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禁忌) 사항 세 가지
한명희
나이 들고 보니 이 친구 저 친구가 “노인이 지켜야할 도리”라는 메일을 보내오고 있다. 첫째내용은 노후에 외롭지 않게 살려면 “말을 적게 하고, 간단하게 하고, 잔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음은 “남을 이기려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노인이 되면 대개 고집이 세어지고 아집에 사로 잡혀 남을 이기려고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기지 말고 저주라는 것이다. 그동안 나도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어서 억지를 많이 부렸다. 그러다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알고는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이기려 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파란불이 깜박 깜박대는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려다가 교통사고를 당할 뻔 했고, 전동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난간에 가슴을 부딪친 일도 있다. 그 일을 겪고 나서는 “매사에 서둘지 말라”고 나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다.
나는 눌변이어서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현직에 있을 때도 훈화는 물론 인사말도 비교적 짧게 하였다. 그래서 학생들로부터는 물론 선생님들로부터도 비난은 받지 않은 것 같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남이 말할 때는 중간에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라.” 그리하면 친구도 얻고 사회생활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다. 내 이야기를 다 잊어버려도 좋으나 이 말 한마디는 꼭 기억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랬던 나인데, 나이 들다보니 말이 많아지고, 목소리도 커지고, 가끔은 남의 말을 칼로 무 베듯 잘라 상대방을 언짢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귀가 어두어지다보니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다. 어떤 때 친구가 전화를 걸어오면 그도 나처럼 귀가 어둘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목소리를 높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목소리 좀 낮추라는 아내의 잔소리를 예외 없이 듣게 된다.
다음은 후당(後唐)의 정치가 풍도(馮道)가 한 말이라고 한다.
-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 ;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
-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 ;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 안신처처우(安身處處宇 ;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 하리리.
한마디로 입을 닫고 혀를 감추면 편안하게 살 수 있으니 말을 삼가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필요한 말조차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말을 아끼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이라는 뜻이다. 내가 말할 때 남이 끝까지 들어주길 바라듯이 상대방이 말 할 때는 끝까지 경청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리고 남을 칭찬하는 말, 희망을 주는 말은 좋지만 남을 비방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말은 삼가야한다.
다음은 가능하면 논쟁을 피하고, 논쟁을 하게 되더라도 이기려고 억지는 부리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나는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쓸데없는 일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잘난 척도 했고, 친구들과 다투기도 하였다.
논쟁을 하다보면 이기든 지든 기분을 상하기 십상이다. 논쟁에서 이기면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친구를 잃기 쉽고, 논쟁에서 지면 기분은 상하지만 친구를 잃을 염려는 없다. 그래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 같다. 이겨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저 주어 상대의 자존심을 세워줌으로서 그의 마음을 얻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라는 뜻일 게다.
한번은 친구와 논쟁을 벌이다가 감정싸움이 될 것 같아 내가 무조건 졌다고 백기를 든 일이 있다. 그랬더니 친구가 “이제는 나하고 말하기조차 싫으냐?” 고 역정을 내어 당황한 일이 있다. 저줄 때도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요령이 필요할 것 같다.
또 논쟁에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해서,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까지 져주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6·25전쟁은 북한이 일으킨 남침전쟁이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는 남침전쟁이 아니라 북침전쟁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는 논리적 판단을 통하여 반드시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산이 아름다우냐? 바다가 아름다우냐? 와 같은 주관적 판단을 대상으로는 싸울 필요가 없다. 그럴 때는 저주면 된다.
좀 오래전 일이다. 파란불이 깜빡 깜빡대는 횡단보도를 급히 뛰어 건너려다가 급 발진한 차에 부딪칠 번 한 일이 있다. 그 날 얼마나 놀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할 일 없는 노인네가 무엇 때문에 그리 서둘렀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일이다. 회기역에서 1호선으로 환승을 하기위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전광판에 ‘당 역 접근’ 이라는 문자가 보였다. 나는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때 한 젊은이가 갑자기 내 앞을 가로 막았다. 그도 전동차가 들어온다고 하니까 계단을 뛰어 내려가려고 한 것 같다. 그를 피하기 위하여 왼손으로 난간을 붙잡는 순간 내 바른쪽 가슴이 난간에 살짝 부딪쳤다. 그날은 불편함이 없었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가슴이 뻐근하여 정형외과를 찾았다. 병원에 가니 무조건 사진부터 찍는다. 그리고는 설명도 없이 약을 지어주었다. 약을 먹고도 가슴이 계속 아프면 다시 정밀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그 후로는 파란불이 깜빡대는 횡단보도에서는 물론 길거리에서도 뛰지 않는다. 물론 전동차를 타기위하여 계단을 뛰어내리는 일도 없다. 매사에 서두르지 않고 신중을 기하고 있다.
그동안 고치지 못하였던 그릇된 생활습관을 바로 잡기 위하여 금기사항 세 가지를 정하여 놓고, 하나하나 실천하고 있으니 늦게나마 철이든 것 같아 다행스럽다.
약력
- 교육부 편수국장(전)
구리문인협회 회장(전)
서울교원문학회 회장(전)
경기도문인협회 자문위원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월간 ‘문학저널’ 신인상 수필 심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