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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시론으로 시 텍스트 읽기·�
시인의 시론詩論으로 읽는 시인의 시세계詩世界·3
──박인환의 시론과 시·②
정유화
1. 들어가는 말
지난 여름호에 이어서 박인환의 시론과 시에 대해 논의하도록 한다. 지난 여름호에서 논의한 내용을 한두 마디로 요약하면, 초기 박인환의 시론은 다름 아니라 시민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비판적 리얼리즘 시론의 강조였다. 이 시론에 의해 그의 시 텍스트는 정치성과 사회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이념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정신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변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만다. 그의 시민정신이 한편으로는 사실적 리얼리즘(정치, 사회)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존주의로 나타난다. 예의 ‘희망과 불안’에 대응하는 시적 욕망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후기에는 사실적 리얼리즘, 실존주의에서 벗어나 모더니즘 시론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물론 모더니즘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억압이 없는 시적 원시림 세계이다. 시론과 시 텍스트를 통해 확인해 보도록 하자.
2. 박인환의 중기시론인 사실적 리얼리즘과 실존주의
박인환은 전쟁 시기인 1952년 6월에 <주간국제>에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이라는 시론을 발표하여 그 이전과 다른 시적 변모를 모색하게 된다. 그 변모는 해방정국의 시기가 결실을 거두기도 전에 6·25전쟁이 순식간에 암담한 시공간을 만든 것에 기인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문화 충격에 대한 응전으로써의 변모(시론)인 것이다.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중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인용하기로 한다.
1) 오든의 시는 이와 같은 비극에 그치고 있으나 그는 이 시를 냉안冷眼한 풍자의 목적에서가 아니고 인간의 모든 사건을 엘리엇이 말한 바와 같은 ‘변화와 복잡’의 연속으로 보았던 것이다. 황폐와 광신과 절망과 불신의 현실이 가로놓인 오늘의 세계에 있어서는 『황무지』적인 것이나 『불안의 연대』나 그 사상과 의식에는 정확한 하나의 통일된 불안의 계통이 세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현대의 사회(정치·문화)를 어떤 불모의 황무지적 관념으로 별견瞥見할 적에 거기에 필연적으로 구상되는 것은 현대에 와서 인간의 가능이 모든 도피성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힘(특히 어떤 천성적인 비극을 걸머지고 살아 나가는 시인의 힘)으로서는 필사적인 전력을 경주하여도 빠질 수는 없다. 오든은 그의 사회적인 책임은 시를 쓰는 데 있고, 인간에 성실하려면은 이 세계 풍조를 그대로 묘사하여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오든뿐만 아니라, 현대시의 발전을 위하여 한국의 일각에서 손가락을 피로 적시며 시의 소재와 그 경험의 세계를 발굴하고 있는 ‘후반기’ 멤버의 당면된 최소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박인환,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맹문재 엮음, 『박인환 전집』, 실천문학사, 2008, p254.
2) 우리들의 현실의 시야에 전개되어 있는 모순과 살육과 허구와 황폐와 참혹과 절망을 현대의 문명을 통해서 반영할 적에 우리들로 하여금 강요케 하는 것은 ‘황무지적 반동’이며, 전후적戰後的인 황무지 현상과 광신에서 더욱 인간의 영속적 가치를 발견하는 데 현대시의 의의가 존재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그룹 ‘후반기’의 대부분의 멤버는 T.S 엘리엇 이후의 제 경향과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느냐는 것이 오늘의 과제가 될 것이며 나의 표제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도 엘리엇의 영향을 입은 두 사람의 현대시의 개척자 오든과 스펜더의 단편斷片을 소개하는 데 조그마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박인환,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맹문재 엮음, 『박인환 전집』, 실천문학사, 2008, p257.
박인환은 1)의 글에서 리얼리즘 시론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 리얼리즘 시론은 현대 문명이 안고 있는 “통일된 불안 계통”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그 예로 든 것이 바로 엘리엇의 『황무지』이며, 오든의 『불안의 연대』이다. 특히 박인환은 오든의 시론에서 그의 시민정신의 근간이 되는 리얼리즘의 기능을 더욱 구체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오든에 의하면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시를 써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는 사회변혁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를 어떻게 써야 할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계 풍조를 그대로 묘사” 하는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사실적 리얼리즘을 의미한다. 박인환은 이러한 사실적 리얼리즘이 현대시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후반기 멤버들에게 “손가락을 피에 적시며, 시의 소재와 그 경험의 세계를 발굴” 하자고 권유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피’는 생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사실적 리얼리즘은 단순히 손재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쏟아내는 각오로 써야 하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이념적으로 사실적 리얼리즘을 크게 옹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해방공간에서 전쟁공간으로 전환되어도 그의 시민정신(리얼리즘)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다만 그 수법이 비판적 리얼리즘에서 사실적 리얼리즘으로 변모되었을 뿐이다.
예의 이를 잘 반영하고 있는 시 텍스트 중에는 「미래의 창부」, 「종말」, 「신호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미래의 창부」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전쟁이 머무른 정원에
설레이며 다가드는
불운한 편력의 사람들
그 속에 나의 청춘이 자고
절망이 살던
오 그대 미래의 창부여
너의 욕망은
나의 질투와 발광만이다.
향기 짙은 젖가슴을
총알로 구멍내고
암흑의 지도 고절孤節된 치마 끝을
피와 눈물과
최후의 생명으로 이끌며
오 그대 미래의 창부여
너의 목표는 나의 무덤인가.
너의 종말도 영원한 과거인가.
──「미래의 창부娼婦」 중에서
박인환에게 6.25전쟁은 그 어떤 비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지배해온 삶의 모든 양식을 해체시킬 정도로 큰 것이었다. 박인환은 그 충격적인 경험의 세계를 통하여 엘리엇이 강조한 ‘변화와 복잡’의 문명을, 오든이 강조한 ‘불안의 연대’를 온몸으로 수납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초기 시론에서 보여주었던 리얼리즘 기법도 급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초기 ‘시론과 시 텍스트’에서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제에 대하여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동시에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미래를 욕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기 ‘시론과 시 텍스트’에서는 이와 달리 허무적인 어조로 희망 없는 미래를 자기 부정적인 의식으로 노래하고 있다. 전자가 공동체적 희망을 긍정적인 어조로 노래했다면 후자는 개인적인 절망을 허무적인 어조로 노래한 것이 된다. 물론 이런 변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 의식은 양자兩者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전쟁이 머문 공간에는 모든 사물들의 의미가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미래의 창부」에서 알 수 있듯이, 삶의 공간에는 ‘불운한 사람들, 편력의 사람들, 잠든 청춘, 절망, 질투와 발광’ 등의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써 말이다. 더욱이 ‘미래의 새로운 신神’을 “미래의 창부娼婦”라고 하여 부정적으로 희화화하고 있으니 인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이 된다. 예컨대 “미래의 창부”가 “나의 무덤”을 요구한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물론 이렇게 된 원인은 전쟁에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박인환은 사실적 리얼리즘 기법을 동원해 불안의 근원이었던 전쟁을 크게 환기시키기에 이른다. 바로 “향기 짙은 젖가슴을/ 총알로 구멍 내고”라는 묘사적 언술이 그것이다. 생명과 성의 상징인 여성의 젖가슴과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의 상징인 총알을 사실적으로 결합시켜 묘사한 이 언술은 문명의 세계사적 불안정성을 강하게 환기시켜주고 있다.
물론 시론 2)에서 보여주는 내용도 시론 1)의 내용과 맥락상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시론 1)보다는 더욱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가령 “‘황무지적 반동’이며, 전후적戰後的인 황무지 현상과 광신”의 현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서술한다는 점이다. 그 서술 내용은 바로 “모순과 살육과 허구와 황폐와 참혹과 절망”이다. 그래서 시론 1)보다는 그 심각성이 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심각성을 어떻게 시로 창작해내느냐에 있다. 지금까지 박인환은 “엘리엇의 영향을 입은 두 사람의 현대시의 개척자 오든과 스펜더의 단편斷片을 소개” 하면서 사실적 리얼리즘을 강하게 주창해 왔지만 “전후적戰後的인 황무지 현상과 광신”에는 그들의 시론을 자신감 있게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박인환은 “‘후반기’의 대부분의 멤버는 T.S 엘리엇 이후의 제 경향과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느냐는 것이 오늘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전후적戰後的인 황무지 현상과 광신에서 더욱 인간의 영속적 가치를 발견” 하려고 하는 시적 주제를 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의 영속적인 가치”는 사실적 리얼리즘 기법으로 형상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인간의 영속적인 가치”는 휴머니즘에 대한 탐구 내용으로 모아진다. 그리고 이것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실존주의 기법이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리얼리즘 기법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다. 표현상으로는 시론 2)가 지속적인 리얼리즘 시론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영속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고 보면 바로 실존주의 시론이 숨어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공동체적 목표를 지향하는 정치성과 사회성에 대하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신의 존재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좀 비약이기는 하지만 실존주의는 주체성(나)을 중시하고 있으므로 낭만주의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낭만주의를 언급하는 이유는 낭만주의가 중기 이후에서 말기까지 그의 시론을 지배하는 정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시적 원시림 시론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말하면 시적 원시림은 리얼리즘보다는 모더니즘 경향을 지향한다.
박인환의 시 텍스트 중에서 실존주의 시론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눈을 뜨고도」, 「회상의 긴 계곡」, 「무도회」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을 간략하게 탐구해 보도록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과 초연硝煙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의 오늘을 살아 나간다.
……아 최후로 이 성자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의 회화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판
철없는 시인
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중에서
전쟁은 도시를 순식간에 정적과 초연의 암흑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그 암흑 공간은 인간의 모든 삶의 근본과 토대를 무너뜨리게 만든다. 그래서 암흑 공간에서는 삶에 대한 그 어떤 가치나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암흑의 세계에서는 암흑만 있을 뿐 그 어떤 광명의 세계를 꿈조차 꿀 수가 없다. 그만큼 절망적이고 충격적이다. 가령 그 암흑의 공간에서는 고통스러운 영원한 현재만 있을 뿐, 미래가 없다.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인식되고 있기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살아 있는 것”뿐이지 미래를 위한 그 어떠한 욕망도 가질 수가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회의와 불안”으로 모멸의 오늘을 견디는 것이다. 지나간 “청춘의 반역을 회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박인환은 이러한 암흑의 세계를 역설적으로 “성자의 세계”로 풍자하기도 한다. “성자의 세계”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자 대신에 망령이 판을 치고 있다.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에게 판/ 철없는 시인”이라는 언술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시인도 그 존재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순한 상태의 시체”처럼 살고 있을 뿐이다. 이럴 경우, 박인환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예컨대 나는 누구인가?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 삶과 죽음은 어떤 것인가? 전쟁 이전의 문명과 전쟁 이후의 문명은 어떻게 다른가? 등의 질문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전쟁이라는 한계상황에 던져짐으로써 인간 실존에 대한 경험을 온몸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해방공간에서는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인간의 가치”(「눈을 뜨고도」)가 전쟁 공간에서는 엄청난 무게를 지닌 시적 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3. 박인환의 후기시론인 모더니즘과 시적 원시림
전쟁이 끝난 후 박인환은 1955년 9월에 『선시집』을 출간하게 된다. 그의 『선시집』은 해방공간과 전쟁공간을 거쳐 약 10년 동안 써왔던 시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선보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선시집』 자서自序에 그의 총체적인 시론에 해당하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어 그 중요성이 더하다고 하겠다. 자서의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나는 10여 년 동안 시를 써 왔다. 이 세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참으로 기묘한 불안정한 연대였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 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
(…생략…) 나의 시의 모든 작용도 이 10년 동안에 여러 가지로 변하였으나 본질적인 시에 대한 정조와 신념만을 무척 지켜 온 것으로 생각한다.
(…생략…) 여하튼 나는 우리가 걸어온 길과 갈 길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분열한 정신을 우리가 사는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내 보이며 순수한 본능과 체험을 통해 본 불안과 희망의 두 세계에서 어떠한 것을 써야 하는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여기에 실은 작품들을 발표했었다.
──박인환, 「『선시집』 후기」, 맹문재 엮음, 『박인환 전집』, 실천문학사, 2008, p304~305.
자서의 시론에 언급된 내용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그 하나는 시인으로서의 삶의 역사가 세계사 내지 한국사의 상황과 거의 일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일치는 다름 아니라 “불안정한 연대”였다는 점이며, 혼란과 고통의 의미를 공유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의 시론이 한국과 세계와의 연관성 속에서 배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시인의 존재에 대한 정의이다. 그에 의하면 시인은 시로써 사회를 가꾸어 나가야 하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시는 개인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소산이 아니라 사회적 욕망을 대변하는 소산이다. 곧 사회적 이념을 대변하는 수단으로써의 시적 기능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도자와 정치가가 아닌 순수한 시인으로 사회와 싸웠다고 한다. 자기모순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창작 원리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불안과 희망의 두 세계에서 어떠한 것을 써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창작하는 것이다. 불안과 희망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 불안이 커지면 희망이 작아지고 희망이 커지면 불안이 작아진다. 그러므로 불안과 희망에 대한 시를 동시에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실제로 박인환에게 희망이 커지면 비판적 리얼리즘(시민정신)의 시가 창작되고, 상대적으로 불안이 커지면 사실적 리얼리즘의 시가 창작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 전자는 공동체적 욕망(정치, 사회)을 보여주고 후자는 개인적 욕망(자아, 존재)을 보여준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아예 희망이 사라지고 오직 불안만이 남게 되면, 실존주의의 시를 창작하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실존주의 시에는 낭만주의 정서도 다소 배어나기도 한다.
박인환에게 10년의 불안정한 연대는 곧 불안과 희망의 지속적 교차를 의미한다. 그의 사회적 싸움도 다름 아닌 불안을 희망으로 전환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적 욕망에도 불구하고 불안에서 희망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사정은 비슷했다. 그래서 그는 ‘불안과 희망’ 자체에 대하여 회의하기에 이른다. 그 회의에서 나온 것이 바로 모더니즘 시론이며, 그 모더니즘 시론이 지향하는 세계가 바로 시적 원시림이다. 시적 원시림은 사회를 지향하기보다는 개인의 내면세계, 곧 자아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 순수한 내면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을 지향할 때에 실존주의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낭만주의 정서가 본격적으로 시 텍스트를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박인환의 후기시론의 특성이다. 그 특성을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목마와 숙녀」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중략…)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와 숙녀」 중에서
이 텍스트는 시적 이미지를 신선하게 보여주는 모더니즘 기법으로 구조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 텍스트의 정서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낭만주의 정서이다. 또한 화자의 의식이 지향하는 세계도 정치, 사회 세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전쟁 공간에 던져진 실존의 세계도 아니다.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는 “페시미즘의 미래”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 “페시미즘의 미래”는 시적 원시림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세계이다. 예의 시적 원시림이란 억압이 없는 시적 자유의 공간, 개성의 공간, 시적 상상력 공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페시미즘의 미래”란 어떤 것일까. “페시미즘의 미래”는 단순하게 도피주의, 염세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텍스트에서 보면, “페시미즘의 미래”는 세속적 논리를 자아의 의지로써 극복하는 것이다. 세속적 세계는 이항대립적 의미를 근본으로 한다. 가령,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에서 ‘만나다/떠나다’, ‘죽다/살다’의 대립항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대립항에서 인간들은 ‘만나다’와 ‘살다’의 기호를 더 욕망한다. 인간들은 그 욕망 때문에 결국 불안하게 살게 된다. 또한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에서도 그 대립항을 찾아볼 수 있다. ‘즐겁다/외롭다’, ‘고상하다/통속하다’의 대립항이 바로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은 ‘즐겁다’와 ‘고상하다’의 기호를 더 욕망한다. 이에 따라 결국 억압 받는 삶을 살게 된다. 곧 욕망의 억압이다. 그래서 박인환은 그러한 대립적 삶의 방식을 버리고 그와 무관한 순수의 내면적 삶을 욕망한다. 말하자면 대립적 삶의 극복이요 초월인 셈이다.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이 바로 그러한 욕망의 시작임을 알려준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개의 바위틈”은 ‘불안과 희망’의 대립항을 상징한다. 예의 그 대립항을 극복하게(지나게) 되면 “청춘을 찾은 뱀”처럼 자유와 개성을 만끽하게 된다. 그의 시론으로 말하자면 곧 낭만주의적 시의 원시림 공간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페시미즘의 미래”는 자유와 개성을 누릴 수 있는 시적 원시림 공간으로 가기 위한 출발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미소를 가꾸다』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이며 서울시립대 강의전담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