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권문세족에 대항했던 신진사대부들은 온건 개혁파와 급진 개혁파로 나뉘었습니다. 정몽주, 길재 등은 권문세족을 내쫓고 비리들만 개혁하고 고려를 이어가자는 온건 개혁파였고, 정도전, 조준 등은 고려를 없애고 새로운 조선왕조를 세우자는 급진 개혁파였습니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 세력과 손을 잡았습니다. 온건파는 시골로 내려가 향촌에서 은둔합니다. 급진 개혁파 세력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고 중앙 관직으로 나아가 성종(제9대 왕, 1457~1494, 재위 1470~1494) 때까지 독점을 하게 됩니다. 조선 건국 이후 급진 개혁파는 관학파가 되고 온건 개혁파는 사학파가 됩니다. 관학파는 집현전이나 성균관을, 사학파는 주로 서원과 향약을 거쳤습니다. 관학파가 성장하여 15세기에 훈구파라고 하여 이름지어지게 됩니다. 훈구파는 계유정난(1453년, 단종 1년), 중종반정(1506년, 연산군 12년)의 공신들입니다. 사학파는 성정하여 사림파가 됩니다.
온건 개혁파는 중앙에 밀려 향촌으로 내려가 향약과 서원으로 힘을 기르고 있었는데 성종이 왕권 강화와 훈구파 견제를 위해 사림파를 끌어들임으로써 조정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로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활약을 합니다. 처음으로 중앙세력에 등장한 인물은 김종직(1431~1492) 입니다. 사림파가 조금씩 진출하면서 삼사에 진출한 사림 세력들이 왕의 잘못과 훈구파를 비판하자 훈구파가 사림파를 죽이는 일이 4번 발생하는데 이를 사화(사림이 화를 입었다)라고 합니다.
사림파는 성리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훈구파의 부도덕함과 부패를 비판하면서 성장하였고 기득권을 위협받았던 훈구파와와의 갈등은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를 시작으로 갑자사화(연산군 6년, 1504), 기묘사화(중종 14년, 1519), 을사사화(명종 원년, 1545)에 걸친 사화를 가져옵니다. 연산군(제10대 왕, 1476~1506, 재위 1495~1506) 때에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표면화되면서 4대 사화가 일어납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 연산군 4)
연산군 즉위 후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계유정란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라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을 유자광, 이극돈이 연산군에게 고하여 김종직이 부관참시되고 김일손 등의 사림파가 죽고 귀향보내진 사림이 큰 피해를 입은 사건입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인데 항우가 의제를 죽인 것에 대한 비판은 결국은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종이나 연산군의 정통성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훈구파가 이를 이용하여 사림파를 몰아내게 됩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고 김일손 등을 죽이거나 귀향을 보냅니다.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로 일어난 사화입니다. 무오사화로 위축되어 있던 삼사는 연산군의 일탈 행위로 다시 간쟁을 하였고 대신들과 공유하며 연산군은 고립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능사의 폐단이 만연되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어 죽은 사건의 보복으로 이어집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처남과 함께 연산군의 생모가 죽은 내막을 밀고하고 연산군은 성종에게 참소해서 폐모를 죽게 했다고 판단한 후궁 정씨의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을 창덕궁에 압송해 조사합니다. 하사주를 이세좌가 엎지르고,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홍귀달이 즉시 따르지 않았는데 이들이 갑자사화의 발단을 제공한 것에 연루된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200명이 넘는 훈구와 사림이 극형과 재산 몰수를 당하게 됩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중종 14)
훈구 세력은 폭정과 방탕한 생활을 한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제11대 왕, 1488~1544, 재위 1506~1544)을 왕으로 세우는 중종반정을 일으킵니다. 중종 반정으로 공신이 된 훈구세력의 월권을 견제하고자 중종은 새로운 대안으로 조광조를 비롯한 젊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였습니다. 조광조는 경연과 언론 활동의 활성화, 현량과 실시, 공납의 폐단을 시정, 위훈 삭제, 소격서 폐지 등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러자 위훈 삭제 등에 대한 불만을 가진 훈구 세력이 궁중의 나뭇잎에다가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가 왕이 된다)'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그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조광조를 비롯하여 남곤, 심정, 홍경주 등 많은 사림 세력들이 죽거나 귀양 보내집니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명종 1)
인종(제12대 왕, 1515~1545, 재위 1544~1545)부터 명종(제13대 왕, 1534~1567, 재위 1545~1567) 때에는 외척들이 득세하여 인종의 외척인 윤임 일파를 대윤,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어린 나이에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인 문정 왕후(1501~1565, 중종의 계비, 명조의 어머니)가 수렴청정하고 소윤이라하는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1565)이 세력을 잡으면서 대윤을 몰아내고 이 과정에서 가담했던 사림들이 희생당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훈구파는 조선을 건국하고 건국 초에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는데 이바지한 사람들에서 연유합니다. 이들의 본격적인 등장은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 때 부터입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공신이 된 이들은 성종(1457~1494, 재위 1470~1494) 초까지 권력을 독점합니다. 훈구파는 성종 때 사림파의 등장으로 위협을 느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중종 반정 이후 기묘사화에서 승리하고 명종 때 을사사화를 통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등 사화를 4차례 일으키며 정권을 잡지만 지방에 서원을 설립해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정착시키며 결속을 다져가던 사림파가 16세기 후반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 시대 때 대거 관직에 진출하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고 훈구파는 몰락하게 됩니다. 사림파는 이후 조선 멸망까지 집권을 합니다.
사림파는 서원과 향약을 통해 양성된 후진 중에서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늘어나나 관직은 한정되어 있어 경쟁이 집단화되어 나타나고 다툼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림은 선조 8년(1575)에 훈구파 처리를 놓고 2개의 파로 나뉘었는데 서로 자신의 파에서 이조 전랑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관직임명권을 놓고 다투다 결국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면서 붕당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조 전랑은 정5품 정랑과 정6품 좌랑을 합쳐 부른 말로 삼사의 관리를 임명하고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선조 시대부터는 사림이 권력을 잡은 후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눠지게 되는 붕당이 출현됩니다. 훈구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동인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 주장하였고 서인은 봐줘야한다는 입장이였습니다.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는데 남인은 대의명분을 중요시하고 북인은 실리를 추구하였습니다. 이때 광해군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북인과 개혁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서인과 남인은 권력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을 내몰기 위한 반발로 일어나는 것이 인조반정입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비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하게 되는데 폐비 살해를 계기로 해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 북인정권을 몰아냅니다. 인조 정권이 등장하고 친명배분 정책을 쓰게 되면서 나라가 휘청하고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게 됩니다. 인조반정 이후에 서인이 주도하는 가운데 남인이 참여하는 형태였는데 서인과 남인이 서로 공존하는 형태를 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일당전제화됩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차이
훈구파: 중앙집권, 부국강병, 패도정치, 민생안정.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성리학 외에 불교, 민간신앙, 기술도 수용. 단군조선(자주적 사관). 사장 중시, 타학문에 포용적, 과학기술 중시. 대지주. 정도전, 권근, 조준
사림파: 향촌자치, 의리·도덕·명분 강조, 왕도정치. 성리학만 중시. 불교 배척, 군사, 과학 기술 등 천시. 기자조선(사대주의). 경학중시, 타학문에 배척, 기술 군사학 천시. 훈구파의 대토지 소유 비판. 정몽주, 길재, 이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