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교인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질문]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3:13)
신약(은혜)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자녀들이나 성도들이 잘못했을 때 흔히들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묵묵히 기도하며 기다려라, 내가 어떻게 고치려고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에 불편한 행동을 하는 교인들을 책망 교훈하지 말아야 하고 또 옳지 않다고 말로써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이 성도를 사랑하는 성숙한 성도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막연히 기다리는 동안 공동체에 불편한 일은 계속되고 특히 교회질서를 알 만한 사람이 그럴 경우는 너무 난감합니다.
[답변]
엘리 제사장의 경우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주제입니다. 교회나 가정에서의 모든 잘못을 무조건 다 참아주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격이 다른 몇 가지 경우로 나눠서 각기 다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와 포용만이 궁극적이고도 현실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먼저 엘리 제사장의 경우 아비로서 자식을 교육훈련 시키지 못한 잘못은 너무나 큽니다. 그러나 자칫 아들의 죄 때문에 아비까지, 나아가 온 집안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신구약 시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절대적으로 각자의 죄 때문입니다. 아비의 잘못으로 자식이, 자식의 잘못으로 아비가, 또 한 가족의 잘못으로 집안이 심판 받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18:2-4)
사무엘상 본문도 그 뜻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라고 말합니다. 아들들은 일차적으로 자기들 죄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비가 그 죄를 알고도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말한 것은 아비의 책임, 특별히 제사장으로서 아들의 윤리적 죄보다 제사장의 소명과 책임을 제대로 교육 훈련시키지 않은 죄가 너무나 커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뜻입니다.
엘리와 두 아들의 죄로 그들 가문을 영원히 멸망시킨 것도 제대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엘리 집안은 둘 있는 아들이 심판으로 죽어 후손이 끊겼으므로 결과적으로 그의 집이 영원토록 심판 받은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분노가 그만큼 격심했다는 표현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노엽게 말라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또 다른 이의 교훈과 책망으로 제대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아비라도 자식을 온전하게 만들 수 없으며 자식도 아비 말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철두철미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뿐이며 신자는 단지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가정이든 교회이든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이 머리이며 모든 구성원들은 그분의 몸에 붙은 지체입니다. 모든 지체들은 당연히 주님 안에서 동일한 신분과 위치를 지닙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 안에선 가장이 예수의 역할을 맡아서 가정을, 또 목사가 예수의 대리인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공동체의 대표로서 주님 앞에 서는 것뿐입니다. 가장과 목사부터 먼저 말씀과 기도에 정진하여 구성원들에게 성경에 계시된 진리대로 섬기고 문제가 있으면 주님께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공동체와 구성원들을 이끄는 실제적인 능력은 성령님의 보호 인도하심입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공동체의 사역과 지체들의 삶에서 더 많이 구체화되는 모습으로 역사합니다. 그래서 인간 지체끼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였듯이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고 상대를 살리는 방식의 관계만을 유지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모는 아이를 훈육 징계할 수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신약시대라도 말씀드린 십자가 복음의 원리 안에서 얼마든지 행할 수 있고 행해야 합니다. 아이들의 잘못까지 하나님이 고쳐줄 것을 믿고 기도만 하고 있어선 안 됩니다. 아이들은 성경의 진리는 물론 일반 윤리에 대한 이해 적용을 제대로 못하므로 실수와 잘못을 일단은 인내와 긍휼로 품어 주더라도 필요하다면 적절한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또 분명하게 훈육 징계해야 합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12:8.9)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징계를 부모자식 관계에 비추어 강조하고 있지만, 어쨌든 부모의 징계를 신약시대에도 허락 아니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또 놀랍게도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고 말합니다. 아비들은 자녀를 화나게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자녀들을 훈육 징계하되 인간적 욕심과 감정은 절대 앞세워선 안 됩니다. 대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아비의 의견이나 믿음을 강요해서도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만 합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아비는 죽더라도 자식은 살리는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교회에서 죄를 짓는 교인을 대처하는 방식도 원칙적으로는 주님의 성육신의 방식대로 따라야 합니다. 한두 사람밖에 모르는 은밀한 죄일 경우는 성령이 그 사람에게 역사하도록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기도하며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어떤 말을 해도 이해해줄 아주 친밀한 성도가 혼자 먼저 찾아가서 진심으로 권면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모든 교인들이 알 정도로 공개적인 죄를 지속적으로 짓고 있다면 당연히 교회는 공식적으로 치리해야 합니다. 그 치리의 방식을 주님이 밝혀 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가장 먼저 피해자나 그 죄를 알게 된 사람 혼자서 찾아가라고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간단하게 세 절차를 거치라고 들었지만 그 시간적 간격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단칼로 무 자르듯이 치리하라는 뜻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도리어 치리절차를 졸속적으로 하거나 사적 감정이나 판단을 개입시키지 말라는 쪽에 무게 중심이 실린 것입니다. 개인적 면담, 증인 및 교회 중직들과의 만남, 교회 전체의 의결이라는 세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동안에 여러 번 만나야 하고 또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는 시간은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죄로 인해 교회 안의 다른 성도를 함께 오염시키거나 교회에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로 국한시켜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여전히 이런저런 죄를, 그것도 죄인 줄 알고도 반복적으로 짓고 있는 성도들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자에 한해 우선적으로 기도하며 기다려 주되 다른 지체들이 죄로 오염되는 경우에는, 사람의 신체도 병균이 번져나가지 않도록 수술해서 환부를 도려내듯이, 부득이 치리하되 그 외의 경우는 성육신의 원리로 주님의 역사에 맡겨야 합니다.
포도원을 흔드는 여우들
문제는 딱 꼬집어 죄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교회 안에 이런 저런 모양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교인들 때문에 오히려 더 골치입니다. 교회 조직, 체계, 직분, 정관 등에 문외한이라 독불장군처럼 자기주장만 내세웁니다. 성경의 진리나 교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오랜 교회생활 체험만으로 신앙적으로 우월한 척하거나 다른 이를 판단 비평 정죄합니다. 교인들의 개인 사정을 퍼트리거나 뒤에서 험담합니다. 포도원을 흔드는 작은 여우의 대표적 예입니다.
차라리 분명한 죄를 지으면 공식적인 치리 절차를 거치면 될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교회 안에 루머와 스캔들 심하면 분파 당쟁이 일어납니다. 이런 경우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이고 성령이 이끄시는 힘이고 그 운영은 성육신의 원리에 따라야 합니다. 인내하고 기도하며 기다려줄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죄를 지어도 그래야 하는데 아직 믿음이 미숙하고 인성이 부족하며 성격과 기질의 문제일 수도 있기에 더더욱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기도만하고 무작정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됩니다. 가장 좋고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교인들 전부가 말씀을 깊이 상고하고 기도에 열심을 냄으로써 교회 전체에 진정으로 경건하고 신령한 영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부터 교인들의 허물은 긍휼과 인내로 끝까지 포용하고 기도해주되 오직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실천해야 합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17:11,12)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19:9,10)
초대교회의 예처럼 말씀을 깊이 상고 공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그런 자들도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 또 말씀의 능력이 그들에게도 임해 교회, 목사, 성도들이 나서지 않아도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런 영적인 분위기가 못마땅하면 다른 교회로 옮길 것이고 남아 있으려면 자신들의 언행을 조심하게 됩니다. 아이들을 일류 대학에 보낸 부모의 비결이 의외로 간단하게 집에서 부모가 TV를 없애고 함께 책을 읽었더니 아이들도 자연히 따라하게 되더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역으로 말해 교회가 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행사들이 많아지면, 아무리 전도축제나 지역사회봉사 같은 의로운 일이라도, 자연히 옳고 그름을 따지고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야 한다는 말들이 많아집니다. 정말로 십자가 복음만이 교회 안에 선포되고 모두가 그 말씀 앞에 한 사람씩 변화되면 작은 여우들이 포도원을 망치는 문제들도 자연히 해결될 것입니다.
2018/10/29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