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12월 14일 오후 2시 일본 니가타(新瀉)항에서 재일동포 975명이 두 척의 소련 선박에 나눠 타고 북한 청진항을 향해 떠났다.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말을 믿고 귀국길에 오른 재일동포 북송단 1진이었다. 배에는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나붙었고 부두에선 조총련이 흔드는 인공기가 물결을 이루는 가운데 '김일성 찬가'가 울려 퍼졌다. 재일동포는 일제 식민지 시절 강제 징용으로 혹은 태평양 전쟁 치하에서 식량 공출로 입에 풀칠조차 하지 못하게 된 농촌을 떠나 일본 땅에 건너왔던 사람들이다. 망향(望鄕)의 설움을 안고 살던 이들의 북송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조총련은 북한을 "즐거운 노동과 행복한 생활로 웃음과 노래가 시(詩)처럼 흘러가는 곳"이라고 선전했고, 조총련계 문화인과 지식인은 물론이고 일본의 좌파 지식인과 언론들도 이에 맞장구를 쳤다.
그로부터 꼭 50년, 부모·4형제와 함께 1963년 111차 북송선을 탔다가 2003년 북한을 탈출한 고정미씨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북송 50년은 북한과 조총련이 사기(詐欺)로 재일동포 9만명을 북에 끌고 간 대(大)유괴사건"이라고 했다. 고씨는 일본에서 조총련의 사기행위를 고발하는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는 "도착 첫날 북한 풍경에 낙담해 '일본에 돌아가겠다'며 울던 열 살 오빠는 수용소에 끌려가 대소변 위를 기어다니며 동물처럼 살다 죽었다"고 했다. 그는 함께 배를 탄 사람 대부분이 북한에서 지옥 같은 삶을 이어갔다고 증언했다. 1990년대의 대기근 때 북송 교포와 그 후손들은 더 혹독한 차별과 감시를 받으며 굶주림 속에서 세상을 떴다.
재일동포 북송사업으로 1959년부터 1984년까지 북한에 끌려간 재일동포와 일본인 처, 가족이 9만3340명이다. 북한은 남한보다 북한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북한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는 사회 하층을 이루는 재일동포에 대한 치안부담과 재정부담을 줄이려고 서로 재일동포의 손을 끌고 등을 밀었던 것이다.
당시 조총련 간부로 재일동포 북송에 앞장섰던 장명수씨는 수기 '배반당한 지상낙원'에서 북한을 거짓 선전해 동포를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수많은 일본의 좌파 지식인·언론인 가운데 좌파 이념에 중독돼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미화하며 재일동포의 등을 떠밀어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속죄하고 용서를 빌었던 사람은 없다. 일본의 좌파 역사학자 데라오 다로는 북송사업 시작 무렵 북한을 직접 보고 와 쓴 '38도선의 북쪽'에서 "북한이 1~2년 후 공업생산력에서 일본을 능가할 것"이란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는 1960년 다시 북한에 갔다가 북송 재일동포들에게 "북한을 안다는 네가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며 뭇매를 맞을 뻔한 일까지 있었다.
50년 전 북한에 건너갔던 9만명의 재일동포 1세대는 대부분 허울뿐인 조국 땅 북녘 하늘 아래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혼백(魂魄)마저 흩어져버린 그들의 넋을 이제 누가 달래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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