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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을 容恕(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容恕(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가?(마 18:21~21)
◾副題目(부제목): 容恕(용서)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아는가?
◾本文(본문) 말씀에 대한 質疑應答(질의응답)
(1) 용서를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아는가?
(2) 용서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가?
(3) 용서를 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가?
(4) 용서를 하지 않으면,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것을 아는가?
(5) 용서를 하지 않으면, 나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없다는 것을 아는가?
(6) 용서를 하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가?
(7) 용서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가?
(8) 용서를 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아는가?
(9)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것을 아는가?
(10) 용서를 하지 않으면, 주기도문울 암송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는가?
(11) 아직까지도 용서를 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시방 당장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가?
(12) 용서를 하지 않으면, 건너야 할 다리를 끊어 버리는, 자살행위라는 것을 아는가?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主)여! 형제(兄弟)가 내게 죄(罪)를 범(犯)하면, 몇번(番)이나 용서(容恕)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番)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番) 뿐 아니라, ✔일흔 번(番)씩 일곱 번(番)이라도 할찌니라".
🔥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아이히만을 용서한 꼴 란즈/ 용서의 사람
✔ 1968년 조용한 사건이었지만, 위대한 일이 일어 났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자그만치 600만을 학살했다.
이 학살에 원흉이었던, "아이히만" 이라는 사람이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았고,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제 사형집행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 바로 그 시점에서, 유대 사람들 중에서, "꼴 란즈"라는 사람은, 아이히만을 석방해 달라고, 대대적으로 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꼴 란즈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용서를 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아이히만을 죽인다고 해서, 죽은 유대인들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둘째, 사형하지 않고 내 버려 두어도, 인생은 다 죽는 것처럼, 저 사람도 곧 죽을 텐데, 미리 죽일 필요가 없지 않느냐?
▪셋째,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이미 심판 했으니, 우리가 심판할 일이 없지 않느냐?
▪넷째, 동생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은 용서를 하셨는데, 우리가 누구를 정죄를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냐?
▪다섯째, 사랑이 식어지는 세상에, 이제부터라고 참 사랑을, 심어야 하지 않겠느냐? 여러분 언제까지, 보복을 할려고 합니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교회들과 목자들과 성도들이,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끝 없는 용서와, 한 없는 용서가 필요하다.
✔ 진정한 용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우리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을 본 받아서, 우리도 부모를 죽인 원수까지라도 용서를 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라.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용서란,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가? 이는 상대방을 위해서 용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용서를 하는 것이다.
✔ 만일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는 다면,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수많은 목자들이, 심각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까지, 결코 죽어도 끝까지, 용서를 하지 않는다.
✔ 우리 주변의 목자들을 관찰해 보면, 갈등과 반목과 원한과 상처 등으로 인해서, 담을 쌓고 사는 목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절대로 용서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용서를 절대로 받아 주지도 않는다.
용서를 하지 않고, 용서를 받아 주지도 않는 목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고고(go go)를 할 것이다.
✔ 그렇다면 남을 용서를 하지도 않고, 또한 남의 용서를 받아 주지도 않는 것이 대수란 말인가? 최선이란 말인가? 복음적이란 말인가? 잘 한 일인가?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고, 또한 상대방의 용서를 받아 주지 않는 자는, 심지어 목자 할아버지라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바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 그 누구보다도 속이 넓고, 그 누구보다도 용서를 많이 해야할 목자들이, 상상외로 벤뎅이 속알머리처럼 좁다. 한 번 틀어지면, 죽을 때까지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아 주지도 않는다.
✔ 그렇다면 목자들이 용서를 받아 주지도 않고, 용서를 하지 않는 원인이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성삼위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을 모르고, 구원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서 죽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저주를 했는가? 절교를 했는가? 원한을 품었는가? 복수를 했는가? 아니면 용서를 했는가?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한 사람이 엄청난 빚을 졌다. 너무나 큰 빚이기 때문에, 일평생 갚아도,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이었다.
그런데 돈을 빌려준 사람이, 엄청난 돈을 빌려간 사람에게, 빚을 다 갚은 것으로 인정을 하고, 쿨하게 모두다 청산해 주었다.
✔ 그런데 엄청난 빚을, 공짜로 탕감을 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아주 적은 금액의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 사실을 안 사람이, 엄청난 빚을 탕감해준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감옥에서 나올 수 없도록 했다.
이러한 복음서의 내용을, 모르는 목자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목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부딛치는 크고 작은 문제로 인한, 갈등과 상처를 풀지 않고, 죽어도 용서를 하지 않는다. 오매! 어째야 쓰까?
총회와 노회의 현주소를 보라. 목자가 목자를 고소한다. 목자가 장로를 고소한다. 장로가 장로를 고소한다. 장로가 목자를 고소한다. 심지어 세상법에 고소를 한다.
✔ 만일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쫒지 않는 사람들은, 직분의 고하와, 자잘못을 떠나서, 그 누구든지 결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고 경고를 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和平)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主)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지금은 은퇴를 하신 배장업 형님 목자는, 동생인 bnk 목자에게, 용서에 대한 에피소우드를, 여러번 반복을 해서 이야기를 했다.
형님이 안수집사 시절에, 서울 삼양동의 중대형교회에서, 자그만치 10년 동안이나, 교회의 재정을 맡아서 봉사를 했다.
✔ 담임 목자는 성격이 불과 같았다. 욱~하는 성질머리가 있었다. 심지어 당회를 할 때에,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장로들이 않아 있는, 책상 위로 올라가서 난장판을 쳤다.
상처를 받은 장로들은, 조용히 회의 장소를 빠져 나갔다. 그러나 성질머리가 고약한 목자에게도, 용서를 비는 장점이 있었다.
상처를 준 목자는 새벽기도가 끝난 후에, 상처를 받은 장로들의 집을 찾아 간다. 쇠고기와 과일과 쌀을 구입한 후에, 차에 싣고서 심방을 간다.
✔ 목자는 일단 노크를 하고, 무조건 방안으로 들어 간다. 그리고 상처를 받은 장로 앞에서, 정중하게 큰 절을 한다. 무릎을 꿇고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다. 상처를 받은 장로는, 춘삼월의 눈이 녹는 것처럼, 상처의 앙금이 모두다 녹아 버린다.
동생인 bnk 목자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 준, 형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동생도 목회를 할 때에, 부지중에 실수와 잘못을 하거든, 무조건 무릎을 꿇고서, 용서를 빌라는 것이 아닐까?
bnk는 5.18 광주 의거 당시에,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다. 광주 영광교회(윤재헌 목사)에서, 교육 전도사로 섬길 때에 벌어진 일이다.
bnk는 장년 찬양대 지휘를 했다. 예배가 끝난 후에, 보통 1시간 정도 연습을 한다. 그 날은, 도청 앞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연습을 10분정도 하고, 장례식에 참석을 했다.
✔ bnk는 영호남의 오래 묵은 지역감정을 없애기 위해서, 목자 안수를 받은 후에, 경상도의 가장 낙후된 섬에서, 만 3년 동안 목회를 하기로 서원을 했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의 해소에 본을 보이기 위해서, 1989년 12월 29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을 떠나서, 경남 통영군 용남면 지도리 수도(물섬)에 있는, 수도(물섬)교회로 부임을 했다.
✔ 꿈에도 보지 못한, 경남 통영의 작은 섬, 전기가 들어 오지 않는 낙후된 섬,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조그만 섬, 사택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수도 시설도 없는 교회에서, 사례지 5만원을 받고서, 만 3년 동안 사역했다.
한 번은 거시기 안수집사가, 시험에 들었다.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다. 술과 담배를 피웠다. 불신자인 동네 사람들과 고스톱을 쳤다.
bnk는 기도도 하고, 권면도 했다. 또한 가까운 성도들을 보내서 권면을 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더욱 강퍅해 졌다.
✔ 기도를 하는 중에, 형님 목자가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아! 그렇다. 선물을 사서 찾아간 후에, 무조건 무릎을 꿇고서 큰 절을 한 후에, 잘못했다고 빌어야 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번째 찾아 가서는, 집안 까지만 들어 갔다가 나왔다. 두번째 찾아 가서는, 마루까지만 올라 갔다가 나왔다.
✔ 세번째는 방안으로 들어 가서, 무릎을 꿇고서 큰 절을 하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비로소 조 거시기 집사 내외는, 자신들이 무릎을 꿇고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을 소개한다. bnk가 섬으로 내려 가지 전에, 거시기 권사에게 50만원을 빌렸다. 그런데 갚지를 않고서, 섬으로 갔다고 했다.
bnk는 돈을 빌린 기억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치매 말기 환자와 같았다. 청천벽력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부끄러워서 안절부절했다.
돈을 빌려 갔다는 말을 듣는 순간, bnk는 거시기 권사와, 남편인 장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당장 빌런 돈을 갚았다.
✔ 마음씨가 공자 동생을 닳은, 착한 남편인 장로는,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하면서, 짜증을 냈다. 그리고 아내인 권사를 꾸짖었다.
✔ 그런데 천사와 같은, 거시기 권사와 장로가, 다음 주일에 bnk가 갚은 돈을, 그대로 다 헌금을 했다. 그래서 bnk도 코로나 19로 어려운 성도에게, 구제 헌금으로 다 드렸다.
한 가지만 더 첨가하겠다. 1989년 12월 29일 밤,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경상도의 섬으로 떠날 때에, 여전도 회장인 권사가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bnk는 정식으로 사과를 드린 후에, 용서를 빌어야 겠다고 결심을 했다. 마침 거시기 장로의 아들 정솔의 결혼식에, 거시시 권사가 참석을 한다고 했다.
결혼식장에 참석을 한 후에, 거시기 권사를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데 거시기 권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식장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 bnk는 거시기 권사를, 얼추 35년 만에 만나서 너무나도 반갑고,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거시기 권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서 큰절을 했다. 그리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누구보다도 용서를 실천해야 할 목자들이, 정녕 용서를 하지 않는 것일까? 깡패들도 싸운 후에는, 막걸리 한 잔 마시면서, 형님 동생하면서 화해를 하지 않는가?
※ 목사들이 용서를 하지 않는 이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용서를 모르기 때문이다.
▪천국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옥을 모르기 때문이다.
▪구원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존심때문이다.
▪체면 때문이다.
▪자칭 의인이기 때문이다.
▪황소 고집 때문이다.
용서에 대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主)여! 형제(兄弟)가 내게 죄(罪)를 범(犯)하면, 몇번(番)이나 용서(容恕)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番)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용서의 횟수에 대해서 물었다. 7번 까지라도 용서를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리고 은근히, 자신의 너그러움과 관대함을 자랑한 것이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잘못을 하면 2~3정도는, 용서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리새인들보다 더 많이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은, 배드로에게 대답하셨다. 7번의 용서가 아니라, 70번씩 7번 까지도 용서를 하라고 했다. 이는 용서를 하는 일에는, 끝이 없고 한이 없다는 말이다.
어쩌면 베드로는, 자신의 7번의 용서가, 완전하다는 것을 확인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의미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7번의 용서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예수님은 “7번이 아니라, 70번씩 7번까지라도, 용서를 해야 한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배드로에게, “완전하게 용서하고, 한없이 용서하고, 끝없이 용서하고, 헤아릴 수 없이 반복되는 용서”를 요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무한한 용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다.
용서의 횟수도 중요하지만, 또한 용서의 방식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용서를 하되,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용서를 해야 한다. 머리뿐 만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용서를 해야 한다.
우리의 수많은 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신 용서처럼, 우리도 상대방에 대해서, 온전해하게 용서를 해야, 비로소 진정한 용서가 되는 것이다.
※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용서의 5단계
(1) 아픔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느끼는 것이다
✔ 상대방에게 사과를 강요하면서, 서둘러서 아픔을 없애려고 하지를 말라. 상대방이 받은 상처와 아픔을, 먼저 자신이 고스란히 느껴야 한다.
(2) 내적으로 상대방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는 한,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다.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압도할 정도로, 많은 양향을 끼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단 거리를 두고서, 스스로 평온을 찾으려고 하면, 먼저 분노를 해야 한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흔히 스스로 무력하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다시 힘을 내어서, 자신과 자신의 힘을 느끼려고 하면, 자신의 분노부터 느낄 줄을 알아야 한다.
(3) 갈등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 졌을까? 무엇이 상대방을 아프게 했을까? 오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 상대방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려 노력을 해야 한다.
갈등 상황과, 갈등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상대방의 용서를 받아 드릴 수 있다. 갈등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 갈등 해결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4) 상대방을 용서하고 마음 속에 생긴 부정적인 에너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용서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용서를 하는 것이다. 즉 용서는 상대방의 부정적인 에너지에서 벗어나서, 나를 정화하는 것이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그냥 흘려 보내는 것이 용서이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나는 상대방의 부정적 에너지에 갇혀서, 부정적인 힘에 압도를 당하고 만다.
용서는 다른 사람의 부정적 에너지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는 탈출구이다. 용서를 하면, 내 뜻대로 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용서는 상대방을 끌어안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했더라도, 영혼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상대방과 아주 친밀하게 지내기 어려울 때가 있다.
용서를 한 후에는, 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용서가 반드시 과거를 잊는 다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잊을 수는 없더라도, 과거에 발생한 일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용서란 내 행동과 감정이, 더는 과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서란 과거의 일을 내려 놓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 상처를 통해서 결실을 얻는 것이다
갈등을 통해서 우리는, 좀 더 발전할 수 있다. 갈등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고,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세를 배우게 된다.
갈등을 통해서, 진짜 자신의 마음과 숨겨진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상처를 통해서, 진정한 자아를 찾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서 나아가게 된다.
✔ 예수님의 용서의 방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인가? 이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怨讐)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逼迫)하는 자(者)를 위(爲)하여 기도(祈禱)하라"는 것이다(마 5:44).
사랑으로 적대감정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사랑이야말로 갈등을 해소하는 최고의 비법이다. 사랑을 통해서, 갈등의 상대가 적이 되는 것을 미리 막을 수 있다.
🔥 용서
✔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다리를 끊어 버리는 것과 같다. 결국 자신도 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강물로 추락을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 일도 괴로운 일이지만, 용서를 하지 못한 사람이, 훨씬 더 괴로운 법이다.
✔ 용서를 받는 것은, 큰 복중에 하나이다. 용서하는 일은, 큰 복을 행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그가 주장한 지동설 때문에, 카톨릭의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 그가 묻혀있는, 푸라우엔버그의 묘비에, 기도문이 한구절 새겨져 있다. "주님!! 저는 바울에게 주신 큰 은혜와, 베드로에게 주신 큰 능력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 십자가 옆에 매달렸던, 강도에게 주셨던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
✔ 아프리카 오지에서는, "용서의 주간"이라는, 관습을 갖고 있는 부족이 있다. 일년 기후 중에서 건조기가 되면, 이 기간에는 모든 이웃과 함께, 서로의 실수와, 부족간의 오해와, 상상적인 것이나, 현실적인 미움 등, "상대방이 나에게 지은 모든 죄를, 나는 용서한다"라는 서약을 하면서, 신나는 축제를 벌인다.
✔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다 용서의 사람이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3F"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용서하자(Forgiven). 둘째, 상대방의 잘못을 잊어 버리자(Forgotten). 셋째, 영원히 잊어 버리자(Forever).
▪≪Nadulbok≫ Church bnk Shepherd.
▪Doctor of ≪Preaching≫.
▪Doctor of ≪Missiology≫.
▪≪Thailand≫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 College Professor.
▪≪Laos≫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 College Professor.
▪≪Myanmar≫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 College Profess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