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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은 인천사람들에게 각별하다. 6·25 전란으로 고향을 떠나온 피난민들이 죽을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버텨낸 역사가 새겨져 있어서다. 거기에 세워진 ‘수도국산박물관’은 1970년으로 시계가 맞춰진 달동네의 생생한 표정을 되살리고 있다.
산 아랫마을 ‘배다리’는 인천 토박이들의 고향이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이 낮은 지대로 물산이 밀려들고, 헌책방 언저리에는 교복 입은 젊음이 몰려들었었다. 배다리의 기억은 그 시절을 살아온 인천의 청춘들에겐 ‘응답하라 1970’이다
수도국산(山)은 6·25 전쟁이 만들어낸 피난민 수용소와 1970년대 민초의 삶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화석이다
아침 굶은 시어머니 얼굴을 하고 있던 하늘이 기어이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제철도 잊어버린 장마 뒤끝이 심상치 않다. 자전거는 ‘수도국산박물관’으로 일단 피신한다. ‘도시 민속’의 선구자라 자부하는 이 공간에서 넉넉하게 시간을 잡을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다.
송림산 또는 만수산으로 불리던 산이 수도국산이 된 것은 노량진에서 퍼 올린 한강물을 인천사람들이 먹게 되면서다. 부평펌프장을 거쳐 오면서 수시로 단수되던 인천의 물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송현배수지다.
‘똥고개’가 있던 동네
6·25 전쟁통에 황해도, 평안도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수도국산 비탈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흥남 철수로 부산에 자리 잡은 함경도 아바이들보다 빨랐다. ‘수용소’라 불리는 피난민촌은 5만5천여평(18만1818㎡)에 1800여 채의 꼬방동네를 이루었다.
오늘날 재개발된 솔빛마을 아파트 단지 자리다. 가뜩이나 좁은 산비탈 땅을 쪼개 팔아 루핑집을 지으니 다닥다닥 붙은 거북손처럼 엉덩이를 맞대고 살게 되었다.
산 너머 갯벌에 인천제철이 들어와 송현동 일대는 대낮에도 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을 정도여서 “송현동 아이들은 쇳가루를 많이 마셔 일찍 철이 든다”는 말이 있었다. 지나다니는 트럭이 고철덩이를 갯고랑으로 던져 놓았다 물 빠진 뒤에 건져내 팔곤 했던 탓인지 송현동에 유난히 고물상이 많았다.
지대가 낮은 안송림의 미나리깡, 배추밭에는 사리 때면 바닷물이 밀려들고, 매립지에 새워진 송현국민학교는 교실까지 바닷물에 잠기기도 했다. 1977년 백병원 부근에 ‘송림위생처리장’이 들어서자 사람들은 화수부두로 넘어가는 서흥초등학교 앞 고개를 ‘똥고개’라고 불렀다. 얼마나 냄새가 지독했으면 “똥공장이 가동을 멈춰야 밥숟갈을 들 수 있었다.”고 기억할까.
인천정보산업고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배다리는 물산의 집합소였다. “배다리에서 구하지 못하는 물건은 전국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말도 있었다. 임진강이 막히자 마포나루는 자연히 폐쇄되고 강화의 농산물도 배다리로 들어오다 보니 종묘상과 농기구, 철공소 등이 자리 잡는 가운데 인현동에 있던 원조 책방골목도 배다리로 내려왔다.
새 책 산다고 타낸 돈으로 헌책 사고, 극장 구경 가고 군것질 하던 교복의 추억이 담긴 책방골목은 한산하다 못해 괴괴하다. 아벨서적만이 확실하게 눈에 띌 뿐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 시대 불멸의 가수 송창식의 흔적이 있다. 인천 신흥동에서 태어나 인천중을 나온 그는 6·25때 경찰관으로 전사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고통을 노래로 이겨냈는지도 모른다. 전교 석차 3등에 서울예고 성악과를 나온 실력이니 머리와 목소리는 타고난 것이다.
송창식에 대한 찬사의 결정판은 대중음악평론가 강 헌이 말한 “가왕 조용필에 대적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가수가 송창식이다”는 평가이다.
전통과 현대의 그 중간쯤 되는 옷을 입고 기타를 맨 구부정한 송창식의 쑥스러워하며 웃는 표정은 자세히 보면 하회탈을 닮았으니 어쩌면 가장 ‘한국적’ 가수일지도 모른다. 배다리에서 탄생한, 그의 싱그러운 청춘의 노래 <담배가게 아가씨>를 들어본다.
<담배가게 아가씨>
송창식 작사, 작곡, 노래, 1987
영락없는 <최진사댁 셋째딸>의 1980년대 명랑 버전이다. 세시봉 트리오(송창식, 윤형주, 이익균), 트윈 폴리오로 활동하던 시대를 넘어 솔로 선언 후 송창식의 활동은 한국대중음악사에 독특한 디렉토리를 형성한다. <고래사냥>, <피리 부는 사나이>, <왜 불러>. <한번쯤> <토함산>, <참새의 하루> 등은 트로트와 국악적 요소가 버무려진 독특한 동양적 음계의 ‘송창식다운 노래’ 퍼레이드다.
‘대마초 파동’으로 쑥대밭이 된 한 시절 가요계에 그는 휩쓸리지 않았다. 지휘자 금난새와 고교동창인 그는 밤에만 활동하는 가수라 ‘밤창식’이라 불리기도 했고, 송창식의 묘비명은 “연습하다 죽다”일 거라는 가수 조영남의 한 마디는 그의 천재성과 노력을 대변한다.
아직도 미발표 곡이 1000곡이나 되는 그, 1989년 마지막 음반 10만 장을 내면서 “돈을 많이 벌면 세금 맞추기가 귀찮다.”고 말했다는 송창식은 신선의 반열에 들었다. “내 음악은 100점, 모차르트는 70점”이라고 했다는 그의 말은 허투루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수도국산 박물관은 ‘도시민속’의 선구자격으로 세밀화를 보는 듯 1970년대 달동네를 그린다(동구 송현동)
달동네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은 추억의 앨범을 뒤적여 보는 일이다(동구 송현동)
새끼줄에 연탄을 꿰어 사가던 기억. 평안도에서 피난 내려올 때 갖고 온 솜틀 기계는 사라진 풍물이다(동구 송현동)
부채 속 여인 남정임. 윤정희·문회와 더불어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구가했으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동구 송현동)
교복은 억눌린 청소년 시절을 상징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날을 추억할 수 있는 소도구다(동구 송현동)
일본 엔카의 비조(鼻祖)
고가 마사오가 자란 인천
일본의 엔카(演歌)를 좀 깊이 들여다 본 사람들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를 안다. 그는 일본대중음악계의 대명사이자 1930년대 일본의 엔카를 정형화시킨 작곡가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酒は淚か溜息か)에서 ‘고가멜로디’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그가 유·소년기를 인천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912년 어머니와 단둘이 이주해온 인천에서 그의 음악적 감수성은 조선의 자연과 전통을 바탕으로 길러진다.
그 스스로 “내 음악에는 조선의 민요도 있고, 노동요도 들어있고, 거지들이 동냥할 때 부르는 걸식가도 들어있다.”고 말했다. “엔카의 원류가 한국이다.”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한 단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엔카와 트로트가 서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쌍둥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어쩐지 무리다.
웃을 수만은 없는 인천의 노래,
<사이다 송>과 <성냥공장 아가씨>
이제 소개하는 두 곡의 노래를 아는 사람은 이미 머리가 반백이 되어 있거나 ‘곱뿌’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일 것이다. 컵의 일본식 발음이다. 원래 인천에는 사이다 공장이 세 개나 있었다. 신흥동의 사이다 공장 앞에까지 바닷물이 닿았으니 노랫말도 자연스럽다. ‘칠성사이다와 칠성콜라’의 원산지가 인천이다
요건 몰랐지, 가갈갈갈, 뿝빠라 빠라 붐빱빠
인천 앞다다에 사이다가 떳어도 고뿌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 백반…
이른바 <사이다 송>이다. 일제 때부터 내려오는 만담풍 녹음본에 서영춘, 백금녀가 부르는 노래다. 전국적으로 알려져 골목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부르던 힛트곡이다. 이주일의 재능을 알아본 서영춘의 코맹맹이 소리는 코믹한 분위기를 더 돋우었던 노래다. 58세로 너무 일찍 타계한 서영춘은 구봉서 배삼룡이 원로대접을 받으면서 만년을 보낸 것에 비하면 애석하기 그지없다.
또 한곡은 <성냥공장 아가씨>다.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늘 충성과 용기를 불태우는 군가에 진력이 날쯤에 부르는 ‘지하 군가’였다. 굳이 지하라고 할 것도 없다. 어느 작가의 말이다.
“발정난 개처럼 솟구치던 성욕에 혓바닥을 내밀고 헉헉대던 시절, 유토피아를 꿈꾸는 인간 이성의 힘과 극기훈련으로 본능을 억압해 승화시켰다.” 군인이고 대학생이고 막걸리 한 사발 돌면 이 노래에 목청을 아끼지 않았다. 19금을 넘어서는 마지막 구절을 부를 때 그들의 억눌림은 철조망도, 공부의 굴레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성냥공장 아가씨는 가난한 이 땅의 자화상 속 슬픈 주인공이다. 개항 직후 인천 동구에 들어선 최초의 공장이 조선인촌(주)이라는 성냥공장이었고, 국내생산량 20%를 점하는 조선 최대 규모였다. 이 희화화된 노래 속에는 치마 밑에 성냥갑을 감출 수밖에 없었던 하루 13시간 노동이 숨어 있다. 1만 개비의 성냥골을 씌워야 60전을 받는 혹사가 인천 여성노동운동사의 시발이기도 했다.
살만하면 고통의 시간도 추억이 되는가. 배다리 책방골목 근처에는 <배다리 성냥마을 박물관>이 들어섰고, 혼성듀오 ‘물레방아’로 활동했던 인천 출신의 가수 백영규는 성냥공장 아가씨와의 로맨스와 소식을 그리워하는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란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백만송이 장미보다 더한 보배, 심수봉
제물포역에서 수봉공원을 넘어 인하대학교로 가는 길이다. 원래 수봉산은 ‘물위에 떠 있는 산’(水峯山)이었다가 ‘오래 사는 새’(壽鳳山)로 바뀌었다. 이 길에서 우리 가요계의 신데렐라, 비련이 감긴 목소리의 주인공 심수봉을 떠올리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니다.
심수봉은 원래 충남 서산 태생이지만 소녀 적에 어머니와 함께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다 인천에서 자라, 인화여고를 졸업하게 된다. 초등학교 교감댁 피아노를 치고, 트럼펫으로 부는 <타향살이>가 좋았고, 이미자의 <정동대감>을 잘 불렀던 소녀의 끼는 타고 났다. 할아버지 심정순이 판소리 명창이고, 아버지 심재덕은 민요채집가였고. 작은아버지와 고모가 소리꾼이고 승무 인간문화재였다.
고등학교 때 기타를 독학하고, 송민영 악단 드러머에게 개인지도를 받은 그가 여고 졸업 후 소공동 ‘라칸티네’에서 “키사스 키사스…”를 부르는 아르바이트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75년 도큐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나훈아는 자신의 힛트곡을 부르는 심수봉의 비련미에 반해 <나는 여자이니까>를 취입하도록 주선해 준다.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 창작 트로트곡 <그때 그 사람>을 선보일 때 이미 명지대생 심민경은 중고 신인이었다. “너무 프로스러워 대학생답지 않다. 노래는 좋으나 대학가요제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이상한(?) 심사평 속에 ‘대학가요제의 이단아’가 된다.
‘트로트만이 갖는 맛과 멋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가수’, ‘천부적으로 한이 담겨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평은 1979년 대한민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 ‘궁정동 그날 밤’ 병풍 앞에 서게 한다. 요나누끼 음계를 능란하게 넘나들며 엔카를 요리하는 그녀야말로 적격 캐스팅이었는지도 모른다. 궁정동의 여인으로서, 금지곡의 주인으로서, 인생의 신산(辛酸)한 고개를 넘던 그녀를 부활시킨 노래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심수봉 작사, 작곡, 노래, 1984, 지구레코드
트로트계에서 보기 드물게 노래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는 대표적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심수봉이다. 인천항에서 연인을 떠나보낸 여인의 아픈 사연을 듣고 만들었다는 곡은 유별날 것도 없는 남녀의 이별을 역시 항구를 무대로 담담하게 노래한다. 체념과 원망이 서려 있는 가락에는 붙잡는다고 돌아올 사내의 마음이 아니라는 확신이 냉소하듯 담겨있다. 사랑에 아파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노랫말이 오늘도 그녀를 비련의 무대로 불러 세운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의 연유는 일제 때부터 있었던 사이다 공장에서 비롯된다(동구 송현동)
이발소는 미장원에 밀려 사라져 가지만 의자에 걸친 널빤지에 동그마니 올라앉아 있던 나의 유년이 거기 있다(동구 송현동)
개발이 불가피하다지만 흔적도 없이 기억을 부숴가는 포클레인의 삽날이 무정하다(동구 송현동)
헌책방에 들어서면 나는 시간을 잊는다. 거기 세월에 묵힌 지식의 냄새가 좋아서다(동구 금창동)
하와이 교민의 애국, 인하대학교의 사연
굳이 언덕길을 올라 인하대학교로 가는 것은 이 대학의 설립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학이 어느 유지가 재단에 출연하는 돈에 바탕을 두지만 인하대는 다르다. 내 친구들도 여럿 다닌 인하대의 이름에 어떤 연유가 있는지 몰랐다. 나는 한진그룹이 재단으로 있어 ‘하(荷)’자가 ‘교통편과 수하물’이 연관된 게 아닌가 하는 무식한 연상을 하고 있던 터였다.
인하는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따온 거룩한 이름이다.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건너가 성공한 하와이 교민들이 1915년 만든 ‘한인기독교회’와 ‘한인기독학원’의 가운데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있다. 당시 기독학원을 매각한 거금 15만 달러를 이대통령이 설득해 고국에 보내도록 해서 만들어진 대학이 ‘인하공과대학’이다.
진흙탕길을 장화를 신고 다닐 정도였지만 미국의 MIT 같은 대학이라며 인하대생은 자신들을 ‘IIT생’이라고 부르며 자부심을 가졌다. 고려대나 연세대에 공과대학이 없던 시절이라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조국 근대화의 현장에서 땀 흘린 엔지니어의 태반이 한양공대와 인하공대 출신 쌍두마차다. 인하공대에는 ‘병기공학과’나 ‘로켓트공학과’처럼 강력한 국방 의지를 이름에 담고 있는 전문학과까지 있었다.
1968년 한진그룹이 인수한 인하대학교는 대한항공의 발전만큼이나 성장하게 되지만 어쩐지 태극 마크의 기운은 예전만큼 선명하지는 못하다. 지나친 매를 때렸다는 감이 없지 않지만 ‘땅콩회항’ 사건의 그림자는 인하대 교정에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대한항공이 논스톱으로 기착하는 태평양의 먼 섬 하와이는 여전히 손꼽히는 신혼여행지로, 낙원의 한 표본처럼 떠 있다.
그렇기에 하와이안 기타의 감미로운 선율과 훌라춤의 율동미는 이국의 서정을 끝없이 자극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20세기가 문을 열면서 인천항을 떠나간 하와이 최초 이민자들의 처절한 생존고투 끝 대척점에 야자수 그늘과 와이키키 해변이 있기에 사랑의 기쁨과 실연의 아픔도 낭만으로만 느끼기엔 어쩐지 쓸쓸하다.
<하와이 연정> 길옥윤 작사, 작곡, 패티 김 노래, 1967, 지구레코드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인천에 있다니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인천문화예술회관 광장에 서 있다는 것도 내겐 뜻밖이다. 칼날 같은 일만이천봉의 찬미는 먼발치라도 금강산이 보이는 동해 최북단쯤이 제 자리라 여긴 탓이다. <그리운 금강산>은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가곡, 성악가라면 꼭 불러 달라고 요청 받는 노래다.
원래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주안염전 자리가 어디쯤일까 더듬어보려 했다. 열우물(십정동) 근처를 지나서 부평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가요는 아니지만 ‘대중’이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겠다 싶어 일부러 발길을 돌린다. 60톤짜리 오석은 악보와 가사를 가슴에 걸고 우뚝 서 있다. <그리운 금강산>은 작시자 한상억과 작곡자 최영섭이 모두 강화 사람이다. 유·소년기에 인천에서 살며 공부했던 연고는 있지만 광역시가 되면서 인천사람으로 편입되었다.
최영섭 선생은 서울음대 김성태 선생의 제자다. 그의 자상한 해설을 곁들인 명곡감상은 늘 인기 있는 방송프로그램 축에 들었다. 1961년 KBS의 청으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1972년이 되어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며 개화한다. ‘더럽힌 지 몇 해’는 ‘못가 본 지 몇 해’로, ‘맺힌 원한’은 ‘맺힌 슬픔’으로, ‘더럽힌 자리’는 ‘예대로 인가’로 원작자가 수정했다. 1985년 남북한 예술단의 평양공연 때 불려 졌으나 지금 북한에서는 금지곡이다.
<그리운 금강산> 한상억 작시, 최영섭 작곡, 1961
배다리 헌책방 거리 점포는 평일인데도 거의 문이 잠겨 있다. 추억 탐방객들이 간간이 기웃거릴 뿐이다(동구 금창동)
인천 수봉공원. 인천에서 여고 시절을 보낸 심수봉이 생각나는 것은 동명이인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미추홀구 숭의동)
자전거가 비에 젖어 거리를 바라본다(미추홀구 도화동)
인하대의 오래된 시계탑은 하와이 교민이 자유대한을 위해 고국에 보낸 애국의 징표다(미추홀구 학익동)
60주년 기념관과 5강의동의 대비는 인하대의 발전을 한눈에 보는 일이다(미추홀구 학익동)
대한항공의 이름은 ‘인하’에 대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빛이 바래 보인다(미추홀구 학익동)
부평 미군부대와 인천의 록, 헤비메탈
이제 오늘의 목적지 부평공원을 향해 간다. 미군이 머물다 간 자리, 애스컴(ASCOM, Army Service Command 미육군기지창)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터다. 좀 더 거슬러 일제 강점기로 가면 일본이 군수물자와 무기를 만들던 ‘조병창’(造兵廠) 자리다.
군국과 호국이 각기 다른 이념을 지녔어도 한 자리에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그 땅이 군사적 용도로 쓰임새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미군도 다 떠나가고 이제 빵 공장만 남아서 전국의 미군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60~70년대 내로라하는 음악인들에게 미군부대 연주활동은 서양음악을 접하고 더 연마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멘스 클럽’의 도너츠판과 부평 ASCOM의 미군 음악이 인천 록 음악의 유공자다.
1990년대 동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은 부산을 능가하는 하드록과 헤비메탈 음악을 접했을 것이다. 배다리지하상가의 록 밴드 <아웃사이더스>, <파이어 볼>의 음악이 낡은 상가를 흔들었었다. 십정동 ‘락캠프’나 부평 모텔촌 ‘루비살롱’ 활동이 밑거름이 되어 부평음악도시축제 ‘뮤직게더링 2018’이 열렸고, 올해도 ‘송도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 2019’가 예정되어 있다.
이제 기행작가가 된 이택순 전 경찰청장이 내게 ‘김홍탁‘을 아느냐고 물어왔을 때, 그는 낯선 이름이었다. 참 딱하다는 듯이 들려준 김홍탁은 전설적 기타리스트였다. 겨우 중학생이 미군 하사관의 기타 솜씨에 반해 사사받고, 인천 동산중학교 3학년 때 밴드를 조직했다. 동산고에 진학한 뒤 인천 미군 클럽을 오가면서 활동한 그의 천재성은 미8군 밴드 ’키보이스’가 경희대 입학예정이던 까까머리를 스카우트 할 정도였다.
윤항기, 차중락, 차도균, 옥상빈 같은 한국그룹사운드 역사의 장인이자 ‘한국의 비틀즈’라 불리는 이들이 맞아들였으니 말이다. 당시 명동 오비스캐빈에서 만난 김홍탁의 인기는 여대생들에게 대단했다고 한다. 가왕 조용필이 “김홍탁은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다”라고 칭찬했을 정도니 나의 무지가 폭로된 셈이다. 청소년 시절 서울살이를 못해 본 한계가 거기까지였다.
다시 동인천으로,
쉽지 않은 인천음악의 홀로서기
이제 부평역에서 자전거를 접어 전철을 타고 동인천으로 돌아간다. 인천이 배출한 가수는 박상규, 장미화, 들고양이, 솔개트리오, 백영규, 최성수, 구창모, 유심초, 배따라기, 소리새 등 한 손에 꼽기 어렵다. 여느 지방도시와 달리 서울의 강한 자장권에 들어 있어 기동차로 서울로 통학하던 경인선을 따라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서울의 가수, 서울의 노래가 되어 버리기 쉬웠다.
<슬픈 계절에 만나요> 백영규 작사,작곡,노래
노래를 따라 인천을 쏘다니느라 잠시 더위도 잊었다. 이제 미군부대서 얻어온 노란페인트로 가건물 벽을 칠했다고 얻은 이름 인천의 ’옐로하우스‘도 마지막 한 채 철거를 앞두고 있다. 116년을 지나온 공창제도의 면면한 흔적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다. 유숙할 곳조차 없는 청춘들의 욕망은 사라진 것일까. 복류(伏流)하고 있는 것일까. 잠깐 맑아진 저녁 하늘에 노을이 구름을 비집고 속살을 보여 준다.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인천에 있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광장이 가득찬 느낌이다(남동구 구월동)
‘트리포드록페스티벌 2019’ 광고 현수막. 인천의 록음악은 시멘스클럽의 마도로스와 부평 미군부대 애스컴의 음악 위에 자라났다(남동구 간석동)
일제 강점기 조병창 자리에 있던 미군부대 ASCOM 자리. ‘부평공원’으로 변해 징용조각상이 아니면 흔적도 찾기 어렵다(부평구 부평동)
조용연 여행작가
첫댓글 쇳가루를 많이 마셔
일찍 철이 든다...
아픔이네요
음악과함께 하는역사
정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