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쇼프팀#1
(신16:18-17:13)
1. 주제
“정의를 정의롭게 추구하라”
2. 성문마다 재판관을 세우라
(신 16: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각 성문에 שֹׁפְטִים(쇼프팀, 재판관들)과 관리들을 세워야 했습니다.
성문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며 중요한 판단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거룩한 공동체가 단순히 좋은 마음만으로 유지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에 따른 판단과 질서가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삶에도 ‘성문’이 있습니다.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마음의 문입니다.
오늘 나의 성문에는 누가 재판관으로 앉아 있습니까?
내 감정입니까?
사람들의 평가입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말씀입니까?
3. 판단을 굽게 하지 말라
(신 16:19)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뇌물을 받지 말라…”
재판관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조건은 "공정함"입니다.
사람에 따라 기준이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잘못을 작게 보고,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작은 잘못을 크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뿐 아니라 자신을 판단할 때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면서 자신에게는 수많은 이유를 붙이기 쉽습니다.
토라는 우리의 마음속 저울까지도 바르게 세우라고 요구합니다.
4. “공의를 추구하라"
오늘 본문의 중심 말씀입니다.
צֶדֶק צֶדֶק תִּרְדֹּף
체데크 체데크 티르도프
“공의, 공의를 추구하라.”(신 16:20)
צֶדֶק(체데크)는 공의, 정의, 올바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토라는 체데크를 "두 번" 반복합니다.
그리고 תִּרְדֹּף(티르도프)는 단순히 ‘좋게 여기다’가 아니라 "추구하다, 뒤쫓다"라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공의는 가만히 있어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때로는 대가를 치르면서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토라는 “공의를 생각하라”가 아니라
“공의를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5. 공의와 예배는 분리될 수 없다
(신 16:21–17:1) 공의에 관한 말씀 바로 다음에 갑자기 아세라와 우상숭배, 흠 있는 제물에 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삶의 공의와 예배의 거룩함을 연결"하고 계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공정하면서 여호와께 아름다운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반대로 여호와의 말씀을 떠나면서 인간 사이에 진정한 공의와 정의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바른 예배는 바른 삶으로 나타나고,
바른 삶의 기준은 여호와에게서 나옵니다.
6. 우상숭배를 공동체 가운데 방치하지 말라
(신 17:2–7) 이스라엘 가운데 누군가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다른 신이나 해와 달과 하늘의 천체를 섬겼다는 소식이 들리면 즉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먼저 말합니다.
“너는 자세히 조사할지니…”
여기에서 중요한 원리가 나타납니다.
거룩함을 지켜야 하지만 성급하게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소문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중대한 판결을 내리지도 않습니다.
“두 사람의 증언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토라의 공의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엄격함과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는 신중함입니다.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온전한 체데크가 되기 어렵습니다.
7. 판단하기 어려울 때 혼자 결정하지 말라
(신 17:8–11) 어떤 사건은 너무 복잡해서 개인이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럴 때 토라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제사장과 당시의 재판관에게 묻도록 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공동체 원리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이지만 언약의 삶은 개인주의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느낀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들었다.”
개인의 확신만으로 모든 판단이 끝나서는 안 됩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말씀과 공동체 안에서 함께 분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8. 권위에 순종하는 것도 공동체의 거룩함이다
(신 17:12–13) 마지막에는 판결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에 대한 매우 엄중한 말씀이 나옵니다.
왜 이렇게 엄격할까요?
한 사람의 고집이 공동체 전체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라는 "자유만큼 책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공동체에는 판단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그 판단을 존중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물론 권위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주신 토라의 기준 아래 있는 권위"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언약 공동체에는
말씀 → 판단 → 질서 → 순종이라는 흐름이 필요합니다.
9. 오늘 나의 마음에도 재판관을 세우라
쇼프팀은 먼 옛날 이스라엘의 사법제도만을 말하는 본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매일 수많은 판단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누군가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났을 때,
내게 손해가 생겼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잘못했을 때,
그 순간 내 마음의 성문에는 누가 앉아 있습니까?
감정이 재판관이 되면 판단은 감정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익이 재판관이 되면 판단은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입니다.
사람이 재판관이 되면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나 토라가 재판관이 되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무엇을 옳다고 말씀하시는가?”를 묻게 됩니다.
10. 오늘의 비유
한 사람이 집에 아주 정확한 저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장에 갈 때마다 상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저울을 정확하게 사용하십시오. 한 치라도 속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저울을 살펴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울의 한쪽 접시 밑에 아주 작은 추가 붙어 있었습니다.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이것은 무엇이에요?”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내가 물건을 팔 때 조금 유리하도록 붙여 놓은 거란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저울은 바로잡으면서 아버지의 저울은 바로잡지 않으시는 거네요.”
오늘 토라는 우리에게 먼저 내 저울을 꺼내 보라고 말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과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 같은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순종을 나도 여호와 앞에서 행하고 있는가?
그래서 צֶדֶק צֶדֶק — ‘공의, 공의’라고 두 번 외치는 말씀을 이렇게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공의와
나 자신에게 적용하는 공의가 달라서는 안 된다.
공의를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공의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צֶדֶק צֶדֶק תִּרְדֹּף
체데크 체데크 티르도프.
공의를 알고만 있지 말라.
공의를 뒤쫓아가라.
11. 기도
여호와여,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는 눈보다 먼저 제 마음을 살피는 눈을 주옵소서. 사람과 상황에 따라 기준을 바꾸지 않게 하시고, 제게 유리한 판단보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공의를 선택하게 하소서. 오늘도 말씀 앞에 제 마음의 저울을 바로 세우며 체데크 체데크 티르도프, 공의를 끝까지 추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슈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