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의 섬, 반다아체에서 배운 평화
조 서 희-백석고등학교 1학년
매미 소리가 이젠 들리지 않는구나 싶더니, 어느덧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차갑다. 노을의 계절, 가을이 왔나보다.
저녁 식사를 하다가 문득 아파트 사이로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을 보았다.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고 노을을 바라보았다. 점점 검붉어지는 것 같았다.
“공기가 맑으면 노을이 더 곱단다.”
하시는 아빠의 음성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생각이 바다를 건너 인도네시아의 블랑시퉁코 해안가를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북단에 위치한 반다아체, 지난 여름 나를 철들게 하였던 곳이다. 아체의 저녁 하늘은 늘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 같았다. 바다끝 노을은 밤마다 몇 개의 보석같은 별을 던져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는 하였다.
반다아체로 떠나기 얼마 전까지 그곳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여름 방학이 두 달 쯤 남은 날이었다,
“서희, 이번 방학에 봉사활동 가지 않을래? 인도네시아 아체에서 평화 캠프가 열린다는데.”
“네, 전 좋아요.”
“그래? 역시 우리 서흰 준비가 되어 있구나?”
어릴 적부터 부모님에게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북한과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생각해 음식을 남기지 않고 버리지 않도록 교육받고, 또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늘 가르침을 들어왔기 때문에, 먼 거리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아빠가 인터넷을 통해 조사하셨다며 아체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2004년 12월 26일 쓰나미로 20만 명이나 되는 주민들을 잃고 폐허가 된 곳, 수백 년 동안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식민지 국가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도네시아에 강제 점령 당한 후에는 최근까지 분리 독립 전쟁을 치르면서 수천, 수만 명이 죽어갔던 곳이란다. 또 우리나라 군인이 지역 평화를 위해 주둔했던 동티모르도 인도네시아의 남쪽 섬이라는 것이었다.
‘왜 부모님은 나를 그런 곳에 보내려는 것일까?’
나는 묘하게 긴장이 되었고, 겁도 났다.
엄마하고 밤을 새워가며 토론하였다. 아침 해가 떠오르며 밖이 밝아지기 시작해서야 엄마는, “아체에 가는 방향으로 하고, 더 생각해 보자.”고 하시면서 이야기를 끝냈다.
그 이후 한 달 동안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여름방학 한 달은 1학기를 보충하고 2학기를 대비할 수 있는 기간이고, 고등학교 여름 방학 중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평화캠프행을 결심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었고, 지원서를 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부모님의 설득)으로 결심을 굳혔고, 그 이후부터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국제평화캠프는 여름 방학 보름 전부터 시작되었다. 현지 적응을 위한 언어와 지식 교육, 그리고 환경 및 생태 교육을 위해 양평에 있는 생활공동체에서 합숙 훈련을 받아야 했다. 같은 학년인 친구 둘과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학생 이상인 언니, 오빠들 30여 명과 함께 사전교육에 참여하였다.
우리들은 평화가 무엇인지, 반다아체에 평화 캠프가 왜 필요한지를 공부하였고, 현지 적응에 필요한 의․식․주 교육도 받았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벌레와의 전쟁이었다. 산 속에 있는 생활 공동체 공간은 온갖 벌레들의 집합소 같았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벌레와 함께 먹고 자는 것이 가장 끔찍하고 힘들었다. 눈물을 머금고 이겨낼 수밖에 없었는데, 벌레들과 친해질 즈음에 사전 교육이 끝났다.
우리의 목적지 Pullo Aceh에는 한국을 출발한 지 7일 만에 도착하였다. 비자 때문에 홍콩과 말레이시아를 경유하고 반다아체에서 현지교육을 받은 후 다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 지역이기 때문이었다.(비행기를 세 번, 그리고 자동차➞배➞자동차으로 갈아타야 한다.)
쓰나미로 인해 피해를 입은 환경은 몇 년 동안 많이 복원되어 생각했던 것보다 잘 정리되어 있었다. 내전의 상처도 깊을 줄 알았는데, 우리의 시골 마을처럼 평화로워보였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부딪친 난관은 역시 의․식․주 문제였다. 벌레와 함께 자는 것과 입맛에 맞지 않는 현지 음식은 사전 훈련이 되어 그래도 참을 만했지만, 옷이 문제였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인데, 반다아체는 특히 종교성이 더 강해서, 여성들은 한여름에도 긴팔옷과 긴 치마로 온몸을 다 가려야 하고 머리에는 히잡을 둘러야 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참을 만했는데, 가장 난감했던 것은 대변 후의 뒤처리문제였다. 그곳에는 화장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빠가 아이디어를 내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의 물총을 수동 비데로 사용하라며 준비해 주시기는 하였지만, 현지인과 철저히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교육탓(?)에 한 번도 사용하지는 않았다.
국제 평화 캠프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일본 등지의 청년들이 참여하였다. 우리는 영어와 손짓, 발짓으로 서로를 알기 위해 애썼는데, 며칠 지나면서부터는 아쉬운대로 소통이 원활해졌다. 그리고 현지인들과 친하기 위해 현지어도 열심히 익혔다.
아체캠프에서 우리들은 블랑시퉁코, 구굽, 말링게 마을로 나뉘어 평화학교를 진행하였는데, 나는 블랑시퉁코 마을에서 시니어(고등학생)반 보조 교사가 되었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모습만 보면 스무살도 훨씬 넘은 아줌마, 아저씨들 같았다)학생들도 있어서 말을 어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색했는데, 그곳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았다. 그러나 비슷한 또래여서 그런지 확실히 빠르게 친해졌다.
평화학교 수업은 약 2주 동안 진행되었는데, 커리큘럼이 아주 다양했다. 역할극을 통해 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작은 폭력 상황을 보여주고, ‘그것이 바로 폭력이며, 또한 이 작은 폭력은 곧 더 큰 폭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전쟁에 대해 현지인들과 토론 시간도 가지고, 환경 오염 실태도 조사했으며, 그 원인과 예방법, 해결 방법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업 후에는 식사 준비와 학교 주변이나 마을을 청소하고,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화캠프의 마지막 커리큘럼은 함께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현지 친구들과 우리는 조를 짜서 나무를 심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나무지지대를 땅에 박는 것이었다. 정신없이 망치질을 하였는데, 나무를 다 심었을 때는 손바닥 곳곳에 물집이 생겼다. 몹시 쓰리고 아팠지만, 어린 나무가 꼿꼿이 서있는 모습을 보며 흐뭇했다.
반다아체를 떠나야 할 즈음에 나는,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내가 그곳에서 하나의 자연이 되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천 공항을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낯선 곳, 낯선 사람들, 다소 위험한 곳에 대한 두려움이 컸는데, 그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이때는 내 마음이 더 없이 평화로웠다.
비슷비슷한 환경의 중산층만 모여 사는 일산으로 이사 온 이후, 서울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빨리 적응하지 못해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또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정말 싫다고 하며 학교 공부에 열의를 보이지 않아 성적도 기대 밖이어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을까?’ 하고 고민하며 살던 내가 불과 한 달여 만에 마음이 평화로워진 것이다.
쓰나미로 부모와 형제를 잃고도 몇 년만에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현지 학생들과 소통하며, 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다. 현지인이든 한국인이든, 또다른 나라의 사람이든지 어떤 사람들에게도 옆에 있는 내 가족, 형제처럼 진정한 마음을 나누려고 애쓴 시간들이 바로 내겐 “평화”를 배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국제 평화 캠프에서 한 달 여 기간 ‘평화’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동안 가장 빨리, 가장 많이 ‘평화’를 배운 사람은 현지인이 아니라 바로 나인 것 같다. 평화의 전도사인 양 아체에 갔지만, 쓰나미와 내전의 아픔을 이겨낸 그들이 오히려, ‘평화란 이런 것이야.’ 하고 내게 큰 가르침을 준 것 같았다.
그곳에서 함께했던 사람들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고 기억에 남지만, 그 중에 가장 특별했던 사람들은 팀장이었던 희은 이모, 민철 삼촌, 인드라, 반석이, 예지, 승현이, 프레자, 아울리아이다. 이름을 쓰면서도 그리워 눈물이 날 것 같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반다아체를 떠나기 전 현지 친구들에게, “2012년에 내가 대학생이 되어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 그 동안 이웃, 친구의 의미, 평화, 나아가 지구의 평화에 대해 많이 배우고 고민해서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한결 더 풍성해진 ‘평화의 삶’을 함께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받은 사랑을 더 크게 돌려주고 싶다.
생각이 ‘회상’에서 ‘깨달음’을 지나 ‘다짐’까지 왔을 때 아빠의 음성이 들려왔다.
“서희야, 운동하러 갈까?”
“네.”
하며 베란다 문을 닫는데, 노을이 보이지 않았다. 그새 반다아체로 갔는지…….
첫댓글 2009년 여름은, 열일곱 서희가 세상과 새로운 소통을 하느라 많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그리고 평화를 알게 되었습니다..그 소중한 시간과 생각을 정리해서 전국 중고생 자원봉사체험수기 공모전에 응모했던 글입니다..흐름 끊긴 두달여 학교공부에 그나마 적응해가려 애쓰던 중간고사 직전, 사흘 밤시간을 셤공부 대신 쓰느라, 애써 잠재우고 있던 캠프 후유증의 불씨가 다시 타올라 시험을 망쳤다는......
시험의 성적 보다 인생의 성적이 쑥쑥 올라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서희가 이렇게 자랐다니 감격이네요^^ 서희의 평화를 향한 마음이 저희들의 마음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서희를 "평화의 도구로"사용하여주실 줄 믿습니다.
놀랍네요. 어린 아이로만 알았더니, 아체 이후의 서희의 모습은 어른 열 보다 더 낳은것 같네요. 나는 이제 부터 서희의 왕펜이 될거예요. 우리 하나님이 귀한 사랑의 도구로 , 평화의 도구로 계속 가꾸어 가실줄 믿어요. 서희 화이팅.
몸으로 살아내면서 배우는 우직함이 이쁘고, 생각의 흐름도 마음의 변화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이 참말 아름다운 서희야! 네가 자랑스럽구나. ^^
히히 감사합니당~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 앙상블ㅋ^^연습도, 점심도 뒤로 하고 서강대 언덕 칼바람을 맞으며 시상식에 다녀왔습니다~ 끝나자마자 성경공부 가야 하는 주희 때문에 바쁘게 일산으로 돌아와야 하기에 점심을 어케 해결해야 하나를 걱정하며 들어간 시상식. 입선이긴 하나 33대 1의 경쟁을 뚫었다는 기쁨과 "서강인"으로 함께 했던 시간들에, 그리고 생각지 않았던 리셉션으로 식사까지 가뿐히 해결한 뿌듯함에 중간고사쯤의 기억은 봄눈처럼 사라진 듯.....ㅋㅋ