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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5월 3일 봄비가 제법 진하게 내리던 날 공군기술교육단의 항공병학교에 공군 사관후 62기가 입소하여 5개월간의 기본군사교육을 받고 동년 10월 1일 217명이 대망의 공군소위로 임관되었다.
그로부터 40년!
4년5개월간의 긴-세월을 신성한 국방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청춘을 바쳤던 용사들이 2011년 5월19일 임관 40주년 홈커밍 행사에 초청을 받고 참석차 서울 공항에 모였다.
지난해의 망년회 모임 이후 5개월 만이다.
만나는 것 만 으로도 반가운데, 만나는 것 만 이라도 젊음이 넘치는데 또 무었을 바라겠는가?
우리가 탑승할 4발 수송기 앞에서 우리 일행은 사진 촬영을 하고 임관 후 40년 만에 교육사령부를 향하는 심정이야 갖 시집온 새색시가 친정나들이 가는 기분이다.
草露人生이라 했든가.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하였는지라 이미 상당수가 歸天 하였고 이민을 갔거나 初老에 접어들었어도 사업 또는 직장에서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동기생 중 일부가 불가피하게 참석을 못하여 아쉬웠지만 만나는 것 만 으로도 반가운데, 만나는 것 만 이라도 젊음이 넘치는데 또 무었을 바라겠는가?
오전 10시경 탑승한 4발 수송기의 지나친 소음으로 40년 만에 가져보는 전우들과의 추억어린 대화시간이 차단되고 원형 창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필름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의 그때를 되살려 본다.
후보생 시절
1971년 5월 3일 입소를 하였는데 우리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 봄비가 내렸고 어스스한 분위기와 더불어 배정된 내무반에서 서로 낯서른 동료들과 더불어 지급된 전투복(7벌?) 등 많은 피복이 지급되었는데 평생 처음으로 바늘에 실을 꿰어 주기를 하였다.
일주일간의 가입교 기간을 통하여 대의원제도 발족과 더불어 정식 후보생이 된 것으로 기억 된다.
취침시간 이외 쉬는 시간에는 복도에 왁스칠이라도 하여 남는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주 1회 하는 내무검사의 관물함 각 세우기 그리고 구대장 근무자의 “일석점호 준비 끝” 메아리가 사라지고 연이어 들려오는 당직구대장의 군화발 소리는 공포분위기 그 자체다.
어쩌다 기압 받는 소리가 들리면 공포분위기는 절정에 이른다.
유격훈련, 각개전투와 분,소대전투 보다는 진중근무와 사격훈련이 기억에 남는다.
또 대연병장에서 오전 일과를 “굴러이동“이 끝내고 식당으로 이동 중 각 학교별 교장님이 교대로 사열대 앞를 지나가며 ”우우로바아앗” 구령과 동시에 절도 있는 동작이 매력이 있고 기억에도 새롭다.
그리고 대식당 앞에서 차례로 한 줄식 입실하며 부동자세로 대기 중 구대장의 “눈알 굴리지 마” 고함과 동시에 풋싱-소리가 침묵을 깬다.
유성구보로 미니스커트 아가씨의 눈요기도 기분 좋고 수양록 쓰며 수양빵 먹는 맛이야 평생 잊지 못 할 것이고, 야간 행군 중 한적한 농가의 평상에 앉아 서너명의 주부가 희미한 호롱불에 오손 도손 얘기하는 평화로운 모습이 향수에 젖게 되었고 그 때 얻어먹은 보리밥 한 그릇이 너무 너무 꿀 맛 같았도다.
또 밤 10시 취침, 12시 기상하여 속리산을 향하는 종합훈련은 3개월간의 고되고 힘들었던 기본 군사교육훈련을 성공리에 끝내고 남은 2개월은 특기교육 과정임으로 그토록 바라던 것이였다.
실미도 사건으로 죄 없는 우리 후보생에게는 그리도 기다리던 특박이 취소되는 날벼락과 함께 활주로 잡초를 맨손으로 베는 벌을 받았고 훈련기간 중 특박 한번 없는 불행한 기수였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다.
실미도 사건
1968년 1월 북한의 124군부대의 김신조 일당 31명의 청와대 습격사건인데 이에 대응하기 위해 684북파 특수부대가 만들어져 실미도에서 강한 특수훈련을 받던 중 남북협상에 의한 긴장완화 분위기에 북파계획이 취소되면서 누적된 불만으로 야기된 사건.
유신과 62기
우리 동기들 각자는 특기별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고 공군 전역으로 배치되어 4년간 청춘을 받쳐 충성을 했다.
복무 중 특기 할 사항은 10월 유신이다.
학생신분이었을 당시 3선개헌 반대 데모에도 참석했던 터라 군인 신분이지만 약간의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급변하는 한반도의 주변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아시아 최빈국으로부터 민족중흥의 사명을 이룩하고 김일성 집단의 적화통일을 위한 끊임없는 도발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구국의 결단임을 이해 못하는 후세들을 위하여 필요충분한 자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최근의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서
북한의 무력도발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다음의 소견을 상술하면서 끝을 맺는다.
-북한의 도발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북한군은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비무장지대 서부지역에서 네 차례나 미군을 습격하여 11명을 죽였고, 남한의 국군도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 시설을 공격하는 등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끊이지 않았던 상황에서 1968년 1월23일 오후 1시 45분 동해 공해상에서 4척의 북한 해군 초계함정과 2대의 미그기의 위협 아래 미 해군 최신예 전자첩보함 프에블로호가 납치되었다. 장교 6명과 수병 75명, 민간인 2명을 포함하여 총 83명이 탄 프에블로호는 납치 당시 북한 원산항으로부터 40km 떨어진 공해상(公海上)에 있었다.
공해에서 미군 함정이 납치되기는 미 해군사상 106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였다.
납치된 정보함의 암호 등을 포함한 육해공군의 모든 비밀정보가 쏘련으로 넘어갔으며 따라서 미국방성은 일시에 정보체계를 변경하기 위해 막대한 국방비가 소모되는 아픔을 겪었음에 반해 김일성은 이에 버금가는 군사 및 경제원조를 소련으로부터 제공받아 기세등등하고 과대포장된 선전으로 북한 인민들에게 우상화 하는데 크나큰 기여를 하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에블로호가 납치되기 2일 전인 1월21일에는 북한 특수부대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의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 등으로 한반도는 그야말로 전쟁의 위기상황으로 급변했다.
미국은 사건 당일 즉시 일본에서 월남(越南)으로 향하던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3척의 구축함 편대를 동해로 회항을 명령하고 원산만에 대기토록 했고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북한이 취한 행동은 일종의 전쟁행위로 규정지를 수 있다"고 발언해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존슨 대통령은 TV방송을 통해 프에블로호 납치를 공해상에서 자행된 침략행위라고 규정하고 공군과 해군 예비역 1만4천6백명에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전투기 및 수송기 372대에 출동대기 명령을 내렸으며, 오산과 군산 공군기지로 2개 비행대대를 급파와 동시에 2척의 항공모함 요크타운호와 레인저호, 그리고 구축함 1척, 잠수함 6척의 새로운 기동함대를 한일(韓日) 해역으로 이동함으로서 전운(戰雲)이 감도는 긴장감이 한반도 주변을 에워 쌓고 있었다.
유엔측 대표와 북측 대표는 그후 20여 차례에 걸친 비밀회담 끝에 12월23일, 납북된지 325일만에 승무원 83명 전원(시신 1구 포함)이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었다.
그러나 승무원이 송환되기까지 비밀회담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국이 적당한 사과의 뜻을 표명하고 상당한 양보가 있었던 것으로 후일 전해졌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하는 공화국(북한)의 초강경 앞에 미국 정부는 간첩선(푸에블로호)의 정탐과 적대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어떠한 함선도 조선 영해를 침범하지 않도록 할 것을 담보한다는 문건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물론 승무원을 석방시키는 조건이었지만 미국의 자존심은 북한의 도발 앞에 처참하게 무진 대표적인 사건이다.
▲지금은 푸에블로호를 대동강변으로 끌어간 뒤 '반미교양박물관'을 조성해 '대미(對美) 승리'의 상징물로 선전하고 있다고 한다.
-닉슨독트린
1966년 월남전에 한국군 1차파병 이후 4차에 걸친 파병으로 한미동맹이 더욱 강화되고 있음에 반해 김일성은 끊임없는 도발을 감행하면서 적화통일을 위하여 미그 17기를 자체 조립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한반도에는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이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같은 해 7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그들의 안보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기 바라며 미국이 또 다시 월남전과 같은 사태에 말려들지 않도록 협조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독트린이 1970년 미 의회를 통과하였다.
실제로 71년 3월 실제 2만명 가량의 미 7사단과 3개 공군비행대대가 철군하게 되고 남한에는 5만명 가량의 미 2사단만 남게 되었고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경제적 군사적으로 한국보다 월등한 김일성 정권의 무력도발에 대비해야 정부로서는 순차적으로 추진하는 경제개발계획이 초기부터 내내 발목을 잡히게 된다.
-핑퐁외교
미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동서냉전 시대에 죽의 장막이 보다 강화되고 있던 중국이 1971년 4월 미국 탁구대표팀을 초청하고 미국이 이를 수용하면서 스포츠 교류가 이뤄졌고 미국도 중국팀을 초청해 미국 주요 도시에서 친선대회를 열었는데, 미중간 외교관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핑퐁외교라 부른다.
또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은 베이징으로 날아가 모택동 주석과의 회담으로 우리에게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하는 영원한 철천지 원수였던 모택동과 미국의 대통령이 소련견제’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친구가 되면서 죽의 장막이 걷히게 되었다.
2.5g의 가볍고 작은 탁구공이 “지구를 뒤흔든 것”이다.
-7.4공동성명과 남북조절위원회
비무장지대 교전이 비일 비재하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1960년대 말 나타난 일련의 무력 충돌은 당시의 긴장 상태를 잘 보여준다.
1967년 1월19일 오후 1시50분에는 동해 거진 앞바다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우리 해군 소속 PCE 56함(당진함=650 톤, 함장=金承培 중령, 승무원79명)이 북한 해안포의 집중사격을 받아 침몰하면서 해군 장병 39명이 전사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사건 1968년 1월21일 저녁10시경 북한의 124군 부대(게릴라 특수부대)소속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북악산 인근 까지 침투하여 경비중이던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죽이고 지나가는 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시민들은 죽였던 사건과 11월의 울진·삼척 무장 게릴라 120명의 침투사건, 이듬해 4월 4월15일 오후 2시 경에는 동해 상공을 정찰비행 중이던 미해군 EC121 정찰기 한대가 북한의 대공포화에 격추되어 31명의 승무원 모두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전술한바와 같이 미중관계개선과 쏘련 수상 후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으로 동서 간에는 냉전체제로부터 해빙무드가 조성되고 있었다.한반도의 전역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던 한국정부도 동서와해무드에 편승하여 1972년 5월 분단 이후 최초의 대북밀사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의 모란봉초대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일성과 악수(청산가리를 만지던 손)를 하면서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후 북한의 박성철부주석이 극비리에 남한을 찾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고 이후락과 7.4공동성명이 남북의 합의하에 이루어졌다.
1972년 7월 4일, 남과 북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밝힌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는 조국통일을 위한 기본입장과 방도를 밝힘으로서 우리 겨레의 통일의 밝은 전망과 희망을 안겨준 역사적인 성명이다. 동년 11월 4일 7.4 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을 추진하고 양측관계를 발전시키며 각분야별 힘을 합쳐 조국통일 원칙에 기준하여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후락과 북한의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가 만나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할 것을 합의하였다.
-10월 유신선포
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경제개발과 자주국방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남한으로서는 7.4공동성명을 주도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위해 3차례의 남북조절위원회를 개최하였으나 소극적이던 김일성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들어 북한측의 일방적 파기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김일성이 1962년 12월 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南朝鮮 解放戰爭을 위하여 채택된 이른바 4대군사노선(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을 비밀리에 추진하여 8년 만에 완성한 것이 남한정부에 노출되고 나서야 남북협상이 김일성의 위장 전술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일성은 1970년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의 보고를 통해 "4대 군사노선을 적극 추진한 결과 전체 인민이 총을 쏠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지역에 철통같은 방위시설을 구축해 놓았으며 중요한 생산시설까지 요새화하였다.
자립적 국방공업기지가 창설되어 필요한 현대적 무기와 전술기재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다"라고 언급, 4대 군사노선의 완성을 호언했다.
따라서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남북적십자 회담에 이은 7·4 공동성명으로 인하여, 이념적인 공백상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즉 사회적 안정과 안보의식을 높여야 하고, 경제발전을 한 단계 더 높여야 하고 무었보다도 자주국방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어 역사적 구국의 결단을 위해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의 명분이 국가의 안정과 국력의 극대화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 하여 평화적 통일을 이룬다는 것에 있었으나, 실은 국민의 판단과 비판 그리고 선택권을 제한하려는 비민주적이고, 장기 집권을 위한 기반 다지기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자원빈국에서 선진국민소득 2만불의 선진 경제대국에 진입하게 되는 튼튼한 기초를 딱은 것을 전 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10월 17일 비상조치가 발표된 이후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11월 21일에 실시되어 92.9% 투표율과 91.5%의 찬성으로 통과 되었다.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을 선출하였고, 12월 27일에 임기 6년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남북이 일촉즉발의 긴장상태에서 남한보다 위를 점하고 있는 북한의 경제와 국사력을 능가하기 위해 김일성의 지도력을 압도하는 국가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구를 감안한 것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2년 4월 24일 북한은 군창건 60주 기념보고회에서 군총참모장 최광 보고를 통해 4대 군사노선의 강화와 함께 「전군의 주체사상화」를 강조하며 △군사기술 향상 △철저한 규율확립 △기본전투단위인 중대의 강화 등을 촉구했으나 남한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막대한 국방예산을 사용하므로서 경제, 군사면에서 북한에 대해 비교가 않되는 것은 유신정권의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단결된 국민의 노력으로 이루어 진 결과이다.
-5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1960년대부터 국내 좌익운동의 이론가로 활동하다가 1980년대 중반 공산주의의 허상을 깨닫고 1995년 전향했다. 한때 ‘학생운동의 대부(代父)’로 불렸던 그가 1960, 70년대 주요 시국사건으로 꼽히는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안 교수는 오늘 출간되는 책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에 직·간접으로 겪었던 사건들에 관한 생생한 육성(肉聲)을 남겼다.
우리 사회 일각에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사건은 권위주의 정부가 반공주의를 앞세워 조작한 사건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1979년 발각된 남민전 사건 관련자 29명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들의 활동이 유신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행위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안 교수는 이들 사건이 정부에 의한 용공조작 사건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공산혁명 기도였다고 증언했다. 물론 수사 과정에서 때로는 폭력이나 고문이 있었지만 실체가 없는 사건을 날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962년 서울대 대학원생이던 안 교수는 빨치산 출신이자 인혁당 가담자인 박현채를 만나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고 밝혔다. 1964년 전모가 드러난 인혁당은 남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공산혁명을 위한 조직이었다는 게 안 교수의 고백이다. 1968년 발각된 통혁당에 대해서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결성된 혁명조직이었다”고 그는 밝혔다. 통혁당의 서열 2위 김질락은 서울대 상대생이던 신영복(현 성공회대 석좌교수)을 지도했으며 신영복은 역시 서울대 상대생이던 박성준(전 성공회대 겸임교수)을 지도했다고 한다.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은 북한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했고 무장게릴라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 행각을 벌이고 총기를 보관한 적도 있다.
김대중 노무현 10년동안 온갖 혜택을 누리며 민주화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등장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제2조는 민주화운동에 대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활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들 사건이 안 교수의 증언대로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해 공산체제를 수립하려는 기도였다면 ‘민주화운동’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지난 정권이 옥석을 가리지 않고 ‘민주화 훈장’을 준 것은 민주화운동의 순수성을 짓밟은 오류다. 세계의 모든 공산체제는 예외 없이 민주와 인권을 유린하는 무자비한 독재를 했고, 북한은 그중에서도 최악이다.
솔직한 고해(告解)를 하지 않으려면 공산혁명 기도를 민주화운동이라고 미화하는 언설이라도 그만둬야 한다.
안 교수의 용기 있는 증언이 나온 이상 역사의 진실을 더는 왜곡해선 안 된다.
북한 인민 300만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단군이래 처음있는 역사적 수치이다.
그럼에도 유신정권 당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사람들 중에 정치에 화려하게 입문을 하고 거금의 보상금을 받으며 영웅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김정일을 비난하기는 커녕 수구꼴통으로 매도하는 현실속에서 이들에 대해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는 법개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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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주현님 글 잘봤습니다. 감개무량 하네요 다른 재주만 있는게 아니고 글재주도 있네요 감사 합니다 김병국.
김형! 이글 아마도 학사장교회의 정국장도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7일 만나기로 되었있으니 말씀하신 기고 또는 학사장교회카페에 게재 협의해 보겠습니다. 김총무님 말씀따나 여러방면에 재능이 많으십니다.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