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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사지
서산 마애삼존불까지 찾아온 다음에야 보원사터를 들르지 않을 수 없다. 마애불이 있는 곳에서 용현계곡을 따라서 더 들어가 보면 비교적 넓은 지대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상황산 서남쪽 계곡에 자리한 운산면 용현리의 보원사터이다. 상왕산과 가야산은 한 자락으로 이어져 있고, 뜻으로도 상왕산(象王山)이나 가야산(伽倻山)이 모두 부처가 머무는 곳이라는 점에서도 한 맥에 닿아 있다.
보원사터 전경
깊은 산 속에 한갓진 절터이다. 동서로 길게 누워 있는 절터 여기저기에서 백제 때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가까이에 있는 백제 시대의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본사라고도 하고, 한 때 고란사라는 이름이었다고도 하나 절의 내력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개울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퍽 널찍한 절터에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고려 초기에 국사였던 법인국사의 부도와 부도비 등이 있어 고려 시대에는 꽤 번성했던 절이었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최치원이 지은 『당대천복사 고사주 번경대덕 법장화상전』(唐大薦福寺 故寺主 翻徑大德 法藏和尙傳)에는 통일신라 화엄 10찰의 하나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 때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미 이름이 나와 있지 않으니 그 전에 폐사가 되어 버린 듯하다. 이 일대에 아흔아홉 절이 있었는데 백암사라는 절이 들어서자 모두 불이 나 버렸다는 이야기만 전설처럼 전할 뿐이다.
근처에 보원마을이 있었지만 1970년에 이 일대가 ‘삼화목장’에 들어감에 따라 마을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켜서 지금은 깊숙한 산 속에 한갓진 절터만 남았다. 근처에는 보리밭이 있어 봄에도 푸른 기운이 감돌며 초여름이면 망초가 우거져서 허물어져 버린 절터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있다.
찻길에서 내려서 50보 남짓이면 당간지주가 늠름하게 서 있어 절터의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다. 그 안쪽으로 거의 일직선상에 산중의 절터로서는 키가 큰 고려 시대의 오층탑이 수려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고, 안쪽으로 석조와 법인국사부도, 그 부도비와 건물 자리의 기둥초석들이 넓은 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이 유물들은 모두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동서로 길게 누워 있는 보원사터는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터 넓이만도 10만 2,886㎡에 이른다. 발굴 조사 때에 백제 때의 금동여래입상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고, 기왓장들은 백제 때부터 고려 때의 것까지 다양하게 나온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 찾아가는 길과 같다. 마애불 입구 가게 앞에서 1.5㎞ 더 들어가면 길 오른쪽으로 보원사터가 펼쳐져 있다.
승용차는 길가에 잠시 주차할 수 있고 대형버스는 절터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차를 돌릴 만한 터가 있다. 숙식과 대중교통도 서산 마애삼존불과 같다.
당간지주
절터를 향해 들어가다가 먼저 눈길을 잡아끄는 당간지주를 보게 된다. 원래부터의 그 자리에 천년을 변함없이 지켜, 지금은 보리밭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데, 4.2m의 늘씬한 자태를 자랑한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화려하지 않지만 단순한 테두리를 둘러 멋과 힘을 둘 다 잃지 않았다. 맨 위쪽은 숙련된 솜씨로 4분원이 매끄럽게 그려져 있고, 간을 잡는 구멍은 위와 아래 두 군데에, 양쪽에 서로 마주보게 나 있어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당간을 받치는 간대(杆臺)가 보기 드물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2층 기대에 둥근 자리를 만들어 기둥이 안정되게 자리할 수 있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서 보물이다.
오층석탑
멀리에서도 이 탑의 자태는 눈에 띈다. 5층의 지붕돌들이 상승감을 이루며 솟는데 철제 찰주까지 남아 있어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이 되어 있다. 키가 9m나 되는 이 탑은 체감률이 급격해서 솟아 보이면서도 지붕돌이 넉넉하게 펼쳐져서 안정감도 갖추고 있다.
충청도 지역의 고려 시대 탑에서만 볼 수 있는 몸돌 굄대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층 기단의 면석에는 기둥 모양이 형식적으로 칸을 나누었는데, 한 칸마다 사자상을 새겨 열두 칸에 모두 열두 마리가 새겨져 있어 이채롭다. 대개 부도에는 기단석에 사자 조각이 있는 편이지만 석탑의 경우에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사자들은 각각 다른 자세를 하고 있고 발 모양이나 표정들이 매우 생생해서 사실성이 높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잘 이어받은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상층 기단도 기둥 모양을 새겨 칸을 나누고 한 면에 둘씩 팔부신중을 새겼다. 그중 서쪽 면에 새겨진 아수라상이 가장 선명한데, 돋을새김이 그리 도톰하지는 않지만, 인체비례는 매우 현실적이며 조각 솜씨도 뛰어나다. 이런 아름다움으로 하여 이 탑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아수라상
오층석탑의 상층기단 사면에 팔부신중을 새겼는데 그 중 서쪽 면에 새겨진 아수라상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다.
기단부나 탑신부에 모두 층층이 갑석 위에 몸돌을 받는 굄대가 있는 것은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나타나는 방식으로, 고려 시대 석탑의 특징이다. 지붕돌의 기울기가 완만하고 처마도 반전이 거의 없이 평평하게 퍼진 것은 부여의 정림사탑 이래로 내려오는 백제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으로, 충청도 지역의 고려 시대 탑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지붕선이 탑의 자태를 한층 아름답게 한다. 고려 초기에 절을 중창하였을 때에 세운 것으로 본다.
석조
절터 오른쪽 수풀 사이로 나지막한 철책에 싸여 있다. 큰 돌을 긴 네모꼴로 다듬고, 그 안을 또 긴 네모꼴로 파내, 길이가 3.5m나 되고 높이는 90㎝에 이르지만 하나의 돌로 된 보기 드문 예로서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 깊이를 정으로 한손 한손 따냈을 공력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버려진 오랜 세월에 한두 군데 금이 가 있어 안타깝다. 안팎에 아무런 장식이 없어 오히려 장중한 맛을 지니고 있는데, 밑바닥 한쪽에 물이 빠지는 구멍만이 나 있을 따름이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조의 모습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978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는 법인국사 부도, 부도비와 함께 절을 크게 중수한 같은 시기에 만든 것으로 본다.
법인국사 부도
절터 맨 뒤쪽 정리된 공간에 부도비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뒤쪽을 축대를 쌓아 공간을 말끔히 정리했는데, 부도는 대개 절에서 가장 한갓진 뒤쪽이거나 좀 거리를 두고 떨어진 산등성이에 두는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절의 중심에서 그리 멀지 않을 뿐더러 동서로 긴 절터의 구조로 보아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만큼 자리가 좀 어색하기는 하다.
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규모가 큰 편이며, 부도비는 부도보다는 조금 작지만 법인국사의 행적이 소상히 적혀 있어 사료로서 귀중한 비이다.
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4.7m로서 부도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다. 곧 법인국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이 부도는 조각이 매우 화려하여 특징적이며 조성 내력과 연대도 분명해 보물로 지정되었다.
아래로부터 모습을 살펴보면 4매의 판석으로 된 지대석 위에 팔각 기단부가 탑신부와 상륜부를 받치고 있다. 기단부 하대석에는 안상을 조각하고 그 안에 사자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으며, 중대석 고임에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 입, 비늘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용이 구름을 휘감고 있다. 중대석은 아무 장식 없이 곧게 팔각으로 기둥처럼 올라갔지만 상대석에는 피어나는 연꽃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몸돌 8면에는 4면에 불꽃 모양 광배가 화려한 사천왕상이, 그 사이사이에 문비형과 높은 관을 쓴 인물 입상이 조각되어 있어 남다른 구성을 보인다. 지붕돌은 귀꽃이 솟아 화려하며 고려 시대 부도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커서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귀꽃의 반전이 경쾌하여 무거움을 좀 덜어 준다. 전체적인 비례로는 키가 큰 편으로 늘씬한 인상이다.
부도비에 새겨지기를 978년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이 부도를 조성한 것도 그 무렵으로 본다.
법인국사 부도비
비신과 귀부가 온전히 남아 있고 법인국사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소상히 적혀 있어 사료로서도 귀중한 부도비로서 보물이다. 4.25m로 부도보다는 좀 작지만 비로서는 큰 편이다. 비머리에는 ‘가야산 보원사 고국사 제증시 법인삼중대사지비’(伽耶山 普願寺 故國師 制贈諡 法印三重大師之碑)라고 제액이 새겨져 있다. 글을 지은 사람은 김정언(金廷彦)이며 글씨는 한윤(韓允)이 썼다. 비문은 법인국사 탄문의 생애와, 화엄종이 강력한 전제왕권을 수립하는 사상적 배경으로서 그가 고려 왕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음이 서술되어 있다.
비문에 새겨진 바에 따라 고려 경종 3년인 978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부도도 함께 세워진 것이니, 연대가 분명하여 부도와 부도비의 기준작이 된다.
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은 목이 밭게 몸에 붙었으며 입이 긴 비교적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다. 땅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두 발이 매우 견고하여, 왕권이 강화되던 시절에 그 중심인 광종의 왕사였던 법인국사의 부도비로서 고려 초기의 강성한 힘을 내보이는 듯하다. 비머리에 위쪽에 용연을 파고 용들이 사방에서 모이게 한 구성을 하고 있어 매우 독특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원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목수현, 김성철, 유홍준)
개심사
김미향추천 0조회 3123.02.12 23:50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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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마음 씻고 마음 열고 개심사(開心寺) 가는 날, 밤새 눈이 내렸다. 세상이 하얗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의 개심사 가는 길가 저수지에 한 무리의 청둥오리들이 얼다 만 호숫가 얼음판 위에서 엷은 겨울 햇살의 온기를 모으고 있다. 저수지를 끼고 돌아드는 목장 산등성이로 차고 투명한 바람이 스쳐간다. 개심사 입구는 여느 절처럼 거창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평범한 풍경이다. 산들이 얕게 깔려 있다. 멀리 가야산 연봉이 남쪽으로 힘차게 내닫지만, 산세는 따뜻하다. ‘세심동 개심사(洗心洞 開心寺)’라고 조촐하게 해서체로 새겨진 자연석 2개를 일주문 삼아 세운 산문엔 빈 겨울바람만 일렁인다. 마음 씻고 마음 여는 곳이라······.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천천히 산문에 발을 들였다. 계곡 옆 오솔길을 따라 오르니 아기자기한 바위 사이로 가는 물줄기가 흐르고, 소나무 숲 사이로 돌계단이 펼쳐진다. 돌층계는 지난 가을 떨어진 솔잎으로 푹신한 흙길이 되어 산길 걷는 맛을 한층 가볍게 한다. 겨울 숲의 차고 싱그러운 기운이 코끝을 시원하게 한다. 겨울 산의 송림과 바위와 마른 풀, 나무들의 화음이 어느 계절 못지않게 깊은 맛을 낸다. 보이지 않지만 따뜻한 생명의 잉태를, 봄의 화사함을 마음으로 열어본다. 적송으로 울창한 숲의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서니 상왕산 너른 구비가 눈앞에 펼쳐진다. 절 아래에서 바라볼 때는 산자락이 크게 보이지 않더니 산 위로 올라와보니 절이 제법 크다. 솔숲이 끝나고 산모퉁이를 돌아 멀리 개심사가 낙엽 진 고목 사이로 연하게 모습을 보인다. 절에서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곳은 장방형의 인공 연못이다. 폭이 좁고 긴 연못이 겨울 햇살에 눈부시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수면이 백설기처럼 부드럽다. 연못 주변에 산벚나무·매화나무·느티나무·전나무·배롱나무·소나무 등 100년은 족히 넘음직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득하다. 연못 안 한편에 경호(鏡湖)라는 글자가 새겨진 자연석이 놓여 있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라기보다는 수행하는 구도자나 절을 찾는 참배객 모두 마음을 열어 비추어 보라는 의미이리라. 이 연못에 봄비가 내리고 봄눈이 녹아 물이 가득 고이면 산매화가 피고 산벚꽃이 피어 온 산이 꽃 천지가 된다. 여름엔 수련과 백일홍(배롱나무)이 연못을 수놓고, 가을에는 적단풍과 떡갈나무 낙엽이 정취를 더하며, 겨울에는 소나무에 내린 눈꽃의 화음으로 아름답게 채색된다. 연못을 가로지른 외나무다리를 건너 절에 올랐다. 개심사 연못직사각의 기하학형 연못으로 전형적인 백제계 연못이다. 일본 나라의 동대사 옆 정창원(正倉院) 가는 길목에도 똑같은 것이 있는데 모두 부여 정림사지 백제 직사각형 연못이 그 원형이다. 연못가에 있는 경지(鏡池)라는 표석은 마음 비추고 마음 닦으라는 의미다. 가로로 걸친 외나무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개심사 영역이다. 백제계 사찰의 진입 공간 개심사 현판한석봉체의 동국진체로 쓰인 투박한 글씨로 거친 듯하면서도 굳센 조선의 미감이다. 근대 명필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년)이 대자 전서로 쓴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 현판이 달린 안양루(安養褸)를 돌아 해탈문을 들어서니 개심사 대웅보전 안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개심사는 백제 말기 654년 혜감(慧鑑) 선사가 창건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중심으로 심검당(尋劍堂)과 무량수전, 안양루를 에워싼 중정(中庭)은 사방 20여 미터 내외의 정방형으로 사찰의 중심 역할을 하며, 그 옆으로 명부전과 해우소·종각·산신각·연못이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다. 이러한 건축 구조는 대부분 한국 산지 가람에서 보이는 것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일 없이 자연을 경영한 조선 정원 미학의 본보기이다. 절의 진입 방식은 영주 부석사나 경주 불국사와 같이 누각 아래를 거쳐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호남의 부안 내소사나 승주 선암사와 같이 누각을 끼고 돌아서 진입하는 백제계이다. 안양루 옆에 해탈문(解脫門)을 두어 대웅전의 측면을 보면서 진입하여 대웅전과 중정의 아름다운 어울림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대웅보전 앞 뜨락에 겨울의 짧은 햇살이 내린다. 산중무일력(山中無日曆)이라더니 인적이 없다. 조선 초기 과도기적 건축 대웅보전은 단정한 장대석 기단에 자연석을 주초로 하여 1484년에 짓고 1644년과 1710년에 개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앞뒤로 조금 긴 장방형 9칸 다포건물이다. 이는 몇 채 남지 않은 조선 초기 건물로, 주심포계에서 다포계로 이전해 가는 과정의 절충 형식이라는 데 높은 가치가 있다. 주심포계의 일반형인 맞배지붕으로, 구조 법식과 기법은 고스란히 주심포계를 따르지만 공포는 다포계로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 시대 건축처럼 단정한 맞배지붕을 간직하고 있다. 공포는 다포계이지만 건물 안쪽으로는 다시 주심포식 지붕 구조여서 천장 구조를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과도기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보물 143호). 대웅전의 불상은 여느 불상과는 사뭇 다른 푸근한 풍모에 인간적인 조형이어서 이웃집 아저씨를 보는 듯하다. 바라보고 예배하면 빙긋이 미소가 절로 난다. 불상의 조각을 담당한 불모(佛母)의 심미안을 보는 듯하다. 이는 당시 불모장이 이 지역 사람으로 불상의 이해가 완전하게 이루어진 다음에 만들어낸 결과물이리라. 불단장엄의 대표적 방식은 화려한 닫집을 만들고 그 안에 청룡과 운학으로 장식하는 것이지만, 개심사 대웅보전 삼존불 위에는 따로 화려한 닫집을 만들지 않고 대신 운궁형(雲宮形)의 소박한 보개를 만들었다. 들보 아래 매달린 학의 정교한 목조 조각이 법당 안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고색 단청과 함께 세월의 멋과 깊이를 한껏 보여준다. 자연미가 돋보이는 심검당 개심사 전각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건물이 바로 심검당이다. 심검당은 해탈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비끼어 보이는 건물로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이다. 자연스럽게 휘어진 나무를 기둥과 부재로 삼아 조선 건축에서 보이는 자연미를 한껏 간직하고 있다. 툇마루가 붙어 있는 심검당의 공포는 주심포 구조로, 쇠서(소의 혀와 같이 생긴 장식)가 상당히 날카롭고 강직해 조선 초기의 건축적 특성을 보여준다. 1962년에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477년 3중창했고 영조 때까지 6번이나 중창을 거쳤다고 되어 있으니 이 절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기둥 사이의 길이와 기둥 높이의 비례가 3.5 대 1로 평활(平闊)한 구성을 보이는 것은 수덕사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충청도 지역 가옥의 넉넉한 모습을 보여준다. 단청을 하지 않아 깊은 맛이 오히려 좋다. 심검당에 이어 다듬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살려 부재로 삼은 건축은 심검당의 부엌으로, 후대에 지어 이은 것이다. 개심사 심검당은 전남 승주 송광사(松廣寺)의 하사당(下舍堂), 경북 경산 환성사(環城寺)의 심검당과 함께 조선 초기 요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축물들이다. 개심사 심검당 겨울 아침 풍경목수국의 마른 꽃잎사이로 푸른 겨울바람이 분다. ‘심검(尋劒)’은 번뇌를 끊는 반야검, 즉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의미로 절집에서 스님들이 기거하는 당호로 많이 쓴다. 심검당 외관기둥이며 부재를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나무를 그대로 쓴 여유로움에서 한국의 ‘대충주의 미학’을 여실히 보여주는 교과서적 본보기다. 그래서 더욱 정답다. 겨울의 잔설에 하늘이 시리다. 금욕의 절제미 개심사에는 조선 후기 영·정조 문화의 절정기에 그려진 아름다운 괘불(掛佛)이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 영조 48년(1772년)에 제작된 이 괘불은 삼베 바탕에 석채와 당채로 채색된 불화로 길이 10.1미터에 폭 5.87미터나 되는 거대한 그림이다. 석가모니 영산회상 장면을 그린 것인데, 화면을 꽉 채우는 석가모니상에 견주어 둘러싸고 있는 보살과 시중들은 매우 작게 묘사돼 있다. 색조는 전체적으로 녹색과 연지, 청색과 붉은빛이 어우러져 있어 밝고 장엄한 맛이 일품이다. 괘불은 원래 초파일이나 백중날 같은 불가의 큰 행사나 대중 법회 때 옥외에 걸리는 걸개그림을 말한다. 조선의 전통 건축에서 민가나 서원·사찰 마당에는 꽃과 나무를 심지 않으며 불필요한 석물은 놓지 않았다. 마당엔 마사토를 깔고 깨끗하게 쓸어 정갈한 맛을 즐겼다. 텅 빈 공간의 절제미를 즐겼던 것이다. 조선 사대부는 내면에 흐르는 금욕의 절제미를 마당에 표현했던 것이다. 담 너머 수목을 감상하고 시야를 넓혔으며, 내당 후원에 화계(花階, 화단)를 두어 답답한 여인들의 마음을 풀어내었다. 분재나 꽃꽂이가 없는 이유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던 선비들의 유교적 정신세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개심사 대웅보전 앞마당에 심어져 있는 꽃나무를 모두 걷어내 반듯하고 정갈한 절집 풍경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더욱이 대중 법회에 내걸리는 괘불을 지지하는 철재 괘불 지지대도 철거하고 원래대로 돌로 된 지지대만 두어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리지 않는다면 개심사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날 것이다. 작고 단아한 아름다움 개심사의 진면목은 무량수전을 지나 명부전(冥府殿) 뒤 산신각에 올라 송림과 고목 사이로 바라보는 풍경이다. 한옥의 미는 멀리서 바라볼 때 찾을 수 있다.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사찰 전각의 지붕선이 푸른 자연과 어울려 보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전각들이 가족처럼 어우러져 있다. 한국은 대부분 산지로 구성돼 있어 건축을 구성하는 공간이 크지 않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만 해도 그렇다. 청나라의 자금성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그러나 세상의 미감은 크기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건물이 들어서는 인문·지리적 환경과 어울린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미감을 보여줄 수 있다. 작은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한국의 미는 작고 단아한 아름다움이다. 사찰 건축도 마찬가지여서, 선종 사찰에 어울리는 명산의 명당, 승경에 아담한 건축이야말로 한국 미의 또다른 전형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개심사의 건축적 아름다움은 의의가 크다. 명부전 인왕상서역인 상의 한 쌍의 인왕상은 부리부리한 눈망울과 힘준 근육에서 무서움을 느끼기보다는 해학미가 돋보인다. 흙으로 빚었다. 육체적 위협이 아니라 정신적 감계(鑑戒)의 의미이다. 아름다운 한국의 미이다. 봄산의 싱그러움, 연둣빛 벚꽃 봄이 무르익는 4월, 온 산이 산벚꽃으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를 때 개심사 명부전 앞 왕벚나무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면 봄 산의 싱그러움과 설렘으로 절집이 술렁인다. 연둣빛이 은은히 감도는 토종 왕벚꽃이 만발해 참배객의 마음을 흔들고 천지만물의 조화에 푸른 납자(衲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진풍경이다. 우리네 상식으로는 벚나무가 일본산이라 여겨와서 토종 벚나무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개심사 왕벚나무가 순수 자생종이라니 반갑고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말로만 듣던 개심사 연둣빛 벚꽃송이를 바라보았을 때 감개무량했다. 아이 주먹만 한 소담스러운 하얀 꽃 바탕에 연한 연둣빛이 살짝 오른 그 신선함이 순수하고 처연하다. 어느 해 봄. 봄비에 산벚꽃이 꽃비 되어 경호 연못에 내리니, 물 아래 물고기가 꽃잎 물고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는 풍경을 보았다. 선경 그 자체였다. 무심히 바라다본 연못 물 위로 흰 구름 한 조각이 서쪽으로 비끼어 가고 있었다. 새해가 되고 마음은 봄을 향해 내달리지만 아직 꽃샘추위가 남아 있고 동장군은 우리네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한다. 그래도 봄은 멀지 않았다. 자연의 계절뿐만 아니라 인연의 봄도 얼른 왔으면 좋겠다. 마음 씻고 마음 열고 혜안으로 세상을 보리라. 사월 명부전 앞 왕벚꽃나무 연둣빛 꽃망울이 터지면 온 산이 술렁인다. 명부전 단청은 화사한 인도의 색채가 고스란히 조선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개심사 - 명산의 일부가 된 아담한 건축 (한국의 미 산책, 2007. 11. 30., 최선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