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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역사연구회, 양달사 현창사업 추진보고 및 국가위란과 영암인 학술발표회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영암 인물 총망라
영암인물 자긍심 키워
'영암역사연구회 제10차 학술발표회' 가 지난 23일 오후 6시부터 8시 30분까지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고려직업전문학교’ 본관 메타버스 강의실에서 열렸다.
이번 학술발표회는 ‘영암역사연구회’ 가 주최/주관하여 제1부 참석회원 소개, 본회경과 및 사업보고에 이어 2부 학술발표, 3부 만찬 순으로 진행됐다.
1555년 5월 25일 영암성대첩 기념식을 며칠 앞두고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양달사 현창사업 이영현 사무국장으로부터 ‘조선 최초 의병장의 활약사항’ 과 ‘양달사 현창사업 어디까지 왔나’ 를 고찰을 해봤다. 또한 조선시대 때 발생한 국가위란과 여기에 활약했던 영암의 인물에 대한 김형석 건축가로부터 ‘국가위란과 영암인 임진왜란.병자호란을 중심으로’ 있었던 역사를 더듬어 봤다.
이영현 사무국장은 “양달사 현창사업회는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의 위대한 업적과 절의정신을 기리고 선양하며,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을 물론 국민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을 두고 있다” 고 사업에 대해 설명했다.
이 사무국장은 “양달사 현창사업회는 1555년 5월 25일(양력 6월 13일) 6천여 왜구의 침입으로 백성들의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려있을 때 영암군민과 인근 지역 주민들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전라남도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영암인의 기개를 드높인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의 위대한 업적을 널리 알리고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고 밝혔다.
전남 영암군 중앙로 37-1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양달사 현창사업회’ 는 주요사업으로 ▲의병장 양달사 업적 선양 및 계승발전 사업 ▲영암대첩 기념사업 및 영암성 복원(남문건립 등) ▲충효와 도의정신을 기리는 사업 ▲정부.자치단체 등과의 유대를 통한 지역발전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양달사 의병장의 활약상에 대해 알리면서 현창사업회서는 양달사 관련 유물이나 기록 등을 상시 수집하고 있다. 이영현 사무국장은 “양달사 현창사업회가 현재까지 영정제작 및 동상건립과 동화책 발간, 시묘공원 정비사업 1차 완료(여막 설치 및 조경사업 추진), 사당 건립을 현창사업회서 진행했거나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영암성대첩 기념사업회에서는 영암성대첩 기념식 및 축제 개최, 영암성대첩 기념 조례 제정, 영암성 복원 사업(시굴조사, 문화재 지정, 남문 건립, 성벽 복원, 영암성대첩길 조성), 영암성대첩 관광자원화 사업 등을 계획 및 추진 중이라고 돌아가는 상황을 전했다.
이 사무국장은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아직도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 외에는 찾아 볼 수 없어 연구 및 발굴하고 이를 정립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며 “현창사업과 기념사업회에서는 이론적인 고증과 공간 재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 등을 펼치면서 작업에 나서고 있다” 고 했다. 이 사무국장은 “안타깝게도 의병장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조정과 관리들에게 외면당하다보니 현재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을 정도로 빈약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데다가 460년 전 왜구의 침입을 막고 영암성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한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면서 “우리가 그 훌륭한 분에 대한 업적을 기리고, 그의 공을 빛나게 해주려 면은 여기에 게신 분들께서 양달사 현창사업에 많은 관심과 성원과 협력을 부탁드린다” 고 했다.
이 사무국장은 양달사 현창사업회와 영암성대첩 기념사업회에서는 성벽 및 남문 복원에 나서고 있으며, 복원에는 많은 예산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영암성길 및 대첩길 조성은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이또한 많은 예산과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월출산을 기억하자며 국립공원 월출산과 영암산성, 영암성의 조성 의미와 성에 관련된 역사를 기억하고 이때 영암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남암 양달사 의병장의 활약상황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자랑스럽게 여기자고 당부했다.
양달사 현창사업회는 1555년 5월 25일9양력 6월 13일) 6천여 왜구의 침입으로 백성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 영암군민과 인근 지역 주민들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전라남도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영암인의 기개를 드높인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의 위대한 업적을 널리 알리고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양달사 현창사업회는 2018년 2월 16일 서울에서 처음 영암군역사연구회 제8회 학술발표회를 통해 ‘국난극복을 위한 영암인의 의병전쟁 양달사 중심으로’ 발표회를 가졌다.
2019년 6월 28일 나주에서 양달사 현창사업회 발기인 준비 모임(1차)을 시작으로 2019년 7월 9일 서울에서 양달사 현창사업회 발기인 준비 모임(2차)을 가졌다.
이후 2019년 7월 20일 영암 도포에서 양달사 현창사업회 발기인 준비 모임(3차)을 갖고, 7일 뒤인 2019년 7월 27일에 양달사 현창사업회 발기인 모임을 영암읍 ‘궁전회관’ 에서 30여 명이 참석하는 가운데 ‘정관승인, 임원선출, 창립선언문 결정, 사업계획 및 사업수지예산 결정’ 등을 확립했다.
또한 2019년 9월 25일에 양달사 현창사업화 창립총회를 ‘영암군민회관’ 에서 200여 명이 참석, 양달사 학술세미나를 개최했으며, 이날 전남대학교 노기욱 교수(호남의병연구소장)가 나와 좌장으로 나섰다. 그리고 주제발표에 광주교대 김덕진, 전남대 정창현 교수가 했다. 그리고 종합토론에는 전라남도 홍보위원 이돈삼 위원이 나섰다.
1555년 5월 25일 형제들과 의병을 일으켜 영암성을 포위한 왜구를 물리친 후 홀연히 사라진 의병장 양달사, 1555년 12월 2일 조선왕조실록에 ‘공이 있는 양달사는 어디로 갔는가(有功達泗歸何處)’ 라는 한탄스런 시구가 적힌 지 464년 만의 일이다.
본 사업회는 제18.17대 전라남도 교육감을 역임한 정만채씨가 회장을 맡고 있다. 정 회장은 10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을 괴롭힌 일본의 오개 근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양달사의 충효정신을 널리 선양해 우리 영암이 의병의 고장이고, 양달사가 호국영웅임을 널리 널리 아리는 데 앞장 서 나갈 것을 다짐한다.
제10차 영암역사연구회 학술발표회 발제자로 나선 김형석 건축가(신북 명동리 출신)는 ‘국가위란과 영암인(임진왜란.병자호란을 중심으로)’ 주제로 학술발표회를 했다. 위태롭고 어지러운 영암의 위란(危亂)은 어떤 것이며, 누가 이 사태를 진정시켰는가에 대한 정확한 문제를 추론하고 짚어봤다. 조선시대의 국가위란에 대한 그 위란을 막아내고자 한 희생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보고, 그때 활약했던 의병들의 희생적인 호국정신을 재조명해보고 기리기는 시간을 마련했다.
김 건축가는 강의실에 마련된 모니터를 통해 조선시대에는 우리 민족이 겪었던 가장 쓰라린 상처를 돌이켜보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고 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당파 싸움과 패도정치로 인하여 국방을 소홀히 함과 동시에 북방에서만 일어났던 외세의 침략이 남쪽에서 일어남으로써 속수무책으로 감내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김형석 건축가는 “영암의 의병장 하면 조선 최초란 타이틀이 따라붙은 남암 양달사 의병장을 빼놓을 수가 없다” 며 “양달사 의병장은 무과에 급제하고 중시에 합격한 양달사 의병장은 해남 현감으로 부임하여 모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 도포 봉호리로 가서 시모 중이었는데, 1555년(명종 10)에 을묘왜변이 발생해 이에 양달사는 충효일체(忠孝一體)라 하여 자신의 형제들을 모아 주변의 주민을 설득해 의병대를 구성, 영암성이 있는 향교로 가서 화려한 옷을 입혀 연희를 벌이고, 왜군들이 참관하는 사이에 의병들과 관군들이 함께 공격하여 크게 왜군을 물리쳤고 또 분격하는 왜군을 물이 없는 진흙탕(둔더리 방죽, 지금의 공설운동장)으로 유도하여 다시 한 번 크게 승리하는 영암성대첩에 공을 세웠다” 고 했다.
김 건축가는 “영암성을 함락시키고자 6000여명의 왜구를 이끌고 침략한 왜적들은 영암성 일대를 휘젓고 다니며 소동을 벌었다” 고 했다. “이러한 혼돈과 무질서의 위태롭고 어지러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인물은 의병장 양달사밖에 없었다” 고 했다.
김 건축가는 “영암의 재산을 약탈하며 군민들을 죽이고 괴롭힌 왜적들의 무참한 잔행에 군민들은 이를 막아달라고 해남 현감을 지닌 양달사에게 영암을 지킬 수 있는 의병장을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며 “주민들은 영암성이 왜구들한테 뺏기면 모든 고을 민들이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없다고 판단해 긴급 상황을 캐치하고, 19세 때 무과에 급제한 양달사에게 의견을 들여 양달사의 지시대로 따랐다” 고 했다.
“의협심이 강한 양달사이기에 그는 마을주민들한테 피 묻은 옷을 흔들어 보이며 군중들을 자극하여 모아 훈련을 시킨 뒤 의병대를 구성해 영암성으로 달려가 왜구들과 싸웠다” 고 했다. “마치 금삼(錦杉)의 피를 연상시키는 이런 교묘한 연출은 군중들을 선동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고 했다.
김 건축가는 “성웅 이순신이 매우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정의로운 사람이었다면, 의병장 양달사는 매우 정치적이고 야심만만하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고 했다. “위란에 처한 나라를 하늘이 돕는다고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영암의 위란은 하늘이 돕는 것이 아닌 오직 의병장 양달사가 영암을 도왔다” 고 봤다.
또한 임진왜란의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해전을 함께한 신북출신인 정운 장군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고, 양무공 김완 장군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 일생을 국가가 위태로울 때 그가 있었다고 했다. 정운 장군에 대한 상세히 기록한 자료들이 많았을 정도로 정운 장군의 활약상이 아주 컸음을 이번 책을 쓰면서 알게 됐다고 했다.
또한 서호출신인 김완 장군의 작은 아버지인 은호사의 주벽 김극희 장군이 명랑해전을 이순신과 함께 계획하는 등 그의 가문과 행적은 말로 다할 수가 없다고 했다. 김극희 장군은 그의 조카 김완 장군과 함께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했던 공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의 공적비와 사당은 서호 화소와 몽해에 건립되어있다고 했다.
또한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한 도포출신인 충무공 손훈립 부자와 손응호, 손응록 삼충정려가 빛나고, 충숙공 박형준과 두 아들 벅효남, 박호남의 희생이 호남을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최희급은 진주성에서 장형 최희열, 둘째형 최희열, 막내 동생 최희량과 아들 최진, 최연, 최선 3형제와 조카 최환 등 일가의 장정 8명과 함께 순절하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고 했다. 이들의 큰 활약으로 진주성을 지켰고, 결국은 호남이 살아남았다고 했다.
또한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한산대첩에서 박성춘과 거북선 우 돌격대장 박이량과 박선립의 희생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금산전투의 희생과 웅치이치전투에서 문명희 등은 손가락 살이 문드러져 피가 나오도록 활을 당기며 싸웠다고 했다.
또한 향토를 지키고자했던 영암의 의병들은 서호출신인 전몽성을 필두로 아우 전몽진, 전첨사와 유장춘 생원인 서희서, 개인 자격으로 싸움에 나선 김덕치, 류희춘, 서건, 김덕란, 박문립 등이 뜻을 모아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영암.강진에서 노략질하는 왜구를 영암과 강진의 경계인 율치(밤재)에서 매복 작전으로 적 수백 명을 격멸하여 영암.강진의 안정을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의사들은 전몽성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유장춘, 박문립을 좌우 부장으로 삼아 울출산 요해처에서 적진을 살피던 중 목포에서 약 30Km 내륙으로 올라온 영산강변에 위치한 해암포(지금의 학산면 은곡리 석포)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파하고 유점동(지금의 학산면 매월리 놋점) 전투에서 분투하가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때 이충무공이 명랑해전을 계획하면서 영암 등지의 해안에서의 왜적의 준동을 막음으로써 명랑해전에 집중하여 해전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했다.
또한 병자호란 때 볼모로 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18장사의 한 사람인 김여준 장사는 어느 날 호왕(胡王)이 잔치를 베풀어 마음껏 놀게 하고 씨름도 붙였는데 이때 김여준 장사는 호장 우직거와 한판을 붙게 되었는데 김어준이 말하기를 “씨름을 하다 잘못하여 죽어도 좋습니까” 라고 물며 호왕은 힘과 기량이 뛰어난 우지기를 믿고 “좋다” 하고 쾌히 승낙하였는데 이에 김여준은 씨르으로 호장 우직기를 단숨에 섬돌에 찍어 죽인 호쾌한 일화는 우리 영암인들의 긍지일 뿐만이 아니고 조선인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 쾌거이기도 하다고 했다.
김 건축가는 조선시대 때 국가위란에 직접 몸을 바친 영암인들의 한 명 한명 나열하며 “용기라고 해서 꼭 전쟁터에서 돌격 앞으로 외치며 제일 앞서나가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며 “불안감을 주며 위험이 따라서 심신의 통제를 잃기 쉬운 상황에서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씩씩하고 굳세게 행동한다면 그것이 용기 있는 것이라고 이런 용기를 갖춘 사람이고 그런 용기를 갖춘 사람들이 호남을 지켰고 나라를 구했다” 고 했다.
김혁석 건축가는 ‘국가위란과 영암인, 임진왜란.병자호란 중심으로’ 책을 펴낸 것에 대해 “영암역사연구회 조복전 회장이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영암의 인물들의 활동한 내용을 조사해보라는 임무를 줘 각종 자료를 보고 모아서 쓰게 됐다” 고 했다.
김 건축가는 “1510년 삼포왜란부터 1694년 갑술옥사까지 184년간의 우리 선조 영암인들의 활동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하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고 했다.
김 건축가는 “영암에 세거(世居)하면서 비록 몸은 객지에 있거나 고향을 떠나서 산다할지라도 고향을 버릴 수 없고, 마음속에 자리 잡은 포근한 고향은 누대(累代)를 이어오면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며 “글로벌화한 지구촌 어디에서 살더라도 고향을 잊을 수 없을 것이며, 나의 조국은 대한민국이고 고향은 전라남도 영암이라는 것은 지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구촌 어디에서라도 이 글을 읽는다면 모두 우리의 조상에 대한 글을 읽는 것” 이라고 했다.
김 건축가는 “향토사회에서 일러난 일과 나라가 위태로울 때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선열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해보는 보람 있는 일을 하였다” 고 생각했다.
김형석 건축가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용기이고, 그것은 바람직하고, 불안에 떠는 자신을 우뚝 세우는 것도 용기이고 바람직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 우리 영암인이였다” 고 했다. 또 “조난당했을 때 가방에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동료와 함께 나는 것도 용기이고, 그것도 아름답고, 영암성을 둘러싼 왜적의 공격을 뚫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왜구들과 맞서 싸우는 일도 또한 용기이고 그것도 아름답다고 본 영암인들의 용기는 호남을 지키고 나라에 안정과 평화를 불러들었다” 고 했다.
김 건축가는 “우리 주변에 세계화이니 변화니 개혁이니 혁신이니 선진화이니 하며 수많은 정치 슬로건이 넘쳐나고 있지만, 우리는 되물을 줄 알아야한다” 며 “도대체 무엇과 누구를 위한 세계화이고 변화이며. 개혁이고 혁신이며 선진화인지를,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용기를 내고 열의를 쏟지만 나중에 만나고 싶지 않은 상황을 만나게 되는데 김완 장군 등 장군이나 양달사 등 의병장과 의병들은 진정한 외침을 하여 그의 진정성을 믿고 따랐다” 고 했다.
“국토가 난리가 나서 파괴되고, 크게 가물고 화재가 나고, 왜놈들이 쳐들어와 국가를 파괴할 때면 마땅히 백분의 나라와 백분의 백성들을 모시고, 백분의 군민들과 함께 백분의 군신을 청하여 영암 지키기에 나서라 했던 양달사 의병장의 의협심은 국난을 타개해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보여준 일이었다” 고 봤다.
우리나라 불교는 외적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위란에 처했을 때 스님들이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했다. 고려 때 처인성전투에서 승장 김인후 스님이 몽고군 장수 살라타이를 사살함으로써 몽고군이 물러났고, 임진왜란 때는 서산 사명대사가 풍전등화와 같던 나라를 구했고, 병자화란 때는 백암 각성대사가 남한산성을 축성하고 항마군을 이끌고 호국불교의 전통을 빛냈다. 만해 한용 스님은 3.1운동을 주도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런 것처럼 이순신 못지않게 그 이전에 조선 최초 의병자인 양달사는 그때 을묘왜변 당시 6천여 명의 왜구들과 맞싸워서 그들을 물리쳐 영암성 함락을 막았고 지역 안정과 나라 평화를 불러들이는 영암대첩은 그들 못지않은 훌륭한 공과였다고 봤다. 또한 진주성까지 가서 전투에 임한 분들의 희생이 호남을 지켰고 나를 구했다고 고찰했다.
김형석 건축가는 “영암의 호국성지의 영암성을 발굴 및 복원하고, 호국정신으로 나라를 지킨 역사 속 양달사 의병장을 연구 조사하는 일이 필요하고,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호국성지 영암성순례법회를 정기적으로 실행한다면 새롭게 호국영암성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 될 것” 이라고 봤다.
김형석 건축가는 “현재 우리나라는 지역감정, 빈부격차, 노사갈등 등 사유의 차이에서 오는 위화적 요소로 인해 불신과 질시가 사회에 만연하고,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를 자처하는 논객들의 상극적 대립은 사상 편향자릉 양산해 국민 통합의 크나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면서 “코로나19 사태는 전 세계를 질병 공황 속으로 물아 넣고 우리나라도 예외 없이 직격탄을 맞아 국민건강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또 나라 경제를 최악의 상태로 끌어내렸다. 이렇게 국가가 위란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은 국민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탁상공론과 정쟁만을 일삼으며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민 화합에 역행하는 후안무치한 작태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다” 고 봤다. “이런 반면에 양달사 의병장 같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우리 영암인들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돼 사회 병리적 현상을 치유하고 새 기풍을 진작해 국민들이 아나갈 바를 밝혀줬던 인물로 귀감이 된다” 는 김형석 건축가의 신념이다.
김 건축가는 “특히 양달사는 장독샘에 깃발을 꽂아 물이 나오게 하여 갈증을 달래주면서 사회정의가 바로서고 혼돈과 절망을 극복하는 민족 대약진의 발판을 마련해줬다” 며 “우리 선배 시민 세대들이 국가 중흥의 힘찬 게 깃발을 높이 들어올 때 나라의 앞날이 함께 밝아올 것” 이라고 했다.
또 “양달사 의병장은 마을주민을 모병하여 복수의 의병장이라는 이름을 쓰고 영암성이 위란에 처한 사실을 접하고 의병들과 함께 영암성 전투에 참전하여 격렬한 싸움에서 대첩(大捷)의 의병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 했다. 1000명도 안 된 의병으로 6000여명의 적군을 물리쳤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될 정도라고 훌륭한 공적으로 추겨 세웠다.
김 건축가는 “양달사 현창사업회와 함께 위기에 처한 영암을 사즉사(死卽死)의 결기로 참전하여 장렬하게 싸워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양달사 의병장을 재조명하여야한다” 고 했다. “영암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양달사 의병장의 충효정신을 깊이 새기고 영원히 기려 후세에 전해 나라사랑의 근본을 심어야할 것” 이라고 했다.
김 건축가는 “5월 25일 양달사 영암성대첩 기념식은 의병장 양달사는 위기의 나라를 구하고자 참전한 숭고한 충효의 정신을 높이 기리고 추모하는 일은 당연 하지만, 마음에만 새기고 지나칠 것이 아니라 널리 알리고 펼쳐야할 것” 이라면서 “금번 양달사 의병장 기념식 행사를 맞아하여 영암성과 장독샘의 얼을 재조명하여 영암은 물론이고 전 국민이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고 말했다.
행동만이 위란(危亂)에 처한 국가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영암의 열사들, 행동주의자이기에 호남과 영암이 바로설 수 있었다. 그때의 고을 군수(현감)와 장수들은 왜구들한테 겁을 먹었지만 행동주의자 양달사 의병장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망설이거나 떨지 않고, 굴하지 않은 용기를 내어 의기양양하게 당당히 싸웠다.
김 건축가는 “양달사가 조선 최초의 의병장이라는 타이틀을 붙게 된 것은 그가 이릴 적부터 의협심이 남달라 그는 활쏘기를 좋아하며 놀았고, 그때부터 그는 애국심을 키웠던 위태롭고 어지러운 상태에 빠진 나라의 위기를 보고 내가 벗어나게 하겠노라고, 나라를 지키겠노라고, 위기의 순간 나라를 구하고자 19세 어린 나이에 그는 무과 시험을 봐 급제해 나라의 수호자가 되겠다” 며 의협심을 키웠다고 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고 해남 현감으로 재직하다가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그만 관직을 그만 두고 시묘살이(여모살이)에 들어갔는데 이때(1555.5월) 왜구들이 영암성을 함락하고자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묘살이를 하던 양달사는 하던 일 멈추고 왜구들과 싸울 의병들을 모집하여 의병대를 조직해 영암성으로 진군했다” 고 했다.
영암성이 6천여 명의 왜구들로 포위된 상태에서 양달사 의병장은 뛰어난 지략과 진략으로 왜구들을 초토화시켰다. 양달사 의병장과 의병으로 자처한 주민들의 호국(護國) 정신이 영암을 지켰고, 나아가 나라의 위태로움을 막아냈다. 만약 그때 영암성마저도 함락되었다면 영암지역은 물론이거와 나주성도 쉽게 함락되어 결국은 호남일대가 왜구들의 침략으로 쑥대 밭이 될 만큼 공포의 지역, 환란시대가 됐을 것이라는 김형석 건축가의 판단이다. 국가위란을 막아내는 영암인이 있었기에 호남일대는 환란시대를 맞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고 확신했다.
김형석 건축가는 “나라를 지키는 숭고한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영암성대첩, 영암성을 지나갈 때마다 궁금했던 장소로 마침 방문할 계기가 되어 한 번 다녀왔는데, 오늘 이렇게 ‘국가위란과 영암인’ 이란 주제로 학술발표회를 하게 된 것에 대해 영광으로 생각한다” 며 “국가위란을 막아내기 위해 영암지역에서 활약했던 의병 역사를 재조명하고 의병장 양달사 장군과 의병의 넋을 추모하면서 오늘 여러 분들 앞에서 학술발표회 기회를 준 것에 대해 무한한 자랑으로 생각한다” 고 했다.
그때 우리 의병들은 무기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삽, 괭이, 쇠스랑, 낫, 죽창 등등을 들고 전쟁터에 나섰다.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려는 피 끊는 용기가 여러 역사서에서 엿볼 수 있다고 했다.
김형석 건축가는 “보통 의병장하면 홍의장군을 손을 꼽는데 의로운 이름마저 잘 알려지지 않은 양달사 의병장을 다시 재조명해서 알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고 했다.
조선 최초 의병장이란 타이틀이 붙어도 왠지 다른 의병장이 더 알아주고 알려지고 있고, 심지어 조정에서도 그 큰 공적을 세운 양달사 의병장임에도 간신들의 의해 감춰버린 안타까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의병활동은 고향 터전 외에도 호남의 곡창을 지키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하닌 내 집, 나의 터전보다는 나라를 더 지키려는 크고 숭고한 신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영암성대첩에 크게 공을 세운 사람들의 혼이 서린 조선 최초의 양달사 의병장을 고장 ‘영암’ 을 추천한다고 했다.
충효(忠孝) 열의 상징인 영암, 양달사 의병장은 충효의 인물을 낳은 영암이다. 충효의 상징인 그는 3충(忠) 3효(孝)를 보여줬다. 나라에 충성하고, 고을에 충성하고 마을에 충성했다. 그는 또 국민에 효심을 보여줬고, 고을 민에 효심을 발휘했고, 부모에게도 효심을 극진히 했다. 충효는 구국의 길임을 몸소 실천한 양달사 의병장과 그를 따랐던 의병들은 국가위란에 빠진 것을 다시 건져낸 영암인의 정신이 흐른 영암은 ‘충효의 길, 효의 길, 구국의 길’ 이 영암성을 위주로 하여 조성돼 있다. “걷기대회를 구지 아니 하여도 마음으로 그 길을 더듬어보는 영암인이 됐으면 한다” 고 했다.
감 건축가는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서 위란은 수없이 일어났고, 그 위란 중에는 영암성을 함락하고자 6천여 명의 왜구들을 몰고 쳐들어온 것을 단숨에 영암의 위태로움과 어지러움을 막아내고 진정시켰던 일이야말로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큰 부분에 해당된다” 고 봤다.
김형석 건축가는 “나라가 위태롭고 어지러울 때 우리 영암인들은 먼발치서만 보면서 손만 놓고 있지 않았다” 며 “영암인들은 국가위란에 직접 몸을 바쳐 구국의 심정으로 나섰고, 그들의 희생으로 인한 호남을 지킬 수 있었고, 국민의 안정과 나라의 평화를 기여했다” 고 했다. “아마 전투에 나선 영암인들이 없었다면 호남은 상상할 수 없는 왜구들의 피해를 받았을 것” 이라고 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말을 하는데 그 중심에는 영암이 있었다” 고 했다.
영암역사연구회 조복전 회장은 “양달사 의병장에 관한 고찰과 국가위란에 직접 나선 영암의 인물과 활약사항에 대해 재조명해보는 데 목적도 있지만, 회원들한테 자긍심을 고취시켜주기 위해 이번 학술발표회를 가진 이유” 라고 말했다.
조복전 회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영암은 토착민들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영암을 고대문화를 이루었다” 며 “영암 곳곳에 고인돌, 혈거, 청동검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을 정도로 찬란한 역사문화를 이룰 정도로 미풍양속을 행해왔다” 고 말했다.
조 회장은 “이러한 풍조에서 영암인은 결혼을 통한 혈연공동체를 형성하고 누구든 만나서 혈연관계를 따져보면 사돈이 되고 사돈네 8촌이 된다” 고 했다.
조 회장은 “또한 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비가 안 오면 월출산 천황봉이나 산성대에 올라가 기우제나 산신제를 지냈고 남해당에서는 해신제를 지낸 민족이었다” 고 했다.
조 회장은 “외적이 쳐들어오면 국가에서 부르지 않아도 이불깃 찢어 머리끈 동여매고 무기를 들고 나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고, 내 고향을 지켜온 충절이 있었다” 고 말했다. “바로 의병을 일으킨 양달사, 전몽성과 그의 형제, 박대기 3부자 등이 그렇게 순국하였다” 고 덧붙였다.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그의 훌륭한 업적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상예편(賞譽篇)은 없어 보인다. 상예란 말은 훌륭함을 선양하고, 그 명예를 존중하며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것을 말한다.
영암 사람들은 이런 인물을 보지 못했구나, 큰 종족이 비록 쇠퇴해졌다고는 할지라도 영암사회에 다시 이런 인물이 있었구나, 양달사가 위기에 처한 고을 지켰으니 양달사는 이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부합된다는 겸형석 건축가의 생각이었다.
양달사 의병장을 한 시대의 한 인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김형석 건축가는 “양달사 의병장은 구국의 인물이면서 한 시대를 평정했던, 그는 세계적인 인물로 평가해야한다” 고 했다. “양달사 의병장을 볼 때 단면만 보지를 말고 반드시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 했다. “나무만 보면 숲을 보지 못하듯이 한 사람의 단면만을 보고 그를 평가했기에 조정과 일부에서는 양달사 의병장의 공적을 자신들의 공적으로 돌리거나 일개의 의병으로 취급하고 공적을 낮게 평가해 양달사 의병장은 숨은 공신으로 묻혀버렸다” 며 “일부만을 보고 전체를 평가하여 사람을 평론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양달사 의병장 한 사람으로만 보지를 말고 전체를 두고 그를 본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인물임을 알게 될 것” 이라는 ‘제10차 영암역사연구 학술발표회 국가위란과 영암인’ 발제자로 나선 김형석 건축가의 강론이었다.
양달사 의병장은 한 개인, 공으로 자신을 빛내기 위한 일이 아닌 그때 의병으로 나선 분들의 결과라고 여겼으며, 한 고을만을 지키기 위한 의병장으로 자처했던 것이 아닌 나라 전체와 국민 모두를 생각하면서 전쟁터에 임했다고 했다. 영암성이 왜구들로 위태로웠을 때 성을 지킨 고을 군수나 영암성 함락을 막기 위해 지원군으로 나섰던 사람들은 겁을 먹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안절부절 하며 쩔쩔맬 때 양달사 의병장은 왜구의 공포에 불안하거나 떨지 않고 용기가 더 충천했다고 했다.
그때의 영암성으로 달려간 의병, 민간 지원군으로 자청했던 주민들은 “나라를 구하라, 지역을 지켜라” 하며 남도의 중심에 위치한 영암 의병장과 의병들은 다시금 영암성 전투에서 나라를 구하고, 지역을 지키기 위해 의연하게 일어선 남도의 의병들의 전신과 그 의미를 기억하는 것은 난세를 헤쳐 나가는 교훈이자 진리라고 했다.
1555년 5월 왜구들은 서남해로 들어와 곳곳을 침략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다쳤다. 사람만 피해보는 것이 아닌 곡식과 짐승 등을 약탈해갔다. 인근 성을 함락하고서 영암성을 뺏으려는 왜구들의 야심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왜구들은 호남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으로 곧바로 남해바다를 거쳐 전라도 연안으로 침략했다.
가족과 집안, 그리고 지역민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살신성인으로 자세로 지역을 지켰다. 월출산의 정기를 받은 영암, 영산강 지중해의 중심 지역으로 교류와 개방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거기에 양달사 의병장이 있었다. 양달사 의병장은 영암성이 왜구들한테 함락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하고 격분하여, 그는 시묘살이를 멈추고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의병을 일으켰다.
왜구들의 수와 무기에 비하면 적수가 되지 못하였지만, 그는 왜구들의 기세가 매우 강한 것을 듣고 열세지만, 온갖 것 전세태세를 갖추어 당당히 맞섰다. 양달사 의병장은 “적을 보고 도망치는 것은 열사가 아니다” 라며 왜구들의 강력한 전술에도 지략으로 왜구 장수의 눈을 창으로 찔렀고 무참하게 처치했다.
명랑해전은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과 울돌목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일구어낸 3대 대첩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명랑해전의 승리는 이순신 만이 이루어낸 것이 아니었듯이, 명랑해전만 훌륭한 대첩으로 볼 수 없듯이 훨씬 그 이전의 있었던 을묘왜변 때 영암성대첩은 그 이전의 공과로 의미는 더한다. “영암대첩의 승리는 양달사 의병장을 따르는 여러 의병들과 지역민들이 힘을 합하여 얻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고 김형석 건축가는 강조했다.
김 건축가는 “정의롭고 당당한 의병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한다” 며 “지난해에 남도의 의병에 관한 학습자료, 국가위란과 영암인의 자료를 만들기 위해 기회 있을 째마다 답사와 탐방을 해왔다” 고 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자료를 오늘 ‘국가위란과 영암인’ 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 고 했다.
김 건축가는 “그 과정에서 마치 몰랐던 이름 없는 수많은 의병들, 남도 어느 곳을 가도 나라와 지역을 지키기 위해 의연하게 일어선 의병들이 있었다” 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알지 못했고, 가르치지 않았고, 심지어 외면해왔다” 고 했다.
김 건축가는 “백척간두 폐망까지 몰린 조선을 지킨 의병들은 얼마나 외롭고 속상했을까하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우(祠宇)나 사당(祠堂)이 세워져 집안의 후손을 중심으로 기억 계승되고 있었다” 고 했다.
그러나 제대로 관심과 지원이 없으니 관리도 한계에 부딪혀 쇠락해지고 있다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다행히 양달사 의병장을 기리기 위한 양달사 현창사업회가 발족하고 사무실을 두며, 그의 공적에 대한 자료수집과 공을 기리고 있는 것은 다행이고 잘한 일이라고 봤다. 양달사 후손께서 양달사가 묻혀있는 곳을 시묘공원으로 조성해 잘 관리하고 있어 다행이고, 어떤 데는 아무도 찾지 않는 의병장들의 따로 세운 사당의 사우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고, 찾지 않고 오지 않으니 문은 잠겼고, 또 안내문은 지워진 채로 외롭게 서있는 데 양달사 의병장의 묘나 장독샘 같은 흔적을 잘 관리하고 있어 이것은 “영암인들의 빛남이다” 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양달사에 관한 시를 읊어줬다.
김형석 건축가는 TV 모니터를 통해 생생하게 이해하기 쉽게 드라마처럼 풀어냈다. 강의를 들은 회원들은 김 교수의 강론에 감동하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또는 을묘왜변 때 국가위란의 안정에 나선 영암인들의 활약상을 듣고 숙연한 마음을 했다, 그들의 나라를 위한 지역을 위해 몸을 바친 숭고한 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특히 국가위란에서 영암인들의 적극 나섰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하며, 영암역사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새겼으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영암역사연구 조복전 회장은 “우리 영암은 충절의 후손” 이라며 “이러한 훌륭한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개발하여 함께 공유하고 후대에 전승하기 위한 조그만 일들을 자긍심으로 키워나가는 것이 영암역사연구회가 하고 있다” 면서 “그 중심에 우리가 있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조 회장은 “이런 학술발표회가 앞으로도 더 심도 있고 의미를 두어 다루겠다” 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영암역사연구는 계속 되어야한다” 며 “이러려 면은 우리 회원 등 영암역사연구를 활발히 펼쳐갈 수 있도록 지대한 관심과 성원, 그리고 협조를 해주길 바란다” 고 말했다. “특히 지원도 좋지만 자료를 찾고 연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우리 회원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두고 함께 나서는, 모두가 연구자로, 조사자로, 발굴자로, 보존자로 나서달라” 고 덧붙였다.
이날 제10차 학술발표회에 영암역사연구회 조복전 회장을 비롯해 문승길 운영위원장이 행사 주최.주관자로 자리했다. 또 김형석 건축가와 양달사 현창사업회 이영현 사무국장이 발제자로서 자리했다. 그리고 양달사 후손인 양백근 경기화성 대표이사가 선친에 대한 재조명에 응원과 격려를 해줬다. 그리고 영암의 원로인 전석홍 전 보훈처장관, 이성조 전 전라남도 감사실장, 유인학 마한역사문화보존 연구원(전 국회의원), 유선호 전 국회의원, 박준영 전 전남지사, 신승현 전 국정원은 향토사에 연구에 적극 동참하는 모습으로 보여줬다. 또한 김호중.조희석.김우혁.김화영.최철수.조삼현.양해관.박찬관.이종채.김재삼.곽종철.김봉식.곽은희.박지영.강부덕.문해숙.심재매.김근애 회원들도 영암역사연구회에 관심을 보이고 발표회를 지켜보며 의미를 새겼다.
전석홍 전 보훈처장관은 축사를 통해 “영암역사를 연구에 전념한 조복전 회장, 향토사에 관심이 큰 김형석 건축사 등 이런 분들이 있기에 우리 영암역사연구회애 대해 애정을 갖게 되고 기대하게 된다” 며 “오늘 보니 발제자로 나선 김형식 건축사가 국가위란과 영암인, 임진왜란.병자호란 중심으로 한 권의 책으로 묶었는데 대단한 열의라고 생각이 되어 지고, 칭찬을 아니 할 수가 없다. 영암 향토사에 관한 일에 우리 다 같이 힘을 모으자” 고 말했다.
유인학 전 한양대교수는 “영암이 언제간은 소멸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며 “영암은 훌륭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우고 간직한 고장이다. 다 같이 노력해서 없어지지 않도록 해달라” 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암의 인물 중에는 도선국사니 왕인이니 하는데 실제적인 인물로 본다면 영암은 훌륭한 양달사 의병장도 있지만 낭산 김준영 선생도 빼놓을 수 없다. 영암은 인물의 고장이고 우리는 그런 인물을 둔 자랑스러운 영암인” 이라며 “자긍심을 갖고 각자 삶에 충실히 한 영암인이 되길 바란다” 고 강조했다.
유 전 교수는 “국제마한역사문화센터가 시종이 아닌 삼호 나불도에 유치하여 건립하게 됐는데 이것은 마한이 시종에 국한 된 것이 아닌 영산강 일대가 마한과 관련되어있어 그렇게 한 것” 이라며 “영산강유역의 중심에는 영암이 있고, 영산강문화가 다시 부흥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고 말했다.
유선호 전 국회의원은 “오늘 배포한 책자를 보니 놀라웠다” 며 “어떻게 이 방대한 역사를 한권의 책으로 펴냈는지 그 많은 자료를 모아 책을 냈다는 것에 경탄하고, 영암에 여러 모임이 있지만 영암역사연구회가 가장 훌륭하고 의미 있는 모임이라고 생각되어지고 항상 응원과 격려, 그리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고 말했다.
박준영 전 전남지사는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게 해준 것은 의로운 의병장, 그 가운데서도 호남이 있었다” 며 “관리들은 의병들을 처치했다. 의병이 더 돋보이게 되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명예가 저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의병장으로 나서 목숨을 걸고 희생하고 나라를 지키려고 하겠느냐 그런 연유로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유이다. 교훈을 삼을 필요가 있고, 그들의 헌신을 잊지 않아야한다” 며 “영암 국난에 대해 정보를 알아볼 수 있고, 그들의 큰 역할을 가슴 깊이 새길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준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고 말했다.
이성조 전 전남감사실장은 “향토사를 밝히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며 “영암에 대한 애정을 갖고, 살게 된 것은 이 모두가 향토사가 한목을 하고 있고, 뿌리를 알게 해준 결과가 사람답게 살게 됐다” 고 말했다.
영암역사에 관심을 갖고 처음 나온 최철수 회원은 “영암역사연구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전화번호를 몰라 나오질 못했고 다행히 알아 연락을 드리고 참석하게 됐다” 며 “저는 낭주최씨로 구림에서 태어나 현재 파주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 집안 할아버지께서도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할 만큼 지역과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 분이고, 후손의 한 사람이다. 앞으로 이런 멋진 모임이 자주 나와 서로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끈끈한 친분관계는 물론 지식을 쌓아가겠다” 고 말했다.
제10차 영암역사연구회 학술발표회(국가위란과 영암인) 발제자로 나선 김형석 건축가는 전남 영암군 신북면 명동리 출신으로 연세대학교 산업대학원 건축공학과 석사를 수료했다. 전 월남참자전우회 동대문지부 회장, 전 김해김씨 부사공파 대종회장, 전 성균관유도회 동대문지부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 토방건축사사무소 대표, 현 대한검정회 경전 훈장 특급반, 서예반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설계.감리로 활동하고 있는 정암 김형석 건축사는 서예를 하며 기슬과 예술로 인생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