생 좌우명 삼아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모두가 이만하면 됐다가 아닌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전력을 다해야 하는, 늘 시작처럼 느껴지는 성덕의 여정임을 깨닫게 합니다.
진정 참행복을 추구하며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은 진짜 성인들입니다.
고백성사 성찰시 십계명 기준이 아니라 진복팔단을 기준으로 삼아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성화의 여정, 성덕의 여정에 이보다 거룩하고 적절한 수행은, 영적훈련은 없습니다.
아니, 하늘에 가기 전, 참행복의 삶을 추구하는 진리의 사람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의 상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한껏 격려하고 고무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나'와 '주님'의 행복 이야기>
오늘은 우리 모두의 축일입니다.
교회가 성인으로 기리는 분들은 물론, 이름이 남겨지지 않았지만 주님 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무수한 무명의 성인들도 기억하며 경축하는 날이지요.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하니?" 하고 물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태 5,3-10)
산상설교에 등장하는 이 말씀은 이런 사람이 행복하다고 알리는 고전적 표현 방식이기도 하지만, 명령형으로도 들리고 감탄형으로도 들립니다.
세상 논리로는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은 이들을 거론하시면서 "행복하라!"고 명하시고 "넌 참 행복하구나!" 감탄하시니,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행복해야 하는 걸까요?
가난하고 슬프고 박해받는데 어떻게 행복할까요?
큰 소리 한 번 못 내고 맨날 지고 사는데, 무너지는 정의 앞에서 속이 타는데, 맨날 퍼주느라 바보 소리 듣고 이용만 당하는데, 두 마음 먹을 줄 몰라 맨날 요모양요꼴로 사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에이, 그래도 어떻게 그러고 살아! 재산도 좀 있고, 슬플 일은 피하고, 큰 소리로 내 권리 찾으면서, 원래 그런 거라며 불의도 슬쩍 넘길 줄도 알고, 자비도 손해 안 볼 만큼만, 이익이 된다면 양다리도 서슴없이, 당장 이익이 안 되면 평화는 무슨..." 하고 있다면, 오늘의 말씀은 남의 나라 이야기, 사차원 언어에 불과할 겁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차지도 뜨겁지도 않게 예수님의 행복 선언과는 별개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지요.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가난 이야기를 하실 때 바리사이들이 비웃습니다(루카 16,14 참조).
아마 지금도 이 복음, 이 기쁜 소식이 울려 퍼질 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이 없지 않겠지요.
못마땅해 할 수도 있고, 복음 속 부자 청년처럼 결국 슬퍼하며 떠날 수도 있겠지요(마태 19,22 참조).
예수님을 따르는 길의 기본이 되는 이 행복 선언은 실은 엄청난 도전입니다.
가장 가난해지기로 작정하고 오신 예수님과 함께 인식의 전환, 가치의 전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저 액자 속 이야기로 그치고 말 겁니다.
한편, 현재 가난한 마음으로 슬픔과 의분을 다독이고 있다면, 큰 욕심 없이 착하고 순수하게 살고 있다면, 하느님 손에 전적으로 의탁하며 박해를 견디고 있다면, 내 성공이나 이익보다 온 세상이 두루 평안하고 무탈하길 기원한다면, 이 말씀들은 엄청난 축복이고 위로입니다.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이 말하듯, 그들은 지금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묵시 7,14) 하는 중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렇게 사는 이들의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요한 3,2)
영원한 생명을 지복직관이라 하지요.
이 지상의 순례 여정 동안 평생 그리던 님, 주님의 얼굴을 뵙고 그분 곁에서 누리는 행복을 말합니다.
이 행복에 대한 희망은 비록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주어진 삶을 소중히 안고 견디며 가는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알게 된 삶을 감사하며 소박하게 성심껏 살면서도 이 말씀을 남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고 자신이 행복한 줄 모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나친 겸손 또는 완벽주의의 덫에 걸린 탓이지요.
내 가난과 의탁과 온유와 의로움과 자비와 깨끗함이 100%가 아니라서 스스로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물러서거나 스스로를 평가절하 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그야말로 "행복하라!"고, "넌 참 행복하구나!" 순수하게 감탄하며 던지시는 겁니다.
성찰한답시고 자신을 난도질하고 부족한 부분을 파내느라 우울하고 의기소침하라고, 저의를 깔고 의뭉히 제시하시는 게 아닙니다.
모든 성인의 날은 무엇 하나 손색 없이 완벽한 성인을 기리는 날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을 뿐더러, 완벽한 사람을 성인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말씀하신 여덟 가지 항목을 다 갖추어야 행복한 게 아니라, 하나라도 얻어 걸리라고 여덟 개나 말씀하셨으니 그 하나라도 겨우 커트라인 걸리듯 걸치기라도 하면 '기뻐하고 즐거워'(마태 5,12)해야 합니다.
오늘의 대축일은 주님 품 안에서 행복할 자질 하나만 있어도 가슴 쭉 펴고 실컷 행복하라고 펼쳐 주신 대축제의 장입니다.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면 죽는 날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미 지금 여기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덕은 덕을 부릅니다.
지금 완성되어 가는 덕이 하나라면 그 하나는 다른 덕을 부르고 또 다른 덕을 키우면서 차츰 조화롭게 변화되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모상이 되어 가는 과정이지요.
우리는 모두 이미 성인이거나, 성인이 될 자질과 역량을 갖춘 존재들입니다.
우리 영혼과 인격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창세 1,27 참조)은 지워질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야, 행복하니?" 하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 마음을 열고 잠시 침묵해 봅시다.
내 마음이 무어라 답하는지 듣고, 또 주님께서 무어라 하시는지 귀 기울여 봅시다.
행복은, 진심을 다해 말씀드리는데, 결코 세상 가치들 순이 아닙니다.
돈, 명예, 권력, 학벌, 지위, 스펙, 인맥, 명품은 잠시 허영심을 만족시켜주고 생활을 편리하게 해줄지는 몰라도 깊은 내면의 행복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내 인생의 두 주연, '나'와 '주님'의 행복 이야기에 고요히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뭔가 피어날 것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벗님의 본명(세례명) 앞에 거룩할 聖자를 붙여서 불러보십시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행복은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비로소 시작됩니다>
한국의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은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문학이라는 밭에서 자랐습니다.
저의 작품은 한국 문학이라는 밭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제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한국 문학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저의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준 선배, 동료, 후배 문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제게는 영광입니다.
저를 키워준 한국 문학과 함께 기뻐하고 싶습니다.”
저는 한강의 수상 소감을 보면서 그의 겸손과 인품도 노벨 문학상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와 이예원’의 번역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청에서 근무하는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있습니다.
시대의 큰 어른이었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습니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가 있습니다.
500만이 넘는 가톨릭 신자가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이렇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도 박해의 칼 아래 쓰러진 수많은 무명 순교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역사에 드러나는 성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숭고한 삶과 희생 그리고 순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지도자 모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 사도가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고, 초대교회의 신학적인 기틀을 마련했던 바오로 사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분들만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이웃을 사랑한 분들이 있어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본당도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있습니다.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신앙의 향기를 전해주는 수도자가 있습니다.
본당에는 지체를 이루는 봉사단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은 그런 건물과 조직, 봉사자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 일찍 성당에 오셔서 기도하는 분들이 있기에, 주보를 나누어 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있기에, 나눔과 희생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분들이 있기에 본당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분들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제 기억 속에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을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1970년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수염이 멋있었습니다.
곰방대로 담배 피우셨습니다.
제가 어렸고, 54년이 지나서인지 그 이상 생각은 잘 나지 않습니다.
작은형은 2004년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키도 컸고, 운동을 잘했던 형입니다.
구속되기보다는 자유를 좋아했던 형은 자유롭게 먼저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2011년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큰 산과 같았던 아버지는 제게 신앙을 주었습니다.
책을 가까이하였고,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말은 없었지만,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하였습니다.
어머니는 2020년 코로나 시기에 하느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저를 사랑하였고, 자랑스러워하였던 어머니입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시기여서, 어머니 장례미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남아 있는 가족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새로운 삶으로 옮겨갈 겁니다.
교회가 위령성월을 지내는 건,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는 우리의 희망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는 쉼터에 불과합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누군가의 한 사람>
1950년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태어난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어른이 될 때까지 추적 관찰하는 종단연구(긴 시간 동안 특정 표본을 관찰하는 연구)가 시행되었습니다.
부모가 범죄자이거나 알코올중독자, 정신질환자여서 불안전한 환경에서 양육된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 살펴본 연구입니다.
40년에 걸쳐 시행된 이 연구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양육 환경이 불안정하고 피폐했던 200여 명의 연구 대상자 중 70여 명은 성인이 되었을 때 자기 부모와는 전혀 다른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물려준 유년기 양육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의 온전한 삶을 지켜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바로 ‘한 사람의 존재’에 있었습니다.
아이의 인생에서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 이해하고 수용했던 어른이 적어도 단 한 명은 존재했다는 사실이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 삶을 살게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받는 존재이고 때로는 너무 취약하지만,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며, 그것은 단 한 명의 영향력으로도 충분함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연구였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부모 때문에, 가족 때문에, 환경 때문에….
그러나 그렇게 탓하면서 자기에게 다가왔던 유일한 한 사람을 스스로 거부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나’ 역시 그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왜 잊어 버릴까요?
주님께서는 그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을 철저하게 따른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이 바로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모든 성인은 세상의 행복을 좇지 않고, 주님 안에서의 행복만을 좇으셨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목적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나만을 위한 ‘누군가의 한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신 분들입니다.
이런 분을 우리는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모습대로 살지 않고 세상의 모습대로만 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한 사람이 되기보다, 나를 위한 한 사람만을 찾았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의 성인을 기억하며,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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