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MBN 방송 토론에서 어느 한 모자라는 인간이 뭘 어떻게 배웠는
지 김종인의 이승만 대통령 발언 파동에 대하여 그가 국부가 될 수
없다는 이유는 국민을 버리고 홀로 도주한 비겁한 인물이기 때문이라
고 씨부렸다. 바로 그것이다.당신이 주장하는 그 도주가 바로 그가 국
부로 불리어야 하는 '정당한'이유이다. 당신이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
령의 도주가 있었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과의 중단 없는 접촉으로
이 나라에 신속히 유엔군이 들어올 수 계기를 만든 것이다.
6.25란 전쟁은 불의의 기습 전쟁이었다. 전혀 대응의 준비가 안 된 상
태에서 단 3일 만에 서울은 적치하가 되고 말았다. 그가 탈출한 것은 6
월 27일 새벽이었다. 만일에 정부가 당시 국민들에게 피난가시오 하는
소리를 했다면 아마도 당시에 단 두 개인 한강 다리 상에서 200백만
서울 시민이 집결해서 아비규환의 무질서로 떼 죽음을 당했을 것이며
이승만 대통령의 대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조처는 어느면을 보나
전술 전략적으로 적절한 대처였다.
더군다나 6.26일 부터 숨어있던 잔존 발치산 세력들은 고개를 당당
히 내밀고 준동을 시작했다.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공개적 이동은
불가능 했다. 따라서 극소수 비서진을 이끌고 창문도 다 깨진 열차편
으로 대구까지 갔다가 이승만 박사의 호통으로 다시 수원으로 올라와
마침 내한한 매까사 극동사령관을 만나 전황을 논의하고 다시 육로로
대전에 이르고 전라남도 목포로 가서 거기서 비로서 쪽 배를 타고 부
산으로 간 것이다. 그 만큼 육상 이동이 위험한 지경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이 미국 워싱턴으로 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신 시설은
같은 운명으로 서울을 간신히 빠져나온 미군사 고문단이 소유한 초단
파 무선시설이 장착된 쓰리쿼터 트럭이 전부였다. 그들도 6.28일에야
끊어진 한강 다리를 뗏목을 만들어 서빙고에서 가까스로 도강에 성공
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연락이 되고 미극동 사령부를 거처 워싱턴에 한
국의 위급 상황을 속속 알린 것이다. 이승만은 쉽게 서울을 떠나지 않
으려고 했지만 비서진이 조금만 다리를 건너 피신하자고 해서 나선 것
이며 수원에 임시 수도를 만들고 맥까사 원수가 방한하자 거기서 이
승만 대통령이 그를 만나 대응 전략을 논의한 것으로 다시 여의치 않
자 다시 대피를 해야 했다. 당시 매까사는 이 남침을 막자면 지상군 투
입이 불가피하다고 트루만 대통령에게 진언한 것이다. 대통령은 부산
을 거쳐 대구에 올라와 자리를 잡자 그 노구를 무릅쓰고 M-1 소총을
들려 준다면 다시 북으로 올라가 싸우다 죽겠노라고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당신의 나이는 75세였다.
대통령 자신이 죽어서 이 남침 대세가 멎고 실지회복이 된다면 백 번
그럴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무모한 생각이요 행위로 전락했을 것이다.
당시 서울 피난을 생각하지 않던 이시영 부통령은 서울에 앉아 있다가
김두봉이란 안면있는 상해 임시 정부시절 인사를 만났다. 그가 바로
서울의 주요 인사 납북 지령을 받고 내려온 북괴 고위직 공산주의자였
다. 그가 한말이 저 위에 언급한 자의 수작과 똑 같았다." 시방 이승만
대통령이 도주했으니 당신 부통령이 우리와 같이 북으로 올라가 대통
령 대신 항복을 선언하고 민족통일을 합시다." 라고 꼬득인 것이다. 이
시영은 그때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남으로 긴급히 피신했다. 이 수작을
현재 일부 교과서에 반영한 것이 "이승만 국민방기 도주론"이다. 그들
의 정서가 무었인가가 극명해지는 대목이요 그래서 그 잘못된 교과서
정상화가 필요한 것이다. 이시영은 현 더불어 민주당에서 끝까지 버티
고 있는 이종걸 의원과 지난 김대중 정권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씨의 조부이기도 하다. 상기 사실은 이종찬씨의 증언이다.
당시 정부로 부터 면죄를 받았던 보도연맹원들의 많은 수가 고개를
반짝들고 제 세상이 드디어 도래했다고 어디서 구했는지 99식 일본제
소총을 들고 다니며 우익 인사에 대한 살인행각을 벌인 것이다. 이것
이 바로 정부가 행한 좌익 전과 세력들에 대한 처단이었다. 그러니까
전자는 학살이요 후자는 처단인 것이다. 학살은 양민이 전제가 되지만
처단은 범죄자가 대상인 것이다. 이것을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승만 대통령이 대피를 하지 않고 즉 그들 말대로 도주를 하지 않고
생포가 되었다면 6,25 전쟁은 1950년 6월 18일을 기해서 대한민국의
소멸과 함께 민족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김일성이 공언한 남반
부 적화 목표 시점인 1950년 8월 15일 보다 약 2 개월이 빠른 시점인
것이다.
이 사실을 반드시 새론 역사 교과서에는 자초치종을 정확히 밝히는 것
이다. 무턱대고 홀로 국민방기 도주 대통령으로 몰지 말라!
두번째 왜 한강 다리가 예정보다 일찍 끊겼을까요? 그것은 이미 임진
강 다리를 적기에 끊지 못해서 방호산이 이끄는 인민군 6 사단이 정면
의 백선엽의 한국군 1 사단을 파죽지세로 몰아 붙여서 신속 남진을 가
능케 한 사실에 기인한 조급증이 원인이었다고 군사 전문가들은 증언
하고 있다. 이승만이 한강 다리에 대한 폭파를 고의적을 압당긴 것이
아니었다. 다리 폭파는 공병이 수행하는 것으로 당시 공병 수뇌부의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그 원인은 바로 조급증이었다. 당시 육참장이었
던 채병덕 소장과 인사참모였던 강영훈 대령이 탄 찦이 막 한강 인도
교를 벗어나 노량진에 접어드는 순간 한강 다리가 폭파된 것이라고 당
사자는 증언하고 있다.
역사는 진실에 입각한 것이다. 조작과 억측으로 역사를 왜곡하지 말
라! 대부분이 조상이 붉었던 후손들이 오늘날의 우리 역사를 왜곡하
고 있는 것이다. 역사편찬 위원회,민족문제 연구소에 들어 앉아 있는
자들의 조상을 추적하면 그 답이 나온다. "그래 이승만은 국민을 버리
고 도주한 대통령 맞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위대한 것이다." 이 맹꽁
이들아!!!!
지금도 민족통일과 이승만 도주론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자들은 바로
북괴의 세작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매국노들이다. 저런 소리를 들을 때
마다 한강교 폭파 1 km 반경내에서 그 폭음을 경험한 세대로서 정말
로 화가 치민다.
(긴급 피난으로 노획당한 죤 무치오 주한 미대사의 뷰익 승용차를 남일
이 타고 휴전회담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첫댓글 도망? 국가리더는 국민자체가 몸을 피신하게 도와드려야하는 것이 올바른 국민의 태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죽어서 김일성에게 대한민국을 맡기지 않아서 속상하고 속을 썩는 인간은 김정은을 추종하는 것들 뿐입니다. 피신을 도망으로 표현하는 인간들은 대한민국이 주는 밥을 먹고 옷을 입는 종북파들입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고싶으면, 흥남부두에서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 품으로 안겨온 자신의 아버지 무덤부터 파헤쳐 참시해야죠. 흥남부두를 통해 도망온 아버지, 그것이 도망입니다. 그래야 도망에 대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흥남부두에서 도망쳐온 아버지의 아들은 도망자의 아들일까요? 아닐까요? 흥남부두로 부터 내려온 부모들을 모욕하는 언행은 참 나쁜 행동입니다. 이북에서 내려온 모든 피난민은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도망이라는 표현을 할 자격부터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