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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세계 배낭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3
중국 28 - 조광윤이 5대 10국 시대를 통일해서 송나라를 세우다!
당송 8대가에 속하는 소식 (蘇軾) 곧, 소동파 (蘇東坡, 1037 ~ 1101) 시 입니다.
황주정혜원우거작 (黃州定慧院寓居作) : 황주 정혜원에 살면서 짓다
缺月挂疏桐(결월괘소동) : 이지러진 달(그믐달)은 성긴 오동나무에 걸려있고
盡人初靜(진인초정) : 깊은 밤 물시계 소리 고요하고 진적이 끊어졌구나
誰見幽人獨來往(수견유인독래왕) : 누가 보겠는가, 은자가 혼자 오고가는 것
縹緲孤鴻影(표묘고홍영) : 짝 잃은 기러기 그림자만 아득하구나
驚起卻回頭(경기각회두) : 놀라 일어나(잠 깨어) 고개 돌려봐도
有恨無人省(유한무인성) : 나의 처지를 살펴줄 사람 아무도 없음이 한스럽구나
揀盡寒枝不言棲(간진한지불언서) : 차가운(겨울) 가지 고르더니 깃들지 않으아
寂寞沙洲泠(적막사주령) : 적막한 모랫톱은 싸늘하기만 하구나
송나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소동파(소식) 가 호주(湖州: 절강성) 의 지주(知州: 절도사, 자사)로
있을때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이 문자옥으로 모함당해 1080년 부터 6년간 황주로 좌천(유배)
당했을 때 지은 시인데 당시 급여가 적었던지 성 동쪽의 언덕에 있는 땅을 개간하여 생계에
보태었으니 이 성 동쪽의 언덕(城东边坡) 이란 말에서 그의 호“동파(东坡)” 가 유래한다고 합니다.
몇년 전에 전남에서 신안유물선이 발견되어 원나라 시대 도자기등 4,500점을 건져 올렸는 데....
이 진품들은 송(宋) 나라 때 생긴 징더전요(景德鎭窯 경덕진요) 에서 생산되어 영파를 출발
해 일본 후쿠오카로 가던 물건들로 청자는 송나라 시대에 완성된 세계적인 첨단 기술이었습니다.
중국은 비단과 차(茶)에 도자기 제조법 외에도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과 종이 등 4대 발명품을
서양에 전했으니, 칼 마르크스는 이 발명품들이 유럽에 전해져 근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태동 할수 있었다고 격찬했었는데, 명나라 이후 쇄국주의로 쇠락했지만 몽골족의 침공만
없었으면 송나에서 유럽에 앞서 산업혁명이 일어날수도 있었을 것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13년 시진핑 주석이 등장한 이후 그는 “中國夢(중국몽)” 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는데 중국이
역사상 가장 강했던 때는 한(漢)나라 시대며 문화적으로 융성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했던
때는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서 로마제국 까지 교역한 당(唐)나라 시대고 바다를 제패한
것은 명나라 영락제 시대니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 은 당시의 위상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란 슬로건은 아무래도 상투적인 표현인지라 호소력이 약하니
이를 "중국몽(中國夢)" 이란 말로 함축미 있게 표현했으니 가히 절묘한 표현인데, 중국몽을
실현하는 국가경영 전략을 일대일로 (一带一路)라 하니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최강대국 중국의 위상을 되찾자는 것이니 아시아인프라 투자은행 (AIIB) 도 그 일환 입니다.
중화민족이 세운 나라는 상나라나 주나라는 너무 오래전의 왕조라 제쳐두고 그후 4개 왕조 중에 시진핑
은 한나라, 당나라, 명나라를 거론하면서 유독 송나라는 제외했으니, 아마도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고
문치주의에 흘러 군사력이 약했으니 미국과의 대결을 생각하면서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송나라는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의 침공을 받아 중원을 뺏기고는 양자강 이남으로
달아나 남송으로 불렸고, 결국 몽골족에게 망해 오랑캐에게 나라를 뺏겼으니... 강대한 나라는
아닌지라 현대 중국인들로서는 자부심은 덜할지 모르지만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송나라는 수도 카이펑(개봉) 과 양자강 남쪽 양주, 항주, 영파, 광주등 유례없는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선진국으로, 중국 천하관을 내세워 이웃나라를 핍박하지 않았고 또 요나라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그 때문에 고려에서 “외왕내제”가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북송(北宋)은 960년 오대십국시대 다섯 번째 나라인 후주(後周) 의 신하로 무신(武臣)이었던
조광윤(趙匡胤) 이 군신들의 추대로 후주의 황제인 공제 시종훈으로 부터 선양(宣揚)
을 받아 건국한 중국의 한족 (漢族) 왕조이며 수도는 화북 지방 하남성의 개봉(카이펑) 입니다.
조광윤이 송주(宋州)에서 절도사로 부임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대송, 연호를 '건륭' 으로 정했는데
북송은 960 ~ 1127년까지 존속한 167년 역사를 말하나, 남송도 1127 ~1279년까지 152년을
더 존속했으므로.... 송(宋)이라고 하면 보통은 960~1279년까지 총 319년간 존속했다고 생각합니다.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육조시대 유송(劉宋) 이래로 계속되던 전 황제에게 선양을 받고
는 돌변해서 그 일족을 멸족하던 잔인하고 배은망덕한 관행을 중지하고, 후주(後周)
의 황족인 시(柴)씨 일족을 보전하며 우대하는 등 인도적인 방식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시(柴)씨 가문에 대한 은전은 태조 조광윤의 “석각유훈” 에 따라 계속 유지됐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비장했던 애산 해전으로 남송이 멸망하는 날까지 시(柴)씨가 송 황실과 마지막을 함께 했으니....
“석각유훈” 에 더해 조광윤이 시씨 가문을 우대하겠다는 증거로 내려준 것이 바로 단서철권 입니다.
중국의 왕조에서 모반하거나 또는 새 왕조를 세우면 대개는 전조의 황족을 몰살시켰으며, 우리나라도
이성계의 조선은 고려 왕씨 왕우(王瑀) 를 신우(辛瑀) 라고 폄훼하고 왕씨들을 배에 태워 몰살시키니
왕(王)씨들이 전(全) 씨나 옥(玉)씨로 개명해야 했던 것을 보면 얼나나 너그러운 처사인지 알만 합니다.
애초에 후주 자체가 단명 왕조이기도 했지만, 후한의 유지원 - 후주 태조 곽위 - 후주
세종 시영 처럼 찬탈과 양자 상속을 거듭해 대를 이어왔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광윤은 후주의 태조 곽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계승을 한 셈이기는 합니다.
“토사구팽 兔死狗烹”..... 얼핏 비정한 것 같아도 나라가 세워지면 개국 공신들이 위세를 부리고
나아가 왕조를 찬탈하는 경우가 많으니 한나라와 명나라는 공신들을 거의 다 죽였,. 조선의
태종 이방원도 처가의 도움으로 집권했음에도 장인과 처남 넷등 다섯을 전부 다 죽이고 또
장모는 노비로 만들어 그 덕분에 후임인 세종은 편안하게 통치했으니 역사에 흔히 있는 일입니다.
더욱 5대 10국에서 5대 왕조들이 몇십년 가지도 못하고 단명한 것은 왕위 찬탈 역모였으니
송나라 태조도 공신들이 걱정이 되지 않을수 없었지만... 그는 공신들을 죽이는 대신에
후한의 광무제 처럼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빌려 넌지시 암시해 벼슬과 병권을 내놓게
하고, 그 대신에 토지와 집과 돈에 미녀들을 여럿 선사해서 피를 보지않고 해결 했습니다.
태조 조광윤은 장수 시절부터 거란족을 물리치고 후주(後周)의 여러 전쟁을 책임진 1등
공신이었으며 이후 10국의 잔존 나라들인 사천성의 후촉, 남평, 광주의 남한에 이어
975년 남부 최대의 국가인 남당을 멸망시켜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자기 대에
통일을 완수하지는 못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북쪽의 북한과 남쪽의 오월 뿐이었습니다.
제2대 황제는 조광윤의 동생 태종 조광의로 사서에 따르면, 태조 조광윤이 조광의에게 선양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조광의가 방에 들어간후 조광윤이 급사하고 다음 황제가 되었다는 촉영부성의
일화는 황위 승계 과정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고 추정할수 있겠는데, 혹은 촉영부성이
조광의를 비난하는 것이란 말도 있으며 태종은 오월과 북한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완수합니다.
그러나 통일 후 송나라는 약한 군사력에 발목을 잡히는데, 태조 조광윤과 태종 조광의 시절에는
통일전쟁을 완수한 고참병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많아 군사력이 우수했으나 후대에서는 2차에
걸친 대요(遼 거란) 북벌이 실패하고 요나라와의 일전에서 대패를 거듭해 군사력을 소진했습니다.
송의 군사적 약체화를 간파한 요나라는 1004년에 200,000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해 성종
야율융서가 친정해 파죽지세로 전주까지 밀고 내려오니..... 송 조정은 대군의 남하에
기겁하여 고려가 왜구 때문에 개성을 버리고 한성이나 철원으로 천도하려고 했듯이
금릉(난징) 이나 성도(청두) 로 천도해야 한다는 천도론이 대세가 될 지경까지 몰렸습니다.
당시 황제이던 태종의 아들 진종은 심성이 여린 군주로 유명하나, 황후로 부터 격려를
받은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처럼 구준의 진언을 받아들여
전주에 친정하고 마침내 요 성종의 기세를 꺾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전황이
소강 상태가 되자, 송과 요는 전연의 맹(澶淵之盟) 을 맺게 되었고 요군은 철퇴합니다.
동로마제국에서 532년 전차경주를 보던 자들이 당파를 지어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
거리를 장악한 군중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불지르고, 관리들을 살해하고, 하기야
소피아 성당을 불살랐으며 황궁으로 몰려들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려 했지만 서커스 배우 출신(천민)인 테오도라 황후는 "황제는 황제답게
떳떳하게 죽어야 합니다." 라고 격려하니 벨리사리우스 등 장군들을 불러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전연의 맹(澶淵之盟) 은 1004년에 송나라와 거란(요나라)이 전연(澶淵, 허난성 푸양시)에서
맺은 외교협정인데..... 요나라 성종은 동으로 만주에 자리잡은 발해의 후신 정안국을
무너뜨리고 여진 부족들을 제압했으며 서쪽으로는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을 복속
시키고 서역의 제세력들, 당항과 강족들로 부터 조공을 받는등 국력이 급속히 성장합니다.
또한 요는 993년에는 고려와 사대 관계를 맺는데 성공하여 요 왕조는 배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지라 더 이상 거칠것이 없었으니, 2차에 걸친 북벌이 실패해 군사력이 약화된
북송에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고 999년부터 1003년까지 총 3차례에 걸친 침공이
성공하자 자신감이 생긴 성종은 모후 예지 황후와 함께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합니다.
거란군은 초기에 승세를 잡아 하북의 주요 거점을 빠르게 함락하고 개봉이 눈에 보이는 전주
까지 진군했으니 기세를 탄 거란군이 전주를 함락하고 얼어붙은 황하를 도강해 개봉을
포위할듯 했지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구준이 송진종에게 친정을 건의하여 금군이
진종과 함께 북상하자 전주의 방어군은 사기가 올랐고 거란군은 예상 밖의 항전에 당황합니다.
게다가 거란의 명장인 소달름(蕭撻凜)이 정찰 중에 송의 장교인 장괴가 발사한 쇠뇌에
맞아 전사한 탓에 요군 전체가 충격을 받아 급격히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런 이유로 전황은 교착되었고, 이에 더해 하북의 송군이 재정비에 성공해서는
요군의 후방으로 진군하려고 하자 요군 수뇌부는 "진퇴양난" 난처한 상황에 빠집니다.
하지만 송 진종은 신하 구준의 건의로 출진하기는 했지만 전투 의지가 강하지 않았고,
요나라의 실권자인 예지황후 역시 송과의 분쟁이 완만히 해결되기를 바랐으며
송군은20만이나 되는 기마 군단이 수도 앞에 버티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요군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퇴로가 끊겨 전멸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양국의 이해관계는 적당히 맞아 떨어졌고, 남은 것은 협의하는 일뿐이었으니 요의 비룡사
한기(韓杞) 와 송의 우반전직 조리용(曹利用) 이 수차에 걸쳐 교섭하여 1004년에 전연의 맹약을
맺는데 맹약은 송나라가 요에 30만의 세폐를 제공하는 것과 양국이 형제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1. 송은 요에게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매년 세폐로 보낼 것.
2. 국경선은 현재 상태로 유지할 것.
3. 송, 요의 황제는 형제 관계를 맺는다. 송 진종이 요 성종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요 성종이 동생이나, 후대에는 나이로 따져서 형과 동생을 정한다.
당시 송은 연운 16주 중 막주와 영주, 즉 요에서 관남 10현이라 부르던 지역을 가지고
있었으니 거란은 관남을 수복하여 연운 16주 전체를 차지하려 했고 송은 관남을
필두로 연운 16주 전체를 되찾으려고 했으니, 이에 Christian Schwarz-Schilling
은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냥이 관남에서 거둘수 있는 토지세를 대신한 것이라 말합니다.
위 3항에 형제 호칭에 대해서는 송측 기록에는 요 성종이 송 진종을 형으로 부른다고 서술했으나
요사에서는 송 진종이 요의 예지황후를 숙모라 부른다고 기록했으니.... 카데시전투 후에
맺은 이집트와 히타이트 평화협정 처럼..... 양측 모두 자신들에게 유리한대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전연의 맹을 체결한 뒤부터 송 - 요 관계는 기본적으로 평화로웠지만, 국지전이나 영토분쟁이 벌어져서
송이 요의 군사적 압력을 받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요 흥종(재위 1031~1055) 이 송이
서하와의 전쟁으로 정신 없는 것을 노려서는 소혜진으로 하여금 송의 국경을 침범하도록 명한 일입니다.
이에 송은 두 나라와 전쟁을 할수는 없으니 요와 재협상하여 30만냥의 세폐를 50만냥으로
증액하는 조건으로 전연의 맹약을 갱신했는데 송의 입장에서 50만냥은 송의 예산에
비해 아주 적은 돈이고 요와 전쟁을 벌여 그 전쟁 비용을 감당하는 것과 비교하면
훨씬 저렴했으나, 재정 지출이 늘어나는 것이기에 처음에는 세폐 증액은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하와의 전쟁이 급하고 요의 대군이 남하한 상황이라 요 왕조가 내건 일부 요구 사항은
거부하고 세폐 증액과 세폐의 명칭 변경과 같은 요구는 수용하는 조건으로 맹약을 갱신
했으며, 이후 송은 25만 5천냥의 세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서하와 강화하였고
뒷날 금과 해상의 맹을 체결할 때에도 요에 주던 세폐를 금에게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요 왕조는 이러한 군사적 압박, 허세를 부려 송 신종 연간까지 송 왕조로 부터 영토를 할양받고
송의 정세를 살피는 등의 이득을 누렸는데.... 송 역시 요가 허세를 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피해가 크다고 볼수없고 요가 진실로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적당히 양보했습니다.
요와 서하에 주는 75만 5천냥의 세폐가 송에게는 재정압박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은, 송은 국경무역을 통해
세폐로 인해 발생하는 재정 지출의 상당 부분을 회수했고 오히려 국경무역을 통해 벌어들이는 상세와
관세가 세폐를 상회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을 정도라 세폐가 문자 그대로의 지출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송은 이미 송 인종 연간에 1년 세입이 6000만냥이 넘었고 북송 말기가 되면
세입이 1억냥에 가까웠는데 서하와의 전쟁으로 재정의 80% 이상을 군비에 쏟고, 그러고도 이기지
못한 송 입장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 75만 5천냥을 지불하는 것은 엄청나게 저렴한 것이었습니다.
송 신종 시기에 재정에 문제가 생기기는 했어도 이것은 세폐 말고도 군비, 관료제 비용, 황실 지출 비용
등이 늘어난 것도 있어 세폐만은 아니며, 또한 세폐는 전쟁 억제재로도 기능했으니 요는 30만냥의
세폐를 국가 발전과 세금 감면에 투입했는데, 송과 전쟁이 벌어지면 재정 누수와 혼란이 벌어지고
인민이 세금 인상과 전쟁세의 압박을 받게 되어 자칫 잘못하다간 대규모 민란이 터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는 세폐의 중요함을 알아서 송의 사신이 방문하면 지방관들이 영접하고 공손히 예를 취하도록
지시하고 송의 사신단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곳에 백성들이 사신단에게 돈을 받지 못하도록 했고 이를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참하도록 했는데, 군사적으로 송을 압박해 영토나 세폐의 증액, 정탐, 명분상에
서의 이득을 취하기는 했으나, 세폐가 끊기는 것은 바라지 않아 실제로 전쟁을 일으킬 의사는 없었습니다.
서하는 송나라에서 세폐를 받아 챙기며 잘 지내다가 호전적인 군주인 이원호가 왕으로
등극한 뒤부터 수년에 걸쳐 송과 전쟁을 벌였으니.... 이원호는 불과 10만 병력으로
10배인 100만에 달하는 송군을 몰아붙였으니 대단한 전공을 발휘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으로 영토가 피폐해지고 아버지 이원호가 받던 14만냥의 세사(歲賜)
와 송과의 무역이 끊겨서 약탈한 물자로도 국가를 부양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
했으니 결국 송과 서하는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화를 체결하고 이원호
는 아버지가 받던 14만냥의 세사를 25만 5천냥의 세폐로 증액하는데 성공 했습니다.
송나라가 북방민족과 싸움에서 고전한 이유는 3가지로 보는데, 첫째는 이전 왕조들은 만리장성에서
방어했으나 석경당이 거란에 "연운 16주" 를 바친 때문에 요나라는 만리장성 이남에서 세력을
기를수 있었고..... 두 번째는 당나라에서 절도사의 폐해로 문치주의를 택한 결과 장수와 병사가
분리됐으며 세 번째는 거란이나 서하가 부족을 통합해 이미 강대한 국가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연의 맹”으로 평화를 이루기는 했지만 요와 서하 같은 군사 강국들이 장성 이남에 진출해 장성
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송은 국가 안보를 위해 국경과 수도권에 대군을 상시 주둔시켜야
했으니 문치주의로 인해 유능한 장교단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도 있어서 병력 증강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송나라는 기본적으로 문치주의 국가라 기병으로 구성돼 강병을 자랑하는 요와 서하와 비교
하면 병력의 질이 좋지를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물론 이들 요와 서하도 기본적인 국력
과 인구면에서 압도적인 송나라를 멸망시킬 수는 없어서 결국에는 3자 간의 균형이 이루어졌습니다.
고려의 강감찬이나 윤관처럼 심괄(沈括)은 송나라 학자로 박학다식한 통섭 학자이니 몽계
필담(夢溪筆談)과 의학서적인“양방(良方)”등 35권의 저서를 저술했는데 수학자이자
공학자, 발명가, 천문학자, 기상학자, 지질학자, 생물학자, 약학자, 시인, 장군,
외교관, 수력학자, 정치가였으니 자는 존중(存中)이요, 호는 몽계장인(夢溪丈人)이었습니다.
심괄은 항주 전당현 출생으로 아버지는 지방관리였던 심주(沈周)였고 어머니는 허씨로 1054년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왕안석이 변법(變法)운동을 일으켜 개혁을 주도했을 때재정과
경제를 담당하는 권삼사사(權三司使) 였으며 1074년 병기공장을 관리하는 판군기감(判軍
器監)으로 있었을때 천문관련 혼의, 부루(浮漏), 영표(影表)를 다시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1075년 송과 요나라가 분쟁에 말려들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국경선을 확정하는 담판에 참가해
수십권에 달하는 국경선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직접 현지 고찰을 진행했으니 요나라와 6차례
담판에서 송나라는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고 '봉원력(奉元曆)' 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1080년
부연로경락안무사 (延路經略安撫使) 로 임명되자 군비를 정돈해서 서하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전연의 맹으로 이뤄낸 평화 덕분에 송과 요는 사절 교환과 무역 등을 활발히 벌였고 송 뿐만
아니라 요 역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으니..... 이 평화는
여요전쟁과도 엮여 한바탕의 소란이 일어난 뒤부터 동북아는 100여년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 평화는 1125년에 송이 금과 손잡고 쇠퇴하던 요를 협공해 요를 멸망시킴으로써 깨지게 되며...
그리고 금을 끌어들여 연운 16주 전체를 회복하려던 송은 금과의 관계 악화와 잘못된 정책
으로 인해 “정강의 변” 이 일어나 개봉이 함락당하고 회수 이남으로 남천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조약을 체결하기 직전의 송은 분위기가 좋았으니 황제가 금군을 이끌고 친정해 분위기를 전환시키
는데 성공하고 국경 방위군으로 하여금 요군의 퇴로를 끊으려 했으며 또한 요군총사령관인
소달람을 저격해 전사시켰으니 결전을 해볼만한 상황이었지만 별다른 피해 없이 황하까지 밀고
내려온 요나라 20만 기마 군단은 아무래도 부담이 되는 상대였기에 송과 요는 강화를 맺은 것입니다.
전연의 맹(澶淵之盟) 의 주요 조항은 송과 요는 형제 관계가 되며 송은 요에게 비단 20만필
과 은 10만냥을 세폐로 지급한다는 것으로 요가 강력히 요구하는 영토 할양 대신에
재화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구매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이미 후진의
석경당이 만리장성 이남의“연운(燕雲) 16주”를 거란에 바쳤으니 더 줄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꾸준히 성장해 나가던 송(宋)에 새로운 큰 적국이 생겼으니 당나라를 괴롭혔던 토번
처럼 이번에는 탕구트계 민족이 세운 서하(西夏) 였는데..... 원래 송과 서하는 여러차례
충돌하긴 했지만, 온건파인 서평왕 이덕명의 재위 기간 동안에 양국은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서하(西夏)에서 이원호가 즉위한 뒤부터 상황이 반전해 송은 호수천 전투를
비롯해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최고위급 인사인 범중엄과
한기를 투입해 소모전과 지연전, 청야 전술을 펼친 끝에 간신히 전선을 유지했습니다.
반대로 서하는 고작 10만의 병력으로 60만 이상을 전선에 투입한 송을 몰아붙였지만,
아버지 이덕명이 송나라에서 받던 세폐와 조공 무역이 끊겨 수많은 도시를 약탈
하고도 물자 부족에 허덕이는 지경에 이르니 송의 인종과 서하의 경종 이원호는
불편한 타협을 받아들여 세폐와 조공무역을 부활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송의 군사적 약세는 서희등 최고 지휘관 대부분이 군대를 전혀 모르는 문관 출신인데다가
작전에서 휘하 장군들의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 하는 일이 많아 오로벌하 전투
등에서 패전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문신이 주도권을 쥔 탓에 무신들을
과거시험에 합격해 진사가 되지 못한 무식한 자들이라고 깔본 탓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문제로 인해 계속 병력을 증강해 군사비 문제가 대두
하고, 서하에 세폐 지급으로 평화가 유지됨에 따라 전투 경험이 부족한 병력이 양산되어 보병
위주 송군은 기병으로 구성되어 강병을 자랑하는 요와 서하에 비해 크게 부족한 약군으로 전락합니다.
송나라 내정에서 가장 큰 사건은 1069년부터 1074년까지 추진된 “왕안석의 변법” 이니....
보통은 “신법(新法)”으로 불리는데 국가 자본을 활용하여 상품의 생산과 유통을 촉진
하자는 주장으로 그렇게 경제적 확대가 이뤄지면 세율을 변화시키지 않더라도 국고
수입을 증가시킬수 있다는 것이지만 시대를 무려 천년이나 앞서나갔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왕안석(1021~1086)은 강서성(江西省) 임천(臨川)에서 군 판관인 부모로 부터 태어났으니 어려서
부터 총명하기로 근동에 소문이 자자했던 그는 스물두살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그 뒤 십여년
동안 지방행정의 직무에 종사했으니 뜻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와 교류하지 못함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는 백성이 겪는 고통과 사회의 심각한 구조적 모순을 몸소 직시하고 그 개혁 방안을 찾기위해
노력했으니, 재상 문언박(文彦博)이 그를 인종(仁宗) 황제에게 천거했지만, 왕안석은 등급을
뛰어넘는 기풍을 만들수 없다며 고사하였고, 구양수(歐陽修)가 간관으로 천거했을 때에는
조모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고사하자 구양수는 집에서 봉양할수 있도록 지방 판관에 임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변법(變法) 사상을 정리하여 인종때 만자에 이르는‘상인종황제언사서(上仁宗
皇帝言事書)’ 를 황제에게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조정에서 그에게
여러차례에 걸쳐 벼슬을 내렸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는데 사대부들은 그가 공명(功名)
에 뜻이 없고 벼슬에 멀리한다고 생각하며 그와 교류하지 못함을 아쉽게 여겼습니다.
인종이 죽고 신종(神宗) 은 평소부터 왕안석의 이름을 많이 듣고 그를 숭모하고 있었던 터라
즉위하자마자 왕안석을 청해 한림학사 겸 시강(侍講)으로 모셨으며 왕안석은 곧 참지정사
(參知政事)와 재상에 임명되면서‘신학(新學)’을 주장하고 변법을 시행했으니 1069년
부터 균수법, 시역법, 면행법, 청묘법, 보갑법왕안석의‘신법(新法)’이 시행되기 시작합니다.
고급관료와 대토지 소유 지주들이 마음대로 토지를 겸병하는 바람에 소유한 토지는 인종시대 70~80%
를 점하게 되었고, 관리의 수는 갈수록 급증하여 건국후 100년도 안되어 두배로 증가했으며 이들은
세금과 병역을 면제받고, 반면 백성들의 세금은 갈수록 많아졌으니 요나라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군비는 엄청나게 소요되어..... 급기야 군비가 재정 수입의 6분의 5를 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특히 송나라는 병사의 수가 너무 많았으니 80만 명의 금군(禁軍: 정규군) 에 다시 60만명의
상군(廂軍:지방군)이 더해져 총 140만명의 군대를 유지했는데 이 규모는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으로, 때문에 엄청난 재정 부담이 발생했고 여기에 송나라는 토지 겸병과
관리들의 상업경영을 금지하지 않았으니 빈부격차는 갈수록 벌어졌고 재정은 고갈되었습니다.
왕안석은 부국강병이란 반드시 법률로써 그 실현을 보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니 중국에서는 한나라
동중서(董仲舒)가 ‘춘추 판결’ 을 제기한 이후 공자(孔子)가 지은 ‘춘추(春秋)’의 어록이 국가의
법률에 우선하는 효력을 발휘해왔는데 하지만 왕안석은 ‘춘추’ 를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판결은 마땅히 국가가 제정한 법률에 의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 예를 들어, 공자는
부모의 복수를 할수 있도록 했는데, 왕안석은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법이 있는 것이며
사사로이 복수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인식하였는데 즉, 법률의 해석이나 사건의
판결에 있어 그는 ‘춘추’ 에 구애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사회의 안정에 목표를 두고 있었습니다.
유가들은 인치(人治)를 중시하고 법치를 경시하였으며 법가들은 법치를 중시하고 인치를 경시했으나,
왕안석은 인치와 법치를 모두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으니 그는 단지 좋은 법률만으로는 국가를 잘
다스리기에 부족하며, 반드시 좋은 관리가 존재하여 법률의 집행을 관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왕안석은 황제에게 ‘풍속을 바꾸고 법도를 세우는’ 개혁정책을 건의해 마침내
부국강병을 기치로 내건 변법이 시행되었으며 그리고 이 변법, 신법
의 가장 큰 목표는 대관료지주의 독점 과 토지겸병을 억제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중소 상인에 대해서는 시역법(市易法)으로써 농민에 대해서는 청묘법(靑苗法)으로써,
국가가 장기 저리로 자금을 공급하였는데 대상인과 지주에게 부가 편중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또 정부가 지방의 물자를 사들여 다른 지방에 팔아 유통과 가격
의 안정을 꾀하는 균수법(均輸法)을 시행하였으니..... 한마디로 정부가 시장을 대신한
것으로 탁월한 계획경제학자였던 왕안석은 변법에 의해 중앙재정 확대를 도모했던 것입니다.
왕안석의 신법은 중앙정부가 이익을 보도록 만든 고급관료 및 대상인 그리고 대지주의
경제적 특권을 제한했으며, 특히 백성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약탈과 착취를 억제
하였으니 그리하여 이 개혁정책은 수구파의 완강한 저항과 반대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사실 왕안석의 개혁정책은 그 기반이 오직 황제의 신임 이외에 다른 보장이 전혀 존재
하지 않는 허약한 것이었고 더욱이 왕안석이 믿고 개혁정책의 추진을
맡겼던 인물들이 대부분 무능하고 심지어 사리사욕에 빠져 일을 그르치기도 하였습니다.
끝까지 왕안석의 개혁정책에 있어 외롭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신종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광(司馬光)
을 위시한 수구파의 재집권으로 이어졌고, 그리하여 신법은 하루아침에 모조리 폐기되기에 이르렀
으며, 왕안석의 신법은 거의 천년이 지난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