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성경은 좋은 스승입니다./ 디모데 후서 3:10-17
20년 전에는 설교하면서, “한국교회 역사가 120년입니다.”하고 말씀드리곤 했는데, 이제는 140년이 되었습니다. 개신교가 전파된 지 벌써 5세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거의 2000년 되는 나라의 경우와 비교하면 아직은 “신생아” 수준이지만, 시간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요소가 있습니다. 정보전달이나 이동속도의 급속한 발전이 그 변수입니다.
1900년까지는 느리게 진보하다가 20세기 들어서 세계는 급속도로 발전하고 변화하였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지금은 동시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공부를 처음 시작했던 40년 전에는 세계적인 신학의 발전과정이 언제나 뒤늦게 전달되곤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누가 어떤 입장으로 설명하는가에 따라서 왜곡된 지식이 강요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눈치 빠른 학생들은 교수 한 분의 설명을 무조건 믿는 대신에, 새로 나온 영어서적들을 뒤져서 다양한 입장을 찾아 “독학”을 하였습니다.
비록 140년 된 한국 개신교 역사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2000년을 거의 따라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로부터 출발해서 목회자를 거쳐서 교회로 흘러가는 폭넓은 기독교 신앙의 양상들이 “신자” 개인에게 이르러서는 어떤 비판이나 판단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 한 가지가 맹신적으로 수용되어서, 교회 밖 세상의 상식적인 판단과 충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0년 신앙의 역사를 따라잡으면서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디모데 후서는 바울의 동역자로 선택을 받은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두 번째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 3장 10-17절은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으로 크게 주목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성경”이라는 말은 성경의 거룩성을 보증하는 말로서, 거기에 쓰인 내용은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교육적 교훈을 다 담고 있다는 추가적인 설명과 더불어 성경의 “독보적”인 위치를 보장합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영감”이라는 말 때문에, 성경에 쓰인 문자를 이해하는 방법을 놓고 오랜 세월 논쟁을 넘어선 싸움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합의하지 못하고 서로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성경의 영감설을 넘어선 축자영감설이고 더 나아가서는 기계적인 축자영감설까지 등장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한 글자씩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을 받아 적었다는 주장 앞에서, 혹시라도 “의심하는” 마음을 먹은 사람은, 혹시 자신이 “불경건”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을 두려워하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성경의 문자적 내용을 “기준”으로 삼아서 현대사회속의 기독교적 규율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해석학이 발달한 시대에 여전히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보내진 두 개의 서신인 디모데전후서의 주제는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교인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들을 상세히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에게도 주는 많은 교훈들을 담고 있습니다.
디모데 전후서 모두 “사도인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쓴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서신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바울이 알려주는 “목회방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대 스승인 사도 바울의 목회지침서이니 그 가치가 “불변”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서신에 사용된 “문자적”인 표현을 넘어서는 문서해석방법이 19세기부터 등장하면서 바울의 직접적인 저작이 아니라는 데에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은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디모데전후서의 가치가 폄하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의 사상을 따르는 학파에서 나온 글이고, 성경형성과정에서 바울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성경목록에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직접저작이 아니라는 이유는 다른 바울의 글에 비교해서 이 성경의 존재가 늦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약 180년경의 교부들의 글에 디모데서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내용에 등장하는 역사적 정황이나, 디모데 서에서 강조하는 “경건”, “절제”, “건전한 교훈” 같은 용어들이 바울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등등을 정리한 끝에, 디모데서는 디모데가 활동했던 에베소 교회의 상황을 담고 있으며, 대략 100-110년경의 교회 상황과 부합한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후서는 어느 정도 교회가 자리를 잡은 상태여서 교회의 직분자들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문맥과 내용과 역사적 상황과 저자에 한 연구 등등을 알고 읽는 다면, 그 내용의 풍부함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성경”인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원문을 보면, 14절에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의 “성경”은 sacred writings (hiera grammate, ἱερὰ γράμματα)입니다. 유대교에서 이 희랍어 단어를 쓸 때의 의미는 “구약성서”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습니다.”라고하면서 성경의 역할을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디모데에게 하는 말, 다시 말하면 에베소 교회에게 전하는 바울학파의 가르침은 “당신들이 어려서부터 알고 있는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당신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드러납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주장 아닙니까?
가장 유명한 구절이 16절인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3:16)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다른 단어를 씁니다. 보통 영어로 scripture(graphe, γραφὴ)라고 번역하는데, “서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모든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θεόπνευστος, Theopneustos, God-breathed)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감으로”(inspired by God)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제 말로 해설한다면, 성경은 그 안에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온전히 담겨있는 책입니다. 동시에 그 안에는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도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동안 사랑받은 성경이 시대를 지나오면서 그 시대에 전해주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 무엇인지를 해석해 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죽은 문자” 속에 머물지 않고 “살아있는 영”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디모데후서에서의 성경은 “구약성경”이지만, 오늘 우리 손에는 “신약성경”도 함께 들려있습니다. 만일에 위의 문장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신약성경은 해당사항이 없다는 뜻이 되거나, 아니면 합당한 논리전개 없이 신약도 여기에 포함시키게 될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모두 다 중요하게 여기면 충분하지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문자적인 이해는 언제나 “선택적 수용”을 하게 만들어서, 자신에게 불편한 것을 버리고 편한 것만 취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문자 안에 “갇혀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구약성경이 지혜를 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한 것처럼, 오늘의 시대에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며 따르라고 하신 바로 그 믿음을 “성서해석”의 시금석으로 삼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포인트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잘못한 것을 책망하고, 우리를 바르게 살도록 인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righteousness)가 무엇인지를 교육하는 책이라면, 그것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아울러 그 가치가 발휘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포인트”는 교훈과 책망과 올바름과 의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이 살던 그 시대의 자잘한 율법적 가르침을 무기로 삼아 교만의 절정을 달리던, 바리새파, 사두개파, 제사장들에게 경고장을 날렸습니다. 반면에 경제적 정치적인 어려움 속에서 연명하던 가난한 백성들이 당하는 율법적인 억압에서 해방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복음서가 전하고 싶은 것은 “구약성경”을 사랑하면서도, 성서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고 실천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이었습니다. 예수는 거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17절에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유능하게”라는 번역의 의미는 “완성하는”(complete, ἄρτιος)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온갖 선한 일을 하는 데 합당하게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입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서 신자로써 그리고 교회의 일에 힘쓰며 사는 그리스도인 모두를 칭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목표는 만사에 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며 사는 일이 목표인데, 성경은 그 완성자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선 1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주위에서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 격렬하게 악행과 사기를 벌이다가, 남도 속이고 결국에는 자기도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굳건하게 “진리 안에” 머무르라고 권면합니다. 문자적으로 “진리”라는 단어는 안 나오지만, 당신이 배우고 확신하는 그것을 붙잡으라는 말로 보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확신과 끈기를 지니게 된 이유가 바로 “성경”에서 배웠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은 평화목교회의 졸업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자녀 한 명이 있는데, 권면하고 싶은 것이 바로 “성경”이 주는 교훈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니 앞으로 어른으로 성장해 가면서 성경의 교훈을 바르게 배우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평생과제입니다.
저는 교회를 <예수학교>라고 부르기 좋아합니다. 심지어 <평생 예수 교육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학위를 주는 것도 아니고, 성적표도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당연히 표창장도 없고 학사경고도 안하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이 학교의 평생학생은 성경이라는 좋은 스승을 항상 곁에 두고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 스승 성경이 어떤 말로 어떤 가르침을 주는지는 학생의 교육 상태에 따라서 모두 다 다릅니다. 그때, 보다 더 수준 높고, 보다 더 선을 행하는데 합당하도록 우리를 완성시켜가는 그런 가르침을 스승으로부터 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5년 2월 16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