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2024.4.17., 수성도서관)
현(玄)과 이분법(二分法) 극복 (2)
1. 이분법(二分法)과 한정형식(限定形式)
이분법은 한정형식이 실재에 진입하여 만들어진다. 한정형식은 한정자(限定者)로 인해 모양이 확정되는 방식이다. 한정자(限定者)는 감각자료나 관념(이름)으로 한정된 것이다. 감각자료(感覺資料, sense data)는 우리의 감각에 주어진 대상이다. 관념(觀念, idea)과 이름(名, name)은 생각되는 대상과 다른 대상을 구분하기 위해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다.
감각자료에 의한 한정형식은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의 여건(與件)으로 주어진다. 시각자료는 색깔과 모양이고, 청각자료는 소리의 강약, 고저, 장단 등이고, 미각자료는 오미(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 등이다. 후각은 냄새(비린내, 향내, 악취, 똥냄새, 쉰내 등)이고, 촉각은 뜨거움과 차가움, 매끈함과 거침, 가려움과 통증 등이다.
관념이나 이름에 의한 한정형식은 감각여건에 의한 것도 있고, 감각여건과 무관한 도 있다. 감각여건에 의한 것에는 빨강, 노랑, 파랑 등의 색깔이나 직선, 곡선, 점선 등의 모양이 있다. 감각여건과 무관한 것에는 진위, 선악, 미추 등의 학문 영역이 있고, 이념, 정치, 경제 등의 사회 영역이 있다. 이때의 영역구분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동명이물(同名異物)도 있는데, 그것은 맥락 속에서 구분할 수 있다.
2. 실재(實在)와 현상(現象)
이분법의 구분 중에 가장 근원적인 구분에 속하는 것으로 실재와 현상의 구분이 있다. 실재와 현상의 구분은 철학에서의 구분이고, 보다 정확하게는 형이상학적 구분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것의 겉모습 뿐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겉모습이 현상이고, 그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그 자체를 실재라고 한다. 실재는 감각에 포착되지 않고, 사고에도 선명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따라서 실재는 모호하다. 그래서 칸트는 실재를 물자체(物自體)로서 알 수 없는 것이며,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상뿐이라고 하였다. 철학에서는 세계를 실재계와 현상계로 구분한다. 실재계는 안에 있어 인식되지 않고, 현상계는 밖으로 드러나 있어 인식된다. 실재계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 형이상학이고, 현상계를 연구하는 학문이 형이하학이다. 형이상학은 증명이 불가능하고, 형이하학은 감각과 의식에 의해 증명가능하다.
실재는 현(玄)으로 지칭할 수밖에 없다. 실재는 감각이나 사고에 포착되지 않으므로 모호하다. 그래서 칸트는 실재를 물자체(物自體)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포착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거기에 비해 현상은 감각이나 사고에 뚜렷하게 포착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습은 거울을 통해서 볼 수 있으며,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느꼈기 때문에 충분히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현상에 불과하다.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시각이라는 감각자료를 본 것이며, 자신의 마음을 느낀 것은 내적 감정인 내감이며, 관념인 현상에 불과하다. 나의 현상은 알지만, 나의 실재는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 새겨져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인용해서 ‘너는 너 자신에 대해 모르는 줄 알라’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무지(無知)의 지(知)]’말과 함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분법(현상)으로 보면 우주는 ‘나와 나 아닌 것(自他)’으로 구분되는데, 같음(실재)으로 보면 나와 우주는 자타불이(自他不二)나 아즉우주(我卽宇宙)가 될 수 있다. 즉 실재와 현상으로 분리해서 존재를 살펴보면 불교의 불이사상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이 이론은 노자의 현동론(玄同論)이나 장자의 제물론(齊物論)과도 연결이 된다.
어떤 내가 실재의 나일까? ‘옷을 입고 있는 나’와 ‘옷을 벗고 있는 나’, ‘깨어 있는 나’와 ‘잠자고 있는 나’, 회장인 나’와 ‘회장에서 물러난 나’, ‘젊은 나’와 ‘늙은 나’, ‘살고 있는 나’와 ‘죽은 나’ 등등 이 모두가 현상으로서의 ‘나’ 아닌가? 왜냐하면 모두 한정형식이 들어간 나이기 때문이다. 실재로서의 ‘나’는 한정형식이 들어가기 전(前)인 현(玄)으로서의 ‘나’이며, 우주와 구분이 되지 않는 ‘나’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어지는 강의>
4/24(수), 현, 앎과 느낌의 방법으로서 시, 감상환(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 5/01(수), 모든 것은 느낀다, 감상환(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