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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혁명과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나 (Ⅱ)
李 秉 華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
농경영학ㆍ경제학 박사
(2013. 9. 5.)
● 신갈농민학교
새마을훈장 수상이후 방송과 언론매체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였고, 비로소 제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불과 5년전 고향 김해에서 비닐하우스 농사와 태권도 도장 운영, 자동차 사업 등으로 소득은 높았지만 건달 소리가 떠나지 않았는데, 변해도 너무 변한 제 모습에 저도 놀랐습니다. 또 저를 자식처럼 지도편달 해주신 박진환 경제특보님 덕분에 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고, ‘조국 근대화’와 ‘민족ㆍ애국ㆍ충성’의 용어를 제대로 알았습니다. 이 시기 농민학교 수료생들은 교장인 저에게 “조국에 충성, 10년후 1억”이라는 용어를 혈서로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의 1억원은 지금의 50억원을 버금가는 금액이었습니다.
다음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있는 <신갈농민학교>의 소개 글 입니다.
<국제농업개발원>
[간략정보]
한 자 國際農業開發院
분 야 교육/교육
유 형 단체
시 대 현대/현대
성 격 교육기관
대표자 이병화(李秉華)
주 소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 고매리
[정의]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 고매리에 있는 농민교육기관.
[내용]
주로 농촌청소년에게 채소재배 및 원예기술을 교육시켜왔다. 교장 이병화(李秉華)가 1972년부터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에서 서양채소류를 주로 재배하는 농장을 운영해오던 중 인근 마을주민들은 물론 다른 지방에서까지 견학하러 와서 교육을 희망함에 따라 신갈농민학교(新葛農民學校)를 설립하였다.
입학자는 보통 농업고등학교 졸업자로서 군입대까지 1년 이상의 공백이 있는 자, 경기도농촌진흥원·군부대·교도소 등으로부터 추천 받은 농어촌청소년, 한국영농학생회원 등으로 영농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청소년이다.
이 학교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교육비의 전액을 농장수입으로 충당함으로써 피교육자는 학비부담이 없다.
둘째, 서양채소의 재배기술뿐만 아니라 자동차운전면허 취득교육, 전기용접 및 스프링클러 조작기술, 트랙터 운전 및 정비기술, 기초 외국어 등 농장을 경영할 때 실질적으로 필요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셋째, 2박 3일 동안 유통현장을 견학하여 유통구조의 현실을 이해시킨다는 점 등이다.
특히 유통현장으로서 양재동 꽃시장, 가락동 청과물도매시장, 축산물공판장 등을 새벽에 방문하여 실제로 농장에서 생산된 농장물을 출하하는 경험도 가지도록 하고 있다. 연간 교육수료생은 3개월 과정 30명, 1개월 과정 30명, 1·2주과정 650명으로, 농장규모에 비하여 많은 수를 배출하여왔다.
이후 이 학교는 교육부로부터 농업전문대학으로 내인가를 받았으나 정부의 요구에 따라 당시 영종도에 소재하고 있던 새마을 사회지도자 교육관으로 이관시키고 국제농업인력개발원으로 법인화하여 한국 농민들의 해외이민 교육장으로 운영되어 왔다.
이후 다시 농림부산하 재단으로 재편성되어 지금은 국제농업개발원으로써 세계 32개 국가에 지사를 두고, 교육사업보다는 한국농민들의 해외농토확보에 따른 진출과 정부 컨설팅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 생산자도 울고 소비자도 운다
1997년 가을 추석을 지낸 며칠후 저는 청와대 본관 부속실 소속의 검수관과 구매관 일행과 함께 충남 서산군 고북면 지역의 새마을지도자 윤대순 선생댁을 찾았습니다.
7월 밭마늘 수확이 끝날 무렵 전국 마늘 산지를 돌아보면서 어느 농가의 마늘이 가장 무공해ㆍ무농약인가를 표본 조사후 5곳을 선발하여 용산미군기지 내에 있는 「106의무대대」 검식팀에 의뢰한 결과 서산군 고북면 일대 마늘이 탁월하였지만, 그중에도 윤대순 지도자의 밭마늘이 최고였다는 결과가 나와 100접을 구매하였습니다.
지금은 경북 의성 마늘이 가장 유명하지만 당시는 서산마늘이 한지형 계통으로 최고였고, 전국 생산량도 가장 많았습니다.
그날 윤 지도자는 “우리 밭에서 생산한 마늘을 대통령께서 잡수신다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느냐”면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우리들에게 대접하면서 슬그머니 저에게 편지 한 통을 쥐어 주었습니다.
윤대순 지도자의 편지 내용은 해마다 서산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의 김장용 양념농산물인 고추와 마늘ㆍ생강 등을 유명 라면회사인 N사와 S사가 밭떼기로 독점하여 김장때 출하하는데, 금년에도 5~8배의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윤 지도자는 이와 같은 편지 내용을 농림부 장덕진 장관실에도 보내고, 청와대에도 등기우편으로 보냈으나, 감감무소식이라고 실망하고 있던 차에, 청와대 직원들이 자신의 집을 찾아 주었으니 이번에는 대통령 각하에게 전달될 것이 틀림없다면서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 훤합니다.
저는 그 편지를 구매관인 방의식 경호관에게 건네주면서 본관 부속실장님께 꼭 전달하여 각하께서 보시도록 조치해 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후 저는 조치에 대한 연락을 받지 못했고, 윤 지도자도 저를 만날 때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동아건설에 김치를 수출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애로사항의 해결책만 요구했지,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이듬해인 1978년 추석전후 건국이래 최대의 마늘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주범은 역시 N사와 S사가 라면수프를 만든다는 핑계로 정부자금까지 지원받아가며 라면 판매소득보다 마늘ㆍ고추 과다독점으로 더 많은 소득을 올렸습니다. 저는 신갈농민학교 서울사무실을 같이 쓰는 중정 경제반에게도 현장 및 사실조사를 요구하였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라면회사는 이미 농림부 등 관계기관에 손을 써 두고 있었습니다.
저는 작년 윤대순 지도자의 편지 생각이 나서 동아일보 배인준 기자(현재는 동아일보 주필)에게 연락하여 ‘월간 신동아’에 취재를 의뢰하면서, 그 동안의 모든 정보를 건네주는 동시에 두 라면회사의 창고에 숨겨둔 마늘과 고추 등을 찾아서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기사를 쓰는 동시에 사정당국에 고발토록 하였습니다.
모든 일간지ㆍ주간지ㆍTV방송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고, 대통령께서는 대노하셨습니다. 배인준 기자는 마늘과 고추의 과점 폭리에 대한 글을 원고지 200쪽짜리 기획특집 「생산자도 울고 소비자도 운다」라는 르포 기사로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동아일보 주필 자리가 그때의 효과가 계속 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사건 이후 농림부 장관이 경질되고, 이때 비로소 일본처럼 ‘농산물 유통개선대책’이라는 후속조치에 따른 입법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얼마후 이 사건 배후에는 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각하께서는 눈치채신 것 같았습니다. 경호실의 하병호 과장(고향선배)으로부터 “야 임마! 너 어른께 할 말이 많은 모양이야”라는 아리송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 법정 농수산물도매시장과 자영(自營)농과 설치의 정책건의
1978년 10월초, 이승만 대통령말기 필화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동아일보 기자출신인 최원각(崔元珏)氏가 긴히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내자(內資)호텔(지금은 적선동 현대빌딩)로 오라고 하여 갔더니 “어제 청와대에서 각하를 만났더니 어릴 때 병정놀이 이야기 등 이상한 말들만 하는데 꼭 돌아가실 사람처럼 보이더라. 그리고 자네 이야기 하더라. 그 녀석이 나한테 꼭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보고 정리하여 보고하라고 하더라. 그런데 각하 말씀 들으니 자네는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이 잘살게 되면 농민 자식들은 농촌에 있지 않고 도시로 더 빨리 떠나니 농촌사회문제를 풀어야 된다고 대꾸를 하였다면서, 또 새마을 회관에다 장례식장 만들자고도 하고 외국 나가있는 근로자의 집안에 초상이 나면 3일만에 귀국치 못하니 새마을 지도자가 가짜 상주가 되어 울어주어야 된다고 말도 아닌 소리를 했다면서… 그런데 각하께서 곰곰 생각하니 자네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하더라… 참, 그리고 지금의 농민학교와 농장 토지를 자네들(김해에서 같이 온 보조요원 2명중 1명은 1973년에 귀향하였음)에게 공짜로 준다고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최원각氏는 대통령께 “그 친구들 부자 되었습니다”라고 반문하니, “나라발전에 보태 쓰라고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얼마 후 박진환 경제특보께서도 각하께서 저에게 농장을 등기 이전해 주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각하께 할 말이 있기는 있냐?”라고 묻길래, “저도 요즘은 대통령 각하를 뵙지 못하여 정책건의를 몇 가지 할까 준비 중이었다”고 했더니, 최원각氏는 두툼한 봉투를 내밀면서 며칠 동안 같이 호텔에서 지낼 숙식비를 받아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저녁마다 모여서 3가지 정책 건의서를 써서 제출했습니다.
첫째, 용산에 있는 농산물 도매시장을 양재동 톨게이트 좌우로 옮겨 완전 경매식으로 하여 농ㆍ수ㆍ축산물 유통불합리를 개선하자.
둘째, 각 도에 농군사관학교 같은 자영(自營)농고(과)를 하나씩 만들어 정예 농민을 양성하자.
셋째, 사병들의 군복무기간을 기술 전문대학과정으로 개편하여 전국민 기술자로 양성하자. 특히 여군 희망자가 많을 것이다.(제 여동생이 여군이라서 강조했음)
건의서를 읽어보신 각하께서는 도매시장과 자영농고는 즉시 법적 정비하여 실시 하도록 조치하였고 저는 실무진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매시장은 10.26이후 국보위가 가락동으로 위치를 바꾸어 건설하였고, 자영농과생들의 첫 입학식은 기숙사 등 건물 신축이 늦어 각하께서 서거하신 후인 1980년 3월에 있었습니다. 군대조직의 기술전문대학 개편은 국방부의 거부로 좌절되었는데, 30년이 지난후 국방부가 일부 실시하고 있습니다.
● 김오랑 소령과 우리 부부
1979년 12월 7일, 각하의 서거로 인한 국민들의 충격이 안정되어 갈 무렵인 이때, 고향후배이자 제 집사람과는 초등학교 동기인 김오랑 소령이 용산에 있는 신갈농민학교 서울사무실(종묘수출입 및 농산물가격조사실)에 찾아왔습니다. “정병주 사령관은 안녕하시냐”고 안부를 물으니 각하께서 돌아가신 후 매일 저녁 양주를 한 병씩이나 마시면서 “주군(主君)이 없는 세상에 살아서 무엇 하느냐고 이상한 말씀을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김소령은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습니다.
박 대통령께서 기흥에 시범농장을 만들고, 그곳에 새마을 주택을 지어 새마을 지도자와 농민들과 같이 담소를 나누고 농사일도 하신다는 소문에 제일 먼저 찾아와 우리도 회장님 전용 농장을 만들 테니 도와달라고 부탁 온 사람은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의 비서실장이었는데, 당시 청와대 안보특보였던 서종철 장군의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기흥주택단지내 그룹 별장옆에 시범농장을 만들어 주고 고향후배를 농장장으로 취업시켜 주었습니다. 지금의 국가대표 탁구훈련장이 그때 시범농장입니다.
이후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님은 신갈동 신역부락(경부고속도로 신갈TG옆 공군화약창고옆)에 대규모 시범농장을 만들고 내친 김에 이웃의 마북동 토지를 대부분 구입하여 지금의 현대연수원을 건설하였습니다. 이때도 저는 농장책임자를 서울농대 출신의 고향선배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한편 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윤필용 장군은 지금의 시흥 기아자동차공장 있는 곳인 소하리 수경사 전용농장 내에 무공해 시범농장을 만들어 관록있는 장군들을 주말에 모셔두고 삼겹살 파티를 연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시범농장들의 소문을 듣고 특전사 정병주 장군도 저를 찾아왔습니다. 정 장군은 “나도 전역하여 시골에 아담한 새마을 주택을 지어 여생을 보낼까 하는데, 나처럼 늙은이도 농민학교에 입교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했고, 저는 쾌히 승락하였습니다. 이후 앞에서 설명한대로 각하의 서거이후 김오랑 소령을 보내어 곧 예편하고 농민학교에 입교할 테니 알고 있으라는 통보를 주었습니다.
12월13일 아침, 한남동 순천향병원에서 어떤 군인이 전방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했는데 시신확인을 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김오랑 소령이 총맞아 죽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동작동 국립묘지 29번 구역 장교묘에 고향후배는 잠들어 있습니다. 예편후 농민학교에 입교한다던 정병주 장군은 12.12사태 얼마후에 소나무에 목메어 자살했고 역시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잠들어 있습니다.
● 새마을주택 1호
무서운 「국보위」가 해산되고 전두환 장군이 체육관 선거로 제11대 대통령이 된 8월27일 이후 박 대통령 때처럼 청와대에 농산물 재배공급과 검역도 해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 해 가을 김장배추와 양념을 준비하여 성북구 사저에 격리 생활하는 큰 영애님(박근혜)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다음날 보안사로부터 “그곳에 드나들면 죽인다”는 경고를 받았고 “나는 이제 민간인이다. 죽이려면 죽여라” 고 맞받아 싸웠습니다. 청와대 한식요리장 윤병옥씨는 저와 같은 꼴을 당하고 병들어 돌아가셨습니다.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습니다. 큰 영애님의 사저 관리관인 박한영씨(박정희 장군시절 당번병)가 만나자는 연락에 찾아 갔더니 비단금침 한 채를 주었습니다. 웬 이불이냐고 물으니 큰 영애님께서 “덮을 일도 없을 것이니 기흥농장의 이선생 애들에게 주라고 하더라. 아버지가 궁색해서 집을 잘 지어 주지 못하여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블럭으로 지었으니(1972년 5월 대통령 자신의 기거용으로 설계한 새마을 주택1호를 말함) 얼마나 춥겠느냐며 이선생 가족 걱정을 하면서 이곳은 위험하니 앞으로는 오지 말라고 하더라.” 그날 저는 저 가녀린 여인을 먼 곳에 계신 어른(각하)를 대신하여 주군(主君)으로 모시기를 맹세하였습니다.
(※ 상기 내용은 박정희 대통령 제28주년 추도식(2007년 10월 26일) 행사후 「님의 찬가」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재편집한 것임)
다음은 「디지털용인문화대전」에 소개된 <새마을주택1호>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새마을 주택 1호>
이칭/별칭 새마을운동 시범주택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737-4
시대 현대/현대
성격 현대 가옥
양식 양옥
건립시기/일시 1972년 1월
소재지 주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 737-4
소유자 국제농업개발원 부속 기흥농장
[정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에 위치한 현대가옥.
[개설]
1970년대 박정희 전대통령이 설계하여 지은 새마을 운동 시범주택으로 현재는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부속 기흥농장 안에 있다. 최근 주택 내부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건물 앞부분을 늘린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변천]
새마을 주택1호는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지도자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한 시범 농장을 개설하라는 지시에 의해 건축되었다. 완공된 1972년 1월부터 현재까지 이병화씨에 의해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완공 후에는 1년에 몇 차례 박정희 대통령이 내려와 머물며 새마을지도자를 만나기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인근 신갈농민학교가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으로 바뀌고 이병화씨가 원장이 되면서 이 새마을 주택 1호는 그 부속농장에 딸린 주택이 되었다. 2006년 관리자인 이병화씨에 의해 앞부분을 늘리고 건물 내부에 칸막이를 설치하였다.
[형태]
새마을 주택 1호는 ㄱ자형으로 남향으로 지어진 안채(122㎡·37평)와 안채 남쪽에 있는 아래채(76㎡·23평), 안채와 아래채 사이의 창고(59㎡·18평) 등 3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축에 사용된 자재는 당시 담장이나 주택을 지을 때 많이 사용하던 구멍 뚫린 일반 시멘트 블록을 이용하였다.
[현황]
새마을 주택 1호는 현재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부속 농장안에 있으며 2006년 건물 내외부의 보수를 거쳤지만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관리는 이병화씨가 신축 당시부터 계속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새마을 주택1호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설계하여 건축되었으며 1970년대 신축된 농가 주택의 본보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약간의 보수를 거쳤지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참고문헌]
• 『월간조선』(2008년 8월호)
• 이병화 개인블로그(http://blog.daum.net/dream-balhae)
● 5공 정부에 학교를 넘겨주다
全斗煥 대통령의 제5공화국시절 문교부 장관과 비서실장을 지낸 먼 촌수로 일가 되시는 이규호(李奎浩) 박사 덕분으로「신갈농민학교」는 자영농과 학생들의 연수기관으로 지정되었고 훗날, ‘86아시안게임’ 이후 조선족 등 해외 동포들의 의무(사상)교육기관으로도 활용되었고 전문대학 내인가를 받았습니다.
1983년 겨울 돌아오지 못하는 편도여권(여행증명서)으로 중남미 국가에 새마을운동을 전파시키고 북한대사관을 철수시키는 공작 업무차 기약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아이티ㆍ온두라스ㆍ과테말라ㆍ코스타리카ㆍ파나마, 그리고 싱글로브 장군이 이끄는 우익 게릴라 콘트라가 활동하는 니카라과 등. 저는 다른 요원들과는 달리 죽지 않고 풍토병이 걸려 살아왔고 후방물자담당관인 장덕희 회장(첼리스트 장한나양의 할아버지)은 한국에 후송된 후 운명했습니다. 저는 이때 조국에 충성하는 길이 해외농업개척임을 찾아내었습니다.
1984년 봄부터 1987년 7월까지「신갈농민학교」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교육당국으로부터 일년이상 수료생에 대하여 “비정규 전문대학 학력인정” 증서를 발급하는 권리를 부여 받아 상당수의 수료생들이 일본의 각 현(縣)에있는 농업자(農業者)대학에 2학년으로 편입학 하였고, 미국정부의 이민국에서는 신갈농민학교가 발급하는 “농업용수기능장” 소지자에 한하여 농업이민을 허가 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혜택이었습니다. 이민브로커들이 기능장 한 장과 25평 아파트 한 채와 맞바꾸자고 찾아올 정도였지요. 농업용수 기능장 소지는 우선 전기ㆍ산소용접기술과 동력펌프수리, 트랙터 운전 및 수리, 자동차면허는 물론이고 스프링쿨러 표준형 34개 거취 설계도면과 이동식 가설도 할 줄 알아야 발급했기 때문에 기능장을 가지고 미국에 이민간 수료생들 모두가 실력을 높게 평가 받았습니다.
이즈음 저는 전경환씨가 회장으로 있는 ‘새마을운동 중앙본부’에 초청강의를 나가고 있었는데 “청와대와 새마을본부가 음모하여 당신 학교와 시스템을 뺏으려고 하니 경계하라”고 문교부 당국자가 알려주었으나 주위 어른들과 의논해 보니 두들겨 맞고 빼앗기기 보다는 그냥 바치고 혜택을 요구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에 새마을 운동 중앙본부 부설 영종도「사회지도자 교육원」에 전부이관 시켜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교육생들에게 너무 강도 높은 심신단련교육으로 사상자가 여러 명 생겨 얼마 가지 못하고 당국으로부터 자격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 정부는 미안했던지 껍데기뿐인 「신갈농민학교」에 외무부가 관장하는 해외농업이민교육기관으로 채택해 주었으나 얼마 후 박 대통령으로부터 나라발전에 보태 쓰라고 물려받은 농장과 학교 부지를 통째로 빼앗으려는 촉수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어, 1987년말 급하게 처분하여 10억5,400만원을 받았습니다. 이 중에서 5,400만원은 양도소득세로 납부하고, 나머지 10억원중 2억원은 빚 갚고, 8억원중 2억으로 전라도 구례와 고흥에 연수원부지를 확보하고, 남은 6억원은 「국제농업 인력개발원」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해외농업개척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1988년 1월초 노태우 대통령당선자가 저에게 적극적으로 지원할 테니 용기를 내라고 격려해 주어, 월간 농업전문지 「상업농경영」이라는 당시에는 생소한 용어를 잡지이름으로 하여 1988년 2월에 창간하고, 지구촌을 누비면서 해외지사를 설립하였습니다. 동시에 한국 농민들의 해외 이주는 일본 외무성처럼 파격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고, 1989년말 재단을 농림부로 이관하여 「국제농업개발원」으로 개칭하였고, 2년 후 11개 국가에 해외개발 거점을 마련하였습니다. (2013년 10월 현재는 32개 해외지사 있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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