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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구하라
누가복음 13:31-35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사순절 둘째 주일이다. 그리스도교 달력에서 가장 경건한 절기이다. 유명한 수도회 운동의 창설자는 베네딕트는 수도회 규칙을 만들었는데, 모든 수도회 운동의 원형이 되었다. 수도규칙 제49장의 내용에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가 있다.
“수도승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하겠지만 이러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에, 이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는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곳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그만큼 경건생활이 쉽지 않다. 사순절은 짧은 동안이라도 수도자의 모습을 닮는 일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인간의 일곱 가지 죄를 멀리하라고 한다. 즉 ‘칠죄종’이다. 칠죄종은 죄의 씨앗, 곧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악을 의미한다. 그 내용은 ‘폭식(탐식),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정욕’이다.
그것은 죄라고 규정짓기 이전에 이미 평화를 잃어버린 삶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샬롬샬롬’이 필요하다. 사순절은 내 안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구하는 절기이다.
요즘처럼 우리가 사는 땅 한반도에서 평화에 대한 간절함을 느끼는 시절도 별로 없다. 그런데 방송에서만, 정치인만 떠들지 대부분 평화를 잃은 현실에 대해 둔감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구하지 않는다.
평화는 어느 사람, 어느 집단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온 인류가 누려야할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평화는 매우 가까이 존재하지만, 또 하루아침에 멀어지기도 한다.
1)
오늘 본문은 평화가 없는 세상에서 복음, 곧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습이다. 배척하는 자들은 평화를 독점한 권력자들이요, 성전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종교인들이었다.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그때 어떤 바리새인들이 짐짓 예수님을 위하는 척 조언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게 한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31).
예수님은 당신을 적대시하며, 하나님의 평화를 배척하려는 그들에게 단호하다. 그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헤롯 이전에도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전하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역사와 현실을 회고하면서 탄식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34).
예루살렘은 이름 그대로 ‘샬롬의 도시’였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의 샬롬이 배척당하였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갈릴리 활동과 예루살렘 활동을 극명하게 대조한다. 가난했던 갈릴리 땅에서 예수님은 환영받는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는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의 대응을 보라. 예수님은 평화의 문제에 대해 단호하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33).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승부수를 던지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평화를 상실한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시고 우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거룩한 성전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비극이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 곧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온 세상의 평화의 질서가 회복된다.
2)
예수님은 그런 폭력적 음모와 계획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목적을 계속하신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평화를 잃은 상태를 보고, 포기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남다른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제3일’에 대한 신앙 때문이다. ‘제3일’은 모든 것이 회복되는 부활의 사건이 있는 시간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32).
구약에서 호세아는 제3일의 구원에 대해 일깨웠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 6:1-2).
성경에서 제3일의 신앙은 부활이요, 생명의 날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히브리어 샬롬, 헬라어 에이레네이다. 이를 평안, 평강, 평화, 화해라고 번역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성전의 질서가 그렇게 강조하는 죄의 문제, 거룩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시는데 비해, 공의와 평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하시다.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불리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평화에 대해서만큼은 양보도, 타협도, 굴하지도 않으신다.
샬롬은 무엇인가? 평화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샬롬’은 파생어를 포함하여 구약에서만 모두 482회 등장한다. 샬롬의 뜻은 평화를 비롯해 작은 범주로는 우정, 친밀감 등 좋은 인간관계를 나타낸다. 넓은 범주로는 행복, 번영, 만족, 건강, 문안 등 개인적인 차원이 있고, 평화조약, 화목제 등 공적인 영역을 두루 포함한다.
무엇보다 평화는 하나님과 온전한 언약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평안하고, 만족하며,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온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바탕으로 삼으셨다. 율법과 계명은 누가 거룩하고 누가 죄인인가를 구별하려는 엄격한 잣대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배워서, 평화로운 삶을 살도록 허락하신 선물인 것이다.
그래서 유대교 랍비들은 ‘샬롬’을 가리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수식어 중에서 으뜸을 꼽으라면 바로 ‘평화의 하나님’이다. 브로우더스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고 하였다. 평화는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일이다.
그러니 평화는 내 안에서부터, 또한 가정에서부터 이루어가야 한다. 이런 구호도 있지 않은가?
“Happy Wife, Happy Life!”
먼저 아내와 행복하라, 인생이 즐거울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모임 가운데에서 늘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 색동교회만 유별나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오래 행해온 전통이다. 평화의 인사는 이미 3세기 초 작성한 것으로 추정하는 히폴리토의 ‘사도전승’ 4장에서 발견되었다. 주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기원하는 유대인의 일상적 평화인사인 ‘샬롬’, 곧 ‘평화가 당신과 함께’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더욱 자주 “주님의 평화”를 반복할 뿐 아니라, 그런 평화의 마음을 간직하고, 표현하고, 증거하고, 살아야 한다.
3)
흔히 사람들은 평화는 힘과 권력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예수님은 병아리를 품는 암탉에 비유하셨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34).
그러나 권력자들은 암탉의 품을 원하지 않았다. 권력자의 평화를 ‘팍스 로마나’ 혹은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불린다. 힘 있는 자를 중심으로 세계 질서가 이루어지고, 평화도 그들의 손에 쥐락펴락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의 언어로 ‘평화와 안전’(Pax et Securitas)은 일상적인 구호였다. ‘평화와 안전’이란 이름의 여신도 있어서, 그 여신 이름을 동전에 새겨 넣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제국이 주는 힘의 평화, 제국이 보장하는 안전은 없었다. 팍스 로마나는 폭력과 억압, 노예제도로 유지하는 세상의 거짓 평화였다.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세상이 주는 평화에 기대지 마라! 거짓된 시대정신에 의지하지 마라! 거짓 평화를 유혹하는 배금주의, 효율주의, 권력주의 따위 모든 유혹을 이기라. 진정한 평화를 주실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고 하신다.
오늘 우리가 부른 142장 찬송은 종려주일에 부르는 호산나 찬송으로, 평화의 찬송이다.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려 세 차례나 반복하여 평화의 인사를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35).
우리는 일주일 전에 개성공단이 폐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북한에 대한 제어 수단으로 남쪽에서 먼저 2006년부터 시작한 개성공단 중단을 선언하였고, 북쪽에서는 아예 폐쇄로 맞받아쳤다.
소식을 듣자마자 지난 월요일 오후에 서울 안국동에 있는 개성공단상회를 찾아갔다. 예전부터 한 번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정작 문을 닫게 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들른 셈이다. 늘 마음먹고 살기는 쉽지만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국회의원을 여럿 보았다. 매장을 둘러보다가 KBS 라디오와 인터뷰도 하였다.
평소 산책할 때 쓸 트레킹화 한 켤레를 구입하였다. 비록 유명상표는 붙지 않았지만, 내 발걸음이 샬롬샬롬이길 소원하는 마음으로 비싼 투자를 한 셈이다.
우리는 개성공단 폐쇄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만약 우리 현대사에서 평화의 교훈을 찾지 못한다면 불행히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
사실 말로만 해결되는 평화는 없다. 유네스코 헌장은 “평화의 옹호는 인간의 마음속에 먼저 건설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는 사람(마 5:41)이 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는 사람(마 5:42)이 되라고 하신다.
감리회 본부에서 근무할 때 주한 이스라엘 대사가 감리회본부를 방문한 일이 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이스라엘 성지를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고객이라고 감사하면서, 계속 성지를 방문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희망사항을 말하였다. 물론 성지는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강조하였다.
성지방문을 가장 많이 하는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은 성지를 사랑하는 민족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성지와 그 땅의 평화를 위해 기도할 책임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해야할, 복음을 전해야할 의무가 있다.
더 나아가 성지는 사랑하면서, 제 나라 제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역설적이고, 모순이다. 평화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다. 평화는 세상과 통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평화 마인드’를 지녀야 하고, ‘피스 메이커’로 살아야 한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중 프랑스 떼제 공동체 신한열 수사를 안다. 그는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1학년 학생이었는데, 1학년 불어강독교실에서 예전에 떼제공동체 수사였던 안선재(안드레) 교수를 우연히 만나면서 평생 떼제 공동체 수사가 되었다. 영어 강독교실을 불어 강독교실로 잘 못 알고 들어간 때문이다. 처음 교실을 잘못 찾은 결과, 그의 인생이 전적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평화의 일꾼을 부르셨다.
평화를 위해 힘쓰는 우리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 1등 전도법이 아닐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평화를 먼저 내 마음에 모셔라. 늘 평화를 구하고, 찾으며, 그렇게 살라.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와 함께,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한반도 위에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