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행법사의 속명은 사토 노리키요,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동갑으로 키요모리의 평생친구임.
궁정스캔들(주1)에 휘말려 느낀바가 있어,
22살때인 1140년 출가했다고 하며,
출가시 2~4살 짜리 딸을 발로 차버리고 출가했다 전해짐.
죽을때 벚나무 아래서 죽었는데 그가 죽은뒤
그 벚나무꽃이 필때마다 그 벚나무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자살을 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서 그 벚나무를 한때 봉인했다고 함.
벚꽃을 사랑했으며 벚꽃과 관련 수많은 와카를 남김.
젊은 시절에는 당대 교토 제일의 무사로 일컬어 졌으나
출가한 뒤로는 수많은 와카를 남겨 와카의 천재,<가성>으로 불림.
17세기 에도시대의 유명한 하이쿠 대가인 마츠오 바쇼에게 많은 영향을 줌.
그의 딸 사이교지 유유코는 그가 죽었다는 벚나무인 사이교 아야카시와 함께
동인게임프로젝트인 <동방프로젝트>의 주요 캐릭터중의 하나임.
*사이교 아야카시는 명계의 벚나무 이름으로 원래는 사이교 호우시가
은거했던 가츠 모치데라(NHK대하 <타이라노 키요모리>드라마에는 소우지사로 나옴,
모치데라와 소우지사가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습니다?)
에 있는 사이교 사쿠라(사이교가 누워 죽었던 벚나무가 지금도 있다고 함)를
착안해서 <동방프로젝트>의 작자인 ZUN이 제7편 게임인 <동방요요몽>속에서 지어낸 이름으로
사이교 아야카시는 사이교호우시의 딸 사이교지 유유코의 유해를 800년 이상 썩지 않게 보호한다고 함.
이하는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들을 웹쇼핑하여 요약한 내용입니다.
사이교는 무사출신의 부친 사토(후지와라에서 갈라져 나온 묘지임)야스키요와
미나모토노 키요쓰네의 딸 사이에서 1118년 태어났으며 부친이 무사로서 황거를 지켰듯이
사이교 역시 18세에 토바상황에 발탁되어 토바인을 지키는 무사로서 좌병위라는 직으로 근무하다가 타이켄몬인 타마코와의 사랑의 스캔들(?)에 말려들어 세상사,인간사의 허무와 회의를 느끼고 곧바로 1140년 출가하여 일본 전국을 유랑하며 사이교라는 법명으로 수많은 와카를 지었는데,60세가 넘어서는 엔이라는 법명을 따로 가지고서 72세에 입적하기까지 고야산에 은거(고야산 은거는 30세때부터 이미 시작했다고 함)하며 수많은 와카를 지었다고 하며,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와카만 하더라도 2000여수가 넘는다고 합니다.가집으로 <산카슈>,<사이교호우시카슈>,<기키가카슈>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이교는 와카에서 꽃을 자주 인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벚꽃을 주로 인용했다고 하며,
사이교가 죽기전 병상에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와카 두수를 인용해 봅니다.
<<바라노니 벚나무꽃 아래서 봄날에 가고파,
그 음력 2월에 보름달 뜰 무렵에>> (파광자주:사이교는 실지로 1190년 음력 2월16일 사망함)
<<그대 바라던 벚꽃나무 아래서 떠나가노니
정토 연꽃 위에도 못오를리 없으리리>>
*일본인들은 와카를 노래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와카를 짓는 이를 시인이 아니라 가인이라고 부름.
사이교 당시 사람들은 사이교에 대해서 평하기를,
사이교호우시는 취향이 흥미로우며
게다가 노래하는 마음도 매우 깊은데다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며
세상에 참으로 나기 드문면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천부적인 가인으로 생각된다.
보통사람이 흉내낼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말로 설명할수 없는 대가인이다고
하면서 그는 일반 보통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칭송했다고 합니다.
**일본인,일본정신과 일본문학에 대해서 매우 냉정하고 인색한 평가를 내리시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도 사이교에 대해서만은 선생자신도 사이교는 좋아한다고 하시면서
사이교를 <일본의 근원 같은것,근원 치고도 가장 높은것,맑은 줄기의 봉우리>라고 높이 평가하심.
주1)궁정스캔들:타이켄몬인 타마코(단 레이분)는 시라카와상황(이토 시로분)의 양녀로 토바상황(시라카와상황의 손자,미카미 히로시분)의 황후이자,스토쿠상황(이우라 아라타분)의 친모인데,양부 시라카와상황과 밀통[기실은 시라카와가 자신의 양녀를 겁탈해서 애를 베게 해놓고 자신의 애를 벤 타마코를 자신의 손자와 결혼시켜서 낳게된 아들 스토쿠는 토바상황의 아들이면서 자신의 아버지 토바상황의 숙부(=실지로는 시라카와의 아들이므로)가 되는 관계=소위 말해서 숙부자관계]하여 기괴하고 천인공노할 가족관계를 만들어 버렸고,이것이 후에 황위 쟁탈전에까지 그 여파를 미치게 됩니다.따라서 타마코는 자신의 남편인 토바에게 따돌림을 당했고요.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토 노리키요(후지키 나오히토분)가 타마코를 안쓰럽게 여겨 이를 감싸주려다 자기도 모르게 연정을 품게되고,이 연정이 타마코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인간사 세상사 속세의 정(정이란 무엇일까? 주는걸까?받는걸까?)이라는 것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 약관 22세에 처,자식 다 버리고 출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조:1155년 년간의 황위 쟁탈전과 호겐의난의 발생원인
토바의 황후는 타마코로 여기서 낳은 큰아들이 스토쿠인데(기실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는 걸 곧 알게되지만...),토바는 이 스토쿠가 토바의 할애비 시라카와가 타마코를 건드러서(겁탈해서?) 낳은 아들로 보고 무척 싫어했죠.물론 그래서 토바가 타마코를 따돌림한 건 사실이지만 완전히 아주 멀리 한건 아니고 부부간의 정은 남아있어 타마코와의 관계속에서 스토쿠는 빼고,3명의 아들과 딸 둘을 더 얻었습니다.이 아들 중에 바로 4번째 아들이 바로 마사히토로 후에 고시라카와천황(마츠다 쇼타분)이 됩니다.그런데 토바는 두번째 첩인 나리코(마츠유키 야스코분)를 매우 사랑해서(?)여기서 낳은 아들 나리히토(기타무라 타쿠미분)를 스토쿠천황의 황위를 폐위시키고,나리히토를 고노에 천황으로 앉히고 본인은 상황이 되어 인세이를 합니다.(이것은 할애비 시라카와가 토바천황의 황위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자신이 자신의 양녀를 겁탈해서 얻은 자식아닌 자식인 스토쿠를 천황으로 앉히고 인세이를 한것과 판박이로 닮은 꼴임)
그런데 이 고노에천황이 17살의 어린 나이로 1155년에 죽음에 따라 황위계승의 셈법이 복잡하게 돌아갑니다.스토쿠는 자신의 아들 시게히토를 천황으로 앉혀서 본인이 진정으로 실권을 쥐고 상황이 되서 인세이를 펼치고 싶었는데,이때 헤이안시대의 3대천재(?)라고도 불리우는 마사히토의 유부이자 사부인 신제이(아베 사다오분)가 토바를 꼬드겨 마사히토(고시라카와천황의 유아때 이름)를 천황으로 앉혀서 토바께서 계속 인세이 하시라고 진언합니다.이리하여 스토쿠는 닭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뒤통수를 맞고 자신의 동생 아닌 동생 마사히토가 고시라카와 천황이 되는 것을 지켜 보며 울분을 삼킬수 밖에 없었죠.그런데 해는 비뀌어 1156년, 할애비 시라카와 못지 않은 권력을 누린 토바가 1156년 7.2 죽습니다.그러자 이때를 기회로 스토쿠가 마지막 반격을 시도하는데, 바로 고시라카와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 시게히토를 천황으로 앉히려고 한것이 바로 호겐의 난으로 전화된 것이며,이 호겐의 난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고시라카와에게 패배함에 따라 스토쿠는 시코쿠의 사누키로 유배되어 쓸쓸히 8년을 더 살다가 사누키에서 사망하며 후에 사누키인으로 추존 됩니다.죽은뒤 문상하는 귀족 하나없고 관도 제대로 못썼다는 등등의 이야기며,이게 원한으로 남아서 원령이 되어 누구,누구를 괴롭히고 어쩌고 저쩌고 저쨌다는 이야기 등등이 있는데....각설하고요^^.단,스토쿠를 보노라면 참 안됐어요.자신이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평생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옆에 아비를 두고서도 아비없는 자식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인생은 또 뭔가???이게 바로 왜구애들이 만세일계 신의 자손으로 떠받드는 천황족보의 한 단면이요 실상입니다.에잇 욕나온다.퉷퉷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