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선사
“지공선사가 된 것을 축하하네.”
“지공선사? 그게 뭔 소리야?”
“몰라서 묻는가?”
몇 해 전 친구로부터 들은 소리다. 근래 이런 우스갯소리를 종종 듣는다.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국립공원이나 공공시설의 입장료를 할인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란다. 동갑내기 친구가 그런 소릴 하니, 저나 나나 별수 없이 노인취급을 받게 된 것이 측은하단 얘긴지, 전철을 공짜로 타고, 복지혜택을 많이 받음이 좋겠다는 것인지 헷갈린다. 어찌 보면 진심보다는 점차 많아지는 국가 복지정책에 대해 비아냥대는 느낌이 더 커 보인다. 그럴 만하다. 저나 나나 고향이 그렇고 사는 지역이 그러니 생각은 분명 우측에 있다.
이왕 줄 것이면 전철보다 버스를 공짜로 태워주는 게 더 좋은데 아쉽다. 자주 타지 않는 전철요금은 깎아주나 마나다. 고향이나 서울도 전철보다는 버스로 가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 동네의 광역버스는 부챗살 노선이라 아주 편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수입이 조금 있어서 요 정도의 교통요금은 견딜 만 한데, 가만히 따져보면 내가 받는 복지혜택의 중심에 국민연금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무원연금이나 군인연금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크게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쓴다.
어쨌거나 은행에서 카드를 받긴 했으나, 차마 가지고 다니기는 부끄럽다. 혹여 전철역 개찰구를 지날 때 빨간불이 켜지면 득달같이 쫒아온다는 역무원에게 얼굴을 붉히며 신분증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건 마뜩찮다. 얼굴과 등에 써진 나이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좌우간 열차 내에서도 경로석은 언감생심 앉을 엄두도 못 내고, 버스의 노약자석도 가급적 피하는 나니, 그 빨간 ‘지공선사’카드를 딱 한 번 시험한 이후 써보지 않았다. 간이 콩알만 하고 배 밖으로 나와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년쯤 종심에 이르면 가지고 다녀볼까 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어느덧 복지정책이 퍽 많아졌다. 육칠십 년대에 비한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병원에 며칠 누워보면 실감난다. 그러나 이 사회의 한쪽에 선 정치인과 언론인들은 과도한 복지정책이 나라의 재정을 위태롭게 한다고 비난한다. 나도 상당부분 공감하는 말이다. 요즘은 방송에서도 대로에서 확성기를 틀어놓고 귀청 찢어질 큰소리로 비난하는 것도 거의 일상이다. 더욱 선거철이다 보니 한층 심하다. 친구들도, 친척들도, 동네 지인들도 대체로 그러하다. 우리나라가 베네수엘라나 아르헨티나처럼 될 것이라고, ‘폭망’이란 단어를 거리낌 없이 외치며 학수고대하듯 비난한다.
노인이 정류장에 서 있으면 그냥 지나치고, 승객들을 화나게 하던 난폭한 버스운행이 몇 년 사이에 퍽 점잖아졌다. 버스를 두세 번 갈아타도 요금은 별로 더 들지 않는다. 어느 지방에서는 버스요금을 한 번만 내면 하루 종일 열 번을 타도 무료라는 것을 그저 좋아할 뿐이다. 논란이 많던 초중고의 급식비도 이젠 공짜다. 곧 수업료도 전액 무료가 된단다.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정부의 기초연금 제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전기요금이 OECD국가 중에서 터키 다음으로는 가장 싸고, 유럽 선진국에 비하면 3~40퍼센트에 지나지 않지만, 올리면 큰일 난다. 전형적인 아시타비적(我是他非的) 비난도 많다.
여하튼 기차를 공짜로 타고 다니는 철도청 직원과 그 가족이 부러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음에 감사할 일이다. 집에서 천안까지 가는 고속버스의 요금이 오천구백 원이지만 별로 부담되지 않음도, 시내버스의 요금이 불과 천이백 원 정도임을 감사히 생각한다. 여행 중에 들은 이야기 한 토막. 그 나라에서는 대학까지 전액 국비로 공부를 한단다. 선진국답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진작 유럽 선진국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외치며 복지를 확충하던 것이 새삼 부럽다. 그들이 폭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도 그들처럼 선진국이 될 수도, 베네수엘라가 될 수도 있다. 국민적 공감대와 인내가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내일은 전철역 옆에 계시는 부모님을 뵈러 갈 텐데, 한 번 빨간 카드를 내밀고 전철을 타 볼까. 왕복이면 오륙천 원이니 제주(祭酒)와 포(脯) 값은 되겠다. 아내가 보면 ‘돈이 떨어졌나, 종심(從心)에 가까워지니 철났나?’하며 웃겠네.
첫댓글 물결따라 가듯 세월 따라 가게 되나 봅니다^^
네~ 말씀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제 좌도 우도 없이 복지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한 편 걱정이 되지만 . 갈수록 사회적 요구가 심할 것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줏대 없는 정당의 태도가 서운하죠? 차라리 처음 태도가 나은데...
책상서랍 속에서 툭 튀어나온 '지공선사'카드를 바라보려니 이런저런 상념이 가득합니다.
복지정책이 선진사회로 가는 데는 필수일테니 극력 반대는 아니 합니다만, 혹여 속도가 지나친 것은 아닐지.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신중하게 시행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7080세대 분들은 어려운 시절의 고비를 건너시느라 노후 준비를 제대로 못하였을 테니
지하철 이라도 무료라니 교통비 부담없이 나들이 할 수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요즘 지하철은 빈 좌석이 많더군요.ㅎㅎ
분명히 필요한 것이 복지인 것은 맞을 듯한데요,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도 잘근잘근 씹기를 잘 하니 원
제가 아는 한 분은 부부 고공자 출신인데, 열변을 토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복지정책이 과하다고.... 허 허
고맙습니다. 평안하세요.
걱정이 되기는 해도 어차피 그렇게 가야한다고 생각하며 잘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