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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3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제1독서 : 2테살 2,1-3ㄱ.14-17
복 음 : 마태 23,23-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전주시 노송동 주민 센터 부근에는 성탄절 전후로 천사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천사는 주민 센터에 전화를 걸어 현금과 돼지 저금통이 든
종이 상자를 놓아둔 위치를 알려주지요. 그 일을 벌써 22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0년 4월, 초등학생이 58만 4천 원이 든 돼지 저금통을
주민 센터 민원실에 맡긴 것을 시작으로,
작년 12월까지 그 금액은 자그마치 8억 872만 원에 이릅니다.
전화 거는 사람이 다양한 것을 보면 온 가족이 함께하는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물론 언론에서도 이들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한사코 몸을 숨겼고,
주민 센터 측도 그 의사를 존중해서 신원확인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신원 공개를 거부하고 큰돈을 기부했던 이 가정의 모습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기부금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고, 이를 통해 더 많은 기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세상에 드러내면서 다른 사람의 기부를 더 많이 이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면적 합리성보다 그저 실천하는 사랑 자체에만 집중하고 계셨습니다.
기왕이면 보이기 위한 사랑을 하는 우리 현대인의 마음을 흔드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향한 ‘불행 선언’입니다.
특별히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십일조는 본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레위족과
불쌍한 과부, 고아, 외국에서 귀화한 이민족들을 돕기 위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과 같은 하찮은 푸성귀를 바치면서
십일조를 바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작 십일조의 근본정신인 사랑은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작은 율법 조항을 지킨다고 자찬하면서도
중대한 하느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기에 불행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겉치레에만 신경 쓰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
지금의 우리 모습은 아닐까요?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시고도 ‘불행 선언’을 선포하시지는 않을까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데 얼마나 성실했는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그마한 실천만으로 모든 사랑을 실천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시작은 마음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 자체만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동체의 축복
-위로, 격려, 치유, 구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수도회 명칭이 좋습니다.
수도회 덕분에 한국 땅에 살면서도 난생처음
청주교구연수원에서 피정지도를 갖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일기 쓰듯 하는 강론이요, 70대 중반에 들어서니 강론 쓰기도 많이 자유로워졌습니다.
제 수도명이 프란치스코입니다.
천주교 입교 전 개신교 다닐 때부터 좋아하고 알게 된 성인은 프란치스코가 유일했습니다.
현임 교황도 프란치스코입니다.
성 베네딕도가 산山같은 분이라면 성 프란치스코는 강江같은 분으로
서로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산과 강”은 베네딕도회 영성이요, 저는 자주 다음 짧은 자작시를 읊어보곤 합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은 강, 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밖으로는 언제나 거기 그 자리, 한결같은 정주의 산,
안으로는 끊임없이, 한결같이 맑게 흐르는 강,
제 신원에 알맞게도 저는 성 베네딕도회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입니다.
어제처럼 여러 단상들로 시작되는 강론입니다.
잠시 공동체를 떠나니 공동체의 소중함을 알겠습니다.
“공동체는 선교의 뿌리다.”
“관상과 선교는 하나다.”
새삼스럽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공동체 중심에 살아 계신 주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릴수록
왕성한 생명력에 활발한 선교활동입니다.
공동체에 뿌리내리지 못할 때 개인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공동체의 축복입니다.
공동체에서 상처도 받지만, 위로와 격려, 치유와 구원의 축복이 백배는 많습니다.
제가 운전을 못 하지만, 공동체 형제의 도움으로
피정 지도차 어제 먼 길의 여기에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어제 여기 수도 형제들의 저녁 성무일도 노래소리가 아름다워
공동체 원장과 주고받은 메시지에 웃었습니다.
“잠시 방문했던 두 형제님 키 큰 분과 키 작은 분, 이름이 무엇인지요?
모습이 너무 순수하고 착해 보여서요.”
“신동준 사도 요한, 제임스입니다. 둘 다 사제 형제입니다.”
“수도공동체 형제들의 저녁 성무일도 노래소리가 참 젊고 힘차고 아름답네요!
평균 연봉이 얼마나 됩니까?”
독수리 타법을 못 벗어나다 보니 ‘연령’을 ‘연봉’으로 쓰여 있음을
후에야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연봉이요?”
“평균 나이요? 연령을 연봉이라 잘못 썼네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네요.”
“아, 네. 40대 중후반 될 듯합니다.”
영육靈肉으로 젊고 힘차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형제들의 공동체임을 깨달아 알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공동체의 손발이 되어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는
원장 형제님에게도 신선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관상과 선교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존재이유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믿는 수도형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안으로는 제자요 밖으로는 사도이고,
안으로는 수도자요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관상적 삶 자체가 활동의 선교가 됩니다.
여기 성당 앞, 오른편 벽에 배치된 글자의 조화가 기막히게 아름다워 사진에 담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상징하는 듯, 흐르는 강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위 이사야서 성서 말씀이 어제처럼 아름답게 느껴지기는 처음입니다.
바로 관상과 선교가 하나 된, 아름다운 삶을 상징합니다.
공동체의 토양에 뿌리 내린 선교입니다. 공동체는 선교의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이래서 찬미와 감사의 공동 시편 전례 기도가 미사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살아갈수록 공동체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도 깊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감사는 그대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감사로 직결됩니다.
제 집무실 게시판에 오랫동안 써 붙인 고백 글이 생각납니다.
“여기 내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공동체는 저에겐 최고의 스승입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형제들에게 배울 것은 끝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섬김의 사랑을 배우게 되니 저절로 겸손한 삶이 됩니다.
공동체 형제들의 삶을 보면서 이뤄지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이런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께 깊이 뿌리내릴수록 주님을 닮은,
아름다운 관상가와 선교사로서의 삶이겠습니다.
오늘 말씀 중 벼락같은 깨달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주님의 호된 질책을 받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런 보고 배울 좋은 공동체가 없었습니다.
권위주의의 교만에 젖다 보니 완전히 공동체와 유리된, 공동체에 뿌리내리지 못한,
물에 둥둥 떠다니는 기름처럼 부평초浮萍草같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지에 눈이 멀어 본말전도本末顚倒,
분별력 상실의 위선과 허영의 괴물 같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눈먼 인도자들아!”
그러다 보니 세칙에는 충실하였으나 본질적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에는 소홀하여
흡사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우스꽝스런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속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지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저절로 안과 밖이 같은 진실하고 겸손한 삶 자체가 선교가 됩니다.
참으로 속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지고,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살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깨끗한 마음으로 책임을 다하며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살 때,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누가 주님의 날이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써도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이제 굳건히 서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참으로 공동체의 중심에 살아 계신 주님께 깊이 뿌리내릴수록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않고 한결같은 내적 평화와 안정의 삶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많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실패했습니다.
이들이 우리에게는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2022년 미사 중심의 교구 공동체의 해”라는 청주교구의 올해 모토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좋은 공동체의 형성은 물론,
공동체 중심에 계신 주님께 깊이 뿌리 내도록 도와주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름다운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되기를 빕니다.”(2테살2,16-17).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 8월 23일은 31년 전에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날입니다.
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오래전이지만 기억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닥에 엎드려 있을 때입니다.
선배 사제들과 교우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새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성가대는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면서 ‘성인호칭기도’를 불렀습니다.
10분가량의 시간이지만 감사와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있을 때입니다.
선배 사제들이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새 사제들의 머리에 안수를 하였습니다.
성인호칭기도 때는 감사와 은총이었다면
선배 사제들의 안수는 공동체와 하나 됨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함께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품식이 끝나고 야외에서 첫 강복을 줄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과 보좌 신부님이 먼저 무릎을 꿇고 새 사제의 안수를 청하였습니다.
사제의 직무는 나이와 상관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부모님과 교우분들에게 안수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새 사제의 첫 번째 사목이 시작되었고, 31년이 흘렀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신학교에서 사제의 직무를 배웠습니다.
첫 번째는 ‘교직’입니다.
복음을 가르치는 직무입니다.
교리를 가르치는 직무입니다.
복음은 강론을 통해서 선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교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예비자들에게 가르칩니다.
견진 성사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신자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을 올바로 숙지해야 합니다.
사순과 대림 특강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전하였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것은 제가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을 저는 삶으로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두 번째는 ‘제사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고, 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사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성사를 통해서 드러내야 합니다.
첫 번째 미사를 봉헌했던 그 마음으로 정성껏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병자성사와 고백성사를 드려야 합니다.
돌아보면 형식적으로 성사를 드렸던 적이 많습니다.
습관적으로 성사를 드렸던 적도 많았습니다.
세 번째는 ‘예언직’입니다.
사제는 시대의 징표를 잘 알아야 합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고민하고 아파하는 것을 공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해야 합니다.
책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생각하니 저를 필요로 하는 분들보다는 제가 필요해서 만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지난 31년을 돌아보며 앞으로 남은 사제생활을 위해서
예전에 신학교에서 읽었던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라는 글을 마음에 깊이 새기려고 합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기도하는 사제
힘없고 약한 자를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는 사제
검소하며, 물질에 신경을 안 쓰며, 공금에 명확한 사제
청소년과 친하게 대화하며 교리교육에 힘쓰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제
웃어른에게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예의를 차리는 사제
독선을 피우지 않는 사제
교구장에게 순명 하며, 동료 사제들과 원만한 사제
강론을 성실히 준비하는 사제
고백성사나 성사 집전을 경건하고 예절답게 하는 사제
후배 사제 양성에 마음 쓰며 생활하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 성직에 충실한 사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가 사제직에 더욱 충실할 수 있도록, 바른길을 가도록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행해야 한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사실 여러 가지 부패 중에서도 종교적 부패는 항상 가장 신랄한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부패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 종교 지도자들의 윤리적 부패 못지않게 탐욕에 의한 부패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부패와 분열은 요한 묵시록에서는 세상 종말의 징표로 제시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불행 선언은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네 번째 불행 선언은 그들의 십일조에 대한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태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었고 철저했고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인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행하는 일은 실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마태 23,23)
그들의 마음을 탐욕으로 채웠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불행 선언은 속은 감추고 은폐하면서
겉은 기만과 허위로 깨끗이 닦는 정결법에 대한 경고입니다.
곧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마태 23,25)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차원을 넘어서,
애초에 그릇 안에 담고 있는 음식을 정당하게 취득하였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방종에 대한 경고입니다.
앞의 첫 번째에서부터 네 번째 불행 선언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 하시며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을 깨우쳐주신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십니다.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동시에 루카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깨끗해지는 방법,
곧 더러움을 비워내는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결국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운 그릇을 비우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정결법의 정신이 자신을 지키는 데 있기보다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잔 속을 깨끗하게 하는 일, 그것은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입니다(루카 11,41).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6)
주님!
제 마음속 탐욕과 방종을 비우소서!
깨끗한 것을 깨끗한 채로, 더러운 것을 더러운 채로 드러내게 하소서!
속은 탐욕과 이기로 채우면서 겉모양만 깨끗이 닦고 치장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채우소서.
제 잔과 접시를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로 채우소서!
제가 당신의 것인 까닭입니다.
제 잔은 당신의 피요, 제 접시는 당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먼저 속을 깨끗이 닦아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법규였다.
박하와 회향, 근채는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정원 같은 조그마한 터에 조금 양념 정도로 심을 뿐이었다.
이것들의 십 분의 일이란 아주 소량이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만이 실행하였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런 십일조까지도 드렸다.
이들은 십일조에 대해서는 철저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불의를 범하고 잔인하였으며
자비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귀를 막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행하면서도 하느님을 제대로 모시고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하여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양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23-24절) 하시면서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신다.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즉 자비이다.
하느님을 향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이 십일조나 맏물보다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을 실천하고 자비를 구하고 사랑하며
네 주 하느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것 아니냐?”(미카 6,8).
하느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믿음이 보이는 법이다.
우리가 참으로 정의를 실천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정의롭게 살아가며, 다른 이를 자비롭게 대하며,
다른 이들에 대해서 신의를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역시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겉이야 번들 하지만
실상은 위선자, 현대판 율법학자이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는 책망을 예수께 듣게 될 것이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좀 더 깨달아 알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진정한 관계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율법 조문이 우리를 얽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하느님 공동체의 법은 우리의 영적인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살아가야 하겠다.
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알고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정용진 요셉 신부
마태오 복음에는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행복 선언(산상 설교의 시작, 마태 5,3-12 참조)의 말씀과
“불행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말씀(마태 23,13-37 참조)이 나옵니다.
복음 안에서 이 두 선언이 서로 교차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맞서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길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일곱 가지 불행한 삶에 관한 말씀 가운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경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의 위선의 가면을 벗겨 내십니다.
위선자는 한마디로 연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위선자의 행동에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자 하는 목적과 지향이 담겨 있습니다.
위선의 깊은 뿌리에는 자기애와 자기만족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주의는 정확히 참사랑과 반대됩니다.
우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마땅히 옳은 일, 명시적인 바른 규정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 경우 모든 사람이 그것은 잘못된 일이고 그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다른 방식의 악행이 있는데,
이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훨씬 더 나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에 해당하는 일들입니다.
이를테면 법의 준수라는 가면을 쓰고 저지르는 숨은 악행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겉으로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아 스스로 만족해하지만,
실제로는 작고 약한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양심을 해칩니다.
‘십일조 규정은 지키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더 중요한 하느님의 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오늘 하루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특히 의로움과 신의 사이에 있는 중심 말씀인
‘자비’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불행선언 4, 5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유다교의 지도층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3번의 불행 선언에 이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불행 선언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의 사물에 시선을 넘 오래 고정시키면 주위의 다른 사물은 보이지 않게 마련이며,
설사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린다 하더라도 첫 사물에 대한 잔상이 제법 오래 남게 된다.
이와 같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의 字句的 의미를 연구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두었고,
율법을 시행함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도 인간에 대한 사랑도 안중에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율법시행의 “정확함과 명료함”이 덕행이었다.
네 번째의 불행선언은 십일조 규정에 관한 것이다.
모세오경에 기록된 십일조의 규정은 실로 복잡하다.
유다교에서 십일조의 규정은 모든 수확 중 십분의 일을 레위인들에게 바치고,
레위인들 또한 십일조 전체에서 야훼의 몫을 떼어 아론 사제에게 바치는 것이다.(민수 18,25-32)
처음에는 십일조의 품목이 올리브기름, 포도주, 곡식에 한정되었으나(민수 18,12),
나무의 열매와 가축까지(레위 27,30-34; 신명 14,22-23) 그 징세의 범위가 점점 확대되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십일조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켜
음식의 양념향신료로 쓰이는 박하, 회향, 근채에까지 적용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율사들이 얼마나 법의 字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어떻게 징수하느냐는 것 보다 왜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 것이다.
모세는 십일조로 거두어들인 모든 것을 한 번씩 다 내어놓고
성안에 사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도록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신명 14,28-29; 26,12-13)
그러나 율사들은 십일조의 목적보다 시행과정을 더 중요 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율법의 가치를 전도하고 말았다.
그러니 십일조의 계율보다 더 상위에 자리한 정의, 자비, 신의의 계명이, 홀대를 받은 셈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하루살이와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제일 큰 동물로 간주 되던 낙타에 비유하신 것이다. (24절)
다섯 번째 불행 선언은 유다교의 정결례에 관한 것이다.
유다교의 정결례에 관한 규정도 다른 율법 못지않게 복잡하다.
모세오경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를 규정하고 있다.(레위 11-18장; 민수 5,1-4; 19,1-22)
그러나 모든 정결과 부정에 관한 규정의 근본정신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는 것이다.
즉 율법의 목적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가치를 전도하고 말았다.
즉 겉과 속을 바꾸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물의 겉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한들 속이 시커멓게 더러우면 겉의 깨끗함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온갖 淨潔 규정을 동원하여 “껍데기”만 가지고 백성들의 淨함과 不淨함을 판단하던 율사들에게
예수께서는 그들 속에 들어앉은 착취와 탐욕을 질타하신다. (25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되돌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 모든 것에는 비단,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된다.
이를테면 시간, 사랑, 능력 등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바치는 것 보다 왜 바쳐야 하는 것인지를 늘 묵상하여야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에 있어서도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그 마음이 성령의 궁전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